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소라의 다시 들추는 책장] #9. 김선민 전 심평원장의 책을 만들다

조직의 수장이 된 전문직 여성의 성공 스토리? 하지만 다른 글이 왔다

담날질환, 대장암, 우울증... 의사도 환자일 수 있다는 깨달음

환자의 마음을 아는 의사가 바라본 대한민국 공공의료의 민낯

최근 정치인으로 또다른 도전, 책이 곧 세상에 내건 출사표가 되었다

30년 경력의 편집자가 쓰는 책 만들기 천일야화 '배소라의 다시 들추는 책장'. 이번 아홉번째 글은 한국 공공의료의 여러 현장에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개척해왔던 김선민 전 심평원장의 책 《아픈 의사, 다시 가운을 입다》를 소개한다. 의대생 시절부터 선천성 담낭질환, 대장암, 우울증 등 여러 병력을 거쳤던 김선민 전 원장은 누구보다 의료 현장에서 환자의 위치에 공감할 수 있는 의사였다. 성공 스토리를 다룬 자기계발서로 출발했던 책은 한국 공공의료의 여러 현실과 교차하는 개인사가 담긴 담담한 산문으로 세상에 나왔다. 개인의 경험이 세상에 어떻게 기록으로 남고, 독자에게 도움이 될까. 시대는 어떻게 이 목소리를 기억할까. 그 질문을 내내 마주했던 과정의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 주] 

1월 6일, 메디치미디어 사옥 지하 스튜디오에서 열린 김선민 작가의 북콘서트 모습. 김선민 작가는 "제 인생 굽이굽이마다 함께 하며 지지해주신 분들께 책을 바칩니다."라는 인사말로 함께해준 가족, 친구, 동료, 지인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 사진=김선민 작가 페이스북

강원국 작가가 연결해준 인연

2023년 2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강원국 작가님이 카톡을 보내왔다. "똑똑. 김선민 심사평가원장님과 친분이 있는데 메디치에서 책을 내고 싶다고 하시네요. 인권위원회 일도 했고, 아주 좋은 분입니다. 만나보면 아실 거에요. 배실장님 연락처 알려드렸으니 월요일 오후에 전화 하실 거예요." 

강원국 작가님뿐만 아니라 메디치의 기존 저자들은 주변 지인들이 책을 쓰고 싶어하면 나를 연결해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 저서가 있으면 어떤 책인지 찾아보고, 저서가 없다면 먼저 프로필을 살핀 뒤 관련 기사가 있는지 알아보는 게 내 루틴이다. 

김선민 원장님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프로필을 살폈는데 서울대 의대 출신의 현직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줄여서 심평원장이라 부름)이라는 이력이 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무슨 일을 하는 곳이지?’ 나는 그때까지 심평원이 어떤 곳인지 몰랐다. 

월요일에 출근해서 대표님께 여쭤보니 “심평원은 의료계에서 엄청난 파워를 갖고 있는 조직입니다. 병원과 약국 등에서 청구하는 내역을 파악해서 적절성 여부를 평가하는 곳이에요. 심평원장의 이야기라면 책이 될 만할 것 같네요.”라고 말씀하셨다. 

서칭을 해보니 심평원은 건강보험공단과 함께 공공의료를 책임지는 한 축이었다. ‘알고 보니 굉장한 곳이었네.’ 더구나 이 분은 조직 역사상 유일한 여성 원장이었다. ‘성공한 전문직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가려는 걸까? 그렇다면 자기계발서가 되겠군.’ 나름대로 내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후에 낯선 이에게서 카톡이 왔다. 김선민 원장이었다. 전화통화 가능한 시간을 묻기에 괜찮다고 말했더니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김선민입니다. 강원국 작가님께 연락처를 받아서 전화 드립니다. 제가 책을 쓰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너무나 또랑또랑하고 맑은 목소리 덕분에 내 기분도 왠지 유쾌해졌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현직에 계신데 집필하실 시간이 나시겠어요?”

“제가 3월 10일에 임기가 끝이 나요. 그러고 나면 시간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러시군요. 저는 저자와 처음부터 같이 기획을 해나가는 걸 선호합니다. 제가 기획안 샘플과 양식을 보내드릴 테니 파란색으로 표시한 항목을 채워서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환자의 마음에 공감하는 의사

김 원장은 바로 다음 날 오후까지 기획안을 채워서 보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공부 잘하고 성실한 모범생 저자들의 특징이다. 짬짬이 시간을 내 기획안과 목차를 들여다보다 ‘이렇게 쓴다면 이거 자기계발서가 아닌데….’ 며칠 뒤 김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솔직히 좀 의외였습니다. 성공스토리를 쓰실 줄 알았는데, 환자이자 여성인 소수자로서 정체성과 문제의식을 많이 쓰셨더군요.”

