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적 카멜레온.’ 영국의 새 총리로 선출된 보수당의 리즈 트러스에 대한 여러 평가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말이다. 이념 가치와 주요 정책에 대한 태도를 카멜레온마냥 바꾸며 입지를 구축해 온 트러스의 삶과 정치 궤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최초의 40대 여성 총리이자, ‘제2의 대처’로 불리는 트러스가 경선 초반의 열세를 극복하고 영국 총리가 된 배경은 뭘까. 트러스는 산적한 영국의 난제들을 제대로 풀어갈 수 있을까. 영국 런던에서 살며 국제 문제를 두루 관찰해 온 윤영호 필자가 새로운 시험대에 오른 56대 총리 트러스를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편집자 주]

✔ 영국의 56번째이자 세번째 여성총리로 리즈 트러스 확정✔ 보리스 존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정치적 계승자✔ 강한 승부욕과 놀라운 변신 능력 가진 실용적 카멜레온✔ 변화를 대변하지는 않으나 변화의 중요성 아는 장관 인선

영국의 차기 총리로 확정된 리즈 트러스 전 외무부장관 (사진:셔터스톡)

지난 7월7일 보리스 존슨은 사임을 발표하며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자리인 영국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어 아쉽다”고 밝혔다. 두 달여만인 9월5일 영국 총리로 선출된 리즈 트러스(47)는 “세상에서 가장 긴 취업 인터뷰를 마쳤다”고 말했다. 트러스는 영국의 56번째이자, 마거릿 대처와 테레사 메이에 이은 세 번째 여성 총리가 되었다. 40대 여성 총리는 트러스가 처음이다. 윈스턴 처칠, 마가릿 대처와 토니 블레어를 포함한 14명의 총리와 일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5번째 총리를 맞이했다.

놀라운 변신 능력, 강한 승부욕

트러스 새 총리에 대한 평가 중에 눈에 띄는 것은 정치에 입문할 당시의 동료였던 더글라스 엘리슨(Douglas Ellison)이 한 말이다. ‘그녀는 적응력이 있는 실용적인 카멜레온(pragmatic chameleon)이다.’ 

트러스는 연구원, 교수와 선생님을 역임한 아버지를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자주 이사를 다녔다. 옥스퍼드에서 태어났지만 글래스고, 리즈 등지에서 살았고, 캐나다 벤쿠버에서도 살았다. 런던의 그리니치에 정착하기까지 여섯 곳의 도시에서 살면서 적응력을 키웠다. 그녀의 출신을 두고 ‘모든 곳에서 왔지만, 어느 곳에서도 오지 않았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 

정치적으로도 트러스는 놀라운 변신을 거듭했다. 그녀는 옥스퍼드대학교 머튼 컬리지에서 PPE(철학, 정치, 경제)를 공부했고, 그때부터 자유민주당(Liberal Democrats)에 가입하여 왕성한 활동을 했다. 다른 사람의 관심 끌기를 좋아했으며, 왕정을 폐지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보수당 중에서도 우파에 속하는 정치인이 되었다. 대학 시절 정치 성향이 나중에 바뀌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지만, 트러스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자유민주당에서 보수당으로 바꿨다. 흔치 않은 일이다. 자신이 늘 상황의 중심에 서려는 기질이 강했고, 그런 면에서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연상시킨다.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YS를 비교한 우스갯소리에 이런 것이 있다. ‘DJ는 바둑을 둘 때 두는 수마다 묘수를 둔다. 그러나 계가를 하면 꼭 반집을 진다. 그에 반해 YS는 두는 족족 깨는 수를 두는데 바둑에서는 절대 지지는 않는다. 패배가 확실해지면 판을 엎고 나가기 때문이다.’ 이 말은 DJ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회자되었던 농담이지만, 두 인물의 캐릭터를 잘 드러내 준다.

트러스는 어릴 적부터 지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보드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동생들을 속이기도 했으며, 게임의 규칙을 항상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 것 같으면 게임을 마치지 않고 사라지는 쪽을 선택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놀이를 가지고 지금의 트러스를 평가하는 것은 무리지만, 그녀의 강한 승부욕이 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여론조사 5위에서 판을 뒤집다

트러스가 인기가 없는 정치인이라고 말한다면, 그녀의 승리를 설명할 수 없다. 다만, 트러스가 총리가 될 정도의 인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선거 초기에 실시된 보수당원 여론조사에서 트러스는 10.93%의 지지율로 페니 모던트, 케미 바데녹, 리시 수낙, 수엘라 브레이버만에 이은 5위였다. 보수당 국회의원 지지도에서는 수낙과 모던트에 크게 뒤진 3위였다. 마지막 두 명을 놓고 벌인 <더타임스>(The Times) 구독자 여론조사에서는 93% 대 7%로 수낙에게 압도적으로 밀렸다. 더타임즈 여론조사에 참여한 구독자 수는 12만 명이 넘었다.

