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국가 역사는 피의 역사...20세기 아시아·아프리카 특히 심해
시오니즘은 유대 민족주의...이스라엘 유대인 급증, 결국 독립국가로
민족국가 이스라엘 영토 내 아랍인 합계, 유대인 인구보다 많아
팔레스타인 독립...외교·국방·경제성장으로 제2의 민족국가화 우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터지면서 중동 문제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대체로 사람들은 '중동' 하면 '전쟁'이 떠오를 정도로 중동은 늘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언제든지 폭발 일보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기에 '화약고'라고 불린다. 도대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왜 싸우는 걸까?
이 글에서는 근대 국가 체제의 대표적 모형인 민족국가(nation state)로 풀어보려 한다. 즉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간 현재의 전쟁과 갈등은 세계 어느 민족국가에서나 비슷하게 나타나는 국가 건설과정에서의 폭력이라는 관점이다. 필자는 이것이 종교나 역사보다 좀더 보편적인 설명의 틀이라고 생각한다. [편집자 주]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터지면서 중동 문제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민족국가(nation state) 건설 과정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라는 관점이라는 관점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를 풀어본다. / 사진=셔터스톡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터지면서 중동 문제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민족국가(nation state) 건설 과정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라는 관점이라는 관점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를 풀어본다. / 사진=셔터스톡

거의 대부분의 민족국가 건설 과정은 강력한 폭력을 동반했다. 누군가를 '민족' 범위 안에 넣는다는 것은 반대로 또다른 누군가는 '민족'이 아닌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 국가 안에서 정당한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이 박탈당한다는 뜻이다. 터를 잡고 살던 땅의 구성원에서 배제된다면 누구나 발끈할 수밖에 없다. 국가의 경계가 형성되고 그 경계 내의 구성원이 정리되기까지 내전과 전쟁이 거듭되었다. 민족국가 형성의 역사는 바로 근현대 ‘피의 역사’이다.

가장 먼저 민족국가가 등장한 유럽에서는 16세기 종교전쟁을 시작으로 20세기 제1차, 제2차 세계대전까지 끊임없는 전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오늘날의 국경과 국가 정체성이 확립되었는데 언어와 종교 등의 동질성에 기반해 민족국가가 만들어졌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민족이 형성된 잉글랜드는 노르만족 등 침입자들 및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주변의 비 앵글로색슨족 국가들과의 싸움, 그리고 바다 건너 프랑스와의 백년전쟁 등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이 모든 과정에 엄청난 폭력이 수반된다.

특히 아일랜드의 경우 20세기까지 영국에 통합되는 문제를 가지고 커다란 유혈충돌을 빚었다. ‘영국 국민’ 혹은 ‘영국 민족’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독일 역시 ‘독일 민족’의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에서 대규모 폭력을 피하지 못했다. 유럽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으로 불리는 ‘30년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두 번의 세계대전까지 독일 민족국가를 확립하는데 독일은 역대급 전쟁, 대규모 폭력사태를 거쳐야 했다. 그리고도 동-서로 분단된 채 45년간 지냈다. 오늘날의 독일 민족국가는 1990년에야 완성된 셈이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등 다른 유럽국가들도 여러 차례의 폭력을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만들 수 있었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등 다른 유럽국가들도 여러 차례의 폭력을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만들 수 있었다. / 사진=연합뉴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등 다른 유럽국가들도 여러 차례의 폭력을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만들 수 있었다. / 사진=연합뉴스

아시아와 중동은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거치면서 대항의 방법으로써 민족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등의 자극도 있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신생독립국가를 건설했다. 1960년은 무려 ‘아프리카의 해’라고 불릴 정도로 숱한 독립국가가 탄생했다. 하지만 독립국가가 되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민족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국가의 구성원이냐를 두고 각 독립국가마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다. 미국과 소련의 거대한 양극체제로 전세계가 갈라지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까지 개입해 이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다.

