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사진=베이징신화·로이터/연합뉴스)

“한국과 중국인들이 2차 대전 이후 도쿄(일본)와 이른바 ‘위안부’ 문제로 다퉈 왔다. 역사교과서 내용이나 여러 바다(해역) 이름을 놓고 싸우고 있다. 모두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좌절감도 안겨 준다. (중략) 물론 민족주의 감정은 여전히 이용될 수 있으며, 어느 나라든 정치 리더가 예전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싸구려' 박수갈채를 받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도발은 진보가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

2015년 2월 27일 당시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이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에서 과거사를 둘러싼 한중일 3국 간의 갈등에 대한 미국 입장을 에둘러 밝혔다.  그때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즉 과거사 왜곡과 센카쿠 열도(중국 명: 댜오위다오) 분쟁으로 한국·중국과 일본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과거사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미래지향적 협력 쪽으로 나아가자던 미국 정무차관의 연설은 많은 한국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 정무차관은 6년 뒤 바이든 정부 출범과 함께 다시 내각으로 돌아왔다. 바로 국무부 부장관이 된 웬디 셔먼(wendy sherman ·71세)이다.

6년 만에 국무부로 컴백한 웬디 셔먼 

2015년 초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먼저 도발한 쪽은 일본이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와 관련한 공개 증언이 있었다. 일본 쪽에선 1993년에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과 유린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한 ‘고노 담화’가 있었다. 이후 1995년 ‘무라야마 담화’, 그 뒤 민주당 정권 때의 ‘간 나오토 담화’ 등을 통해 일본은 처음으로 군국주의 일본의 전쟁범죄를 인정하고 사죄했으나 1990년대 중반부터 터져 나온 일본 우파들의 거센 반발로 추세는 역전됐다. 그런 반동적인 역사수정주의 흐름을 주도한 아베 신조 정권은 그 모든 반성과 사죄를 사실상 다시 부정하며 원점으로 되돌렸다.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분쟁이 터진 것도 극우 정치가 이시하라 신타로 당시 도쿄도 지사가 미해결 역사문제로 남겨 놓았던 센카쿠 열도를 도쿄도(都)가 매입해 일본 영토로 만들자고 선동한 게 직접적 발단이었다.

셔먼의 논법에 따르더라도 먼저 ‘과거사의 교훈 얘기’로 싸구려 박수갈채를 받아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쪽은 아베와 이시하라였다. 그런데 셔먼은 그런 역사를 무시하고 반발하는 한국과 중국을 탓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을 두둔한 셈이 됐다. 그랬던 셔먼이 바이든 정부의 국무부 서열 2위인 부장관이 됐다.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 (사진=AFP/연합뉴스)

인도-태평양 전략 구상

인도-태평양 전략체제(Indo-Pacific strategic framework). 지난 1월 13일 트럼프 정부가 전격 공개한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관한 내부 기밀문서다. 이 문서는 2018년 2월에 작성, 승인된 것인데 트럼프 정부가 바이든 정부 출범 일주일 전에 일부 자구를 검은 잉크로 지우고 서둘러 공개했다. 왜 그랬을까? 정권 교체기 권력 공백에 따른 위험을 줄이기 위해 미국의 의지와 존재감을 드러내고, 차기 정권으로의 전략 계승을 압박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1월 5일 기밀해제 방침을 결정했고 그다음 날 우익 트럼프 지지자들이 국회의사당에 난입한 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트럼프는 집권연장에 미련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지난 3년간 미중 무역분쟁 등을 유발한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의 지침이 돼온 이 10쪽짜리 문서를 공개 하루 전에 입수한 미국 뉴스 웹사이트 악시오스(Axios)는 그 핵심 내용을 "중국의 영향력 증대를 저지하기 위해 인도를 대항마로 키우고 이 지역 내 미국의 전략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내부지침"이라는 기사를 냈다. 거기에는 일본 자위대와 대만의 힘을 강화해 대중국 대응능력을 키운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 문서의 일본 관련 내용에 주목한 아사히신문과 NHK 등 일본 언론들은 이를 ‘인도-태평양에서의 전략적 틀(체제)에 관한 각서’로 부르면서, 아베 정권이 주창한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FOIP) 구상 및 미국·일본·호주·인도 중심의 쿼드(Quad) 전략대화와 관련지어 분석하고 바이든 정부도 그 골격을 계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 11월 대선 직후 스가 요시히데 총리와의 첫 통화 때 바이든 당선자가 ‘번영하고 안전한 인도-태평양’ 구상을 얘기하며 그 기초가 될 미일동맹 강화 방침에 관해 협의했다는 얘기도 일본 언론에서 보도됐다. 1월 19일 열린 국무장관 후보 앤서니 블링컨(Antony Blinken), 재무장관 후보 재닛 옐런(Janet Yellen), 국방장관 후보 로이드 오스틴(Lloyd Austin) 청문회에서도 이것을 계승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히 드러났다. 블링컨은 “중국의 대두는 미국에 최대의 도전”이라고 했고, 옐런은 중국을 “미국 최대의 전략적 경쟁상대”라며 그 “위협”에 강력한 자세로 대처해야 한다고 했다. 오스틴도 중국을 “미국이 직면한 가장 우려할만한 경쟁국”이라며 일본과 호주, 한국 등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재구축해 대처하겠다고 했다. 당연히 한국의 외교안보 상황 및 전략과도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문제는 그것이 한국에 득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거세질 한일 갈등 봉합 압력

