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는 요즘 돈이 넘쳐흐르는 ‘유동성 과잉 시대’를 겪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경기를 살리기 위해 살포했던 뭉칫돈이 국경을 넘나들며 금융시장과 실물경제를 휘젓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부동자금이 국채 시장으로 몰려 시장금리가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하지만 기업 투자 마인드는 살아나지 않는다. ‘미래 불확실성’이라는 유령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더욱 심각하다. 1200조 원으로 추정되는 부동자금이 채권, 해외자산, 부동산 등으로 옮겨 다니며 부동산값 폭등과 상대적 박탈감을 부채질하고 있다. 과거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뉴 노멀’ 현상 앞에서 각국의 정부와 중앙은행은 속수무책이다. 경기침체가 두려워 부동자금을 수습하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있다. 팽창적 통화정책이 부동자금만 키우지 않고 생산과 고용으로 이어지게 하려면, 중앙은행과 상업은행들이 변해야 한다. 은행업의 초기 전통을 되살려 ‘담보 대출’보다 실물 거래·투자에 초점을 맞춰 뒷받침하는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실물과 화폐의 가교 역할을 되살리는 것이다. 은행의 역할은 투자은행과도, 보험회사와도, 대부업자와도 달라야 한다. [편집자] 유럽·일본, 마이너스(-) 금리 행진 국채 발행액 17조 달러가 (-)금리 돌아보건대, 2019년은 세계 경제에 미중 무역전쟁의 해였다. 연초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는 두 나라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면서 노심초사해 왔다. 그 바람에 아주 중요한 현안임에도 별로 주목받지 못한 일이 있다. 바로 마이너스 금리 행진이다. 어쩌면 무역전쟁보다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거나 당장은 고통이 덜하다는 이유로 각국 정부가 무심코 흘려보내고 있다. 마이너스 금리의 진원지는 유럽과 일본이다. 유로 지역(0%)과 스웨덴(-0.25%), 덴마크(-0.75%), 스위스(-0.75%), 그리고 일본(-0.1%)의 중앙은행들은 수년째 정책금리를 제로 이하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올해 들어서는 정책금리를 넘어서 시장금리까지 마이너스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현재 독일 국채는 발행액의 80%, 덴마크 국채는 100%가 마이너스 금리로 거래된다. 주요 선진국들의 국채 발행액 중 25% 정도가 현재 마이너스 금리를 기록하고 있다. 금액으로는 17조 달러를 넘는다. 올해 초에는 그 규모가 8조 달러 정도였으니, 10개월 만에 두 배 넘게 늘었다. 깜짝 놀랄 수준의 증가세다. <그래픽 참조> 마이너스 금리가 잘 실감나지 않으니 예를 들지 않을 수 없다. 1년 만기 독일 국채의 시장금리(수익률)가 –0.6%라는 말은 100유로짜리 국채가 100.6유로(=100/(1-0.006))에 거래된다는 말이다. 1년 뒤에나 받을 100유로에 0.6유로의 웃돈(프리미엄)을 붙여주니 이것은 ‘금융 상식’에 대한 반란이다. 기업들, 투자·고용·배당 모두 꺼려 (-)금리는 절망감의 ‘금융적 표현’ 어떤 것에 프리미엄이 붙는다는 것은 희소성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채권은 골동품이나 기념우표와 다를 바가 없다. (독일 국채가 정확히 그러하다. 경기침체보다 재정적자를 더 무서워하는 정부 때문에 독일에서는 국채가 품귀현상을 보인다) 은행, 연기금, 보험사, 증권회사 등 내로라하는 굴지의 기관투자자들의 채권투자 활동이 골동품 수집과 다를 바가 없으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기가 막힌 일의 근원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있다. 일본과 유럽 대륙은 저출산으로부터 시작되는 인구 감소, 거기서 생기는 고령화, 저성장 등 장래가 암울하기만 하다. 그래서 대기업들은 투자와 고용은 물론 배당까지 자제하며 막연히 현금만 지킨다. 그런 상황에서 중앙은행의 팽창적 통화정책은 마이너스 금리를 부추긴다. 마이너스 금리정책의 목표는 은행들이 대출을 늘려 소비와 고용을 촉진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은행의 기업대출은 엉거주춤하다. 은행이 생각하기에 장래가 불투명한 중소기업 대출로 원금을 날리느니 차라리 마이너스 금리일망정 안전한 국채에 투자하여 소소하게 손해를 보는 것이 낫다. 그래서 팽창적 통화정책이 국채의 프리미엄만 높이게 된다. 결국 마이너스 금리 행진의 본질은 심리적 위축과 ‘돈맥 경화’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 즉 절망감의 금융적 표현이다. 