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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란의 ‘글로생활자’] 4000m 히말라야 고산에서, 엄마와 딸이 진짜로 넘은 것들

by | 2020년 9월 25일 | 위크엔드 컬처


<피렌체의 식탁>은 창간 2주년을 계기로 주말판 ‘위크엔드 컬처’를 선보인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한 주의 긴장을 풀고 느긋하게 인문학과 지식, 문화의 시간을 즐기도록 하기 위해서다. 토요일 아침에 찾아가는 주말판은 기존 매체와 다른 맛과 멋과 흥을 드리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위크엔드 컬처’의 세 번째 필자는 강혜란 중앙일보 기자다. 문화부 기자로 오랫동안 일해온 강혜란 필자는 최근 정형민 감독의 다큐멘터리 <카일라스 가는 길>을 보면서 7년 전 어머니와 함께 떠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체험을 떠올렸다. 80대 노모와 히말라야 성산 카일라스로 가는 여정을 찍은 정형민 감독의 다큐멘터리 속 모자(母子)와, 강 기자가 히말라야에서 체험했던 7년 전의 모녀(母女), 그들 사이에는 미묘하고도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그게 뭐였을까? 강 기자는 이 글에서 가족의 화해, 노년의 삶과 도전 등에 관해 얘기한다. “그냥저냥 살아가는 얘기를 쓰고 싶다”는 강 기자는 자신의 글이 40대 후반 싱글 여성의 글쓰기로, ‘주말의 색다른 읽기’로 받아들여지길 바란다. [편집자]

#다큐멘터리 ‘카일라스 가는 길’
  80대 엄마를 응시하는 아들의 시선
  7년 전 모녀가 함께 한 산행 떠올라
#꿈은 좋았지만 현실은 피로의 연속
  온갖 SOS는 내 몫, 원망도 ‘갑툭튀’
  엄마와 딸은 애증관계인 걸까
#자랑거리였던 ‘똑똑한 둘째 딸’에서
  어느덧 설산처럼 ‘시린 딸’이 된 나
  “비스타리”(천천히)를 되뇌이며 
  나와 엄마 사이 문턱을 넘어서다

스크린 속의 몸집 작은 할머니가 해발 4000m가 넘는 산자락에서 안간힘을 다해 기도하고 있다. “나이 서른일곱에 남편 잃고 아이들 키우다 여기까지 왔습니더. 제발 저기까지 갈 수 있게 해주이소, 부처님. 나 이대로 낙오하면…” 찬바람에 엄마 뺨이 덜덜 떨리는데 아들인 다큐 감독이 찍는 카메라는 담담하기 그지없다. 그 산, 카일라스의 꼭대기에 뭐가 있어 저렇게 애가 탈까. 불로장생 묘약이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여든 네 살 이춘숙 할머니는 온몸의 즙을 짜내듯 악을 쓰며 산을 올랐다. 7년 전 예순여섯의 내 어머니가 히말라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난 주말, 다큐멘터리 ‘카일라스 가는 길’(감독 정형민)을 보러 극장에 갔다. 여든 네 살 ‘오지탐험가’의 여정도 궁금했지만 무엇보다 7년 전 엄마와 함께 했던 히말라야 여행을 복기하고 싶었다.
2013년 당시 회사 근속 13년을 맞아 한 달짜리 안식휴가를 받았다. 어떻게 쓸까 하다가 히말라야의 해발 4130m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트레킹을 가기로 했다. ABC에다 푼힐 전망대까지 넣어 산에서만 열흘간 머무는 일정을 짰다. 알고 지낸 산악인들 도움으로 현지 가이드를 해줄 셰르파도 구했다. 5월3일 대한항공 직항 편을 타고 엄마와 나란히 네팔 카트만두로 향했다.

