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열린 제102주년 3ㆍ1절 기념식에서 만세삼창을 마치고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한국 정부는 언제나 피해자 중심주의의 입장에서 지혜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것입니다.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 회복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일 양국의 협력과 미래발전을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문재인 대통령  102주년 3·1절 기념사 중 일부)
올해로 102주년인 3·1절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일관계와 관련해 언급한 내용과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반응은 ‘전후 최악’이라는 지금 한일관계를 당분간 현상동결하자는 상호 합의 내지 재확인 절차처럼 비쳤다. 바꿔 말하면 ‘과거사 문제’로 통칭하는 양국 간 미해결 현안들의 해결을 포기하고, 전투를 각기 차기정권으로 넘기기로 신사협정을 맺었다고나 할까. 싸움의 원인을 모조리 문재인 ‘좌파’정권 탓으로 돌리고 있는 일본 자민당 정권은 내년 한국 대선에서 보수정권으로의 정권교체를 바라고 있는 듯, 사실상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시간벌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부임한 강창일 신임 주일대사를 총리와 외상 등 정부 고위관료들이 만나지도 않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전임 남관표 대사의 이임인사도 받지 않는 강경자세까지 연출한 것은 일본 국내여론을 의식한 정치쇼에 가깝다. 이런 것도 하나의 전략일 수 있겠지만, 지금 일본의 이런 행태는 고도의 전략적 사고의 소산이라기보다는 대책없이 현실에 그냥 떠밀려가는 전략부재, 대안 모색마저 포기한 무능에 가까워 보인다. 이를 간파하고 있는 듯한 한국 정부 쪽의 대응이 오히려 전략적이며 영리해 보인다. 시간은 일본 편이 아닐 것 같다. 사태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일본에 불리한 쪽으로 흘러갈 공산이 커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 기념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반응은 그날 오후 기자회견장에서 나온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집약돼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 하나 하나에 대한 코멘트는 삼가고 싶지만, 중요한 것은 양국 간의 현안 해결을 위해 한국이 책임을 갖고 구체적으로 대응해 가는 것이며, 현안 해결을 위한 한국 측의 구체적인 제안을 주시해 가겠다는 것이 이제까지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한일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기 위해서도 일본의 일관된 입장에 입각해 계속 한국 측에 적절한 대응을 강하게 요구해 가겠다는 데에 변함이 없다.”
한국 3·1절 기념사에 여전히 '과거 입장' 고집하는 일본

한마디로, 구체적인 해결책을 한국 정부가 내놔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쪽의 “일관된 입장”이란, 2019년 7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첨단소재 부품·장비의 수출규제와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배제조치 이후 요구해 온 2018년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징용공)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확정판결, 그리고 1월 8일 서울중앙지법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배상판결 등이 국제법 위반이므로, 한국정부가 책임지고 그것을 무효화하는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이런 자세는 그 전인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그해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뒤 아베 신조 정권과 박근혜 정권이 2015년에 전격 발표한 ‘12·28 위안부 합의’가 사실상 무효화되면서 굳어졌다. 지난해 9월 아베 정권을 승계한 스가 요시히데 정권은 한국에 대한 정책도 그대로 물려받았고, 일본 국내 사정 때문에 그것은 더욱 경직돼 있다.

올림픽 개최 성사에 집착한 나머지 코로나19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는데 실패했다는 비판, 한계에 봉착한 ‘아베노믹스’를 더욱 궁지로 몰고 있는 코로나 사태 이후의 경제난, 아들의 총무성 직원 접대 비리 등으로 스가 정권의 지지율은 크게 떨어졌다. 오는 9월에는 스가 총리가 물려받은 아베 정권의 잔여임기가 끝나는 자민당 총재선거가 있고 10월은 4년 임기의 현 중의원 임기도 끝난다.

스가 총리가 아베 정권 잔여임기를 채우는 과도내각을 넘어 본격적인 ‘스가 정권’을 창출하려면 9월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이겨야 하고 그 전에 중의원 해산을 거쳐 실시될 수도 있는 총선거에서 승리해야  한다.

아베 정권 이래 ‘일본회의’로 대표되는 보수우파층의 지지에 크게 기대고 있는 자민당 정권의 관리자 스가 총리가 이런 난관들을 뚫고 가기 위해서는 ‘혐한’을 넘어 ‘한국과의 외교단절’까지 호언하면서 한국의 ‘무조건 항복’을 주창하고 있는 보수우파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과거의 문제를 미래의 문제와 분리”해서 미래지향으로 가자는 문 대통령의 이른바 ‘투 트랙’이나 ‘피해자 중심주의’ 접근방식을 수용할 리 없다. 가장 합리적인 타협방식일 수 있는 독일식의 기금 조성을 통한 해결이라는 한국 쪽 대안도 아베 정권 때 이미 거부한 만큼 수용 불가다.

