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GSOMIA(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두고 말이 많다. 보수 언론에서는 병자호란 때의 최명길까지 소환하고 있다. 한승동 <피렌체의 식탁> 편집인이 한미일 동맹의 본질 해석을 바탕으로 GSOMIA 종료에 대한 보수 언론의 논조에 대해 논평한다. [편집자]

일본이 한국을 보는 창: 한국의 보수언론

반도체·디스플레이 첨단 소재부품의 수출 규제와 ‘화이트 리스트’ 한국 배제, 그리고 한국 정부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 종료 선언에 이르는 최근 한일 간의 갈등을 지켜보면서 일본이란 나라를 다시 생각해 본다. 군국일본의 침략전쟁 등 과거사 긍정과 회귀욕구를 기조로 한 일본 수정주의역사관의 가장 열성적인 지지자 아베 신조 총리. 그 아베 정부의 한국에 대한 최근 공세는 아마도 문재인 정부의 등장과 2015년의 ‘12·28 위안부 합의’ 파기에서 촉발돼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 손해배상 청구소송 최종판결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을 것이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들 중의 하나가 일본의 언론 상황이었다. 아베 정권 등장 이후 국제 언론단체가 매기는 각국의 언론 자유도에서 일본의 순위가 급락해 한국 한참 아래로 쳐졌다는 보도들을 본 적은 있지만, 퇴행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그 실상을 체감한 것은 이번 한일 갈등에 관한 일본 매스미디어들의 보도를 통해서였다.

무엇보다 거의 모든 면에서 일본의 중요한 파트너인 한국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릴지도 모를 아베 정권의 대한(對韓) 수출 규제와 화이트 리스트 배제 과정에서 일본 언론들의 정면 비판이나 이의 제기를 찾아보기 어려운 가운데, 압도적 다수가 아베 정권의 결정을 지지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들 중 다수가 그 결정 내용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압도적으로 지지한다는 조사결과도 본 적이 있다. 매스컴의 영향이 절대적일 것이다. 아베 정권의 대변지라는 말을 듣는 극우 <산케이신문>이나 <요미우리신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비판적인 자세를 잃지 않은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신문> 등도 아베 정부 조치를 비판할 때 거의 예외 없이 그 비판의 전제조건처럼 “문재인 정권이 징용공 문제나 위안부 문제에 불성실한 대응을 계속해 온 것은 사실”이라며 문제의 발단과 주요책임은 한국 정부에 있다는 지적을 빠뜨리지 않고 되풀이 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정부의 잘못이 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때 든 생각은 ‘아, 이런 스테레오 타입화한 문구를 넣지 않으면 곤란한 뭔가가 일본사회에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혼자만의 억측일 수 있지만, 일본 고위관료들이 한국 정부를 비판하거나 공세를 취할 때 그 근거로 제시하는 자료들의 상당수가 한국 정부에 비판적인 보수 유력일간지들 보도내용을 그대로 따온 것이라는 점도 그런 의문을 부추겼다. 나중에는 그들이 한국의 유력 보수 비판지들 기사를 인용하는 게 그저 편의상 그러는 게 아니라 거기에 대한 강한 신뢰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본에는 그처럼 정부 정책을 정면으로, 자유롭게 비판하는 유력 공식매체가 없는 것과 관련이 있나 하는 데로 생각이 미쳤다.

그런 풍토 속에서라면, 그들이 한국 보수 유력지들의 무제한적인 한국 정부 비판을 정치적 편향에 의한 왜곡이나 과장 없는 ‘사실’로 받아들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아베 정부의 한국에 대한 최근 공세는 한국 내 보수 유력매체들의 비판적 보도내용 인용, 분석에 근거를 두고 경우가 많아 보였다. 이 또한 억측이겠지만, 그것이 그들을 한국 상황에 대한 오판으로 이끈 부분이 적지 않지 않을까. 이건 명백히 불과 얼마 전까지 아시아권 최고의 언론 자유를 구가한 일본 매스미디어들의 급속한 전락이며, 그런 현상이 주요 방송, 신문사 간부들을 자파 인사들로 갈아치운 아베 정권 등장 이후 두드러지고 있다는 지적들도 많다. 민주주의나 자유는 한번 확립되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수학공식이나 법칙 같은 것이 아니라 계속 싸우고 새로 획득하지 않으면 어느 날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신기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역시 어디선가 들은 말이지만 실감한다.