“저는 늘 소수자라는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의사이기 전에 환자였고 여성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인권위에서 일했고, 일반 의사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던 것 같아요. 제가 걸어왔고 극복했던 내용을 후배 여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원장님, 그렇다면 지금 목차 중에서 제일 자신 있게 써나가실 수 있는 꼭지를 2개 정도 골라서 샘플원고를 써보세요.”

“분량은 얼마나 쓰면 될까요?” 

“A4 용지에 글자크기 10pt, 행간 16pt 기준으로 3.5장~4.5장 분량으로 샘플원고 2편을 써서 보내주시면 다시 이야기 나누시지요.”

그 후 저자는 2주가 넘게 연락이 없었다. 그 사이 심평원장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다는 것을 언론보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퇴임식 4일 뒤 김 원장이 늦어져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초고 3편을 보내왔다. 

초고를 읽은 느낌은 놀라웠다. 의대생 시절 선천성 담낭질환으로 수차례의 수술과 힘든 투병기를 보냈고, 마흔에는 대장암 수술과 투병에 이어 우울증으로 고생한 경험까지 있었다. ‘정말 극적인 인생을 살아오셨구나. 누구보다 환자의 마음에 공감하는 의사겠구나.’ 김 원장은 글을 꾸준히 한두 편씩 써서 보내왔고 3월말 사무실에서 점심 미팅을 하게 되었다. 

직접 만난 저자는 우울증을 겪었던 사람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환한 미소와 명랑한 목소리를 지닌 분이었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운 시간이 이어지는 가운데 김 원장은 수시로 원고를 보내는 데 대해 변명을 했다.

“실장님, 제가 아플 때 빼놓고는 일을 안 하고 쉰 적이 없어서 자꾸 글을 쓰게 되네요.”

“괜찮습니다. 원장님 지금까지 주신 원고에 대한 피드백과 함께 제가 목차를 조정해 보내면서 콘텐츠 구성안 샘플을 보내드릴게요. 내용은 충분하지만 메시지가 하나로 잡히지 않는 느낌이 있어요. 구성안을 짠 뒤 원고 수정과 추가 집필을 하시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미팅을 마치고 나는 그동안 김 원장이 보낸 개별 원고에 대한 피드백과 함께 콘텐츠 구성안 샘플 파일을 보냈다. 엑셀에 세부목차를 표시한 뒤 그 세부목차 안에 어떤 에피소드와 메시지를 넣을 것인지 정리하는 파일인데, 단행본 원고를 본격 집필하기 전 그리는 설계도다. 집필 방향성을 잃지 않고 흐름을 유지하면서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는 유용한 도구다. 

김선민 작가와는 일하기가 수월했다. 콘텐츠 구성안의 샘플을 보내주었더니 이내 본인이 써야 할 내용을 채운 구성안이 돌아왔다. 기획과 집필을 위한 기초 설계도에 해당하는데, 특히 처음 책을 써보는 저자들에게 유용하다. / 자료 제공=배소라
김선민 작가와는 일하기가 수월했다. 콘텐츠 구성안의 샘플을 보내주었더니 이내 본인이 써야 할 내용을 채운 구성안이 돌아왔다. 기획과 집필을 위한 기초 설계도에 해당하는데, 특히 처음 책을 써보는 저자들에게 유용하다. / 자료 제공=배소라

태백의 '낭만닥터 김사부'가 바라본 공공의료

내가 보낸 샘플을 받은 김 원장은 부지런히 구성안을 채워서 보냈다. 쓰고 싶은 메시지를 각종 에피소드에 두루 담아서 산만한 느낌이었는데, 구성안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다시 살펴보니 ‘사회와 의료를 연결하는 일에 종사해온 의사가 환자와 여성으로서 바라본 공공의료에 관한 이야기’ 콘셉트가 명확해졌다. 

이제 설계도는 그렸으니 원고 집필을 향해 달려야 하는 시점. 초고에 대한 나의 피드백과 글쓰기의 유의사항은 이랬다. 하나, 개별꼭지에서도 기승전결이 확실하게 있어야 한다. 둘, 개별꼭지의 완결성과 더불어 한 챕터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연작으로 이어진 8폭 병풍을 그린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셋, 가능하면 도입은 개인적인 경험의 스토리나 에피소드, 읽거나 본 사례 등 구체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넷, 마지막에는 그 꼭지에서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명확히 기술한다. 다섯, 초고를 완성한 뒤 하루 정도 시간을 두고 다시 읽으면서 장황하거나 늘어지는 부분은 삭제하고 압축한다.