게다가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은 유럽처럼 오랜 전쟁을 거치면서 개별 민족 단위의 국가 건설이 된 것과 달리 강대국들이 임의로 정한 경계선에 영향을 받으면서 국가를 만들었다. 세계지도를 보다 보면 반듯한 국경선이 많은데 이는 평화나 조화의 상징이 아니라 인위적인 손의 존재, 분쟁의 씨앗으로 봐야 한다.

한 영토 내에서 이질적인 종족집단(ethnic groups)이 한 국가의 구성원이 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국가마다 이를 해결하는 구체적인 해법은 달랐지만, 어디에서나 폭력이 수반되었다는 점은 동일하다. 인도-파키스탄 대분리와 카슈미르 전쟁,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인도네시아 국민혁명, 말레이시아 69년 종족 폭동, 아프가니스탄 내전, 중동의 여러 전쟁과 내전 등이 그러하다. 1950년 한국전쟁 또한 크게 보면 민족국가 형성 과정의 폭력에 해당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짧게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선언, 길게는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길고 긴 싸움 역시 민족국가 형성 과정의 진통이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유대인 국가

널리 알려졌듯이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긴 세월 동안 박해와 따돌림을 당하며 살았다. 그러다 19세기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이 속속 민족국가를 만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유대인 민족국가를 세우자는 열망이 생겨났다. 이를 최초로 공론화시킨 인물이 오스트리아의 언론인이었던 테오도어 헤르츨이다.

헤르츨은 1896년 발간한 저서 <유태인 국가(Der Judenstaat)>에서 조상 대대로 ‘약속의 땅(에레츠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해온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민족국가가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국가 건설 과정이 전쟁과 폭력 속에서 진행될 거라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근대적인 사상과 과학기술로 문명화된 유태인들이 낙후된 중동지역으로 이주해 그 지역을 유럽처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발전이 중동지역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낭만적인 포부로 가득했다.

이는 ‘그 땅’의 현실을 모르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봐야 한다. 고귀한 이상이라는게 사실은 왜곡되고 굴절된 현실인식에서 출발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던가. 당시 유럽인들이 중동과 아시아를 바라보았던 오리엔탈리즘이 유럽의 유대인들의 ‘약속의 땅’ 비전에도 고스란히 담겼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고 나라를 세우는 과정은 폭력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나라 없는 설움에 시달리던 유럽 여러 나라의 유대인들은 세계시온주의기구(WZO)를 결성하고 조상들의 땅이라고 믿어온 가나안 지역, 즉 팔레스타인 지역에 신생 유대인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시온주의 운동'을 벌였다. 1차 대전 중이었던 영국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로스차일드 가문등 런던의 금융계 유대인들의 협조를 구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했다(밸푸어 선언).

이후 WZO은 세계 각국의 유대인들로부터 모은 기금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의 토지를 매입해 유대인들의 이주를 장려했다.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아랍인과 이주해온 유대인 간에 폭력 충돌이 빚어졌고 그 횟수와 강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높아져 갔다. 밸푸어 선언 이후로는 유대인이 더 많아졌다. 당시 이들의 모습은 서부개척시대의 미국 백인들과 비슷한 점이 많다.

1947년 UN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를 각각 세우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 얘기되는 2국가 체제론이다. 유럽과 러시아 등에서 온갖 박해를 경험하며 조그마한 땅이라도 '내 나라'를 갖는 것이 염원이었던 유대인들은 UN의 결정을 받아들였지만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아랍인들은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너와 나는 다른 민족이며 이 땅은 너희의 조상의 땅이 아니라 내 조상과 나의 땅’이라는 인식에서다.

1948년 드디어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이 세워졌다. 하지만 건국 이전부터 전개되던 아랍-유대 간 갈등은 이스라엘 건국 선포를 기점으로 폭발했다. ‘그 땅에 살던 팔레스타인인들보다도 이집트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인정하지 않고 힘을 통해 지상에서 지워버리겠다며 이스라엘을 공격해 들어왔다.