그것이 2019년 유럽·일본 경제의 현주소다. 돈맥 경화, 한국 경제도 예외 아냐 DLF 사태, 부동산값 폭등을 유발 유럽·일본의 마이너스 금리 행진이 강 건너 불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그것 때문에 금년 하반기에 홍역을 치렀다. 1~2년 전 개인과 기관투자자들은 ‘설마 선진국 시장금리가 마이너스 수준까지 떨어지랴’ 생각하고, 고수익을 추구하는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에 베팅했다가 이자는커녕 원금까지 몽땅 날리는 사태를 맞았다. 투자자들의 망연자실 속에서 감독 당국은 DLF를 판매한 은행들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우리나라가 DLF 사태를 겪는 근본 원인도 사실은 돈이 잘 돌지 않는 현상, 즉 ‘돈맥 경화’에 있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아 멀리 유럽 시장까지 기웃거린 것이다. 국내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시중 부동자금은 물밀 듯이 부동산시장으로 몰려든다. 서울과 수도권 아파트값은 소비·투자 심리의 위축 속에서도 6년 연속 상승하여 신기록을 세웠다. 지난주에 정부는 부동산시장의 비이성적 흥분을 잠재우기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부동산시장 과열의 뇌관이 되는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시장을 억제하는 게 큰 골자였다. 이는 근원적 해법이라기보다 대증요법에 가깝다. 더구나 부동산 PF 시장의 급팽창은 정부 스스로 초래한 측면이 강하다. 정부가 발표한 대로 지난 5년간의 부동산 PF 시장 급팽창은 증권사들이 주도해 왔다. 그리고 부동산 PF에 대한 증권사 대출은 종합금융투자사업자(8개)가 앞장서고 있다. 미국식 투자은행 육성하다 부동산 PF 급팽창만 불러 우리 정부는 몇 년 전부터 종합금융투자사업자의 부동산대출을 사실상 장려해 왔다. “혁신적 모험자본의 공급 확대”를 목표로 발행어음이나 어음형 CMA의 취급을 허용하면서 자금조달수단을 은행 수준으로 넓혀준 것이다. 부동산 PF에 대한 대출과 보증이 과연 혁신적 모험자본 공급에 해당하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미국식 투자은행을 모델로 삼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골드만삭스와 같은 미국 투자은행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모두가 전통적 상업은행으로 탈바꿈했다. 또한 상업은행들은, 엊그제 세상을 떠난 폴 볼커 전 연준 의장의 제안(Volcker rule)에 따라 일탈적 투자활동이 일절 금지된다. 그래서인지 미국은 중소기업 대출이 줄어들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돈맥 경화라는 말도 들리지 않는다. 은행업 초심으로 돌아가야 ‘돈맥 경화’ 치유할 수 있어 바로 이것이다! 유럽이든, 일본이든, 한국이든, 돈이 잘 돌지 않는 현상의 근본적 치유책은 은행업의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금융의 진화과정을 뒤돌아보면, 은행업의 출발은 어음할인(discount)이었다. 그것이 대부업(usury)과의 근본적인 차이다. 유럽의 은행들은 대부업을 금지하는 교회법 때문에 전전긍긍하다가 선하증권 같은 환어음을 할인(매입)하는 방법으로 여신 업무의 활로를 찾았다. 환어음(bill of exchange)은 상품을 배에 싣고 외국에 가서 팔고 오기 위해서 발행되는 서류라서 그것을 거래하는 것은 대부업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다만 대부업자들이 취급하는 융통어음(promissory note)과 달리 실제 상거래 때문에 발행되고 유통된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다. 그래서 생긴 거래 관행이 어음 배서(endorsement)다. 어음을 거래할 때마다 어음 뒷면에 꼬박꼬박 매도자의 이름을 적도록 하는 절차다. 어떤 어음이 일부분만 환어음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배서인 하나하나가 어음의 진실성을 보증하고 연대하여 상환을 책임지도록 한다. (이것이 배서의 보증기능이다) 그래서 어음은 주식이나 채권과 달리 액면분할이 금지된다. 르네상스 시절 서양의 교회법이 우리나라의 어음법을 포함하여 전 세계의 법률에 남긴 흔적이다. 아무튼 은행업의 근간은 환어음의 할인이다. (융통어음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환어음은 진성어음 또는 상업어음이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20세기 초까지는 상업은행이나 중앙은행이 여신을 할 때 주로 어음할인에 의존했다. 나폴레옹전쟁과 같은 특수한 환경이 아니라면, 담보부 대출은 전체 여신의 30%를 넘지 않았다. [caption id="attachment_4284" align="alignnone" width="523"] 출처: 유럽중앙은행(Jobst and Ugolini(2014), “The coevolution of money markets and monetary policy, 1815-2008”, Working Papers Series no. 1756).
