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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제국과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를 넘어

by | 2019년 4월 19일 | 한반도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실체도 있다면, 그리고 우리에게 여전히 남겨진 숙제가 있다면 그것들은 무엇일까.

지난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국제세미나’에서 이삼성 한림대 교수는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을 규정하는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구조가 내면에 담고 있는 연속성의 실체를 밝혔다.

“19세기 말 이래의 제국체제 시대부터 미국과 일본은 러시아를 공동으로 견제하면서 중국 대륙을 통제하고 경영한다는 지정학적 목표를 공유했다. 그래서 이들은 한편 서로 갈등하면서도 권력정치적 흥정을 통해서 협력하는 연합의 전통을 구성했다. 두 제국이 1940년대 전반기 짧은 폭력적 갈등의 시간을 끝낸 전후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일본은 연합을 넘어 거의 동체(同體)에 가까운 동맹을 구축하였고, 그러한 양국의 지정학적 동맹의 구도는 탈냉전에도 변함이 없다. 러시아의 상대적인 퇴장과 달리 개혁개방을 통해 국력이 팽창하는 중국과 미일동맹 사이의 지정학적 긴장은 더욱 재충전의 길을 걸었다.”

19세기 말 이래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구도가 지금까지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오늘날의 한반도 및 동아시아 문제도 19세기 말 상황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얘기가 된다. 100년 전 3·1운동 때 선조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과제가 바로 지금의 과제와 다르지 않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 교수가 말한 19세기 말 이래의 ‘동아시아 제국체제’란, “서양의 여러 제국과 일본 제국이 중국 주변의 동아시아 약소사회들을 식민지화한 뒤 이 식민지배를 발판으로 삼아 중국 대륙을 하나의 거대한 반식민지로 공동 경영하는 질서”를 가리킨다.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7월 일본과 미국이 맺은 ‘가쓰라-태프트 밀약’도 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던 러시아를 공동으로 견제하면서 중국 주변국들을 식민지화한 뒤 이를 발판으로 삼아 중국대륙을 지배하고 경영하는 질서를 가리킨다.

미국과 일본 연합체제(지정학적 동맹체제)는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벌인 1941~45년의 짤막한 폭력적 갈등(아시아·태평양전쟁)을 겪었으나 일본 패전 뒤 곧 바로 미국이 내세운 ‘자유세계’라는 초국적 반공체제하에 전쟁 전보다 더 강력한 동맹체제로 재건됐다. 이 질서 속에서 일본의 전후 세대는 “제국 일본의 침략전쟁과 반인류적 범죄들이 아시아의 다른 사회들에 남긴 역사적 상처에 대한 감수성을 가꿀 교육적 기회”를 갖지 못했다. “(1945년 패전 이후) 거의 반세기 동안 역사문제에 대한 고뇌를 면제받았던 일본 사회는 (1989~91년 냉전 붕괴 뒤) 갑자기 활성화된 것처럼 보인 동아시아 다른 사회들의 역사 담론과 생경하게 맞닥뜨려야 했고 자기방어적으로 되었다.”

이 교수가 뒤틀린 동아시아 질서를 떠받치는 “정신적 폐쇄회로”라고 지적한 이런 “역사심리적 간극”은 미일동맹과 중국, 미일동맹과 동아시아 간의 지정학적 긴장, 체제·이념적 긴장과 함께, 그가 한반도와 동아시아 문제를 인식하고 분석하는 기본 틀이라고 할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개념의 핵심요소를 구성한다.

“전후(2차대전 뒤) 동아시아의 비극은 내전을 통해 중국 민중이 선택한 대륙의 사회주의 정부와 전후 세계의 패권국가로 자리잡은 미국이 이념적 차이를 넘어서는 평화적 공존을 위한 역사적 선택을 가꾸어내는 데 실패하면서 출발했다. 이 실패는 이후 동아시아 역사에 치명적인 구조적 결과를 낳았다. 그 실패는 곧 분단 한반도의 내전적 갈등과 결합하면서 미중 사이의 직접적인 폭력적 대결로 발전했다. 이후 중국 대륙과 미일동맹이 대분단의 기축을 구성하고, 이 분열된 기축과 연결되어 한반도, 대만해협, 그리고 인도차이나에 세 개의 소분단체제들이 고착화되었다. 대분단의 기축은 소분단체제들과 상호작용하며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질서, 곧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라 부를 수 있는 역사적 현실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중국대륙과 미일동맹 사이에는 지정학적 긴장,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차이의 긴장, 그리고 제국체제의 폭력에 뿌리를 둔 역사적 상처가 치유되기보다 응결(凝結)됨으로써 굳어진 역사심리적 간극에 의한 긴장이 존재했다. 이 세 차원의 긴장이 중첩되고 상호작용하면서 대분단체제의 지속성을 보장했다.”

냉전 붕괴 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해체의 기회를 맞았으나 강력한 중국의 대두와 미국·미일동맹이 추구하고 있는 동아시아 해양패권이 맞부딪치면서 새로운 형태로 치환 내지 재충전됐다.

급진전되는 듯했다가 다시 교착상태에 빠진 북미관계 정상화, 북핵 위기 해소, 남북 교류협력 및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혼조 내지 정체를 비롯한 한반도 분단국가체제(소분단체제)가 미동도 않는 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악순환의 고리’로 밀접하게 서로 엮여 있다.

한반도 문제와 동아시아 문제 역시 상호연관돼 있으며, 둘은 동시 병행적으로 풀어갈 수밖에 없다.

“한국에 마침내 민주주의는 실현되었지만, 100년 전 식민지 권력에 항거하여 3.1운동에 나선 수백만의 한국인들이 열망했던 ‘새로운 나라’를 향한 지난 한 세기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 모두에게 세 가지의 숙제가 남겨져 있다. 하나는 북녘땅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민주주의, 둘째는 나라가 중복되어 상쟁하는 현 상태를 넘어서 지속 가능한 한반도 평화체제를 건설하는 것, 그리고 셋째는 3.1독립선언문이 말했듯 ‘(민족과 나라들 사이에) 과감하게 오랜 잘못을 바로잡고 진정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사이좋은 새 세상을 여는 것’(果敢으로써舊誤를廓正하고眞正한理解와同情에基本한友好的新局面을打開함), 즉 동양 평화에 기여하는 일이다.“

한반도 평화를 넘어 동양 평화를 위해 우리 사회는 어떤 인식과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이 교수는 이 글에서 그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정신적 폐쇄회로로 규정한 역사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출발점으로서 대안적인 동아시아 역사대화방식의 모색을 제안한다.