하지만 치열한 싸움 끝에 이스라엘은 나라를 지켜냈다. 1967년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의 점령지역은 더 늘어났다. 이때 형성된 국경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경계선이다.

이스라엘 영토 분쟁사. 1948년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이 세워졌다. 하지만 이집트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인정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공격해 들어왔다. 이스라엘은 나라를 지켜냈고 1967년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의 점령지역은 더 늘어났다. 이때 형성된 국경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경계선이다. / 사진=연합뉴스
이스라엘 영토 분쟁사. 1948년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이 세워졌다. 하지만 이집트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인정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공격해 들어왔다. 이스라엘은 나라를 지켜냈고 1967년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의 점령지역은 더 늘어났다. 이때 형성된 국경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경계선이다. / 사진=연합뉴스

’유대 민족국가‘에서 ’이스라엘 민족국가‘로

이스라엘은 이주민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처음에는 유럽에서 건너온 유대인들(아쉬케나짐)이 건국을 주도했지만, 일단 나라가 세워진 다음에는 비유럽 지역의 유대인들도 대거 이주해와 출신지 구성이 다양해졌다. 동유럽과 남유럽, 러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등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인 유대인들은 각기 언어, 문화, 전통, 피부색이 달랐다. 1949년 첫 인구조사 당시 이스라엘 국민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무려 20가지에 이르렀다.

이 다양한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믿는다는 것과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여긴다는 점 이외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신생 이스라엘은 이들을 한데 묶어 이스라엘의 주권자 자격을 가진 이들, 즉 '이스라엘 민족'으로 재탄생시켜야 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유대 민족'과 별개의 작업이다. 유대인에 대한 뚜렷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대 율법인 '할라카'에 따르면 "(그가 유대교인이건 아니건 간에)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낳은 사람은 유대인"이라고 규정한다. '유대인'의 조건으로 종교나 유대인 관습 준수 여부는 상관이 없다는 뜻이며, 인종적으로 유대인을 정의한 것이다. 하지만 새로 건국한 신생 독립국 이스라엘은 인종적 유대인을 기준으로 구성원을 정의할 수 없었다. 생각과 문화가 너무나 다른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였고 이들을 인종적으로 검증할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흔히 이스라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는 달리 초기 이스라엘은 유대교를 국가 정체성의 근간에 놓지 않았다. 이스라엘 건국 주도 세력은 사회주의자였으며 이 가운데에는 심지어 무신론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건국 이후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정치를 주도한 정당은 노동당이었는데 이스라엘의 키부츠는 사회주의 집단 농장 모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맨땅에서 시작한 신생 국가 이스라엘은 하나부터 열까지 국가가 개입했다.

이주민들에게 제공할 주택도 노동당 정부가 짓고, 공장도 노동당 정부가 세웠으며, 토지 분배와 일자리 제공도 노동당 정부가 주도했다. 유럽 자유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은 노동당 간부들은 유대교 대신 유럽 민족국가의 모델을 따라 새로운 국가 표준을 정하고자 했다. 언어와 관습, 전통, 종교 의식, 국가관 등 여러 면에서 표준화가 진행됐으며, 이스라엘 정부는 군과 학교를 통해 이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을 만들어 나갔다.

초기 이스라엘의 군 복무 기간은 남성 6년, 여성 1~2년이었는데 여기서 군사 훈련뿐만 아니라 새로운 공용어와 이스라엘 국가 정체성 등의 교육을 집중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으로의 통합을 도모했다.

