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정가에 모처럼 ‘말의 정치’가 돌아온 것 같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의 국회 연설(9월 7일)을 지켜본 사람들의 관전평이다. 말의 귀환, 더 나아가 정치의 귀환을 예감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정치부 기자들이 기대한 ‘한 방’은 없었다. 8.15 광화문집회 주도세력에 대한 공격을 빼고는 상대방을 가격하는 발언을 일절 하지 않았다. 국민의힘(옛 미래통합당)과 김종인 비대위원장도 광화문집회 세력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려는 입장이니 여야 갈등의 소지는 없었다.
<피렌체의 식탁>은 지난 7일 연설에서 드러난 ‘이낙연 화법’을 한 발 더 깊이 들여다봤다. 이 대표는 그동안 콘텐츠는 진보를 지향하되 ‘품격’의 언어를 지킨다는 원칙을 표방해왔다. 이른바 ‘태도 보수’라 일컬어졌다. 이 대표의 화법은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대조적이다. 이 지사는 분명한 어젠다와 논리를 갖춰 상대의 빈틈을 날카롭게 공격한다는 평을 받아왔다. 그런 점에서 이낙연 화법은 오히려 야당 대표인 김종인 비대위원장과 비슷한 측면이 많다. 자유롭고 솔직·발랄한 토크를 위해 역시 필명(筆名)으로써 다섯 명의 대화 내용을 전한다. [편집자]

▲피터팬
이낙연 대표의 연설을 들어보면 상당히 품을 들여 준비한 거 같다. 주목할 점은 야당이나 반대세력을 비난하는 구절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다만 8.15 광화문집회를 주도한 사람들을 “방역을 조롱하고 거부하는 세력”이라고 공격하거나, “(개천절에도 비슷한 집회를 열려는 세력을) 법에 따라 응징하고 차단해야 한다”는 경고를 한 게 눈에 띄었다.

▲반반
이 대표가 30분 연설 중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정부’를 한 번도 지칭하지 않은 게 인상적이었다. 당대표 경선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기치로 내건 것과 많이 달랐다. 자신의 어젠다와 정책 구상을 선보이는 데 주력했다고 생각한다. M세대, 이른바 ‘마스크 세대’를 화두로 ‘대전환의 시대’를 역설했다. 당면과제인 코로나19 위기 극복과 대전환을 위해 건강안전망, 사회안전망, 한국판 뉴딜과 신성장, 성 평등, 균형발전 등 다섯 가지 어젠다를 제시했다. 물론 이것들은 문재인 정부의 어젠다이기도 하지만 이 대표가 자신의 정치적 화두로 제시한 게 아닐까 싶다.

#국가적 리더에 걸맞는 메시지 표출
#시대적 과제들 고민한 흔적 엿보여

▲가오리
이낙연 대표는 이번 연설을 통해 오너(owner)급 정치인의 모습을 절반쯤 보여준 것 같다. 그간 여야 교섭단체 대표의 정기국회 연설은 각박했다. 야당 쪽에선 대개 대통령과 집권당을 비난하고, 여당 쪽 연설자는 눈앞에 놓인 자신들의 ‘개혁과제’ 달성을 일방적으로 역설하기 일쑤였다. 그런 점에서 이 대표는 당내 대표 경선에서 60% 넘는 득표율로 당선된, 그러면서 차기 여론조사에서도 1위인 정치인의 ‘위엄’을 보여주려 했지 않았을까.

▲피터팬
이제부터는 국가적 리더, 즉 대통령 후보감에 어울리는 메시지와 정책을 표출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여론조사 결과 차기 지지도에서 이재명 지사의 추격을 받고 있지만 그와는 급(級)이 다르다는 걸 은연중 보여준 것 아닐까 싶다.

▲타이거
대통령 취임사를 듣는 것 같았다. 마무리 부분의 ‘내가 꿈꾸는 대한민국’이 특히 그렇다. 큰 뼈대는 첫째, 둘째, 셋째의 나열식 연설이다. 김대중 대통령 스타일이다. 나열식 연설은 내용의 이해와 정리에 도움이 되지만 특정 내용에 방점이 찍히지는 않는다. 

▲반반
정치부 기자들이나 선수들이 바라는 ‘한 방’은 없었다. 이를테면 박근혜 대통령 시절 유승민 원내대표가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통해 보수의 새 진로를 보여준 것 같은 ‘한 방’ 말이다. 당시 유 대표는 보수 여당으로선 매우 이례적으로 세금을 더 걷어서 복지에 쓰자고 주장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연설을 통해 이낙연 스타일은 보여줬지만 자신의 방향성과 색깔을 뚜렷하게 보여주진 못했다.