아울러 이 교수는 “제국의 시대에 나라없음의 문제”에 대한 사색을 통해서 ‘국가’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이며 우리가 이에 대해 어떻게 사유할 것인지를 논한다. 국가폭력의 결정체라고 할 전체주의에 대한 치열한 사유를 전개한 한나 아렌트가 그와 동시에 ‘나라없음’의 문제를 깊게 고뇌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사유의 연장선에서 인권, 즉 “인간의 정치적 및 사회적 권리”란 자연 속에 존재하는 천부적 권리인 것이 아니라, ‘국가’ 내지 ‘나라’로 불리는 정치공동체 안에서의 정치적 실천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는 지극히 정치적이며 역사적인 현상임을 아렌트는 직시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그렇다면 국가라는 정치공동체 안에서 모든 권력관계의 민주적 재편성을 위한 더 치열한 사유와 끊임없는 투쟁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 커진다. 진보를 자임하면서 국가에게 갈수록 더 많은 요구를 하는데 앞장서면서도 인권이나 진보를 탈국가 내지 국가 초월과 동일시하는 지적 풍토가 만연한 오늘, 국가에 관한 우리 사유가 빠져 있는 모순과 함정에 대해 돌이켜보게 하는 대목이다.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가 주관하여 지난 11일 상하이에서 열린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국제세미나’에서, 이삼성 교수는 하나로 엮여 있는 이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 및 동양평화 수립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피렌체의 식탁>은 이 세미나 안내문에서 이삼성 교수의 발표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 교수에게 발표문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 교수는 이 글의 구체적 내용은 세미나 주최측인 정책기획위원회와 무관한 자신의 개인적 생각들이라는 점을 명확히 밝히는 것을 전제로 <피렌체의 식탁>에 전재하는 데 동의하였음을 밝혀 둔다. 다음은 ‘3.1운동 후 100년 동아시아의 초상- 나라의 없음과 나라의 과잉, 그리고 제국과 대분단체제를 넘어서’라는 제목이 붙은 그 발표문의 전문이다. [편집자]

[이삼성 / 한림대 교수]

1. 제국의 시대에 나라 없음의 문제

1919년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을 배경으로 그 해 4월 11일 이 곳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이 도시에 임시정부를 세운 것은 당시 상하이가 표상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완의 공화주의 혁명이었다 할 1911년의 신해혁명은 3,000년을 넘는 유서 깊은 왕조시대를 끝내고 새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낡은 질서는 하루아침에 해체되지 않았다. 진정한 공화주의 혁명은 좌절되고 그 혁명의 상당 부분은 낡은 시대의 지배세력에 납치되었으며, 베이징은 그 세력의 중심으로 남아 있었다. 상하이도 그 혼란과 당혹의 시대를 투영하고 있었지만, 근대적인 사회계층 성장의 중심지였던 이 도시는 공화주의 혁명의 복권을 주도하려 하거나 러시아혁명에 자극받아 전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젊은 세대 중국인들의 심장이 약동하고 있었다.

그 시대 동아시아는 제국체제라고 부를 수 있는 질서 속에 있었고, 상하이는 그 질서의 한복판에 놓여있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에서는 제국들이 해체되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미국과 일본이라는 신흥 제국들을 포함한 제국들의 위상이 더욱 강화된 제국체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동아시아 제국체제’란 서양의 여러 제국과 일본 제국이 중국 주변의 동아시아 약소사회들을 식민지화한 후 이 식민지배를 발판으로 삼아 중국 대륙을 하나의 거대한 반식민지로 공동 경영하는 질서를 가리킨다.1)


1)필자는 ‘제국의 시대’와 ‘제국체제’를 구별한다. 우선 필자가 말하는 ‘제국의 시대’는 세계질서의 주도 국가들이 지구의 다른 사회들의 대부분을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로 지배하는 기간으로서 대체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엽까지가 해당된다. 그런 의미에서 에릭 홉스봄이 1차 대전에서 끝나는 것으로 본 ‘제국의 시대’와 다르다. 한편 ‘제국체제’는 한 지역 안에서 그 안의 모든 사회들이 제국 아니면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로 양극화되어 병존하는 구조를 가리킨다. 유럽 안에서 대부분의 사회들이 제국과 식민지로 구획된 상태를 뜻하는 ‘유럽 제국체제’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유럽 안의 식민지 사회들이 독립하면서 종언을 고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시점에서도 영국과 미국을 포함한 참전국들 대부분은 유럽 바깥에서 여전히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들이었다. 따라서 2차 대전 또한 “제국의 시대에 제국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속한다. 동아시아의 경우는 동아시아의 대부분 사회들이 제국과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 상태로 구획되기에 이르는 청일전쟁 이후 1945년까지의 시기를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천하체제를 대체한 질서로서의 ‘동아시아 제국체제’ 국면으로 정의한다.

치외법권과 조계지로 상징되는 그 시대 상하이의 반식민지적 상황은 근대 동아시아의 슬픈 초상이다. 제국과 식민지가 만나는 상하이에서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근대와 전근대가 교차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아시아 여러 사회들에서 흘러든 새 사회와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향한 꿈들이 이 도시에 괴이며 자라나고 있었다.

도쿄는 서양 세력과 연합하여 중국을 경영하는 제국의 심장부이자 식민지 권력의 거점으로서 현재의 권력과 그 팽창을 추구하는 제국적 사유의 중심이었다면, 상하이는 사회에 관한, 그리고 사회들과 나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상과 꿈들이 만나는 곳이었다. 거대한 사회를 대표하는 도시였지만 동시에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의 처지에 놓인 사회들의 목소리를 담아 낮은 곳으로부터 사유하는, 한편으로 자기에 관한 절망에 신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미래에 대한 열망으로 용트림하는 도시였다.

이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수립에 나선 한국인들의 행동을 추동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조국땅에서 전개된 3.1운동이었다. 러시아혁명의 레닌주의가 민족해방을 내세우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 구호를 내걸었지만 1차 대전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제국체제는 더 공고해진다. 3.1운동은 1차 대전 후 오히려 안정성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 이 제국체제에 대한 동아시아 반제국주의 민중운동의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3.1운동은 그 기원에서도 동아시아적 차원을 갖는 것이었다. 3.1운동은 국내적으로는 19세기 말 한국의 거대한 사회민중운동이었던 동학농민봉기의 연장선에 있다. 동시에 3.1운동이 가진 공화주의적 요소는 분명 1911년 중국 신해혁명의 사상과 맥이 통하며, 더 멀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몇 년 간에 걸쳐 필리핀 민중이 2만여 명의 전투원 전사자와 25만 내지 많게는 무려 75만 명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희생을 낳으면서,2) 미국 식민주의를 상대로 전개한 독립전쟁 과정에서 보인 공화주의적 행보와도 연결된다.3)


2)데이비드 핼버스탐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필리핀전쟁에서 필리핀 군인 사망자 2만, 민간인 사망자 25만 명에 달했다(David Halberstam, The Coldest Winter: America and the Korean War, New York: Hyperion, p.111). 크로스토퍼 클라크가 파악한 규모는 훨씬 컸다. 필리피노 희생자 수는 50만 명에서 75만 명에 달했다는 것이다(Christopher Clark,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New York: HarperCollins, 2013, pp.151-152).
3)미국의 식민주의에 저항한 필리핀 독립운동의 공화주의적 성격과 함께 그 한계에 대해서는, Stanley Karnow, In Our Image: America’s Empire in the Philippines, New York: Ballantine Books, 1989.