트러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세 가지가 없다고 말한다. 첫째, 대중적 친화력이다. 그녀는 중산층 출신이지만, 입는 옷이나 하는 행동에서 출신이 노출되지 않는다. 길거리 시민을 편하게 만나는 모습이 그녀에게는 없다. 중산층을 배신한 귀족 같은 느낌을 풍긴다. 계급의 배신이라는 것은 영국인에게 중요한 키워드다. 

둘째, 콘텐츠다. 이것은 다분히 이미지와 관련이 있다. 트러스는 자유민주당 시절부터 마거릿 대처를 좋아했고, 몇몇 사진에서 대처를 연상시키는 의상과 포즈를 취함으로써 고유한 콘텐츠보다는 이미지에 의존하는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셋째, 지조다. 대학 시절에 이미 정당을 바꿨고, 왕정 폐지론자가 ‘토리’(Tory, 보수당원, 구 왕당파)가 되었다.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으나 국민투표가 브렉시트로 결정된 후 51분 만에 자신을 브렉시트 지지자로 바꿨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즉위 80주년 행사에서의 보리스 존슨 부부와 리즈 트러스 당시 외무부 장관.(사진:셔터스톡)

존슨과의 ‘결별’이 아닌 ‘승계’

이번 선거는 애초 보리스 존슨이 상징하던 것과의 결별이 될 것으로 보였다. 존슨이 상징하는 것은 보수, 남성, 기득권, 엘리트 등이다. 총리 선출의 화두가 여성, 소수민족, 소수자, 비기득권이 될 것처럼 보였던 이유다. 페니 모던트, 케미 바데녹, 리시 수낙의 대중적 인기가 그런 현상을 설명해 준다. 하지만 결론은 트러스였다.

트러스는 정치적으로 현명하다. 한국에서 YS, DJ, 김종필(JP)에게 붙었던 ‘정치 9단’이라는 별칭이 그녀에게 어울린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시절에 총리의 지원을 듬뿍 받았으며, 테레사 메이 총리 시절에도 살아남았고, 보리스 존슨 총리 시절에는 외무부 장관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그녀가 정치적으로 현명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총리 선출은 국민 유권자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보수당 국회의원이 여러 차례의 투표를 통해 후보자를 한 명씩 탈락시키고 최종적으로 두 명을 남긴다. 두 후보자를 놓고 당원 투표를 실시한다. 비당원 여론조사 같은 것은 없다. 이런 까닭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 2명에 살아남는 것이다. 줄곧 3위를 달리던 트러스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페니 모던트를 제치고 2위로 당원 투표에 진출했다. 국회의원 투표에서 여유 있게 1위를 달리고 있던 리시 수낙이 모던트보다 트러스를 쉬운 상대로 생각하게 만든 것도 트러스의 정치적 현명함이다. 최종 2인으로 수낙과 트러스가 결정되는 순간, 이번 선거는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국민의 85%가 가장 시급한 문제로 인플레이션 억제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 재정을 잘 알고 있는 리시 수낙에게 민심이 있었다. 그에게는 최초의 소수민족 총리라는 상징성도 있었다. 하지만 수낙은 패배했다. 보리스 존슨 총리가 물러났지만, 새 총리는 당원 투표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리즈 트러스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보수당 저변에는 존슨과 그의 정책에 대한 지지가 굳건하다. 그 표를 확보하지 않고는 당내 선거에서 이길 도리가 없다. 

리시 수낙은 보리스 존슨이 물러가게 되는 결정적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리즈 트러스는 끝까지 존슨을 비난하지 않았고, 존슨은 눈에 보일 정도로 전폭적으로 트러스를 지원했다. 수낙은 자신을 선발해 준 사람을 배신한 정치인으로 보였다. 실용적 카멜레온은 변신할 때와 변신하지 않을 때를 구분한다. 카멜레온은 배신하지 않고 변신할 뿐이다. 그녀가 카멜레온이라면 서민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도 배신이 아니라 변신일까?

최대 과제, 전기요금과 가스비

미국에 가면 가장 부담되는 것이 재산세와 보험료처럼 보인다. 외부인이 볼 때 그 부담을 어떻게 감당하고 사는지 의아할 정도다. 반면에 관광객으로 영국에 가면 비싸 보이는 것이 교통비와 숙박비다. 택시비는 말할 것도 없고 지하철을 비롯한 대중교통 비용도 높다. 그렇지만 실제로 영국에서 살면 비싸다고 생각되는 게 전기요금과 가스비다. 가정당 전기요금과 가스비 부담이 1년 전의 300만 원 정도에서 현재는 500만 원 정도로 올랐고, 이런 추세라면 800만 원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펍이나 레스토랑 사업장은 전기요금과 가스비 부담이 7배까지 올랐다고 주장한다. 