*오스트리아, 벨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위스, 미국[/caption] 은행보다 신용카드사들이 은행업 초기 영업방식 유지 오늘날 은행업의 전통을 가장 잘 살리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은행이 아니라 신용카드회사다. 요즘은 전산화되어 실물을 구경하기 힘들지만, 신용카드회사들은 상점 주인 등 판매인(가맹점)에게 ‘신용카드 매출전표’를 매입한 다음 한 달 뒤 이를 구매인(신용카드 사용자)에게 제시하고 대금을 회수한다. 환어음을 할인했다가 만기일에 어음교환을 통해 발행인에게 자금을 회수하던 초기 은행의 영업 방식과 똑같다. 신용카드 매출전표나 상업어음은 그 자체가 발행인에 대한 청구권(claim)이기 때문에 이를 할인(매입)할 때 따로 담보를 요구하지 않는다. 또한 어음할인은 부대비용도 작다. 담보대출을 하려면 담보물의 가치를 확인하고 평가하는 데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걸린다. 반면, 어음할인은 서울 명동의 사채업자가 사무실 책상에서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다. (은행을 뜻하는 bank는 책상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banca에서 나왔다). 유사시에 배서인 누구에게라도 대금 상환을 요구할 수 있는, 강력한 안전장치(연대책임)가 있기 때문이다. 담보대출·채권투자 매달리면 안돼 어음할인의 더 큰 장점은 실물거래와 직결된다는 점이다. 신용카드회사는 전국의 음식점, 상점, 영화관 등 수백만 곳의 가맹점에서 어떤 상거래가 일어났는지 전부 확인할 수 있다. 소위 ‘카드깡’이 아닌 이상 모든 신용카드 거래는 실물거래의 결과다. 그래서 사기나 부도의 확률이 낮다. 만일 우리나라의 은행들이 신용카드회사처럼 자금의 용도나 여신의 원인행위를 파악하고 신용을 제공한다면, 대출 사기나 부도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상업은행들은 유감스럽게도 초심을 잃었다. 어음할인보다 담보부 대출과 채권투자를 더 좋아한다. 물론 외국에서도 상업어음 할인이 퇴조하고 담보부 대출이 주를 이룬다. 지난 세기에 풍미했던 통화주의(monetarism)의 영향이다. 통화주의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한다. 돈을 풀 때 ‘담보부 대출이냐, 상업어음 할인이냐, 채권 매입이냐’ 같은 신용경로(credit path)를 구분하지 않고 최종적인 결과, 즉 통화총량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러니 중앙은행의 양적 완화가 생산·고용 등 실물부문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정책당국 실수까지 겹쳐 상황 심각 우리나라는 통화주의에 더해서 정책당국의 실수까지 겹쳐 상황이 더 심각하다. 2014년 한국은행은 ‘금융기관 대출규정’에서 어음할인의 근거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 결과 한국은행의 여신액 25조 원 가운데 기업의 실제 경제활동이 확인되는 것은 1조5000억 원(무역금융지원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대출자의 자격과 담보만 확인하고 자금을 공급한다. 한국은행이 신용경로에 관심이 없으니 상업은행들의 여신활동도 실물부문과 괴리된다. 20년 전에는 상업은행 여신 중 70%가 상업어음 할인, 무역금융 등을 통해 구체적인 실물거래와 직결되었으나 현재는 그 비율이 30% 미만이다. 나머지는 실물경제 활동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 담보부 대출이 차지한다. 은행들은 과거에 비해 어음발행이 확연히 줄어서 담보부 대출을 늘렸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은행이 담보부 대출을 좋아하니까 기업들이 어음발행을 줄였다고 보면 된다. 상업어음 아닌 불공정거래가 문제 새로 생긴 중소기업벤처부는 한술 더 떠서 상업어음 자체를 없애 버릴 대상으로 삼는다. 중소기업들의 연쇄부도와 과도한 금융비용 부담을 염려하기 때문이리라. 반면 상업어음이 갖고 있는 장점, 즉 실물거래 확인(정보제공) 기능과 배서의 보증기능은 인정하지 않는다. (‘어음 연쇄부도’의 다른 이름이 ‘배서의 보증기능’이다) 대기업들이 어음의 만기를 과도하게 길게 잡아 하청업체를 괴롭히는 것은 어음의 문제가 아니라 불공정 거래의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담보를 요구하지 않는 어음할인과 달리 담보 대출 땐 차입자에 대한 정보를 달리 파악할 수 없다. 여신을 제공하는 측은 담보물의 가치에만 관심을 갖게 된다. 