당시 본격적인 파시즘화에 앞서서 일본 제국의 심장부에서도 성장하고 있던 대중 민주주의 혹은 진보적 사상의 전파와도 연결되는 것이었다.

3.1운동은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적 무력에 부당하게 빼앗긴 채 한 사회 전체의 집단적 굴욕과 노예화를 강요당한 상태로부터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국권회복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국가권력의 폭력에 맞서 자각된 민중의 근대적 인권운동이었다. 온 세상이 제국이 아니면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로 구획되고 차별화된 세상에서 인간이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개인들이 집단적 주체를 구성하는 자신의 ‘나라’를 갖는다는 것과 불가분했다. 제국의 시대에 제국은 문명과 질서의 담지자(擔持者)를 표상했으며,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의 인간은 미개인(未開人)과 동일시되는 가운데 각종 권력적 및 문화적 장치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일반적인 시민권의 밖에 놓이고 그만큼 비인간화의 폭력에 쉽게 노출되는 구조였다.

1933년 나치스가 권력을 장악한 독일에서 유대인들은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수용소에 갇히거나 난민으로 내몰렸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철학자의 한 명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1933년 그렇게 난민이 된 유대인 여성이었다. 그 시대의 암흑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아낸 그녀의 주저 『전체주의의 기원』은 국가폭력의 가장 궁극적인 형태라고 할 ‘총체적 테러’를 포함하여 ‘국가의 과잉’이라는 문제에 대한 치열한 사유의 결정체이다.4) 하지만 이 작품에는 ‘나라 없음’(statelessness)의 문제에 대한 아렌트의 깊은 고뇌와 성찰이 함께 담겨 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5) 한국인은 유대인만큼 오랜 세월은 아니지만 약 반세기에 걸쳐 나라를 상실했던 경험이 있으며, 3.1운동은 그 ‘나라 없음’의 상태를 넘어서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기에 한국인들에게 ‘나라 없음’의 문제에 대한 아렌트의 사유는 특별한 울림이 있다.


4)이삼성, 「한나 아렌트의 인간학적 전체주의 개념과 냉전: 친화성과 긴장의 근거」, 『한국정치학회보』 49집 5호(2015년 겨울), pp.113-145.
5)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New York: Harcourt, Brace and Co., 1973(Originally 1951), pp.269-302; 이삼성, 『제국』, 소화, 2014, pp.499-500.

아렌트에게 있어서, 제국의 시대의 인간에게 ‘나라 없음’은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가 성립할 조건을 상실한 것을 의미했다. 나라 없음이란 우선 인간이 의미 있게 존재할 ‘장소’(a place)를 빼앗긴 상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행동이 일정한 효과를 지닌 공간을 빼앗겼다는 뜻이었다. 이 장소를 박탈당한 인간은 시민적 권리인 자유와 정의보다도 더 근본적인 권리를 이미 박탈당한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또한 저마다 인간이 애틋한 소속감을 가진 공동체를 담는 그릇이 상실된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곧 “그 구성원에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할 의사가 있고 또한 그것을 보장할 수 있는 공동체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렌트는 구체적인 권리 상실 이전에 그 공동체의 상실로 인간이 직면하게 되는 위기의 중대성에 주목한 것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그것이야말로 20세기 인권 문제의 가장 큰 위기이자 재앙이 자리했던 지점이었다. 나라 없음의 경험을 가진 민족의 구성원이었던 사상가만이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었던 주제였다고 생각된다.

아렌트는 더 나아가 “인권과 근대국가 사이의 긴밀한 의존 관계”를 간파했다. 정치철학도 철학 일반과 마찬가지로 탈형이상학화될 수밖에 없었던 20세기에 있어서, 흔히 ‘천부적 인권’이라 일컫는 ‘자연법적 권리’는 처음부터 실존하는 권리가 아니라 정치사상일 뿐이었다. 인권의 사상을 현실역사에서 구현하는 공간은 도시국가든 광역적 영토를 가진 큰 사회든, 폴리스라는 정치공동체 안에서의 정치적 실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포함한 억압적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과 예방이 국가 자체를 초월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의 권리의 실존적 조건은 인간의 자발성 및 사유능력과 함께, 공화국이라는 정치적 공간, 즉 폴리스(polis) 안에서, 국가의 초월이 아닌 국가의 내적 변화를 향한 인간의 정치적 실천, 그리고 이를 위한 인간들 사이의 연대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이 같은 아렌트의 사유는 제국의 질서에 음양으로 우호적인 많은 지식인들의 논리와 차별성이 있다. 근대 이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정치철학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제국 건설의 경험을 가진 큰 사회의 지식인들이었다. 이들과 달리 아렌트는 나라를 갖지 못했거나 또는 나라의 주인일 수 없었던 타자화된 민족 집단의 구성원이었고, 그러한 그녀에게 ‘나라 없음’의 문제는 자신의 생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제국’과 ‘나라 없음’에 대한 그녀의 사유는 특별한 바가 있다.6)


6)국가폭력의 결정체라고 할 전체주의 체제의 역사적 기원의 하나로 ‘제국주의’를 주목한 가운데, 아렌트는 대영제국이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배의 수단으로 동원한 비밀경찰을 포함한 관료주의와 인종주의를 그런 맥락에서 깊게 논의했다.

제국주의의 시대, 제국의 지식인들은 제국의 국가권력을 문명과 질서의 담지자로 규정하면서 약소민족들이 자신들의 자율적인 정치공동체를 구성할 필요성이나 정당성은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을 식민지로 하는 과정에서 일본 제국의 지식인들이 제기한 논리는 “대한제국을 일본 제국에 합병하여 하나의 큰 제국‘을 이루어 두 민족이 더 큰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처럼 제국의 논리는 작은 정치공동체들을 크고 강한 국가권력에로 통합함으로써 마치 대동사회를 구현하고 나아가 ’세계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처럼 포장한다. 모든 사회들이 저마다 독립적인 정치공동체를 갖는 것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갈등과 전쟁의 원인이 되어 평화에 방해가 된다는 논리로까지 확장되곤 한다.

제국의 논리는 큰 것으로의 통합이 곧 평화라고 단순화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강한 사회들이 제국을 건설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과정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끊임없는 전쟁과 폭력의 과정이었다. 크고 작은 다양한 정치공동체들이 힘의 강약을 떠나서 저마다 자율성을 존중받으며 공존할 때 그것이 진정한 평화이며, 그러한 평화 속에서 인류 문명이 더 발전하고 풍부해질 수 있다는 것을 제국의 옹호자들은 부정한다. 그들은 크고 강한 사회들의 국가권력은 문명과 질서의 표상이라고 숭배하는 한편, 작은 사회들의 국가는 국가폭력의 주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폄하하고 타기(唾棄)하는 데 열중하는 경향이 있다.