이런 부담은 국제 가스 가격 인상에 기인한 것이지만, 영국이 2차 대전 이후 직면한 최대 위기로 여겨진다. 새 총리는 전기요금과 가스비 고지서의 부담을 인위적으로 낮추는 ‘초시장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전기요금과 가스비 상승을 제어하고, 전기회사를 파산에서 구하고, 저소득층에 전기요금과 가스비를 지원해야 한다. 이런 일을 해내려면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다. 리즈 트러스는 선거 과정에서 경기 진작을 위한 감세를 주장했기 때문에 두 정책의 충돌을 피할 수가 없다.

전기와 가스 이외에도 인플레이션 요인은 많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공격적으로 인상하고 있다. 금리 인상은 서민의 이자 부담을 증가시켜서 새로운 문제가 된다. 이와 함께 스코틀랜드 독립 문제, NHS(국가의료시스템) 문제, 북아일랜드 문제, 교통 시스템 개선 문제, 국방비 증액 및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 도버 해협을 건너는 이민자 문제, 파티 게이트로 인해 분열된 당원을 결속시키는 문제 등 과제들이 눈앞에 산적해 있다. 

사진:셔터스톡

트러스의 ‘변신’은 어디까지 

리즈 트러스는 당원 투표에서 리시 수낙을 57% 대 43%로 물리쳤다. 트러스는 81,326표를, 수낙은 60,399표를 각각 획득했다. 예상보다 작은 격차였고, 다른 당 대표 선발 때와 비교해도 최저 수준의 지지율이다. 트러스는 동료 국회의원, 당원, 여론의 충분한 지지 없이 출발하는 총리가 되었다.

당내의 광범위한 지지를 끌어내는 것이 우선 급하겠지만, 언론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보리스 존슨 총리를 낙마시킨 것은 <비비씨(BBC)>를 필두로 한 제도권 언론이었다. 비비씨는 매일 같이 존슨 퇴진 노래를 불렀고, 주요 일간지도 동조했다. 트러스는 존슨의 정책을 계승한다고 말했고, 비비씨와 갈등을 일으켰던 나딘 도리스 문화스포츠미디어 장관은 트러스의 핵심 인사로 포진해 있다. 경선 과정에서 트러스는 비비씨 인터뷰를 일방적으로 취소하기도 했다. 새로운 총리가 나오면 언론과 일정 기간 밀월 관계를 갖는 게 상례이지만 이번엔 그럴 가능성이 없을 듯하다. 경선 과정에서 더타임스는 노골적으로 리쉬 수낙을 지지했다.

당은 물론이고 정치권 안팎에서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출발하는 리즈 트러스의 앞길은 험난하다. 그러나 우리는 실용적 카멜레온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까닭에 트러스의 실패 가능성을 미리 점칠 필요가 없다. 총리가 된 그녀가 어떤 적응력을 보여줄지, 어떤 변신을 보여줄지는 아직 모른다.

외무부장관 시절, 총리관저에서의 내각 회의에 참석하고 나오는 리즈 트러스(사진:셔터스톡)

변화의 아이콘은 아니지만 변화의 필요성 잘 알아

영국 내각에서 중요한 자리 네 곳(총리, 재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에 백인 남성이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리즈 트러스는 재무부 장관에 가나계 영국인 크와시 크와르텡(Kwasi Kwarteng)을 내정했다. 크와르텡은 현 내각에서 비즈니스, 에너지, 산업 전략을 담당했기 때문에 지금의 에너지 문제를 풀 수 있는 적임자로 보인다. 외무부 장관은 시에라리온 출신의 어머니를 둔 제임스 클레벌리(James Cleverly)가, 내무부 장관은 총리 경선에서 경쟁했던 인도계 수엘라 브레이버만이 맡는다. 주요 직책 네 자리에 ‘영국을 대표해 왔던 백인 남성’은 없다. 트러스는 스스로가 변화를 상징하지 못하지만, 변화의 필요성은 잘 알고 있다.

흔히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말하지만, 정치인의 변신이나 남자의 변신이 유죄로 추정될 일은 없다. 변신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 변신하느냐는 것이다. 리즈 트러스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변신을 거듭했으며, 앞으로 무엇을 위해 변신할 것이고, 어떻게 변신할 것인가? ‘실용적 카멜레온’ 트러스 총리에게 바야흐로 새로운 무대가 펼쳐졌다.


글쓴이 윤영호는서울대학교 외교학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증권사, 보험회사, 자산운용사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했고, 카자흐스탄 증권사 겸 자산운용사인 세븐 리버스 캐피털(Seven Rivers Capital)에서 대표로 일했다. 현재는 영국 런던에서 자산을 운용하며 런던 생활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옵션투자 바이블>, <유라시아 골든 허브>, <그러니까, 영국> 등이 있고, 최근에는 인터뷰 모음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를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