일본은 어떤 존재인가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다시 물어 본다. 일본은 어떤 존재인가?

올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세계는 삼층 구조로 돼 있다. 지상의 박 사장네와 기택네의 반지하, 그리고 완전 지하인 벙커의 문광네. 영화는 결국 모두의 파멸로 끝나지만, 파국으로 가는 도정의 극적인 전개는 주로 반지하와 지하 간의 쟁투, 즉 상층 박 사장네에 기생하는 집사 내지 마름 역할을 차지하기 위한, 코믹하면서도 섬뜩한 유혈 쟁투를 중심으로 그려진다. 이들 중하층 계급과 공유할 수 없는 ‘냄새’를 경계로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처럼 보이던 박 사장네도 중하층 상호모순이 극에 이르러 폭발하는 순간 무사할 수 없었다.

사업 실패로 빚쟁이에 쫓겨 맨 밑바닥 지하로 잠적한 문광의 남편. 박 사장네와 같은 상층계급을 올려다 볼 수도 없는 초월적 존재로 ‘리스펙트’(존경)하며 굴종을 내면화한 그가 분노를 폭발시킨 대상은 박 사장 쪽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줄인 문광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기택네의 식구들. 그리하여 그 유혈 난투극의 연쇄는 결국 마지막 순간, 극 전개 내내 차별적이고 모멸적인 냄새를 매개로 기택의 내면에 계속 쌓여 간 수치와 증오의 적대적 계급의식의 폭발, 즉 박 사장 살해와 함께 종결된다. 하층계급에 대한 박 사장의 우월적 지위와 그에 토대를 둔 우월감(하층계급에 대한 멸시)은 아들의 ‘인디언 놀이’에 동원된 기택에게 어차피 월급 받고 하는 일상 업무 아니냐며 시키는 대로 하라는 명령조의 윽박지름에서도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그 적대적 계층(계급) 투쟁의 승자는 없다. 공멸이다. 하지만 그들 주역의 공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난투극 무대인 모순 가득한 세계 자체는, 기택의 아들 기우가 부자가 돼 아버지를 지하에서 구출하는 마지막 장면이 예의 그 반지하에서 꾼 덧없는 꿈에 지나지 않았다는 그 냉엄한 현실이 암시하듯,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다. 그런 계급사회에 출구는 없다, 거듭되는 공멸뿐이다.

이건 너무 도식적이고 시야 협소한 감상일 수 있지만, 이 정도의 얘기는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면, 약간씩의 편차는 있겠지만 대체로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다. 봉 감독이 던져 놓은 무한 해석의 가능성들을 훼손할 수도 있어 미안하긴 하지만, 그 영화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냄새’를 중심으로 얘기를 그야말로 순전히 주관적으로 좀 더 끌고 가 보자. 기택과 그 식구들의 특이한 냄새를 박 사장과 그 막내아들은 단박에 알아채지만 부인 연교는 박 사장이 얘기할 때까지 그 냄새를 알아채지 못한다. 이는 박 사장과 연교의 애초 계급이 달랐음을 암시한다. 박 사장이 그 냄새를 재깍 알아챈 것은 아마도 자신이 어릴 적에 지겹도록 맡았던 그 냄새였기 때문이 아닐까. 순진무구의 예민한 그 어린 아들은 아버지처럼 그 냄새를 넌더리나도록 싫은 역겨움이 아니라 그저 다른, 기택 네 식구들에게 공통된 냄새로만 인식한다. 연교도 평생 그런 냄새가 풍기는 환경에서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냥 다른 수많은 냄새들 가운데 하나로만 인식했을 것이다. 박 사장이 그 냄새를 못 견뎌한 것은 그 냄새가 상징하는 자신의 비참했던 옛 하층계급의 기억 내지 잠재된 무의식, 다시는 마주하기 싫었던 그것 때문이 아닐까.