▲양자
나는 이낙연 대표가 이번에 멘탈(mental)의 변화를 일부 보여줬다고 본다. 이 대표는 사실 0.1%의 학력 엘리트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지만 광주일고, 서울법대를 졸업한 뒤 동아일보가 언론시장의 40%쯤을 차지하던 시기에 21년간 동아일보 기자로 살아왔다. 아마 그의 기본 멘탈은 호남과 신문기자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나 더 보태면 서울법대라는 학력의 왕관. 그는 정치권에 입문해 국회의원을 네 번 하고 도지사를 두 번 지냈다. 그러다 보니 대체로 귀족적 이미지가 강했다. 김대중이나 노무현처럼 맨주먹으로 시대의 최대 화두를 껴안고 몸부림치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이번에 연설을 풀어내는 걸 보니 코로나19, 여성과 청년의 현실 등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연설만 놓고 보면 합격점을 줄 수 있다.

▲타이거
정치의 두 지향점이 개혁과 통합이라고 할 때, 통합에 무게중심을 두고 연설했다. 약자와 소외계층은 물론 야당까지 끌어안으려는 모습을 보여줬다. 개혁에 관한 세부 내용이 실종된 건 아쉬운 대목이다. 

▲피터팬
사석에서의 이 대표는 귀족적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막걸리 예찬론자’이자 좀체 취하지 않는 말술에 누구와도 유머를 섞어 유쾌한 대화를 즐긴다. 반면 업무상 만난 사람들은 ‘이 대표가 타인을 동등한 능력의 소유자로 보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그와 함께 일한 아랫사람들이 ‘6급 공무원처럼 깐깐하게 군다’는 뜻으로 ‘이 주사(主事)’ 같은 별명을 붙여준 이유였다. 이 대표 자신은 “국민 입장에서 공직사회를 관리하다 보니 생긴 구설인데 뒷담화가 무서워 설렁설렁 넘어갈 순 없지 않냐”고 설명했다더라. 이번 연설을 보니 완벽주의 성품 못지않게 국가 리더로서의 무게감을 실으려 노력한 것 같다.

#사이다 발언 핵심은 ‘비틀기+받아치기’
#안정감·품격 앞세워 '어른의 걱정' 느낌

▲가오리
이재명 지사가 각종 현안에 대해 외과의사처럼 수술칼을 들이대며 스트리트 파이터처럼 실적을 쌓아왔다면 이 대표는 ‘안정감’과 ‘품격’을 우선시하며 그 테두리 안에서 고칠 걸 고치는 사람으로 전략을 세운 듯했다. 이번 연설에서 그걸 정리해 보여주려 했다.
이 대표의 말은 상대방 발언을 비트는 요소가 있었다. 총리 시절 그가 인기를 얻은 ‘사이다 발언’의 밑바탕은 이런 거다. 야당 의원들의 정치공세에 맞서 사안의 본질에 대한 이해력을 바탕으로 상대 발언의 빈틈을 파고 들어가 받아치기를 하는 식이다. 예컨대 2018년 10월 국회에서 "문 대통령의 평양 방문 동안 태극기가 (평양 시내에) 없었다"고 야당 의원이 질의하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방문한다면 서울에 인공기를 휘날릴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이에 앞서 2017년 9월 국회 대정부질문 땐 “(MBC 김장겸 당시 사장의 거취 문제와 관련해) 최근에 MBC나 KBS에서 불공정 보도하는 거 보신 적 있습니까?”라는 추궁에 “꽤 오래 전부터 좀 더 공정한 채널을 보고 있습니다”라고 맞받아쳤다.
과거의 역대 총리들은 대정부 답변 때 대체로 공무원들이 써준 대로 읽어왔던데 반해 이 대표는 순발력 있게 반격을 시도했고, 이것이 여당 지지자들에겐 사이다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른의 걱정’이 느껴졌다.

▲타이거
오늘의 이낙연 대표를 만든 것의 8할은 바로 그 사이다 발언에 있다고 생각한다. 가볍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폐부를 찌르는 순발력과 촌철살인이 그의 주특기이자 대중들에게 먹히는 포인트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질의나 답변이 아닌, 연설이란 특성상 그런 장점을 살리는 게 쉽지 않았을 거다.  

▲양자
그래서인지 문재인 대통령보다는 덜 진지하게 보인다. 문 대통령의 연설은 심각한 표정과 함께 지지자들에게는 진정성의 극치로 비쳐진다. 이 대표의 이번 연설은 앞과 뒤 부분의 톤이 좀 다르다. 아마도 하고 싶은 말은 앞부분에 있는 것 같은데 건강안전망, 사회안전망, 한국판 뉴딜과 신산업 육성, 성 평등까지가 본인의 핵심 메시지로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뒷부분의 정치개혁 언급 부분과 분리될 수 없다. 앞에서 비전을 제시했지만 뒤에서 정치개혁 없이는 그런 게 다 아무 소용없다고 강조했다. “상대방 골탕 먹이는 일이 정치인 것처럼 비치곤 했다”고 톤을 약간 누그러뜨렸지만 실은 “상대방 골탕 먹이는 일”이 지금 정치의 실상이라며 그것을 바꾸자고 강조하고 있다. 바로 그 뒤의 “전례 없는 국난에도 정치가 변하지 않는다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와도 조응한다.
바로 앞의 ‘우분투(ubuntu,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 얘기나 시대의 질적 대전환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 흐름을 선도해야만 행복의 나라로 갈 수 있다는 얘기도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말로 연결 지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연설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는 오히려 이게 아니겠냐는 생각이 든다.

