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 동안 윗사람은 말하고 아랫사람은 듣는게 관습이었다. 민주주의는 윗사람(?)을 표로 뽑는 제도다. 윗사람의 능력에 듣기(listening)가 포함되기 시작했다. 현대의 위대한 지도자는 뛰어난 경청가(Great Listener)라고들 한다. 정혜승 필자는 대통령비서실에 국민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고 그것이 접수되는 국민청원제도를 만들었다. 과거 제도와 다른 점은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이가 직접 답변하도록 규정한 점이다. 새 대통령 취임과 국민청원의 일시중단을 맞아 그가 제도의 취지, 배경, 소감을 보내왔다. [편집자 주]

✔국민의 93%가 알고 있고, 68%가 실제 써본 서비스  국민이 물으면 정부는 답변한다, 이건 상식 아닐까?

✔이전에도 국민 목소리 듣는 민원 창구는 많았지만  정부 답변은 지루하고 비슷비슷한 모범 답안 일색

✔꼭 청와대가 나서야 했나고도 하지만 국민 ‘빽' 삼아  최고책임자 불러내고 수석·비서관 적극 나서 답 준비

✔제대로 질문하면 답 찾아…바로 해결 못하면 로드맵  어디서 어떻게 계속 챙길 거라 답하는 것도 큰 의미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2021년 8월 19일 국민청원 4주년을 맞아 직접 답변하는 모습

국민의 93%가 알고 있고, 68%가 실제 써본 서비스는 사실 엄청난 성과다. 기업이라면 이런 서비스를 접지 않는다. 하지만 국민청원은 막을 내렸다. 국민신문고 등 정부의 다른 민원 서비스와 통합 운영할 방침이라고 하니 1막이 끝난 셈이다. 새 정부의 소통 의지가 높은 만큼 새로운 모습을 기대한다. 국민청원을 대국민 ‘서비스'로서 기획하고 운영했던 첫 책임자로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이 같은 기대 덕분이라는 점을 밝힌다. 무엇보다 국민이 계속 청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미련도 있다.

대답 없던 700만 명 서명 세월호 특별법, 그 갑갑함

국민청원은 질문에서 시작됐다. 왜 정부는 국민에게 답하지 않는가? 세월호 관련 특별법 제정을 위해 약 700만 명이 서명했던 2014년, 국민은 한마음이었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고 원인을 제대로 확인하고, 제도나 관행에 문제가 있다면 고치기를 바랐다. 그렇게 모인 국민의 뜻에 당시 정부는 별 반응이 없었다. 법 제정은 왜 추진하지 않는 것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세월호 선주 세모그룹 유병언 집안 추적이나 해경 해체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건 다들 알았지만, 상황은 답답했다. 국민이 물으면 정부는 답한다, 이게 상식 아닐까?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품어온 질문이었다.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민원 창구는 늘 있었다. 예전에 오히려 많았다. 중앙정부 각 기관을 비롯해 지방자치단체 홈페이지 등 어디에든 물을 수 있는 게시판이 있다. 찾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있다. 그런데 답변에 만족했다는 반응은 드물었다. 

솔직히 정부 답변은 지루하고 뻔했다. 비슷비슷한 모범답안들이다. 왜 정부의 대답은 항상 천편일률적인가? 들어 보나 마나 한 답을 듣기 위해 하나 마나 한 질문을 정부에게 해야 하나? 애써 본인인증 등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면서? 여차하면 담당 공무원에게 밉보이는 불이익까지 감수하면서? 

답변을 작성한 실무자 탓은 하지 않겠다. 국민에게 답하는 것은 책임이 따른다. 위아래 상관없이 공직자라면 누구든 책임이 무겁다. 속사정이 이러하다고 투명하게 밝히는 것도, 이래서 문제가 안 풀린다고 솔직히 털어놓는 것도 쉽지 않다. 뭔가 바꾸거나 해결하는 것은 어쩌다 의욕 넘치는 공무원의 몫이다. 그런 이들이 꽤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민원 창구에서 만나는 행운은 없었다.  

모든게 뜨거운 감자일 텐데, 감당할 수 있을까?

청원을 통해 국민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것은 문재인 당시 대통령의 의지였다. 2017년 정부 출범 직후 합류 제안을 받은 나는 언젠가 대통령 탄핵 청원도 들어 올 거라는 걱정부터 들었다. 쉬운 질문은 하나도 없을 테고, 다 뜨거운 감자일 텐데 그걸 어떻게 처리할까? 아니, 당장 정부가 뭔가 한다고 해서, 특히 청와대가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찾아올까? 