다큐멘터리 <카일라스 가는 길>의 시작도 히말라야 영상이다. ‘은둔의 왕국’으로 불리는 무스탕 왕국 초입에 위치한 해발 2800m의 작은 산골마을 까그베니의 한 사찰에서 이춘숙 할머니가 바닥을 쓸고 기도를 올린다. 2014년 할머니가 여든살 때다. 그에 앞서 히말라야를 다녀온 아들 정형민 감독이 600년 된 사찰 얘기를 하자 노모가 가보고 싶다 했단다. 평생 해외여행 한번 다녀오지 않은 어머니가 처음으로 내비친 순례길 소망에 아들이 따랐다. 이 여정을 담은 다큐 <무스탕 가는 길>이 2017년 공개된 바 있다.

이번 영화는 그 다음에 떠난 오지 순례를 한데 묶었다. 먼저 바이칼 호수를 다녀온 뒤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시작해 고비 사막, 파미르 고원, 티베트 성산 카일라스, 히말라야, 네팔 카트만두까지 3개월여 2만㎞에 이른다. 광활한 초원과 눈이 시린 얼음호수, 황혼이 내려앉은 사막에서 어머니를 응시하는 감독의 눈길이 애틋하다. 사람들은 ‘왜 노모와 오지로 가느냐’며 만류했지만 아들 정 감독 생각은 이랬단다. ‘나는 그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오래 걷고 싶었고, 티베트의 성스러운 산 카일라스까지 지구의 아름다운 길이 이어져 있었다.’

내가 엄마와 거기에 간 이유도 비슷하게, 어디선가 읽은 문장 때문이었다. “히말라야에 갈 땐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과 가라. 당신이 그 산에 섰을 때 그 사람을 데려오지 않은 것을 미치도록 후회하게 될 테니.” 엄마를 가장 사랑해서인가. 정량으로 셈하면 내 생에서 엄마보다 사랑한 사람이 있었을 때가 더 많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생에서 가장 오래 애증해온 사람임에 분명했다. 가진 것 없이 도시 빈민의 생을 살아오신 엄마가 더 늙고 몸이 불편해지기 전에, 맑은 소리 아름다운 풍경을 눈과 귀로 담을 수 있을 때 나란히 ‘세계의 지붕’을 걸어보자. 그렇게 떠난 여행이었다.

꿈은 좋았는데 현실은 딴판이었다. 무엇보다 육체 피로가 컸다. 엄마는 젊었을 때 산행을 즐겼고 이후엔 탁구‧헬스 등으로 체력을 관리해와 운동 젬병인 나보다 기초체력은 나았다. 다만 무릎이 좋지 않은 편이라 우리 모녀를 개인 가이드해준 셰르파 형제에게 가장 많이 한 네팔 말이 “비스타리”, 즉 “천천히”였다.
매일 8시간씩 걷는 날짜가 쌓이고 해발 고도가 높아지자 엄마는 헉헉대기 시작했다. 막판엔 다섯 걸음 떼고 쉬기를 반복했다. 음식도 제대로 못 드셨다. 롯지(산중 숙소)에서 파는 음식이란 게 뻔한데, 연신 “고기를 먹고 힘을 내야 하는데…”라고 되뇌었다. 3000m 넘는 산중에선 육류를 파는 게 금지돼 있다고 거듭 말하는 사이 내 안의 울화가 쌓여갔다.

영어를 전혀 못하시는 것도 성가신 일이었다. 물 한잔 달라, 화장실 어딨냐, 전기가 안 켜진다 등등 모든 SOS가 내 몫이었다. ‘당연하지, 딸이잖아, 넌 젊잖아!’ 라고 핀잔을 줄 수도 있다. 마음속에서 ‘내가 자랄 때 물 달라, 기저귀 갈아 달라는 투정을 엄마는 마다하지 않았다’라고 스스로 삭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 몸 하나 추스르기 힘든 고산에서 피로는 원망이 됐다. 산에서야 알았다. 엄마가 이미 늙고 시대에 뒤처진, 힘없는 노파라는 걸.