아베 정권이 집권 기반으로 활용해 온 이른바 일본의 가속적인 ‘우경화’로 일종의 자승자박 형국이 된 자민당 정권의 과도기적 관리자 스가 총리로서는 한국 쪽 제의를 수용하는 것은 축구로 치면 ‘자살골’에 가까운 것이다. 그랬다가는 당내 파벌 기반도 없는 그는 9월의 총재선거에 명함도 내밀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 총재(곧 일본 총리) 간판으로는 총선에서 패배를 피할 수 없고 자칫 2009년 8월 민주당에 정권을 내주었던 전철을 다시 밟을 수 있다는 반발에 부닥칠 것이다. 한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 요구는 한국 쪽 전략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계산보다는 강경대응이 정권 재창출에 유리하다고 보고 이를 활용하려는 계산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관측도 있다.

자국 내 우경화에 기대는 자민당 정권, 한일 화해 갈수록 요원 

일본 최대부수를 자랑하는 우파 월간지 <문예춘추> 2019년 10월호의 ‘총력특집 일한 단절’이라는 선동적인 특집기획에 “일본과 한국 ‘국가의 품격’”이란 제목으로 기고한 수학자요 에세이스트 후지하라 마사히코(藤原正彦)의 글이 실렸다.

“한국의 역대 정권은 궁지에 몰리면 일본에 난제를 던져 국민의 갈채를 받는 것으로 구심력을 회복하는 것이 상투 수단이 돼, 그것을 되풀이해 왔습니다. 그 일본이 이런 국면에서 마침내 ‘말 잘 듣는 아이’이기를 그만뒀습니다. (…) 한국은 그 국가 간의 약속을 파기하는 국제법상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 합당한 제재를 가하는 것은 당연한 대응입니다.”
지난해 8월 15일 에이(A)급 전범들이 합사된 일본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서 일본 제국주의 군복을 입고 전범기 ‘욱일기’를 든 남성들이 당시 전몰자를 추모하는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도쿄/EPA 연합뉴스)

이것은 일본 대다수 지식인을 포함한 일반인들의 전형적인 한국관 내지 정세 인식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품격>이란 책도 쓴 후지하라는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 뒤 한국에서 시작된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두고 일본에선 한국제품 불매운동도 반한 데모도 전혀 벌어지지 않는다며 “이런 국가로서의 품격 차이가 지금 세계적으로 도드라져 보인다”는 정말 품격 없는 말도 덧붙였다.

문재인 정권이 반일 관제데모를 사주한 적도 없거니와, ‘12·28 위안부합의’를 사실상 파기한 것은 정권이 궁지에 몰렸을 때가 아니라 박근혜 정권을 탄핵한 ‘촛불 시민혁명’의 기대가 쏠리고 있던 지지율 최고조기 때 그 자신감을 배경에 깔고 있었다. 2018년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을 명한 대법원의 확정판결이나 지난 1월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서울중앙지법의 배상판결은 오래 전부터 진행돼 온 재판에 대한 재판관들 판결이지 문재인 정부가 지시한 게 아니다.

“아베 정권은 대법원 판결에 대해 문재인 정권이 개입하지 않는다며 무대책이라 비판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근대 통치형태상의 삼권분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아베 정권은 일본에서는 정권이 사법부를 콘트롤(통제)하고 있는데, 왜 한국에서는 그것을 할 수 없느냐며 안달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런 얘기를 한 사람은 <징용공, 화해로 가는 길-전시피해와 개인 청구권>(지쿠마 신서)을 쓴 일본의 우치다 마사토시(内田雅敏) 변호사다.

한국의 정권이 반일데모를 사주한 예가 없지는 않다. 예컨대 쿠데타 뒤 광주항쟁을 유혈진압하고 들어선 1980년대 초의 전두환 정권은 정권의 정통성과 긴급했던 외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정권에 40억달러 ‘협력자금’을 받아내는데 반일감정과 관제데모를 이용했다. 당시 냉전체제하에서 일본이 반공 최전선인 한국의 희생에 기대 ‘안보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며 반일감정을 조장했다.