대출을 받는 쪽의 신용도나 사업성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부산의 중소기업 사장이 금융기관 담보물로 인기 있는 ‘서울 소재 아파트’를 근거로 대출을 받아 해외여행 경비로 쓰더라도 그 대출은 ‘유망 지방중소기업 대출’로 포장된다. 자금의 용도가 아니라 대출자의 신분과 자격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스펙 대출’로는 투자·고용 못 늘려 지방 중소기업사장들도 그런 사정을 잘 안다. 그래서 ‘대출용 스펙 쌓기’, 즉 지자체나 보증기금 등이 발급하는 각종 자격증과 확인증을 취득하는 것을 기술개발보다 중시한다. 정책당국은 자격증과 확인증을 토대로 실시된 ‘유망 지방중소기업 대출’에 보조금을 지급한다. 그리고 장차 투자와 고용이 늘어날 것이라고 정책효과를 홍보한다. 은행창구에서 여신할 때 자금 용도를 확인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홍보 문구가 실현될 리 없다. 진정한 국부(國富)는 쌓아둔 금(金), 즉 저량(貯量)에 있는 게 아니라, 생산하고 소비하는 양, 즉 유량(流量)에 있다는 것이 애덤 스미스의 가르침이다. 정책당국과 상업은행이 애덤 스미스의 가르침을 기억한다면, 여신을 제공할 때 대출받는 사람의 자격과 담보물의 가치와 같은 저량에 초점을 맞추지 말아야 한다. 대신 생산·고용·투자와 같은 유량 즉, 신용공급 채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금융혁신을 부르짖기 전에 은행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자.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마음으로 은행업의 뿌리를 되찾는 게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는 ‘돈맥 경화’의 근본적인 해소책이다. 은행은 기업(실물부문)과 중앙은행(화폐부문)의 가교다. 은행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여신활동이 실물 경제활동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그것이 투자은행, 보험회사, 대부업자와 다른 점이다. 한 걸음 더: 내부유동성으로 실물경제 살리자 2014년 노벨경제학상 받은 이론 인내심이 있는 독자를 위해서 조금 어려운 금융이론을 소개하고자 한다.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유누스(그라민은행 설립자)는 “담보가 있어야 신용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날개가 있어야 비행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무담보로 신용을 제공하려면, 돈이 필요한 사람에 대해서 믿을만한 정보가 필요하다. 상업어음(그밖에 전자어음, 신용장 등)은 그 사람의 경제활동 이력을 보여주는, 확실한 스모킹 건이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장 티롤(2014년)과 벵트 홀름스트룀(2016년)은 어음할인의 장점을 이론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경제시스템 안에서 진행되는 생산, 투자, 판매활동과 연계되어 공급되는 자금을 내부유동성(inside liquidity)이라고 부른다. 반면, 담보대출과 채권투자처럼 이미 존재하는 부동산과 채권(경제시스템 외부)에 기초하여 공급되는 자금을 외부유동성(outside liquidity)이라고 부른다. 말할 것도 없이 내부유동성이 외부유동성보다 실물경제를 살리는 데 우월하다. 또한 대표적인 내부유동성인 어음할인의 경우 배서인의 연대책임이라는 도의적 담보(moral guarantee)까지 갖추고 있어서 담보대출보다 위험하지도 않다. 칼 마르크스는 내부유동성(어음할인)을 다른 차원에서 옹호한다. 그는 『자본론(제3권, 제35장)』에서 “화폐제도는 확실히 가톨릭적 요소(엄격함)가 있고, 신용제도는 확실히 개신교적 요소(분방함)가 있다. 가톨릭에서 해방된 개신교가 없듯이 화폐제도(당시 금본위제도)에서 해방된 신용제도도 없다”고 주장했다. 신용과 화폐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실물경제활동에 근거하지 않고 부동산이나 채권에서 출발하는 여신(외부유동성 공급)은 ‘공산주의자’ 마르크스가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의 정책당국과 은행들이 취해야 할 길은 분명하지 않은가? 이미 존재하는 부동산과 채권을 여신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대부업자나 할 짓이다. 담보부 대출로 기울어진 현재 상업은행의 영업방식은 정답이 아니다. 모기지증권(MBS) 등에 “모험적 투자”를 추구하는 투자은행도 정답이 되기 어렵다. (모험은 투기와 별로 다르지 않다) 실물과 금융의 연계성을 높이는 금융시스템 및 금융기관의 영업방식을 찾아야 한다. 차현진 /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