2. 전후 세계에서 제국과 나라의 의미 유전(流轉)

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공식적인’ 제국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동서 양 진영 모두에서 ‘민족해방’과 ‘독립국가’가 개념적 시민권을 획득한 전후 질서에서 ‘제국’은 더 이상 문명과 질서의 표상은 아니었다. 세계대전과 대학살과 파괴의 표상으로 바뀌며 ‘더러운 말’로 추락했다. 그러나 탈냉전과 세계화와 함께 세계의 지성사적 풍토는 다시 뒤집어졌다.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신자본주의적 세계경제를 주관하고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전쟁을 수단으로 세계질서를 규율하게 되자, 영미권과 일본처럼 과거 제국 건설의 역사적 경험을 가진 큰 사회들의 지적 담론은 20세기 말 이래 ‘제국 개념의 도덕적 복권’ 현상이 풍미하게 된다.

제국은 더 이상 폭력과 제노사이드의 대명사가 아니었다. 20세기 전반기 제국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문명을 표상하며 세계 질서를 담지하는 질서표상의 지위를 다시 누리게 된 것이다. 서양과 일본의 제국주의에 의해 1세기에 걸친 반식민지화의 비극을 경험해야 했던 중국에서조차도 21세기 들어 분명해진 국력 팽창과 함께 제국 담론이 번성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전통시대 중국 중심의 지역질서를 표상했던 ‘천하’의 개념이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재가공되어 바람직한 미래 세계질서를 표상하는 개념으로 재활용되는 지적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20세기 좌우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전체주의의 시대적 경험과 민족청소와 같은 극단적인 국가폭력의 경험은 인류로 하여금 국가를 주로 폭력의 주체로서 사유하게 만들었다. 국가폭력에 주목하는 사유들은 흔히 국가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국가에 대한 비판은 때로 “제국적 질서에 대한 긍정과 옹호”로 귀결되기도 하였다.

‘제국’은 다시 “문명과 질서의 표상”으로 부활하였고, 이와 함께 약소민족 사회들의 작은 정치공동체들, 그들의 국가와 그 구성인자로서의 민족은 존재이유와 존재 근거를 부정당하는 지적 풍토가 형성되었다. 제국은 질서의 담지자로 남아야 하고, 국가는 사라지고 있거나 사라져야 할 존재로 치부되는 것이었다. 이 말은 실제로는 큰 사회의 국가권력은 제국화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심지어 바람직하며, 반면에 작은 사회들이 구성한 작은 정치적 공동체들의 자율성은 쉽게 희생되어도 좋다는 얘기로 되고 만다. 서방 제국(諸國)에서 발원한, 주로 작은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국가 주권’의 희화화(戲畫化)는 이들 사회 안에서의 ‘정치’와 정치적 실천의 의의와 위상에 대한 경시(輕視)로 이어지곤 한다.

그러나 세계화로 인해서 국가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 제국 건설의 경험을 가진 큰 사회들의 국가권력은 더욱 사라지지 않는다. 20세기의 한복판에서 한나 아렌트가 고뇌했던 것처럼, 이상적 철학으로서의 인권이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역사로서의 인권은 초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질서 안에서 많은 경우 그가 속한 민족이 집단적인 정치적 자율성을 가진 폴리스(polis)를 구성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나라 없음’의 상태에 놓여있었느냐에 따라서 인간 권리의 실존적 조건이 달라지는 것이었고, 오늘의 시점에서도 그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는 제국의 사이클에 다름 아니며 국가는 사라져도 무방한 존재단위라는, 세계화 시대에 광범하게 유포된 관념은 정치공동체의 단위를 근대의 산물로 간주하는 서양사 중심의 관념이 광범하게 존재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그런데 근대국가가 근대의 산물인 것은 맞지만 국가가 근대의 산물은 아니다. 그리스 도시국가 시절부터 국가 혹은 “공화국”(republic)은 정치철학의 불변하는 핵심 주제였으며, 이는 미래에도 근본적으로는 변치 않을 것이다. 국가와 그 안에서의 정치의 문제를 “역사적 한시성”을 띤 것으로 간주하고 국가 초월의 주장이 우세하면 국가권력의 민주적 재편성과 그 심화를 위한 부단한 정치적 참여와 실천이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감당해야 할 숙명이자 의무라는 사실을 외면하게 된다. 이 함정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미셸 푸코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실존적 조건은 도처에 미만한 권력 관계의 거미망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권력의 거미망으로부터 인류가 일거에 해탈할 수 있는 혁명의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권력의 거미망을 어떻게 하면 보다 수평적이며 민주적인 관계망으로 전환시켜 나갈 것인가, 이를 위한 부단한 고뇌와 투쟁이 요구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기꺼이 감당해야 할 운명임을 인정하는 데에서 세계와 국가에 관한 우리의 사유는 출발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추구하고 긍정할 것은 오로지 권력의 대형화나 제국화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개별 사회 안에서나 세계질서에서나, 크고 작은 정치공동체의 자율성이 힘의 관계에 비례하기보다는 인류가 공감하는 공동의 가치와 함께 다양성과 다원성에 대한 존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전후 동아시아 질서와 한반도 국가의 초상(肖像)

제국의 시대에 인류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시대를 살아내야 했다. 그 시대의 한복판인 20세기 전반기에 벌어진 두 차례의 대전과 그 과정에서 전개된 일련의 제노사이드는 1억에 가까운 인간의 생명을 앗아갔고 그 숫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유린했으며, 인간과 인간, 사회와 사회 사이의 연대와 신뢰를 파괴했다. 주로 유럽을 무대로 전개된 제1차 세계대전은 전사자 1천만 명을 포함한 전투 중 사상자(死傷者) 3천만 명을 낳았으며, 여기에 민간인 희생자 7백만 명이 추가되었다. 5백 만의 여성들이 미망인으로 남겨졌다.7) R.J. 럼멜 교수의 통계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은 전사자만 약 2,900만 명에 달했고, 전쟁 기간 제노사이드를 포함한 민간인의 희생은 1차 대전 때의 세 배에 달하는 2,100만 명을 넘었다.8) 또 다른 학자의 통계에 따르면, 2차 대전 중 인명 희생은 훨씬 더 많아서 최대 7천 5백만 명에 달했다.9)