나카소네 정부와 당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한국 신군부의 쿠데타를 용인함으로써 반공전선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고, 당시 고조되던 한국의 민주화 열망을 오히려 위험시 하며 외면했다. 그때 한일간을 오간 일본쪽 밀사가 일제 관동군 참모 출신으로 이토추상사 회장까지 지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다. 그는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소설 <불모지대(不毛地帯)>의 실제모델이기도 했다.

그런 ‘품격 없는’ 한일간 정권 차원의 유착은 군사정권 때나 가능했다. 정권 말기인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전격적인 독도방문과 ‘천황 사죄’ 발언도 맥락도 없이 나온 뜬금없는 얘기는 아니다. 그의 정치적 계산이야 어찌됐든, 거기에는 1990년대 중반부터 우익 결집을 통해 집권에 성공한 아베 정권(제1기 집권 2006년 9월~2007년 9월, 제2기 2012년 12월~2020년 9월)의 역사수정주의적 역행이 배경에 깔려 있었다.

아베는 일본 군부의 위안부 강제동원 만행을 인정하고 사죄한 ‘고노 담화’ 이후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정권의 한일 화해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완전히 뒤엎고 일본의 전쟁범죄를 부인했던 과거로 되돌아갔다. 아베의 장기집권이야말로 역사수정주의에 입각한 끊임없는 반(反)북한 선전과 혐한 조장을 통한 ‘외부 적’ 창출 덕을 많이 봤다고 할 수 있다. 2012년 8월 이명박의 독도방문을 기점으로 폭발한 일본 내 반한정서는 결과적으로 2012년 말의 아베 재집권에도 기여했다.

처음부터 꼬였던 2차 세계대전 후 한일 국교 정상화

한일관계가 이처럼 풀리지 않는 것은 양국의 역대 특정 정권들 탓만으로 돌릴 순 없다. 근본적인 원인은 전후 한일관계가 출발부터 잘못된 데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야 근본적인 해결책도 찾을 수 있다.

일본 패전 뒤의 한일관계 정상화(국교 수립) 교섭이 시작된 것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 20일 열린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속칭 ‘한일회담’)이었다. 그날 열린 예비회담 장소는 도쿄 마루노우치에 있던 연합군(사실상 미 점령군)총사령부(GHQ) 외교국 회의실이었다. 거기엔 윌리엄 시볼드 GHQ 외교국장도 옵서버로 참석했다. 이 때문에 한일관계 전문연구자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 교수는 저서 <검증 일한회담>(이와나미 신서)에서 한일 회담이 아니라 “사실상 한미일 회담”이라고 했다.

여기 등장하는 시볼드(William Joseph Sebald, 1901~1980)라는 사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해군에 입대해 1차 세계대전 때부터 일본에서 근무했으며, 1925년부터 3년 간 주일 미대사관 무관으로 있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예비역 장교로 미 해군 정보국 소속이었다. 일본 패전 뒤 도쿄 주재 연합국최고사령관 정치고문단 특별보좌로 있다가 1946년에 외교관 자격을 얻어 1947~52년에는 정치고문 및 GHQ 외교국장, 대일이사회 의장으로 있으면서 GHQ에서 미 국무부를 대표했다, 1947~1951년에는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대리역을 하면서 사실상의 주일 미국 대사 역할을 했다.

지독한 ‘친일파’였던 그는 1949년에 당시 미 국무부 극동아시아 담당 차관보였던 버터워스(William Butterworth, 1903~1975)에게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도록 권고하는 전문까지 보냈다.

독도는 1951년 9월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에는 일본이 반환해야 할 섬들로 제주도, 울릉도 등과 함께 명기돼 있었으나, 나중에 결국 빠지게 되는데, 미국은 당시 독도를 한국 영토에 넣어달라는 한국 측 요구를 거부하고 원래 초안에 한국 영토로 반환될 도서 목록에 넣었던 독도를 일본 영토 다케시마로 표기했다가 또다시 그것을 아예 초안에서 빼버렸다. 지금까지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런 미국의 독단적이고 자의적인 조치다.

그렇다고 미국이 독도를 일본 영토 목록에 집어넣은 것도 아니다. 당시 일본을 사실상의 속국으로 온전히 지배하는 대신 한반도를 소련과 분할 지배했던 미국에게 일본 요시다 시게루 정권은 강화조약 초안에 승전국으로 들어 있던 한국을 빼 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했고 미국은 결국 일본 편을 들었다. 그래서 한일협정의 상위법이라 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회의에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대만과 대륙 정권 모두)은 초청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사실 일본이 국제법 위반 운운하며 한국이 한일협정과 샌프란시스코 조약 규정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는 건 자가당착이다.