일본 매체에 따르면 이 문서에선 일본을 인도-태평양에서 “지역통합의 중핵국가”이자 “지역적으로 통합되고 기술이 앞선 인도-태평양 안전보장 설계의 기둥”이라고 기술했다. 한국과 관련해서는 지지(時事)통신이 “한국이 한반도 이외의 지역 안전보장 문제에서 더 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코로나19 사태와 경제 악화 등 국내문제 대책에 발목 잡힌 미국이 대외정책에서 북핵문제 등 남북 간 평화 프로세스 추진을 우선순위에 둘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지지통신 보도가 지적한 ‘한반도 이외의 지역 안전보장 문제’란 것도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구상의 주 타깃인 중국 억제다. 거기에 한국의 역량을 우선적으로 투입하게 유도하면서 그 선결조건으로 한일 갈등 봉합을 압박할 공산이 크다.

트럼프 정부의 전략문서는 동맹국들, 동남아 지역과의 협력 등을 강조했지만, 정작 트럼프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유럽 회원국들과 사이가 틀어졌고 한국, 일본과는 방위비 분담금 문제로 삐걱거렸다.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과의 정상회담엔 자신이 참석하지 않은 채 줄곧 빠졌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선 탈퇴해버렸다. 이에 비해 바이든 정권은 트럼프의 돌출적 단독 대응방식과는 다른 대중국 정책, 즉 협력적 공동대응방식을 취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그런 점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은 바이든 정권에서 더 강고하고 일관되게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 그 중심축은 미일동맹이다.

바이든 정부 출범 닷새 뒤인 1월 25일 세계경제포럼(WEF, 다보스포럼) 개막식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기조연설을 통해 “새로운 냉전을 시작하고, 타자를 위협하고, 공급망을 붕괴시키거나 제재를 가하고, 디커플링(분리), 고의적 고립화를 꾀하는 것은 세계를 분열시키고 대립으로 몰아넣을 뿐”이라고 경고했다. 분명히 미국의 그런 움직임을 겨냥한 것이다. 다음날인 26일에 시 주석이 문재인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사진=AP/연합뉴스)

일본도 '安美經中', 한국의 대응은?

인도-태평양전략 구상에서 미국은 중국의 대만 통합 공세로 분쟁이 발생할 경우 ‘제1열도선’(第一列島線, first-island-chain) 내 중국군의 공중 및 해상 지배를 저지하면서 제1열도선 국가·지역(first-island-chain nations and territories)을 방어하는 전략을 펼칠 것이라고 했다. 제1열도선은 규슈에서 오키나와를 거쳐 대만, 필리핀까지 이어지는 선이다. 아사히신문이 미국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한 바로는 이 선 안에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도 포함된다. 말하자면 미국은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경우에는 물론 센카쿠 열도를 점령하려 할 경우에도 군사적으로 개입해 저지하겠다는 얘기다. 그럴 경우 주한미군은 물론 한국군도 투입될 수 있다.

제1열도선은 원래 미국의 중국 봉쇄정책에서 설정된 전략적 개념인데, 거꾸로 중국에게는 그 선이 미국의 공세를 막기 위한 전력 전개 목표선이자 대미 방어선이다. 제2열도선은 일본 혼슈의 도쿄 남동쪽 이즈 제도에서 오가사와라 제도, 괌, 사이판을 거쳐 파푸아 뉴기니에 이르는 선이다. 미국은 자유항행 등을 주장하며 중동산 원유 등 주요 교역품들의 주 항로에 펼쳐져 있는 이 제1열도선 내의 남사군도, 서사군도와 오키나와, 센카쿠까지에 이르는 동·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배타적 지배권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이것이 바로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Free and Open Indo-Pacific. FOIP) 구상이다. 이는 바이든이 제창한 ‘민주주의 정상회의’와도 연결돼 있다. ‘자유’, ‘열린’, ‘민주주의’와 같은 단어들은 모두 중국의 억압적 전체주의 이미지와 대비시키려는 체제경쟁 프로파간다 색채가 짙게 밴 수사다.