말하자면 잘 돌아가는 머리를 지닌 박 사장은 태생적으로 부잣집 딸이었던 연교와의 정략적 결혼(부인을 사랑하느냐는 기택의 질문에 대한 박 사장의 대답은 애매했다)을 통해 상층계급에 포섭된 또 다른 ‘기생충’일 수 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연교네 친정집안 역시 그 비슷한 과정을 거쳐 계급상승을 꾀했을 수 있다. 결국 그 끝없는 순환구조 속에 모두는 모두에게 기생충일 수 있다. 곧 계급사회에서, “만인은 만인에 대한 기생충”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근대 이후 일본의 행보를 이 영화에 적용시키는 만용을 부려 본다면, 서구의 산업기술문명을 재빨리 습득해 그것을 이웃 나라 침략과 식민지배, 수탈에 활용함으로써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반열에 든 일본은 연교(서구열강)와 정략결혼한 박 사장과 같은 존재일 수 있지 않을까. 주변 민족과 국가들에 대한 경멸과 만성적인 우월감, 자신들도 한때 속했던 궁핍한 하층세계의 냄새에 대한 견디기 어려워하는 역겨움의 정서. 일본은 박 사장처럼 외관상으로도 선하지도 순진하지도 않았지만, 영화에 기댄, 일본에 대한 나름의 튀는 해석인데, 어쨌거나 계급적으로 갈라진 그 세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이 얘기는 최근 필자가 번역한 책의 역자후기로 썼던 글을 활용했다.)

미일동맹이 상정한 한미일 공조 내지 ‘한미일 삼각동맹’도 이와 유사한 3층구조로 돼 있다. 1등 미국, 2등 일본, 3등 한국의 철저한 위계적 질서. 한국 정부가 근대 이래의 장구한 세월 동안 동아시아에서 관철돼 온 이 계급적 위계질서를 위압적으로 강요하려는 미일동맹에 반기를 들었다. 바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 종료 결정이다. 미일동맹의 요구를 한국 정부가 정면으로 거스르기는 아마도 사상 처음이 아닐까. 이 놀라운 ‘반격’을 두고 줄곧 한국 정부를 비판해온 한국의 유력 보수일간지는 8월 26일 ‘한·미·일, 한·미 안보동맹 훼손 결코 안 된다’는 제목의 사설과 복수의 칼럼들을 통해 맹렬히 공격했다. 사설은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한미일과 한미 안보동맹 훼손으로 규정하고, 그 결정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그 마지막은 이렇게 돼 있다. “한국의 ‘안보 외톨이’ 상황은 막아야 한다. 그러려면 독도 영토수호훈련을 치르더라도 예년처럼 일본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도록 조용하게 실시하는 전술이 바람직하다. 우리의 생명을 지키는 최선의 방책은 굳건한 동맹체제다. 이를 위해선 트럼프 행정부와의 신뢰를 회복하는 한편 하루빨리 일본과의 갈등을 푸는 지혜가 절실하다.”

무엇을 위한 동맹인가

여기서 ‘우리’란 누구이며, ‘동맹’은 무엇을 위한 동맹인가?

한·미는 동맹이지만 한·미·일은 한·일이 그렇듯이 동맹이 아니다. 어쨌든 신문이 주장하는 ‘신뢰 회복’과 ‘갈등을 푸는 지혜‘는 전체 논조로 보건대, 사설을 채운 그 긴 말이 불필요할 정도로 단순명쾌하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철회하라’는 것이다. 더 간단히 줄이면 그냥 일본과 미국에 ’항복하라‘는 것이고, 그게 살 길이라는 얘기다. 그게 정말 살 길일까? 그게 살 길인지 죽을 길인지는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

그날 1면 머리기사부터 마지막 칼럼에 이르기까지 이 신문을 채운 주요 내용은 모조리 ‘지소미아’와 ‘조국’에 대한 정부쪽 결정을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신문 마지막 3개 오피니언면을 차지한 칼럼, 사설들이 거의 모두 그러했는데, 예컨대 ‘조국과 동맹 균열-불길한 이중주’라는 제목을 단 칼럼이 대표적이다. 법무장관 지명자가 동맹 균열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그가 지소미아 반대자여서?