게다가 국제법이란 게 본질적으로 제국주의 열강들이 상호이익을 침범하지 말고 세계를 최소비용으로 분할지배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그들끼리의 신사협정에 가까운 것 아닌가. 민관이 합동으로 무뢰배까지 동원해 남의 나라 왕비를 살해하고 왕을 쫓아내고 나라를 빼앗은 것을 국제법적 합법이라 우기는 일본인들이야말로 그들끼리의 신사협정마저 어긴 국제법 위반자들이 아닌가. 1919년 3·1운동 뒤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들을 철저히 외면한 베르사유 강화조약 참가자들이 그러했듯 제국주의 침략자들 중에 자신들의 행위를 국제법 위반이라고 스스로 인정한 자들이 있었나.

2015년 '위안부 합의 체제' 동아시아 역학 구도 다시 봐야

1951년이면 전쟁 중이던 한국은 국가의 생존 자체를 미국에 기대고 있던, 그야말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처지였고,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 덕에 경제가 급속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때 미국의 주선 내지 종용으로 시작된 한일회담의 결과가 그 15년 뒤에 성사된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 즉 이른바 한일협정이다. 청구권협정 제2조에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해서 양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명기돼 있다.

이는 그 50년 뒤에 체결된 한일간 ‘12·28 위안부 합의’의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는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완전히 최종적으로’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는 사실상 같은 뜻이다. 완전히 해결됐으니 더는 거론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야마모토 세이타 등 6명의 변호사들이 쓴 <완전하지도, 끝나지도 않았다>(메디치)가 비판하고 있는 것도 그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주장이다.

이 ‘완전히 최종적’ 해결이라는 것을 못 박는 데에 15년이 걸렸다. 그것도 5·16 쿠데타에 계엄령 선포(6·3사태)까지 하고서야 가까스로 성사됐다. 한국인들의 격렬했던 한일협정 반대 이유의 핵심은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제대로 된 사죄와 배상을 포기하고 독립축하금, 경협자금 명목의 유무상 5억달러에 국가의 자존과 독립을 팔아넘겨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때의 한일 기본조약 제2조의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원문은 영문)를 두고 한국은 1910년의 한일합방조약 등 일제 침략과 식민지배 시절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들이 원래부터 원천무효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일본은 그것들이 일본 패전과 한국 독립으로 이미 무효가 된 것일 뿐, 그 이전에는 국제법적으로 합법이었다고 해석한다. 지금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게 합법이면 배상할 이유도 사죄할 이유도 없다. 침략이나 전쟁 등으로 파탄난 국교를 회복하는 강화조약의 기본 전제는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 배상하며, 재발방지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1965년 한일협정에는 그것이 없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때 이미 일본의 전쟁배상에 부정적이었던 미국은 그 조약에 기초한 한일협정에서도 한일 양국이 원문인 영문을 각자 편의대로 해석하도록 하게 함으로써 문제를 얼버무렸다. 그럼에도 청구권협정으로 포기된 것, 즉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은 자국민의 부당한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개입하는 ‘외교 보호권’일 뿐 피해자 개개인들의 배상 청구권은 살아 있다는 것을 일본 정부와 최고재판소 판결도 인정하고 있다.

이 ‘1965년 체제’는 1980년대의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1990년대 초 냉전 붕괴로 흔들리기 시작( 1991년의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이 그래서 가능했으며, 이를 계기로 위안부 문제가 비로소 국내외적 보편적인 인권문제로 부각될 수 있었다)했으나, 2015년의 12·28 위안부합의로 ‘완전히 최종적’ 해결을 재확인하기까지 거의 반세기를 버텨냈다.

지난 2015년 12월 28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당시 윤병세 외교장관(오른쪽)과 일본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이 일본군 위안부 협상 최종 타결을 발표하던 모습.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2015년 체제’는 불과 2년만에 무너졌다.(박근혜 정부 '위안부 이면합의' 숭겼다..."합의 비공개부분 존재 2017. 12.27일 연합뉴스) 두 체제 붕괴에 걸린 이 극명한 시간적 격차. 그것은 냉전붕괴와 이후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동아시아 국가간의 힘 관계 및 지정학적 변동으로 어느정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한일갈등 원인 제공은 일본 정치, 시간 갈수록 일본 불리해져

1951년 한일회담이 미국 주도로 시작됐을 무렵의 한국은 국력이랄 게 거의 없었다. 1965년 협정 때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909억 5028만 달러였고, 한국은 30억 1761만 달러로 30배가 넘는 격차였다. 그 엄청난 힘의 불균형 위에 체결된 사실상의 불평등조약으로 일본은 침략과 식민지배가 국제법적으로 합법이었다는 억지를 관철시키고 배상도 사죄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미국은 공정한 중재자가 아니었다.