이는 원래 아베 정권이 창안해낸 개념이다. 1월 13일 일본 방위성의 싱크탱크인 방위연구소 정책연구실 소속 연구원이 발표한 인도-태평양 전략 해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냉전 (붕괴) 뒤의 일본은 지역적 또는 글로벌한 안전보장 상의 역할 확대를 꾀함으로써 지역(인도-태평양)에서의 미국의 힘의 우위를 떠받쳐 주면서 그것을 ‘보완’하는 역할을 추구해 왔다. 그런데 2000년대 후반부터 미중 간의 ‘파워 시프트’(power shift, 권력이동)가 더욱 분명해지고 미국의 지역 관여가 예전만큼 자명하지 않게 돼 가는 상황 속에서 단지 미국의 힘을 떠받쳐 주는 것만이 아니라 일본 자신이 주체가 돼 미국 이외의 나라들과 협력하면서 지역질서 구축을 위한 노력을 해나갈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아베 정권이 제창한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구상은 그 표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 정권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그것은 미일동맹 합동 구상이 됐다. 이 구상은 미국이 절대적 우위를 누리는 가운데 나온 것이 아니라 그것(팍스 아메리카나)이 예상보다 빠르게 무너져 가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다. 미국 역시 그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방위연구소의 해설에 트럼프 정권 시절인 2020년 1월에 아세안 회원국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인용돼 있다.‘미국·중국 중 어느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경우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라는 질문에 10개국 중 7개국이 중국을 택하겠다고 답했다. 충격적인 결과였다. 호주마저 트럼프 정권 등장 뒤 미국 의존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안보정책을 논의해야 한다는 ‘플랜 B’를 만들었다.

방위연구소의 그 연구원은 바이든 정권도 인도-태평양 전략 구상의 기본적인 노선을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렇다고 일본이 미국 지지로 올인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도 국가전략을 ‘안보의 미국’, ‘경제의 중국’이라는 두 가지 축으로 설정해왔다. 아베 정권은 대중국 관계 강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으며, 후계자인 스가 요시히데 정권도 다르지 않다. 미국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당연한 선택이다.

한국도, 美中 양자택일 담론 버려야

그런데 묘하게도 미국이냐 중국이냐, 양자택일식의 선택을 강요하는 이념적이고 비실용적인 흑백담론이 횡행하고 있는 곳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인 듯하다. 일본에서도 시진핑 주석의 일본 방문을 허용해선 안 된다는 보수우파세력이 있지만, 대세도 아니고, 그들이 내건 주요 반대 이유는 시진핑 체제의 홍콩 민주화운동 탄압이다.

한국이 미일동맹의 인도-태평양 전략 구상대로 “한반도 이외의 지역 안전보장 문제에서 더 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결국 미일동맹의 중국 억제에 가담하는 것이다. 그럴 때 중국은 반격에 나설 것이다. 동북아의 이런 한·미·일 남방 삼각공조는 북·중·러 북방 삼각 대응체제 강화를 촉발할 것이다. 이른바 ‘신냉전’으로 가는 길이며, 남북한 분단선이 신냉전의 최전선이 되고 북핵문제 해결은 물 건너간다. ‘대국 일본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우익 호전주의 세력에겐 최적의 세력 구도일 수 있다. 대신 한국은 지난 세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국가역량을 남북 분단 완화(해소)와 평화정착 등 자민족 문제 해결과 지역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분단을 만들고 그것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외부세력의 이익을 위해 투입·소모함으로써 스스로를 파괴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에서 연설한 웬디 셔먼이 2015년 2월에 정무차관 직에서 물러난 뒤 그해 12월 아베-박근혜 정부가 ‘위안부’ 합의(12·28합의)를 전격 발표했다. 한일 간의 그 극적인 갈등 봉합 과정에서 셔먼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압박으로 성사된 그때의 그 임시방편적인 갈등 봉합으로 문제가 해결됐던가. 2018년의 ‘징용 피해자(징용공)’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배상 확정판결과 2019년 아베 정권의 한국 첨단소재·부품 수출규제라는 보복, 한일 군사비밀보호협정(GSOMIA) 갈등으로 이어졌고 결국 지금의 ‘사상 최악의 한일관계’로 가는 발단이 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인도-태평양 전략 구상에 압축돼 있는 미국과 일본의 최근 움직임으로 보건대 바이든 정권은 또다시 한일 간의 임시방편적 갈등 봉합을 압박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미국과 한반도의 오랜 악연

셔먼은 한국, 중국 및 일본 사이에 얽히고설킨 과거와 현대사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1차 북핵 위기가 터지고 제네바 핵합의에 이른 1993~1996년 기간에 빌 클린턴 정권의 국무 차관보였다. 평양에서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북의 조명록 차수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워싱턴과 백악관을 방문하고 메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한 1997~2001년 기간에는 국무부 보좌관이자 대북정책조정관으로 미 국무장관의 평양행에 동행했다. 1999년에 ‘페리 프로세스’의 페리 전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 때도 함께 갔다. 그는 ‘햇볕정책’ 지지자였다.