그런데 <카일라스…> 모자의 여행은 어쩌면 저렇게 다를까.
“엄마 괜찮나~.” “그래~.” “안 춥습니꺼~.” “안 춥습니더~.” 카메라 앞뒤의 두 사람은 내내 정겹고 서로 힘이 돼준다. 할머니는 80대란 게 믿기지 않는 체력과 친화력으로 무장했다. 베이컨을 썰어 넣은 식은 빵조각도 우물우물 잘 삼킨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과 스스럼없이 손짓발짓 이야기하고 농담한다.
화면에 거의 등장하진 않지만 아들은 노련한 여행가처럼 보인다. 그의 듬직한 에스코트로 어머니는 ‘80대 오지탐험가’라는 타이틀을 기꺼이 누리는 모습이다.

‘저게 다는 아닐거야…’  나는 스크린에 담기지 않은 화면 속에 이들의 불화가 있을 거라고 상상해본다. 어쩌면 이들도 냉랭하게 말 한마디 안하면서 고비 사막을 건너놓고도 ‘찡하게’ 보이려고 그런 부분은 편집했을지 모른다. “또 그런 잔소리냐”며 카메라 끄고 싸웠을 수 있다. 아니, 실제로 두 사람은 훨씬 다정하고 평온했을 것이다. 엄마와 아들, 엄마와 딸이 같을 수 없으니. 후자가 더 동물적인 애증의 관계 아닐까.

화면에서 이춘숙 할머니가 아들에게 제주(祭酒) 채우는 요령을 일러주고 있다. 40여 년 전 작고한 남편의 제사를 산중에서 챙기는 모습이다. 사별 후 다섯 살, 두 살 남매를 홀로 키웠다는 그는 결혼 전에 농촌지도소 활동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단다. 담대한 여장부 기운이 역력한 할머니는 끊임없이 일기를 쓴다. 그 속의 유려한 표현들은 다시 스크린을 적신다.

반면 나는 엄마가 뭘 쓰는 걸 가계부 외에 본 적이 없다. 엄마는 평범하고 못 배운 필부다. 게다가 남편이라면 진저리를 쳤다. 히말라야 갈 때 ‘오지 탐험’이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게다. 엄마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라면 저렇게 근사하지 않을 테고 그걸 찍는 내 카메라 역시 비틀비틀 했겠지. 엄마는 무얼 바라고 그 먼 길을 함께 나섰던 걸까.

엄마는 모르겠고, 내가 그 설산에 왜 갔는지 깨우친 순간은 있다. 트레킹 다섯째 날  밤, 데우랄리 롯지(3200m)에서 저녁식사 후 셰르파 형제와 담소를 나눌 때였다. 람바부는 가이드 경력만 20년 가까운 베테랑이고 그의 막내동생 비쿠는 은행원으로서 이번 여행에 어쩌다 동행한 상황. 우리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엄마는 옆에서 멍하게 앉아 쉬는 중이었다.

비쿠가 물었다. “디디(누나라는 뜻). 우리가 만난 지 오늘로 엿새쯤 되지? 내일이면 우린 베이스캠프에 가게 돼. 일정이 끝나가는 셈이지. 이제 우리가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하는데, 디디에 대해 물어봐도 돼?”

“그래, 뭐가 궁금해?”
“디디는 뭐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밤이 이슥하도록 이어졌다. 희미한 백열등 아래에서 서로의 가족 얘기를 주고받다가 그가 마침내 물었다.

“그랬구나… 그럼, 아직도 디디 혼자서 아버지와 연락해? 그는 지금 어디에 살아?”

호흡을 가다듬고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My father passed away a month ago…(아버진 한달 전에 돌아가셨어)”

그 말과 함께 눈물이 양볼을 타고 흘렀다. 비쿠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Oh, I am sorry.. I am sorry…(미안해, 미안해)”
“No, you don’t have to be sorry about that…(아냐, 미안해 할 필요 없어)”

그때 엄마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와? 와 그라는데?”
“응, 아냐. 아무일도.”
“근데 왜 쏘리, 쏘리 이라는데? 뭐 잘못 했나, 니가?”

다행이었다. 엄마는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전혀 몰랐다. 엄마는 오래전 이혼한 남편의 장례식을 끝끝내 가지 않았다. 마치 상주처럼 장례를 치른 뒤, 나는 머나먼 설산에 가고 싶었다.