이스라엘이 '유대인 민족국가'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대인 인구를 늘리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1950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제정된 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법이라고 평가받는 '귀환법'이 만들어졌다. “모든 유대인은 조국으로 이주할 권리를 지닌다”는 것이 귀환법의 핵심 내용으로서 세계 모든 유대인들에게 자동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하고 이스라엘 국가 건설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아랍인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같은 땅에 살고 있는 아랍인보다 멀리 떨어진 해외 거주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겠다는 것이 이 법의 의도였다. 이 결과 에티오피아에서 검은 유대인 수만명이 새 시민으로 등장했다. 현대문명과 동떨어져 살던 블랙 유대인들은 1년 정도 집단시설에서 거주하며 양변기 사용법 등을 익힌 뒤 사회에 진출하곤 했다. 이스라엘 크네세트(국회)에는 지금도 ‘러시아 이민자당’이라는 정당이 있다. 러시아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정당이다.

2018년 건국 70주년을 맞아 이스라엘은 '민족국가법'을 통과시켰다. 1950년 귀환법의 정신을 이어받는 법으로서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의 역사적 조국이며, 유대인들은 배타적 자결권을 지닌다"는 것이 이 법의 골자이다. 뻔한 말인 것 같지만 사실 이 법은 뻔하지 않다. 이스라엘에는 유대인이 아닌 이들도 시민권을 가지고 산다. 이스라엘 인구 가운데 약 20퍼센트 정도가 아랍계 이스라엘인이다. 즉 이스라엘 독립 전부터 이 땅에 살던 아랍인들의 후손들이다. 그런데 민족국가법에서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의 조국"이라고 못을 박아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유대인 민족국가임을 선포한 것이며 동시에 아랍계 이스라엘 시민권자들을 '이스라엘 민족'에서 배제시킨 셈이다. 민족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주권자로서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2018년 건국 70주년을 맞아 이스라엘은 '민족국가법'을 통과시켰다. 1950년 귀환법의 정신을 이어받는 법으로서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의 역사적 조국이며, 유대인들은 배타적 자결권을 지닌다"는 것이 이 법의 골자이다. / 사진=셔터스톡
2018년 건국 70주년을 맞아 이스라엘은 '민족국가법'을 통과시켰다. 1950년 귀환법의 정신을 이어받는 법으로서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의 역사적 조국이며, 유대인들은 배타적 자결권을 지닌다"는 것이 이 법의 골자이다. / 사진=셔터스톡

이스라엘의 인구 문제 – 민족국가의 불완전성

그렇다면 이제 유대 민족국가인 이스라엘은 완성된 것인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선 영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지정된 동예루살렘이나 요르단강 서안지구 역시 자신들이 돌려받아야만 하는 땅이라고 여긴다. 솔로몬 성전이 있었던 동예루살렘이나 역사적 장소인 헤브론, 제리코(여리고) 등이 포함된 서안지구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곳이다.

국제사회의 결정에 따라 동예루살렘 및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넘겨주었지만 언젠가는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지지를 받고 있다. 유대인들 스스로 '이스라엘은 완성되지 않은 국가'라고 여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인구 구성에 있다. 2023년 기준 이스라엘의 총인구는 약 970만명이다. 이 가운데 유대인이 715만명(73.5%), 아랍계가 205만명(21%), 기타가 50만명 가량이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의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거주하는 또다른 아랍인 인구가 약 540만명 가량이다. 팔레스타인 인구와 이스라엘의 아랍계 인구를 합치면 740만명이 넘는다. 이스라엘의 유대인 인구보다 많다는 것이다. 게다가 2020년 기준 팔레스타인의 출산율은 3.57로 2.90인 이스라엘보다 높다. 만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합병할 경우 통합 이스라엘에는 아랍계 인구가 유대계 인구보다 많아진다. 유대 민족국가를 지향하는 이스라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다.

면적도 좁은 데다가 인구도 많지 않기 때문에 큰 전쟁에서 한 번 패하면 나라가 없어지고 유대인이 멸절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지배해왔다. 게다가 건국 직후부터 주변 여러 나라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많은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일상의 긴장 수위도 높다. 이란의 핵개발에 가장 민감한 나라가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인들은 이란이 핵무기를 가질 경우 그 타겟은 이스라엘이 될 거라고 여긴다. 국토가 크지 않은 좁은 이스라엘은 딱 한 번의 핵공격에 소멸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이스라엘인들은 그런 만큼 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기도 하다.