그렇게 김 원장은 내 피드백에 따라 기존에 쓴 원고를 고치고 나서 본격적으로 원고 집필을 시작했다. 중간에 콘텐츠 구성안도 다시 한 번 바꾸면서 꾸준히 원고를 써나갔다. 1~3장 초고를 완성한 시점이 8월초. 기획안 작성에서부터 5개월가량 걸린 셈이었다. 그러고 나서 2주 동안 동안 딸들과 해외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그리고 한 달 뒤 그녀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왔다. 9월 18일부터 태백병원에서 직업환경의학과장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평원장이라는 큰 직책을 맡았던 사람이 지역의 재해 전문 공공의료기관에서 다시 가운을 입고 일한다니. 중간에 결합해 책의 편집을 맡은 엄은희 팀장은 태백의 낭만닥터 김사부의 현신이라며 그녀의 선택을 멋지다고 칭송했다. 

추석이 지나 본격적인 마지막 수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엄 팀장은 일부 구성을 다소 변경하고 초고에 대해 일일이 피드백을 하며 수정요청을 했다. 김 원장은 전혀 귀찮아하지 않고 1차 수정에 이어 2차 수정까지 마쳤다. 퇴근 후 사택에 돌아가 저녁 시간을 오롯이 책 집필에 쏟아 부은 것이다. 그렇게 11월 초에 최종 원고가 완성되었다.

《아픈 의사, 다시 가운을 입다: 병원과 사회를 이어가는 의사 김선민이 꿈꾸는 세상》, 김선민 지음, 메디치미디어, 2024. 

다시 가운을 입은 의사, 그리고 그가 세상에 던진 출사표

제목 회의에서 결국 김 원장의 정체성인 ‘다시 가운을 입다’는 것이 키워드로 떠올랐고 <아픈 의사, 다시 가운을 입다>라는 제목으로 확정되었다. 저자의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 경우에는 명사가 추천사를 써주는 것이 중요한데 저자의 인맥으로 쉽게 해결이 되었다. 

저자를 메디치에 소개한 강원국 작가, 코로나 팬데믹 시절 함께 위기를 극복했던 정은경 전 질병청장, 저자가 자문을 해주었던 드라마 <라이프>의 이수연 작가가 그들이었다. 특히 정은경 전 청장은 저자를 ‘어려운 길,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 ‘공공 영역에서 국민의 건강을 위해 걸어온 의사’라고 소개했다. 이것이 저자를 지칭하는 핵심일 것이다. 

책은 편집과 디자인, 제작과정을 거쳐 1월 5일에 출간되었고 1월 6일 토요일 오후 메디치스튜디오에서 김 원장의 전 동료들과 선후배들이 모여 북콘서트가 진행되었다. 얼떨결에 사회를 맡아 진행하게 되었다. 30명 규모의 공간에 40여명이 몰려 발 디딜 틈 없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사회자와 저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함박웃음을 터트려주는 관객들의 모습에 이들이 저자를 얼마나 좋아하고 응원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는 추천사를 쓴 정은경 전 청장이 깜짝 게스트로 참여했다. 정 청장은 공공의료의 영역을 함께 걸어온 김 원장에 대한 동료애와 함께 그 기록을 출간한 김 원장의 성실함을 칭찬했고, 관객들은 코로나 팬데믹 극복에 공을 세운 두 사람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김 원장의 책 출간 소식은 의료계에 화제가 되었고 언론 여러 곳에서 책 소개 서평과 저자 인터뷰 기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아무리 개인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도 이 사회의 사각지대인 소수자 인권과 공공 의료를 다룬 묵직한 주제 탓일지,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은 탓인지 판매량은 기대에는 다소 미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비록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꾸준히 팔리고 있으니 언젠가는 이 책의 효용과 의미를 아는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최근에 의대증원으로 인한 의사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우리나라 의료 문제의 해결책이 공공 의료임을 어필한 저자의 인터뷰가 화제가 되고 있다. 소외된 이들에게 사회적 연대의 손길, 즉 공공의료를 제공하는 것이 책의 부제처럼 병원과 사회를 이어가는 의사 김선민이 꿈꾸는 세상이 아닐까. 공공 의료 정책의 실현을 위해 출사표를 던진 의사 김선민이 꿈꾸는 세상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