카카오와 네이버, 구글 서비스도 수없이 망했다. 뛰어난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가 협력하고 자본이 받쳐 줘도 안 되는 일이 많다. 정부 사이트나 앱을 애용하는 건 홈텍스, 코레일, 우체국 정도였다. 이용 목적이 분명해야 했다. 소통을 위한 청원이라니, 대단한 미디어들도 포털에 밀렸다고 하는데 과연 청와대가 해도 될까?

제대로 질문하면 답을 찾게 마련이다.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 처음부터 우리의 한 줄 슬로건이었다. 이건 해야만 했다.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인데 국민청원의 남다른 성공 요인이 됐다. 단번에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로드맵을 제시했고, 어디서 어떻게 계속 챙길 거라 답하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사람들은 사회와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효능감이 있을 때 움직인다. 행동에는 보상이 따라야 하는데 꼭 물질적일 필요는 없다. 이후 제도 개선을 포함해 제대로 된 답변에 대한 기대가 필요했다. 나 혼자 분노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나눌 수 있는 동료, 시민을 만날 수 있는 플랫폼.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연대의 감각, 공감도 좋은 연료이자 보상이다. 

2021년 12월 10일 방역패스 청소년 확대 반대청원 답변에는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직접 등장했다.

장관, 수석, 비서관 급이 직접 답변한다, 서면보다 영상으로

뜻 맞는 이들과 함께 변화를 만드는 것만큼 보람 있는 일이 있을까? 민원 창구에 질문해도 효능감이 없다면 아쉬운 답변 탓이다. 각 부처에서 답변에 진심이려면 담당자들이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최고책임자를 불러내야 했다. 답변자를 무조건 장관이나 수석, 비서관급으로 정했던 이유다. 영상을 고집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서면 답변은 누가 써주면 그만이니까. 어차피 쉬운 질문은 없을 터. 몇 개 부처가 머리를 맞대거나 민간, 시민사회에 협력해야 할 이슈라면 다양한 담당자들을 총동원해 상황 파악부터 해야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힘이 필요했다. 청와대 수석과 비서관들이 적극 나서 준 덕분에 제대로 답변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하다 보니 청원에 참여해준 국민이 ‘빽'이 됐다. 정부도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은 욕구가 있었고, 청원을 활용하는 법을 학습하게 됐다.

순기능은 살리고 정부 사이트의 번거로움 걷어내

헌법에서 청원권을 보장했고, 1961년 청원법을 제정했으나 활성화하지 않은 이유도 해결해야 했다. 공인인증서라든지, 실명 인증, 보안 프로그램 설치 등 정부 사이트에 익숙한 모든 것을 걷어냈다. 시장 점유율이 절반도 안 되는 한글 프로그램 서식 등도 불필요했다. UX(user experience), 사용하기에 편리하고 매끄러워야 했다. 

인터넷 게시판이란 원래 운영이 난관이다. 포털 등이 지난 십 수 년 고심하며 만들어온 규칙을 빌렸다. 언론의 도움을 받기 위해, 답변 외에 보도 자료에도 공들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삿거리를 찾는 이들의 마당이 됐지만, 초기 청원 보도엔 친절한 보도 자료도 한 몫했다.

뜨거웠던 국민청원이 다양한 논란을 부른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원래 스타트업들은 신규 서비스 반응을 확인하면서 다른 모델로 전환하는 피봇(pivot)을 하곤 한다. 순기능은 살리고, 역기능은 보완한다는 원칙으로 버텼다. 진영으로 갈라지는 부족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난 것은 청원 탓만 할 수 없다. 분노를 쉽게 확산시키는 소셜미디어 탓에 전 세계가 부딪친 문제다. 

국민청원이 갈등을 심화시켰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소셜미디어와 플랫폼의 역기능을 속속 확인하고 있다. 다른 커뮤니티에서 불붙는 것과 달리 청원은 정부가 책임지고 답변하며 참전할 뿐이다. 논의의 방향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에 도움이 되고, 아예 신경을 끄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부담이다. 국민에게 답하려면 그런 부담은 감수해야 한다. 아니, 적극적으로 대응해 차별과 혐오로 이어지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n번방·심신미약 핑계·경비원 근무 환경...국민이 만든 어젠다

청원 5년의 성과와 순기능은 청와대 보고서에 잘 정리했다. 보고서는 청원과 함께 닫혔고, 6월 중 대통령 기록관에 다시 공개할 예정이다. 중요한 일에 언론의 시큰둥한 반응을 겪을 때마다 청원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는 말이 나왔다. 텔레그램 n번방 이슈는 20만 이상 동의한 청원이 9건, 총 동의 수가 769만에 달했다. 정부는 디지털 성범죄에 전력 대응했고, 성폭력처벌법을 개정해 불법 촬영물 소지, 구입까지 처벌을 확대했다.