이스라엘이 전쟁 중 자국 시민의 인명 피해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필자는 작은 인구에서 찾는다. 이스라엘군의 작전 개념은 아군의 사상자가 최소화되는 효율적인 전투를 지향한다. 전면전보다는 암살이나 특수작전을 통한 목표 달성을 중시하며,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신속한 작전 실행으로 빠른 시간 내에 적을 물리치는 훈련을 해왔다.

수시로 날아드는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로켓포 공격을 막기 위해 최강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으로 불리는 '아이언 돔'을 개발해 실전배치한 것도 적은 인구로 살아남기 위한 이스라엘의 노력이다. 만일 전쟁이나 작전 중 많은 이스라엘군 사망자가 나올 경우 여론의 비판도 커진다. 인명 손실에 민감한 이스라엘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사례가 길라드 샬릿(Gilad Shalit) 인질 사건이다. 2006년 하마스에게 잡혀 5년간 감금됐던 이스라엘 병사 길라드 샬릿을 구출하기 위해 2011년 이스라엘 정부는 1000여명의 팔레스타인 수감자를 석방한다. 1 대 1000의 인질 교환이 이뤄진 것이다.

2006년 하마스에게 잡혀 5년간 감금됐던 이스라엘 병사 길라드 샬릿을 구출하기 위해 2011년 이스라엘 정부는 1000여명의 팔레스타인 수감자를 석방한다. / 사진=연합뉴스
2006년 하마스에게 잡혀 5년간 감금됐던 이스라엘 병사 길라드 샬릿을 구출하기 위해 2011년 이스라엘 정부는 1000여명의 팔레스타인 수감자를 석방한다. / 사진=연합뉴스

이스라엘 입장에서 볼 때 자국 영토 내에 존재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이스라엘의 민족국가 건설 노력에 계륵보다 심한 아킬레스건이다. 이스라엘 영토 내의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거주하는 약 540만명 가량의 아랍인(팔레스타인인) 문제다. 팔레스타인을 분리해 독립을 시킬 수도 없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팔레스타인 지역이 장차 되찾아야 할 조상들의 땅이라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팔레스타인 완전 독립을 용인할 수 없는 현실적인 장애물도 존재한다.

팔레스타인이 독립국가가 된다면 군대를 보유하게 될 것이고, 아마도 그 군대의 총구는 이스라엘을 향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그립에서 벗어난 팔레스타인이 세계를 대상으로 외교와 무역을 하고 아랍권 등에서 투자를 받아 경제성장에 나선다면 이스라엘로서는 강력한 개발도상국 팔레스타인과 국경을 맞대야 할지도 모른다. 이 국가는 당연히 무장 민병대 정도가 아니라 정규군을 보유할 것이고. 오랫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을 박해하며 증오와 원한의 쳇바퀴를 돌려온 이스라엘은 반대로 그 세월의 업에 묶여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된 셈이다.

2부는 10월 19일 <팔레스타인의 입장에서 본 민족국가>로 업로드됩니다.


글쓴이 박정욱은
직업은 라디오 PD이나 역사책을 읽는 것이 최고의 취미인 역사덕후. 특히 중동과 러시아 인도 등 '아시아의 서쪽, 에덴의 동쪽'이 어찌 돌아가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종교와 정치가 만나는 역사를 흥미롭게 공부하고 있다. 9·11 테러 이후 국제 정치의 핵심에 서 있는 중동에 대한 안내서가 부족하다고 느끼던 중 직장이 6개월간 장기파업에 들어가면서 시간이 주어진 것을 계기로 중동 역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2018년에 <중동은 왜 싸우는가?>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