‘지금 청와대엔 최명길이 없다’는 제목의 또 다른 기명 칼럼이 있었는데, 그 글 끝자락에 이런 인상적인 글귀가 나온다. “남한산성에서 역적으로 몰려가며 주화론을 주창했던 최명길은 지금의 청와대에서 찾을 수 없다. 지소미아 종료는 문재인 대통령과 주요 참모 전원이 주전론으로 똘똘 뭉친 결과였을 것이다.”

주전론자들을 탓하는 이 칼럼은 주화론, 곧 일본‧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해법이라며, 그 옳은 길을 옳다고 주장하며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대쪽 같은 충신의 부재를 한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최명길로 대표되는 주화론자와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론자들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최명길 같은 주화론자의 목숨 건 옳은 선택이 있었기에 조선은 살아남았다, 문재인 정부는 이미 잘못했지만, 지금이라도 최명길의 길을 따라가라, 그래야 살 길이 열린다. 전체적으로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 게 분명해 보이는 그 신문의 전체 ‘오피니언’은, 그러나 17세기 초반 강화도와 남한산성에서 벌어졌을 그 주화-주전 논쟁이 사실은 사후약방문 같은, 더 심하게 말하면 패자들의 책임전가식 공허한 명분싸움에 지나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거나 잘못 보는 것은 아닐지.

병자호란의 승패는 그 전쟁이 일어나기 9년 전인 1627년 ‘정묘호란’ 때 판가름 났고, 그 4년 전인 1623년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때 이미 굳어져 있었다.

“여진의 후금이 만주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국제정세에 처하여 현명한 외교정책을 써서 국제적인 전란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피하였다.”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은 명이 몰락하고 후금(청)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던 당시 광해군의 외교를 그렇게 평가했다. 이삼성은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에서 <한국사 신론>의 그 부분을 재인용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반면에 쿠데타로 집권해 인조를 옹립한 서인세력은 ‘광해군의 대외적인 관망태도를 버리고 향명배금(向明排金)의 정책을 뚜렷이 하였다’고 이기백은 서술했다. 이기백은 이러한 인조의 정책변화가 ‘후금의 신경을 날카롭게 하였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광해군의 ‘균형외교’ ‘실리외교’를 내팽개치고 망해가던 명을 받들고 금(후금. 1636년에 ‘청’으로 개칭)을 오랑캐라며 배척한 것이 ‘호란’을 불렀다는 것이다.

당시 상황을 <위키백과>도 그보다 좀 길긴 하지만 비슷한 내용으로 정리해 놓았다.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 등 많은 왕족들을 숙청하고, 인목대비를 폐하기까지 하는 등의 도덕적 논란과 많은 정적들을 만들었고, 그 때문에 결국 성리학(주자학)적 명분론을 앞세운 서인세력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쿠데타 명분상 핵심적 존재였던 인목대비는 인조반정 다음날인 그해 3월 13일 광해군을 폐하고 그의 36가지 죄를 논하는 교지를 내렸다.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겨온 지 2백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에서는 군신의 사이지만 은혜에서는 부자의 사이와 같았고, 임진년(1592~98년의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再造之恩)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이리하여 기미년에 중국이 오랑캐를 정벌할 때 장수에게 사태를 관망하여 향배를 결정하라고 은밀히 지시하며 끝내 우리 군사 모두를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하여 추악한 명성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온 중국 사신을 구속 수삼하는데 있어 감옥의 죄수들보다 더 하였고, 황제가 칙서를 여러 번 내렸으나 군사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아니하여 예의의 나라인 우리 삼한으로 하여금 이적 금수의 나라가 되는 것을 모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가슴 아픈 일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천리(天理)를 멸절시키고 인륜을 막아 중국 조정에 죄를 짓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는데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자가 어떻게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조종의 보위에 있으면서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 수 있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시키노라.”(<광해군 일기>,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에서 재인용)

서인과 인목대비는 천자(명나라 황제)의 명을 거역하고 새로 일어나던 오랑캐(만주 여진의 후금=청)와 화친한 게 광해군의 죄라며, 종말로 치닫던 명과 새로 일어나던 청의 왕조 교체기에 줄타기 외교를 통해 전쟁의 참화를 피해가고 있던 광해를 명의 재조지은에 대한 배은망덕이라 단죄했다. 그리고 청에 대한 적대를 천명했다.