청원의 공감에 힘입어 소방공무원을 국가직으로 전환했고, 심신미약을 봐주던 법 조항을 개정했다. 음주운전 처벌, 동물보호법을 강화했고, 아파트경비원 등의 근무 환경을 개선했다. 국민이 직접 어젠다를 만들고 변화를 요구하는 경험 자체가 시계를 뒤로 돌리기 어렵게 만들었다.

예상 밖의 국민 뜻에는 당황스럽지만 겸허히 수용

 무엇보다 사람들의 의견이 모이고, 나와 다른 생각을 살펴볼 수 있는 공론장의 역할을 더 고민해야 한다. 청원을 통해 예상과 다른 국민 뜻을 확인할 때마다 겸허해지기도 했다. 제주의 예멘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2018년 청원은 당혹스러웠다. 우리는 난민 보호에 매우 소극적인 국가로 꼽히는데 현황에 대한 정보는 부족했고, 오해는 적지 않았다. 결국 난민 보호 관련 해외 현황과 국내 실상을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답변에 만족하지 못하는 목소리가 컸지만, 법과 원칙대로, 우리 정부의 관행대로 해도 난민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이었다. 실제 예멘 난민 신청자 대부분이 이후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인도적 체류자로 남았다. 

국민의 생각, 이른바 사회적 합의 수준이 정부의 기대와 다르다면 더 열심히 소통하는 수밖에 없다. 만약 이렇게 의견을 모으는 공간마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모두가 9시 뉴스를 보고, 신문을 보던 매스미디어의 시대가 끝났다. 각자 취향에 따라 서로 다른 유튜브와 커뮤니티를 들여다본다. 팩트와 정보는 쪼개진 채로 각기 다른 곳을 떠돈다. 민간 영역에 괜찮은 공론장이 있다면 좋겠지만, 한때 청원이 의견이라도 모이는 마당으로 작동했다. 

청원은 사라지고, 갈 곳 잃은 국민 이제 어디로

이걸 꼭 청와대가 해야 했을까? 공론장은 민간에서 더 잘 만들 수 있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의견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나무위키의 활약을 보면, 더 잘할 여지는 어디에나 있다. 다만 공론장이 아쉬운 사회에서 청와대라고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국민이 어떤 이야기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를 내는지 듣는 일을 마다할 이유도 없다. 

청원은 아쉬웠던 지점만큼 진화할 여지가 엄청 많아서, 부디 새 정부가 청원 2막을 더 근사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청원 없으면 어쩔 뻔했냐는 말은 이제 청원이 없으니 어디 가서 호소하냐는 말로 바뀌고 있다. 삼권분립 민주주의 체제에서 청와대가, 정부가 모든 걸 해결해줄 능력자가 아니란 걸 이제 다들 안다. 

하지만 청원은 국민의 뜻이 모이고 확장되는 경험을 남겼다. 국민은 이제 기자회견 외에도 다른 방식의 정부 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안다. 국민의 뜻을 듣는 공간은 계속 진화해야 한다. 국민에게 필요하고, 정부에게도 분명 그렇다. 당신도 지금 청원이 없으니 은근 아쉽지 않은가?

5월9일 마지막 국민청원에 답변하는 문재인 당시 대통령.


글쓴이 정혜승은문화일보에서 기자로 일하는 법을 배우고, 다음에서 포털의 인터넷 정책과 GR(대외협력)을 담당하며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를 두루 경험했다. 카카오에서는 소셜임팩트, 홍보로 경험을 넓히며 부사장을 역임했다. 2017년 뉴미디어비서관으로 청와대에 합류, 디지털소통센터를 이끌며 국민청원 등 새로운 소통을 모색했다. 2019년 여름 청와대를 떠난 뒤 메디치포럼 프로그래머로 일하며 인터뷰집 <힘의 역전 1,2>를 냈다. 뉴미디어 스타트업 얼룩소를 창업했으며, 현재 충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