동아시아의 제국체제는 그 출발점이었던 청일전쟁 기간에 뤼순(旅順)에서 비무장 중국인 6만 명에 대한 일본군의 학살과 10) 함께 막이 올랐다. 이후로 이 질서에서 제국의 폭력은 크고 작은 제노사이드를 수반했지만 특히 1937년에서 1945년 기간에 집중되었다. 이 기간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의 침략 전쟁이 수반한 희생은 무수한 전상자(戰傷者) 이외에도, 비무장 포로나 민간인을 일본군이 학살한 숫자만 600만 명에 달했다. 그 대다수인 3분의 2는 중국인의 희생으로서, 비무장 민간인 260만 명을 포함하여 400만 명에 달했다.11) 동아시아 제국체제가 기본적으로 중국 대륙 주변 사회들에 대한 식민지화를 발판으로 반식민지 중국에 대한 보다 폭력적인 경영과 침략으로 발전해가는 구조였던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7)Ian F. W. Beckett, “Total War,” in Arthur Marwick, Clive Emsley, and Wendy Simpson, eds., Total War and Historical Change: Europe 1914-1955, Buckingham: Open University Press, 2001, p.30).
8)R.J. Rummel, Death by Government, New Brunswick: Transaction Publishers, 1994, pp.111-112.
9)Milton Leitenberg, “Deaths in Wars and Conflicts between 1945 and 2000,” Matthew Evangelista, ed., Peace Studies: Critical Concepts in Political Science, Volume I, London: Routledge, 2005, p.94.
10)“A Japanese Massacre: The World’s War Correspondent Reports a Butchery at Port Arthur, A Three Days’ Reign of Terror,” New York World, December 11, 1894; 藤村道生 著, 『日淸戰爭: 東アジア近代史の轉換點』, 東京: 岩波新書, 1973(2007), p.132. 미국 언론보도를 포함하여 이 학살사태에 관한 중국 측 서술은, 宗澤亞 著 , 『淸日戰爭』, 北京: 北京聯合出版公司, 2014, pp.353-377.
11)R.J. Rummel, Death by Government, New Brunswick: Transaction Publishers, 1994, pp.111-112. 2015년 중국 상하이의 <상해외어빈도>(International Channel Shanghai: ICS)가 방영한 약 10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東京審判>(The Tokyo Trials)은 1947년 본격화된 중일전쟁으로 인한 전사자(戰死者)를 포함한 중국인 희생자 수를 최대 3,500만명까지로 추산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총력전으로 불린 두 차례의 대전에서 이웃 사회들 사이의 상호 파괴와 살상, 그리고 전대미문의 반인류적 범죄들은 동아시아보다 유럽에서 더 웅장한 스케일로 벌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제국의 시대는 유럽에서보다 전후 동아시아에 더 치명적인 역사적 유산을 남겼다. 그것은 유럽과 동아시아에 구축된 전후 질서가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후 유럽의 냉전체제는 전전의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는 제도적 장치로 작용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바르샤바조약기구라는 유럽 냉전의 제도들은 서독과 나머지 서방 사회들을, 그리고 동독과 나머지 공산권 사회들을 제각각 하나로 묶는 초국적 이념공동체를 구성하는 장치였다. 그 장치 속에서 독일 전체와 세계의 나머지 전체는 전전의 역사적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었다.

반면에 전후 동아시아의 비극은 내전을 통해 중국 민중이 선택한 대륙의 사회주의 정부와 전후 세계의 패권국가로 자리잡은 미국이 이념적 차이를 넘어서는 평화적 공존을 위한 역사적 선택을 가꾸어내는 데 실패하면서 출발했다. 이 실패는 이후 동아시아 역사에 치명적인 구조적 결과를 낳았다. 그 실패는 곧 분단 한반도의 내전적 갈등과 결합하면서 미중 사이의 직접적인 폭력적 대결로 발전했다. 이후 중국 대륙과 미일동맹이 대분단의 기축을 구성하고, 이 분열된 기축과 연결되어 한반도, 대만해협, 그리고 인도차이나에 세 개의 소분단체제들이 고착화되었다. 대분단의 기축은 소분단체제들과 상호작용하며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질서, 곧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라 부를 수 있는 역사적 현실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중국대륙과 미일동맹 사이에는 지정학적 긴장,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차이의 긴장, 그리고 제국체제의 폭력에 뿌리를 둔 역사적 상처가 치유되기보다 응결(凝結)됨으로써 굳어진 역사심리적 간극에 의한 긴장이 존재했다. 이 세 차원의 긴장이 중첩되고 상호작용하면서 대분단체제의 지속성을 보장했다.12)


12)이삼성, 「전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구성과 중국: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형성과정에서 중국의 구성적 역할」, 『한국정치학회보』 50집 5호 (2016년 12월), pp.163-189.

대분단체제의 동아시아 사회들은 전전의 제국체제 하에서 상실했던 국권을 회복하지만, 이제 다른 극단으로 치달았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국가의 과잉’이 문제로 되었다. 나라 없음이 문제였던 한반도에도 이제 나라가 넘쳐났다. 한반도의 중복된 국가들은 상쟁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북녘에서는 과잉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결합한 채 주체사상이라는, 집단적 주체는 있으나 개인의 영혼이 박제된 사상을 낳으며 ‘국가의 과잉’을 뒷받침했다. 남녘에서는 일본 제국주의가 남기고 간 파시즘의 유산이 전쟁의 유산과 결합하면서 그것대로 국가의 과잉을 실현했다.

동아시아 공산권 사회들은 국가가 인간에 대한 ‘총체적 지배’를 추구하는 전체주의의 역사적 경험을 치러야만 했고, 한국·대만·인도네시아 등 미국과 동맹한 동아시아의 탈식민 사회들은 거의 한결같이 반공 파시즘의 시대를 연출했다. 전체주의도 반공 파시즘도 정치권력이 진리를 지배하려 들면서 개인의 영혼의 자율성을 포함한 인간적 가치들을 부차화하는 절대 국가이념을 구축하려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시도를 인민해방 혹은 자유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정당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닮은꼴이었다.

전후 한반도가 경험한 국가들은 인권의 구성자이기는 커녕, 상쟁하는 이데올로기와 권력의 화신으로서 야만의 구현자였다. 서로 피흘리며 싸우는 중복된 나라들과 그 과잉은 3.1운동에 나선 한국인들이 염원하며 찾고자 했던 나라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결국 적어도 남녘에서는 국가권력의 민주화를 위한 민중의 봉기가 연이어 전개되었고, 그 열망과 투쟁이 감당해야 했던 희생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절정에 달했다. 5월의 희생은 비극이었지만, 그 희생과 투쟁에 의해서 한국인들은 경제발전의 업적을 앞세운 군사독재에 대해 갖고 있던 이중적인 태도를 비로소 청산할 수 있었다. 반공 파시즘 권력에 대한 숭배와 거부가 공존하는 태도로부터 군사독재에 대한 전면적 비판과 총체적 거부로 전환한 것이다. 그 전환에 의해서 3.1운동과 4.19의 전통을 잇는 또 하나의 전국적인 민중 봉기가 1987년 6월에 가능했고, 그것이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의 출발이었다.

4. 탈냉전에도 지속되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그 정신적 폐쇄회로

한국에 마침내 민주주의는 실현되었지만, 100년 전 식민지 권력에 항거하여 3.1운동에 나선 수백만의 한국인들이 열망했던 ‘새로운 나라’를 향한 지난 한 세기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 모두에게 세 가지의 숙제가 남겨져 있다. 하나는 북녘땅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민주주의, 둘째는 나라가 중복되어 상쟁하는 현 상태를 넘어서 지속 가능한 한반도 평화체제를 건설하는 것, 그리고 셋째는 3.1독립선언문이 말했듯 “(민족과 나라들 사이에) 과감하게 오랜 잘못을 바로잡고 진정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사이좋은 새 세상을 여는 것”(果敢으로써舊誤를廓正하고眞正한理解와同情에基本한友好的新局面을打開함), 즉 동양 평화에 기여하는 일이다.