그리하여 인조반정으로 존명반청(尊明反淸)·향명배금(向明排金) 세력이 권력을 쥔 지 불과 4년만인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다시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그 다음해에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올리는 치욕을 당했다.

왕실과 권신들이야 새 상전에 빌붙으면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국토는 무참하게 파괴되고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청으로 붙잡혀갔다. 임진왜란(1592~1598)이라는 대병화를 겪은 지 불과 30년도 되지 않아 시작된 북쪽과의 두 차례 전란은 서인 반정세력의 세계관과 그에 따른 대명 사대주의 일변도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은 이후 영·정조기에 마지막으로 반짝거린 불씨를 빼면 쇠락을 향해 줄달음쳤다.

1644년 명이 멸망한 뒤에도 만동묘(萬東廟)를 지어 명나라 황제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한 우암 송시열처럼 서인과 노론 집권세력들은 명 멸망 뒤 오히려 자신들이 중화의 정통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시대착오적 향명배청의 소중화 의식에 집착하면서 과거에 야만시했던 여진족에 대한 허황된 우월감을 벗어버리지 못했다. 광해군을 쫓아낸 반정세력은 임진 전란의 기억이 생생하던 시기임에도 중원만 바라보며 아무런 군사적 대비태세도 갖추지 않은 채 그나마 광해군이 쌓아올린 토대마저 허물어버렸다. 주전파와 주화파의 공허한 명분론만 요란하게 맞부딪혔을 뿐 실제로는 속수무책이었다.

애초에 망해버린 제국을 섬기면서 중원을 통일한 새 제국과 맞장뜨겠다는 것부터가 전략은 차치하고 현실인식부터 잘못된 착오나 오판이었다. 오판이 아니라 현실을 알면서도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반정공신들이 밀어붙인 명분쌓기용 정치적 제스처, 기획연출된 정치쇼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신문 칼럼의 주화파 예찬과는 다소 어긋나게, 남한산성 논쟁에서 조정을 구했다는 주화파 최명길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집권했던 서인·노론세력은 오랑캐와의 화의를 주장했다는 주자학적 명분론을 앞세워 ‘소인배’로 질타하는 등 냉대했다. 그의 후손들은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강화도 등에서 숨어 살아야 했다. 그의 맞수 주전파 김상헌은 그 반대로 영달했다. 조선후기 세도가의 직계 선조격인 김상헌의 후손 중에 13명의 재상과 수십 명의 판서, 참판이 배출되었고, 순조비, 헌종비, 철종비 등 왕비 3명과,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가 모두 그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그 나라는 결국 망했다.

‘한·미·일, 미·일 안보동맹’ 쪽에 줄 서지 않으면, 동맹을 ‘훼손’하고 ‘균열’시키는 것이라며, 중국·러시아·북을 이롭게 한다는 논리는 결국 북·중·러와의 대적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 침략과 식민지배, 미국의 개입으로 분단되고 전쟁 참화까지 함께 겪은 북쪽 동족을 계속 적대하고, 교역량이 미국·일본의 그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중국과도 적대하라는 것인지. 그리하여 20여 년 전에 무너진 냉전을 대상만 바꾼(소련에서 중국으로) 새로운 냉전(신냉전)체제로 부활시키는데 적극 동참하는 것이 살 길이라는 얘긴지. 그렇게 해서 살 자는 누구이며 죽을 자는 누구인가?