<카일라스…>를 보고 엄마에게 전화했다. 이춘숙 할머니는 첫 히말라야 여행 이후 오지 순례자가 됐지만, 엄마의 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본인의 건강을 챙기는 게 자식들에게 ‘폐’가 되지 않는 거란 사명감에 꾸준히 운동하고 구립 복지관에서 얻은 노인 일자리를 성실히 다닌다.
조금 달라졌다면 네팔이나 히말라야 뉴스가 TV에 나오면 큰 관심을 보이는 정도. 얼마 전 ABC 코스 산사태로 한국 교사들이 불귀의 객이 됐을 때 “우리가 갔던 데더라”라면서 안타까움인지 반가움인지 모를 감정을 전화에 비쳤다.

“엄마, 그때 말이에요. 제가 너무 못해서 미안해요. 성질만 부리고…” 
“뭔 소리고. 나는 그런 거 하나도 기억 안 난다. 그리고 니가 내 아니면 누구한테 또 그라겠노, 야. 나는 지금도 눈 감으면 훤하다. 그 풍경들, 사람들이…”

그러고 보니 떠올랐다. 땀 뻘뻘 흘리고 올라온 비탈길에서 방울을 딸랑거리는 지나가는 염소떼를 바라보며 엄마에게 “여기 와보니 어때” 하고 물었을 때다.

“아, 내가 여기 와서 보니까 내 딸이 진짜 똑똑하고 대단하구나 싶다.”
“잉? 무슨 말이야?”
“아니, 이 먼 곳에서 착착 진행되게 준비를 다 해놓고, 이 훌륭한 사람들(가이드 및 포터)을 구해놓고, 말(영어)도 다 잘 통하고. 와, 내가 진짜 똑똑한 딸을 뒀구나 이번에 처음 알았다.”

기쁜 반면 한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처음’. 내 딴엔 그간 가족에게 나름 한다고 했는데 엄마는 이제야 “내가 딸을 똑똑하게 키웠구나” 자부심을 느낀단 건가. 어렸을 땐 늘 ‘똑똑한 둘째딸’이라고 자랑스러워하셨는데. 돈깨나 있는 이웃 앞에서 큰소리 칠 땐 늘 내 성적 얘기였는데. 그랬던 둘째가 어느새 뻣뻣하고 불편하고 대화도 잘 하지 않는, 설산처럼 시린 존재가 됐단 것일까.

“내가 해냈다~! 대한민국 장유선이가 해냈다~!!”
겨우겨우 4130m ABC 고지에 다다랐을 때 엄마는 이렇게 소리쳤었다. 그저 둘째 딸이 가자고 해서 따라나선 길이었는데 마치 필생의 목표라도 이룬 듯했다. 다녀온 뒤 엄마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했다. 히말라야 그게 돈이 많다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라요. 우리 딸이 똑똑하니까 그걸 다 안내해서 갔지. 그럼요, 나도 당연히 꼭대기까지 갔지, 평생 또 언제 갈끼라고.

<카일라스…> 모자가 그 기나긴 여정 후 어떻게 달라졌는지, 스크린에 담기지 않은 사연을 알 순 없다. 다만 나는 엄마와 좀 더 소소한 대화를 하고, 가끔 여행도 다닌다. 여전히 툴툴대고 삐걱대지만, 그만큼 애틋한 표현도 늘었다.
히말라야에서 우린 끝없이 “비스타리”(천천히)를 되뇌었다. 천천히 오래 걸은 후에야 비로소 산을 넘을 수 있었다. 히말라야에 엄마와 함께 가서 다행이었다. 카일라스건 어디건 상관없을 터였다. 내가 진짜 넘은 건 엄마와의 사이에 낮은 문턱이었으니.


강혜란 기자

2000년 입사한 중앙일보에서 현재 영화와 문화재 기사를 쓰고 있다. 아름답고 무용한 것에 대한 열망으로 문화부 기자를 탐했으나 현실은 숙성은커녕 속성 원고 생산 글로생활자. 일이 아닌 ‘내돈내산’(내돈 내고 내가 산) 문화생활을 40대 후반 싱글의 시각으로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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