▲타이거
문 대통령의 말이 진정성 있게 보이는 건 명실상부하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과거와 현재가 일관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번 이 대표의 연설에도 감성적으로 접근한 대목이 곳곳에 눈에 띤다. 이에 비해 노무현 대통령은 감성적 언사는 가급적 배제하려고 했다.

#문명사적 ‘대전환’ 강조 부분 돋보여
#이해찬 대표 때와 달리 협치에 방점

▲가오리
특기할 만한 점은 뭔가 문명사적 시각을 집어놓으려 한 점이다. ‘대전환’이라는 용어를 거듭 사용한 것은 케네스 포메란츠의 책 <대분기(Great Divergence)>의 개념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서방이 중국, 인도, 이슬람을 극복하고 세계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과정을 서술한 책인데 코로나19를 겪는 지금이 그와 같은 대전환기라는 역사 인식이다. ‘역사상 새로운 선도국가는 새롭고 효율적인 에너지를 선제적으로 상용화했다’는 부분도 같은 맥락이다. 몽골의 말, 네덜란드의 바람, 영국의 독일의 석탄, 미국의 석유를 예로 들었다.
60대인 이 대표가 대전환 극복의 네 번째 과제로 성평등을 제시한 것은 어떠한가? 여성들은 연설문 중 “낯선 사람을 만날 때면 걱정되고, 가사노동과 가족돌봄의 짐은 무겁습니다”라고 표현한 부분을 높이 평가하더라. 성범죄에 대한 단호한 대처, 유리천장 없애기 같은 공약도 내놓았지만 위의 구절은 ‘여성들이 어떤 점에서 힘들어하는지를 알고 있는 것 같다’는 평이다.
주변에 따르면, 젠더·세대 문제에 대한 이해는 5060세대 남성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이 대표에게도 가장 큰 난제다, 지난 7월 “인생에서 가장 크고 감동적인 변화는 소녀가 엄마로 변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가 젊은 여성들로부터 비판받던 때보다는 현실적인 이해가 깊어진 것 같다. ‘소녀에서 엄마로 변하는 순간’이 왜 지금 여성들에게 가장 크고 감동적인 변화가 아닌지를 밤새 독학해 새벽녘에 깨달았다고 하더라.

▲양자
문명 대전환이라는 거시적 시각과 국내외 현안들에 대한 디테일한 언급, 그것을 단문의 문학적 감수성까지 섞어 일목요연하고 알기 쉽게 풀어 설득력을 높인 것으로 보인다. 상당히 잘 짜인 얼개인데, 세상은 이렇게 바뀌고 있으니 우리도 바꾸자, 지금까지의 구태로는 여든 야든 이길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다는 게 전체 메시지의 대강이 아닌가 생각한다.


▲피터팬
연설 전반부에선 M세대(마스크 세대), 후반부에서는 '우분투'라는 단어가 인상 깊게 들렸다. 이 대표가 연설 말미에 “우분투는 아프리카 반투족의 말”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단어는 여야 협치 의지를 과시하기 위해 차용한 것 같다. 이해찬 대표 시절의 대치 정국과 달라질 것을 예고하는 단어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이 대표는 동아일보 기자 시절인 1980년대부터 ‘국민의힘’ 김종인 비대위원장과 40년 가까이 인연을 맺어온 사이다. 두 사람 나이가 12세나 차이나지만 개인적 신뢰는 두터운 것 같다. 협치와 통합이 이번 연설의 큰 주제였는데 김종인 위원장이나 야당 쪽과 얼마나 이런 분위기를 유지해 나갈지 관심거리다.

▲반반
이 대표의 연설에서 ‘권력 의지’가 느껴졌다. 마치 대통령 취임연설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마 일부러 그렇게 썼을 것이다. 비록 ‘한 방’은 없었지만 연설문을 쭉 읽어보면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 이 대표는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할 때 취임사를 썼을 만큼 리더의 말과 글을 다루는데 강점을 갖고 있다.
총리 퇴임 후 원외 인사로 있을 때 ‘제가 지금은 아무 직책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현안에 대한 언급을 꺼렸다. ‘사태를 엄중히 보고 있다’는 말을 많이 해서 그것이 일반 국민에게는 약한 모습으로 비쳐졌고, 심지어 ‘엄중히’ 선생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이제 집권여당 대표가 됐고 ‘이낙연 정치’의 한 자락을 보여줬다. 앞으로 12월쯤 정기국회 예산안 통과 즈음까지 약 100일간 차기 선두주자로서 생사의 1차 고비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타이거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인데, 언제부턴가 ‘말의 정치’를 보기 어려웠다. 말로써 국민을 위로하고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정치, 적어도 말 때문에 국민이 짜증나지 않는 정치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본다. 여야 간에도 대화-타협의 정치가 이루어지길 국민은 원한다. 다만 협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 대표의 말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흐르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 이 대표의 어려움이 있을 거다.

정리=한은지 기자

https://www.youtube.com/watch?v=4WSq9XAFjM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