누가 광해군이고, 누가 인조이며, 누가 최명길이고, 누가 김상헌인가

21세기 미일동맹을 17세기의 명·청 교체기의 어느 한쪽에 단순 비교할 순 물론 없다. 다만 양자택일식 진영논리에 함몰된 대외정책은 실리·균형의 광해를 버리고 망해 가던 명에 올인했던 17세기 인조반정 이후 서인·노론 세력(지금까지도 그들이 지배하고 있다는)의 그것만큼이나 꽉 막히고 위험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를 공식 발표할 때까지 일본과 미국은 지소미아 유지를 전혀 의심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발표 직후 그들 나라 당국자들이 보인 경악과 당혹, 분노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직전에 일본과 한국을 찾은 존 볼턴, 마크 에스퍼, 스티븐 비건 등의 고위관리들을 통해 미국은 지소미아 유지를 종용하면서 일본의 일방적인 횡포에 대한 한국 정부쪽의 불만과 항변에 이해한다는 메시지를 계속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또는 비공식적인 메시지였다. 미국도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에 ‘이해를 나타냈다’고 한 정부의 발표는 사실이지만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미국은 그 정도 ‘언질’만으로도 한국 정부가 미국 뜻에 따르리라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고, 그런 자신감을 일본 쪽에도 피력했을 것이다. 일본이 발표 직전까지 지소미아 종료가 별 것 아니라며 느긋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관행에 오래 전부터 굳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번 지소미아 종료 선언이 획기적인 이유는 그런 관행을 한국이 주체적으로 깨버린 사상 최초의 사례라는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미국은 한국 정부의 그런 발표 직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우려, 실망을 표시하더니 급기야 ‘동북아 안보환경에 대한 오해’라는, 일본 정부가 한국 결정을 비판하며 사용한 표현을 그대로 써가며 비판강도를 높였다. 아마도 도쿄쪽이 워싱턴쪽에 강력하게 불만을 표시했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미국이 이해를 나타냈다는 한국 정부의 발표를 일본이 미국이 진짜 의도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미국이 부랴부랴 정색을 하고 일본을 두둔하고 나섰을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선택지 1순위는 언제나 일본이었고 지금도 그것은 변함이 없다. 근대 이래 미국은 일본이라는 동아시아 최대 교두보를 차지하기 위해 주변민족 특히 한반도를 계속 희생시켜 일본을 강화시키는 전략을 버린 적이 없다. 일본 패전 전후해서 전범국 일본이 아닌 그 희생자인 한반도를 분단시킨 것도 미국이었고, 1951년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최대 피해국들을 배제시킨 채 일본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체결한 것도 미국이었으며, 전쟁범죄와 사죄 및 배상 등을 거의 일본 뜻대로 처리한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을 강요한 것도 미국이었고, 가깝게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가자며 2015년 ‘12·28 위안부 합의’를 종용한 것도 미국이며, 지소미아 체결을 압박한 것도 미국이었다. 미국은 그럴 때마다 자국의 이익 극대화를 앞세우며 한반도 주민들의 이해와 상충되기 일쑤인 일본의 요구에 먼저 손을 들어주었다. 얼마 전 호주의 싱크탱크 연구원이 미국의 한반도 개입은 언제나 미일동맹의 전략적 이익을 앞세운 채 한반도 피해자들의 희생을 무시해 왔다며 개입하지 말라고 지적한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국의 그런 자세는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래 지금까지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한일 양쪽 모두에 비공식적으로 ‘이해’를 표시하며 불만을 무마하려던 미국은 마지막 선택의 순간 망설임 없이 일본 손을 먼저 들어주었다. 아베 정부가 수출관리니 안보위험 등 추상적 말만 늘어놓으며 구체적 이유도 제시하지 않은 채 반도체·디스플레이 첨단소재 수출 규제와 ‘화이트 리스트’ 한국 배제를 무례하게 밀어붙일 때 침묵하던 미국은 한국이 일본의 무례에 맞대응하는 순간 엄청난 불만과 쏟아내며 철회를 압박하고 나섰다.

지소미아란, 유력 일간지는 사설에서 한미일 삼각 안보협력의 ‘링크핀’이라고 했지만, 명백히 삼층구조의 삼각동맹으로 가는 입구다. 신냉전적 구도를 전제한 한미일 삼각동맹은 한반도의 분단, 동족간 대결을 유지, 강화를 근간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 분단과 대결을 영구화할 것이다. 그럴 경우 유력신문이 예찬한 주화론은 오히려 그런 전쟁 가능성을 높이는 냉전적 대결구도를 지지하는 주전론으로 바뀐다. 지소미아 주창자들은 사실 그걸 바랄 것이다. 그런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일까.

한승동 / <피렌체의 식탁>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