불행 중 다행한 것은 이 세 과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북한체제의 근본적 변화는 풀뿌리 자본주의에 의해 내면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대화와 남북경제공동체 형성 노력은 북한의 내면적 변화를 가장 확실하게 촉진할 것이다. 북한의 잔존하는 전체주의적 장치들을 단번에 파괴할 수 있는 군사적 방도란 없다. 군사적 방도의 추구는 북한의 전시체제를 지속시킴으로써 잔존하는 전체주의의 생명력을 지속시킬 뿐이다. 북한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힘은 북한 내부에 있다.

사실 북한은 김정일 시대인 2001년부터 비록 ‘글라스노스트’(자유언론)는 누락된 것이긴 했지만 나름의 페레스트로이카(經濟改建)를 추구했다. 이를 위해 북한이 노력한 북미 관계 개선과 북일관계 개선은 미국과 일본 쪽의 사정으로 번번이 좌절되었다.13)


13) 와다 하루끼 지음, 남기정 옮김, 『북한 현대사』, 창비, 2014, pp.269-277.

핵무장국가 북한의 완성이라는 오늘의 사태가 결코 북한이 바라던 최선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의 하나이다. 그러한 지체에도 불구하고 북한 내면에서 진행된, 그리고 김정은 시대에 들어 더욱 촉진되고 있는 시장화와 그것이 초래한 일정한 사회적 다원성의 잠재력, 외부세계와의 접촉과 교류가 가져올 정보봉쇄 체제의 점진적 해체. 그러한 변화의 조건들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에 의해서 뒷받침될 때 북한 인권 문제의 평화적 해결의 지속가능한 조건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은 한국에게 진정한 국가안보 전략이요, 북한 전체주의의 잔재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체하여 인권 문제를 해결해나갈 인간안보 전략이며, 또한 그것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해체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동아시아 공동안보에의 열쇠이다. 그러므로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 우리가 걷는 길은 한반도 평화와 동시에 북한 민주주의, 그리고 나아가 동양평화를 열어가는 열쇠로서 일석삼조가 아닐 수 없다. 3.1운동 백년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 어깨에 놓여있는 짐은 분명 무겁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 모두를 감당하기 위해 우리가 걸어야 할 이정표가 분명하다는 것은 차라리 축복일 것이다.

그처럼 한국이 동양 평화에 기여하는 기본이자 첩경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한반도 평화가 동아시아 평화로 직결된다는 뜻은 아니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그것은 존속할 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를 향한 남북 모두의 열망을 제한하고 무력화할 수 있는 장치로 작동할 수 있다.

탈냉전이라는 말은 미소 두 초강대국 간의 냉전을 직접적으로 투영했던 유럽에서의 냉전 해체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질서가 탈냉전에도 불구하고 견지하는 연속성을 포착하는 데는 부적절하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냉전과 탈냉전을 관통하는 연속성을 포착하기 위한 개념이다. 탈냉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왜 여전히 여기에 있는가.

먼저 중국 대륙과 미일동맹 사이에 존재하는 지정학적 긴장이 재충전되었다. 19세기 말 이래의 제국체제 시대부터 미국과 일본은 러시아를 공동으로 견제하면서 중국 대륙을 통제하고 경영한다는 지정학적 목표를 공유했다. 그래서 이들은 한편 서로 갈등하면서도 권력정치적 흥정을 통해서 협력하는 연합의 전통을 구성했다. 두 제국이 1940년대 전반기 짧은 폭력적 갈등의 시간을 끝낸 전후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일본은 연합을 넘어 거의 동체(同體)에 가까운 동맹을 구축하였고, 그러한 양국의 지정학적 동맹의 구도는 탈냉전에도 변함이 없다. 러시아의 상대적인 퇴장과 달리 개혁개방을 통해 국력이 팽창하는 중국과 미일동맹 사이의 지정학적 긴장은 더욱 재충전의 길을 걸었다.

중국대륙과 미일동맹 사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긴장의 축인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차이 또한 해체가 아닌 치환(置換)을 겪었다.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공산권과 미국의 동아시아 동맹체제 사이에 존재한 정치사회적 긴장은 독재와 자유의 대립이 아니었다. 다만 좌익 전체주의와 우익 반공 파시즘 사이의 긴장일 뿐이었다. 사적 소유제의 존폐를 둘러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차이였을 뿐 동일하게 모두 ‘국가 과잉’의 유형에 속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래 중국 사회주의는 시장화하고, 동아시아의 자본주의 사회들은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긴장은 퇴조했고, 특히 1989년 이래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긴장—당이 곧 국가인 당국체제(黨國體制)와 정치다원주의 사이의 긴장–이 부상했다.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차이라는 긴장의 축이 새로운 형태로 치환되어 재충전된 것이다.

역사심리적 간극으로 말미암은 긴장의 축 역시 탈냉전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중국 대륙의 상대편에 미국이 일본과 동체로서 존재하는 것인 바, 그것은 미국이 자신이 구축한 ‘자유세계’라는 초국적 이념공동체에 일본을 편입함으로써 제국 일본의 역사적 범죄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장치였다. 미국은 진주만 공격이라는 일본의 죄과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이라는 또 다른 반인류적 범죄로 상쇄하여 상호 역사청산을 한 가운데, 미국이 제국 일본의 역사의 짐을 자기화하는 구조였다. 미일동맹은 상징천황제의 형태로 일본의 정신적 권위 구조에 전전과 전후를 관통하는 역사적 연속성을 허여(許與)함으로써 완벽해져 있었다. 다만 동아시아의 냉전 시기는 사회주의와 반공주의의 이념 대결이 역사 담론을 제한하고 억압하는 구조였기에, 대륙과 일본 사이의 역사문제는 동결(凍結) 상태에 놓였으며, 이런 조건에서 더욱이 일본인 일반의 역사인식과 역사교육은 비판적 자기성찰을 면제받았다.

동아시아에 찾아온 탈냉전은 역사문제의 해체가 아니라 해빙(解氷)을 의미했다. 이념 담론이 해체된 공백을 역사 담론이 빠르게 메꾸었다. 냉전기에 동결되어 있던 역사적 상처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전면에 부상했다. 하지만 일본의 전후 세대는 제국 일본의 침략전쟁과 반인류적 범죄들이 아시아의 다른 사회들에 남긴 역사적 상처에 대한 감수성을 가꿀 교육적 기회를 갖지 못했다. 거의 반세기 동안 역사문제에 대한 고뇌를 면제받았던 일본 사회는 갑자기 활성화된 것처럼 보인 동아시아 다른 사회들의 역사 담론과 생경하게 맞닥뜨려야 했고 자기방어적으로 되었다.