그랬던 웬디 셔면, 한반도와 남북한에 대해 가장 잘 안다는 전문가가 일본을 두둔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역사는 길다. 2차 대전 뒤 미국은 연합국이 분할 점령했던 독일과는 달리 일본을 단독으로 점령했고, 대신 분할당한 것은 일제의 피해자 한반도였다. 그때 미국은 천황과 전범자들 대다수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분할점령의 결과 일어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에 일본과의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지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때 미국은 미일 안보동맹을 동시에 체결해 전범국 일본을 동아시아 최대의 동맹국으로 만들었고 일본의 전쟁배상 책임을 최소화했다. 1948년의 도쿄 전범재판 때도 그랬지만 1965년의 한일협정 때도 미국은 식민지배와 침략을 부정하던 일본을 문제 삼지 않았다.

1945년 9월2일, 미군 구축함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에 임하는 일본 대표단. (사진=궁리)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증기선(흑선)을 이끌고 일본을 ‘개국’시켰을 때, 그 목적은 일본 자체가 아니라 중화제국과의 교역을 트는 것이었고 일본은 그것을 위한 교두보요 전진기지였다. 미국과 영국 등 근대 이후의 서구 열강들에게 일본은 그런 목적을 위한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일본의 전후 경제기적은 그런 지정학적 조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전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에겐 덩치 큰 일본을 다시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과거사는 덮었다. 미국의 국익 우선 앞에 일본과 얽히고설킨 주변국들의 원한과 복잡한 사정, 역사적 정의는 어떻게 되든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일본을 제 편으로 만들거나 점령하기 위해 그들은 일본이 주변 국가에 저지른 범죄행위에 애써 눈을 감았다. 2차 대전 뒤에도 패전국이었던 일본의 그런 지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일본 자민당 정권은 지금도 일제의 침략과 합병, 식민지배가 당시 국제법상으로 합법이었다고 주장하며 독일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이제 거대 중국이 ‘주적’으로 떠오르자 냉전 붕괴 뒤 흔들렸던 교두보 일본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면서 인도-태평양 전략 구상이 등장했다. 과거사에 매몰되지 말고 미래로 가자는 미국의 갈등 봉합 종용은 더 거세질 것이고 한국은 주변 대국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독자적 제3의 길 찾아야

웬디 셔먼은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과 독일이 참여해 2015년 7월에 최종 타결된 이란과의 핵합의에 이르는 협상을 주도한 바 있다. 오바마 정부의 성공적인 그 야심작을 트럼프 정부는 뒤엎어버렸지만, 셔먼이 부장관으로 국무부에 복귀한 바이든 정부는 그것을 되살릴 것이다. 그의 그런 이력이 북핵문제 해결에도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구한말의 처참했던 경험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자기 힘이 없는 대국의존 외교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다. 앞으로 상당기간 지속될 미중 패권경쟁 시대에 그것은 한국을 늘 양자택일식의 위험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만들 것이다. 친미-반중-반북이냐 친중-친북-반미냐는 식의 망국적인 극단의 양자택일 담론이 이미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힘을 갖고 국제무대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 자기 힘이 없이는 ‘중립’도 공허하다는 것을 우리 근대사는 보여준다. 자기 나름의 힘을 갖고 독자적인 입지를 확보하려면 경제력을 키우고 갈라진 남북이 다시 손을 잡아야 하며, 반미도 반중도 하지 않으면서 우군을 확보하는 ‘제3의 길’을 찾아야 한다. 미·중·일만 바라보지 말고 러시아와 동남아, 유럽, 중동, 중남미와 아프리카 등 더 넓은 무대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야 한다.


한승동 필자

1986년 잡지 <말>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8년 <한겨레> 창간 멤버로 합류했다. 1998년부터 3년간 도쿄특파원을 지냈고, 이후 국제부장, 문화부 선임기자, 논설위원 등을 거쳤다. 동아시아와 민족(통일) 문제는 물론, 환경·생태·과학 분야를 비롯해 다른 세상사에도 두루 관심이 많다. 전체를 아우르는 이른바 통섭적 안목을 갖추려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