일본은 지금까지 오늘날 한국의 발전에 자국 식민지배가 기여한 것도 많다며, 전후 경제발전도 일본이 제공한 유무상 5억달러 덕이 아니냐고 주장하지만, 그 때문에 한국은 일본의 하청분업구조에 편입돼 막대한 부를 일본에게 안겨주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일 무역적자는 그 생채기라 할 수 있다. 한일협정은 “일본쪽에서 보자면 싼값에 한 것”이라고 우치다 변호사도 말했다.

하지만 2015년 합의 때 한일간의 GDP 차이는 거의 1대 3의 비율로 좁혀졌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뒤 12·28합의가 허물어진 2017년에 한국의 구매력 평가기준(ppp) 1인당 GDP(Real GDP)가 일본의 그것을 넘어섰다. 2019년의 국가 GDP는 공식환율 기준으로 한국이 1조 6468억 달러, 일본이 5조 786억달러로 3배가 조금 넘지만, 같은 해의 ppp기준 Real GDP는 각각 2조 2113억, 5조 2310억 달러로 2.5배가 채 안 된다. 그 차이는 가속적으로 좁혀지고 있다. ppp 기준 1인당 GDP는 한국이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간 각각 △4만 1001△4만 1993△ 4만 2765 달러인데 비해 일본은 각각 △4만 859△4만 1074△4만 1429 달러였다.(CIA 월드팩트북)

2015년 12·28합의 역시 웬디 셔먼 당시 미 국무부 정무차관이 위안부 문제 등으로 일본과 불화하던 한국·중국을 나무란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 미국의 강력한 개입으로 이뤄진 ‘한미일 합의’였으나 불과 2년을 버티지 못했다. 아버지인 박정희가 한미일 협정을 통해 구축한 ‘완전하고 최종적’인 1965년 체제가 50년 뒤 그의 딸인 박근혜가 새로 구축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한미일간 합의로 수명을 연장했으나 불과 2년만에 무너진 것이다.

촛불시위로 표출된 강력한 시민의 힘이 국가나 정권간의 밀실합의를 일거에 무너뜨렸다. 경제력 변동으로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순 없지만, 시민의 힘 성장과도 얽혀 있는 각국의 경제력과 냉전 붕괴 뒤의 급격한 지정학적 변동 등이 이런 변화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일본 자민당 정권은 한일간의 이런 변화를 문재인 ‘친북 좌파’ 탓으로 돌리면서, ‘혐한’을 방치 또는 조장하면서 국가 간의 합의나 협정을 마음대로 뒤엎는(“축구 골대를 마음대로 옮긴다”) 국제법 위반이라 줄기차게 비난한다. 문제가 된 하버드의 ‘미쓰비시 교수’ 램지어의 저열한 ‘위안부=자발적 매춘부’ 논문도 일본 정관계·재계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들의 이런 퇴행적 세계관·가치관 및 재정지원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자민당 정권의 이런 행태는 정말로 급변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 잘못됐거나, 잘 알면서도 자기 약점이나 실패를 호도하며 남 탓으로 돌리기 위해서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일본에겐 좋은 일이 아니며, 방치하면 시간이 갈수록 사태는 점점 더 불리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근본 원인을  도외시하고 또 다시 무조건적인 한일협력으로 문제를 봉인한 채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답을 마련하라고 종용하는 건 지혜로운 대응이라 할 수 없다. 미국도 일본도 그것을 강제할 힘이 이젠 없다.

일본이 먼저 변해야 한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침략과 식민지배의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고 새로 출발하지 않는 한 어떤 합의나 협약도 결국 사상누각이 될 것이다. <일본은 왜 몰락하는가>의 저자 모리시마 미치오가 제시한 일본 재생의 길도, 그런 바탕 위에 비로소 구축될 수 있는 동아시아 공동체였다. 모리시마도 강조했듯이, 그러기 위해서는 무능하고 전략도 없는 일본 정치가 먼저 변해야 한다.


한승동 필자

1986년 잡지 <말>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8년 <한겨레> 창간 멤버로 합류했다. 1998년부터 3년간 도쿄특파원을 지냈고, 이후 국제부장, 문화부 선임기자, 논설위원 등을 거쳤다. 동아시아와 민족(통일) 문제는 물론, 환경·생태·과학 분야를 비롯해 다른 세상사에도 두루 관심이 많다. 전체를 아우르는 이른바 통섭적 안목을 갖추려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