냉전기에 그나마 일본 안에서 역사반성의 맥을 지탱하던 진보적 이념 정당들이 탈냉전과 함께 약화되고 마침내 해체의 길을 걷게 된 것도 문제를 악화시켰다. 제국 일본의 역사 범죄에 집단적 책임을 느껴야 할 이유를 더욱 납득하지 않는 세대가 어느덧 일본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오늘날 평화헌법을 폐기하려는 아베 정권의 정치적 저변을 이룬다. 이 역사 문제는 영토 분쟁과 결합하여 중일 양국 간의 소통을 더욱 방해하지만, 한일 두 사회 간의 소통도 방해한다. 결국 한중일 삼국 사이 소통의 선순환(善循環)을 억지하는 장치가 된다.

그래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기축관계는 탈냉전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긴장의 차원 모두에서 해체가 아닌 재충전이나 치환의 양상을 보이며 긴장구조가 유지된다. 또한 한반도와 대만해협에 존재하는 소분단적 긴장의 구조는 저마다 중국대륙과 미일동맹 사이의 기축 관계적 긴장과 서로를 지탱하는 상호작용을 지속하고 있다.

재충전된 지정학적 긴장은 중국대륙의 동해안선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동아시아 대분단선’의 접점들에서 영토 문제와 직결된 군사적 긴장으로 발전하고 있다.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에서의 치환된 긴장은 이제 ‘진정한 민주’와 ‘문명’의 기준에 대한 정의를 둘러싼 또 다른 담론의 전쟁을 수반하면서, 중국과 미일동맹을 양축으로 하는 양극화된 군사동맹 질서의 존재이유를 이념화하고 도덕적으로 포장하는 역할을 한다. 또 활성화된 역사심리적 간극의 긴장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정신적 폐쇄회로를 구성한다.

5. 동아시아의 역사대화 방식의 전환을 위해

동양 평화에 우리가 기여한다는 것은 이러한 대분단체제 너머의 동아시아를 꿈꾸고 동아시아의 다른 사회들과 그 꿈을 공유하며 그 실현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다. 이를 위해 3.1운동 100년을 기념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지향점을 바라볼 것인가. 우선 지정학적 긴장의 해체에 우리가 기여하는 길은 말할 것도 없이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통해서 비핵화된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양극화된 군사동맹의 질서에 대한 의존을 줄이면서 동아시아 공동안보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을 동아시아 공동안보로 연결하는 구체적 고리의 하나는 한반도 비핵화의 동북아시아적 심화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영구적 비핵무기지대로 협약하고 주변 핵보유국들이 이를 존중하면서 동아시아에서 그들 핵무기의 역할을 제한하고 줄여나가는 질서, 즉 동북아시아 비핵무기지대를 구성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아세안 국가들이 이미 협약해 실천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비핵무기지대와 결합하여 동아시아 공동안보의 초석이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향한 중대한 조건의 하나는 이 대분단체제의 정신적 폐쇄회로로 기능하는 역사심리적 간극의 긴장을 해소해나갈 실마리를 찾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 정신적 폐쇄회로의 현실적이며 논리적인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정신적 폐쇄회로는 두 가지의 딜레마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반성하지 않는 일본’(unrepentant Japan)이라는 문제의 구조적 조건에 관한 것이다. ‘충분히 반성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문제는 분명 일본이라는 특정 사회의 역사적 자기성찰 능력의 미성숙을 표현한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 사회의 반성적 역사의식의 미성숙이 미일동맹의 문제를 포함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속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전후세대 일본인들 개개인의 역사적 감수성 부족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대분단체제 자체의 속성과 직결된다는 점이 동아시아 역사문제의 첫 번째 딜레마인 것이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 역사문제는 두 번째 딜레마에 봉착한다. 그것은 “반성을 거부하는 일본”과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한 외부 압력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자체의 지속성에 던지는 문제이다. 먼저 ‘반성하지 않는 일본’은 그것 자체로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를 지속시키는 중대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대분단체제의 해체를 위해서는 일본의 역사의식 전환이 필수적이고 이를 위한 일본 안팎의 요구와 압력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현재와 같이 동아시아 다른 사회들의 국가권력이 주체가 되어 일본에 대해 행사하는 정치외교적 압박 위주의 역사대화방식은 대분단체제를 해체시키는 데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지속을 보장할 위험성도 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딜레마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가 내장(內藏)하고 있는 정신적 폐쇄회로의 실체라고 생각된다.

이 자폐적 회로에서 출구의 실마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대분단체제의 해체에 기여하는 일본의 반성은 결국 다른 국가권력들의 압박으로 강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사회 내면의 자발성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역사 반성을 촉구하는 노력은 폐기될 수 없다. 다만 가해자 사회의 진정한 반성을 견인해낼 수 있는 역사대화 방식을 찾아야 한다. 가해자 사회에서도 양식 있는 시민들의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역사대화의 양식은 두 가지 원칙에 기초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째, 역사에 대한 책임 추궁과 반성 촉구의 문제를 ‘국가간 외교’(inter-state diplomacy) 중심의 방식으로부터 ‘사회간(社會間) 대화’(inter-social dialogue)가 중심이 되는 역사대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역사대화에서 정부 간 외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교가 사회간 비정부적 대화에 엄정하게 기초하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 20세기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많은 침략전쟁과 전쟁범죄들 중에서 특정한 시기 특정한 사회에 의해서 행해진 범죄들에 한정하지 않고, 이 시기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모든 침략전쟁과 가공할 전쟁범죄들을 역사대화의 주제로 포용하는 보다 보편주의적인 접근을 배려하는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 동아시아의 각 사회 정부들이 구성에 참여하고 함께 재정적으로 지원하되 그 활동에 개입하지 않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 연구위원회」(East Asian Historical Research Committee for Truth and Reconciliation), 줄여서 <동아시아역사위원회>라고 부를 수 있는 제도와 규범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14) 이 역사위원회의 목적과 활동은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① 20세기에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모든 침략전쟁과 가공할 전쟁범죄들의 진실규명과 최선의 화해 방안을 논의하는 학술적인 연례 포럼을 주관한다. 포럼에는 동아시아인들은 물론이고 세계인 모두가 일정한 객관성의 기준을 갖춘 학술적 발표자로서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다만 국가나 단체의 대표로서가 아니라 인간 개인의 자격으로 참여하도록 한다.

② 동아시아역사위원회는 그 같은 연례 학술포럼 이외에 동아시아에서의 사회간 역사대화를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역사위원회는 그처럼 다사회간(多社會間) 학술적 대화와 의견 수렴을 촉진하는데 집중하고 한정한다. 이 연구위원회의 활동의 결과로 얻어진 진실규명과 최선의 화해 방안 논의를 관련 국가와 사회들의 역사반성과 화해 조치를 구하는 외교적 활동으로 연결하는 일은 별도의 정부간 협의체가 담당하도록 한다. 이를테면 「역사화해를 위한 동아시아 정부간협의회」(‘East Asian Intergovernmental Council for Historical Reconciliation)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 협의체가 준수할 제일의 활동 원칙은 동아시아역사위원회의 논의 결과에 전적으로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2의 원칙은 반성과 화해의 조치를 권고하되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제적 구속력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이 위원회의 학술포럼들을 통한 역사대화 노력에 기초하여 동아시아 사회들을 대표한 위원들의 다수가 공감하는 권고는 가해자 사회에 의해 수용되기까지 지속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한편 인도(人道)에 관한 국내법과 국제인권법에 기초한 각 사회의 사법부의 역할은 국가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정치권력자의 임의적인 외교적 행동과는 구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범죄의 피해자들이 사법적 정의를 구하면서 작동하는 각국 사법부의 역할은 국가 주도의 역사문제 해결방식과 사회간 역사대화 방식의 중간을 구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강제노동이나 전시 여성의 성노예화 범죄 등과 관련한 각국 사법부의 역할은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동아시아 역사문제의 해결에서 각국 사법부가 어떤 방식으로 기여하는 것이 최선일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사법부의 판단 근거로 될 국제인권법의 발전 방향은 모두 <동아시아역사위원회>에서 열린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동아시아 역사대화의 방식을 전환하는 것은 역사의 반성 문제를 국가권력들 간의 직접적인 정치적 대립의 문제로부터 한 걸음 분리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권력이 주도하는 역사대화 방식은 각 사회의 민족주의적 정서와 결합해 과도하게 정치화되거나 때로는 정치권력의 필요에 따라 무원칙한 침묵 또는 정부 권력들 간의 자의적인 타협을 낳기도 한다.15)

침략전쟁과 전쟁범죄의 문제에 관련하여 그 역사와 미래지향적 규범을 지속적으로 논의하는 동아시아 사회들 공동의 협력을 제도화하는 모델을 구축할 때, 국가권력 중심 역사문제 접근이 피하기 힘든 ‘역사와 기억의 정치화’의 함정을 피하면서 각 사회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반성과 화해를 촉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14)<동아시아역사위원회>의 인적 구성은 나라별로 “회원 수가 가장 많은 역사학회”들이 각 사회를 대표하는 위원들을 추천하여 구성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15)한국의 박근혜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과 진정한 사과가 없는 한 한일 간 협력은 없다는 다소 극단적인 태도로 역사문제를 오래 거론했다. 그러나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는 전시 성노예 피해자들의 의사나 사회적 논의에 대한 고려 없이 갑자기 아베 정부와 ‘일본군 위안부 한일 합의’를 전격적으로 타결했다. 역사문제에 대한 국가권력 중심의 과도한 압박과 동시에 무원칙한 정치적 타협의 폐해를 대표하는 사례였다.

6. 맺음말

한반도 남단(南端)의 섬에서도 멀리 남쪽으로 떨어진 ‘이어도’는 거대한 암초이다. 기후가 온건한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는다. 심한 파도가 쳐야만 비로소 자신을 드러내기에 ‘파랑도’(波浪島)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탈냉전과 함께 경제적 상호의존이 심화된 이후의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이를테면 이어도 같은 것이다. 보통은 잘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어느 순간 대분단의 골격이 실체를 드러내면서 잠재적 위험성을 현실화시킬 수 있다.

2007년 봄에 쓴 한 논문에서 필자는 “미국의 동아시아 해양 패권과 중국의 국력 팽창이라는 두 객관적인 지정학적 현실은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외교적 노력이 없이는’ 내재적인 상충적인 요인들로 인해 한국을 포함한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의 평화를 위협하는 긴장의 구조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었다.16) 아울러 같은 무렵 쓴 또 다른 글에서 필자는 경제적 상호의존과 경제공동체의 제도들은 그것 자체로 평화를 보장하지 않으며 안보영역에서 구체적인 어젠다를 중심으로 공동안보의 구성을 향한 진지하고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했었다.17)


16)「21세기 동아시아의 지정학: 미국의 동아태지역 해양패권과 중미관계」, 『국가전략』, 제13권 1호 (2007년 봄), pp.10-11.
17)「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공동체 사이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제6권 2호(2006), pp.5-50.

당시만 해도 미국 부시행정부 대외정책의 초점은 9.11의 여파 속에서 남아시아와 중동에서의 대테러전쟁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미중관계는 긴장보다는 대테러전쟁을 위한 연합의 측면이 두드러져 보이기까지 했었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심화된 중국과 세계 사이의 경제적 상호의존은 미국과 중국 사이의 무력 충돌의 가능성을 비현실적인 일로 치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부시행정부가 북한과 중동 불량국가들에 의한 대량살상무기(WMD) 위협을 명분으로 삼아 미사일방어 구축을 본격화하기 위해 러시아와 1972년에 맺었던 탄도미사일방어제한협정(ABM Treaty)을 파기한 것은 중국으로 하여금 핵전력의 다변화와 현대화를 촉진하게 이끌었다. 필자가 2007년 논문에서 지적한 ‘동아시아 대분단선’의 지정학적 요충들에서 중국의 팽창하는 영토적 자아정체성과 미일동맹 사이의 긴장 발전은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오키나와 해역의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와 남중국해에서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현대 국제정치학에서 고전이 되어 있는 작품 『결정의 본질』(Essence of Decision)의 저자인 그래함 앨리슨은 최근인 2017년에 출간한 새 저서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과 미국은 양측이 전쟁을 회피하기 위한 어렵고 고통스런 행동들을 취하지 않는다면 현재로서는 전쟁으로 가는 충돌코스 위에 서 있다.”18)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대분단체제는 전보다 좀 더 두렷한 실루엣을 드러냈지만, 앞으로도 이 실루엣은 때때로 경제적 상호의존이라는 외양에 가려서 시야에서 거의 사라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거대한 암초가 어느 순간 강풍에 떠밀리며 동아시아의 일견 평화스러운 일상을 깨뜨리기 전에 새로운 동아시아를 위한 비전과 실천이 구체화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당면한 숙제는 말할 것도 없이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문제인 한반도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동아시아 사회들이 좀 더 치열하게 동시적으로 지혜를 모아야 할 과제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분단체제의 동아시아를 넘어서기 위한 구체적인 어젠다를 공동으로 개발하고 실천하는 노력의 필요성이 절실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출발점의 하나가 이 질서의 정신적 폐쇄회로로 작용하고 있는 역사문제의 해소를 위한 보다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공동의 모색일 것이다.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에 나섰던 한국인들이 100년 후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과 숙제는 분명 동아시아 역사문제의 본질과 직결되어 있다. 식민지 및 반식민지 민중들의 탄식과 절망이 지배하던 시대에 독립을 넘어 크고 작은 사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동아시아를 꿈꾸었던 그 분들의 이상을 생각하면서, 지금 여전히 또 다른 맥락에서 꿈결에서 나누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는 생각이지만 함께 공유하며 미래 역사의 씨앗이 될 수 있도록 함께 키워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18)Graham Allison, Destined For War: Can America and China Escape Thucydides’s Trap?, Boston: Houghton Mifflin Harcourt, 2017, p.vii.

이삼성 / 한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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