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11일 WHO가 선언한 코로나19 팬데믹이 1년을 넘어 장기화 되고 있다.  WHO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진자는 4월 초 현재 1억3100만명에 달하며 사망자는 284만명에 이른다. 한국은 확진자나 사망자수가 다른 국가보다 확실히 적은 편이지만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아직은 원활하지 않아서다.<피렌체의 식탁>은 사회 각계 각층의 필자들로부터 팬데믹 시대에 위로를 받았던 책들을 추천 받았다. 코로나19로 세상은 이전보다 위험에 노출됐고 비대면은 고착화됐다.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뀌며 아이들은 태어나고 일상은 계속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일상에서 책을 통해 팬데믹의 터널을 통과할 지혜와 인내, 혹은 희망과 연대를 발견할 것이다. [편집자]

◇강혜란/ 중앙일보 부장(문화팀 기자)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 1, 2권> 해럴드 C. 손버그 지음, 김원일 옮김, 클책을 고르며 ‘팬데믹’에 방점을 찍을까 ‘위로’에 집중할까 하다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2020년은 전무후무한 세계화 시대의 전염병에 난타 당한 해이지만 실은 위대한 작곡가 루드비히 판 베토벤의 탄생 250주년이기도 했다. 전 세계 클래식계는 이를 대비해 수많은 ‘축하연’을 준비했으나 대부분 공연장이 셧다운되고 국가 간 이동이 제한받으면서 대부분 취소됐다. 대신에 이들이 준비한 음악은 유튜브로, 라디오로, 각종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흘러나왔다. 일년내내 지치고 외롭고 아득하던 순간들에 베토벤의 음악이 우리를 ‘연결’해주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넘길 수 있었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절망의 심연에서 환희의 선율을 불러낸’ 베토벤을 기념하는 해였기에 더욱 그랬다.

베토벤 관련 책도 숱하게 쏟아졌지만, 전체를 아울러 하나를 꼽는다면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1, 2권을 꼽겠다.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음악평론가 출신 해럴드 C. 손버그가 1970년에 초판을 펴낸 뒤 1996년 제3판으로 개정했다. 국내 번역본은 지난해 1월 1권이, 12월에 2권이 나왔고 앞으로 3권이 나올 거란다. 제목이 다 요약한다. 서양음악의 계보 속에서 당대는 물론 현대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을 살핀다. 음악 이야기가 주가 되지만 그걸 형성하는 핵심 재료로서의 ‘인간’이 밀도 있게 그려진다.

이 인간다움이란, 바흐를 비롯한 대부분의 고전 작곡가들이 겪었던 급여와 책무 간의 균형 문제, 외모와 성품 관련 에피소드(여자 문제는 늘 중요 포인트!), 천재성에 관한 일화, 가족 및 지인들과의 불화 등을 포함한다.(인품이 원만하고 낙관적이었던 하이든은 그런 불화에서 거의 예외로 보인다). 이들은 세상에 자신을 욱여넣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음악에 적응하게끔 사람들의 세계를 확장시켰다. 이 같은 에피소드를 흥미 위주로 나열하는 게 아니라 서양 역사와 인문학 흐름을 강한 지적 근육으로 장악한 채 일종의 ‘작곡가 사기열전’으로 전개한다는 게 강점. 미사와 성가, 귀족들을 위한 오락으로 출발한 클래식이 더 많은 인간들, 더 보편적인 인간성을 담아내는 도구가 돼온 흐름이 잡힐 듯하다. 단점이라면 사진은커녕 삽화 한장 없는 글바닥으로 권당 500여쪽이 이어진단 것. 그래도 저자가 겨냥한 바 ‘지성적이고 음악을 좋아하는 비전문가 독자들’이라면 능히 빽빽한 행간에서 환상의 선율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에서 1권에 속하는 베토벤은 같은 권에 속한 14명의 작곡가들과 견주어 비슷한 분량이다. 베토벤에 대한 집중 탐구를 하기엔 아무래도 아쉬운 편. 이를 보완할 책으로 아르테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중 <베토벤>(2020)과 클래식 전문 음반숍 풍월당에서 펴낸 <베토벤 현악 사중주>(2020)을 추천한다. 둘 다 국내 저자다. <베토벤>은 KBS1라디오 클래식FM에서 ‘실황음악’을 진행하는 최은규 음악평론가가 베토벤이 생전에 거쳐갔던 도시(공간)들을 답사하면서 그의 삶과 음악을 엮어낸 책이다. 그 자신이 연주자 출신으로서 음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비교적 쉽게, 여행하듯 혁명적 음악가 베토벤을 조명했다.

반면 나성인의 <베토벤 현악 사중주>는 그의 전작 <베토벤 아홉 개의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숙련된 해부학자의 솜씨로 음악을 밀도 있게 해체하고 재조립해 해설한다. 솔직히 클알못(클래식을 알지 못함)의 수준에선 다 이해하기 어려워 언젠가 내공이 쌓이면 곡 하나하나와 대차대조하며 다시 읽을 생각이다. 다만 그게 방과 후 과제가 아니라 아껴서 꺼내먹고 싶은 초콜릿 상자로 느껴지게 한다는 게 공들여 쓰여진 이 책의 강점일 듯. 어쩌면 팬데믹 시대를 가장 위로한 것은, 이렇듯 언제 어디에도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순간들이 아니었을지.

◇김진경/ 자유기고가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해.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소설에서 여러 번 되풀이되는 문장이다. 주인공은 1933년에 태어나 71세에 세상을 떠나는 남자다.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했으며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둔 성공한 광고 전문가이자 화가. 남자의 장례식 장면으로부터 시작하는 소설은, 죽음을 맞기까지 남자가 살아온 삶을 차분하게 회상한다. 사랑이 끝나고 가정이 깨질 때, 몸이 병들고 죽음을 맞을 때,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받아들이는 수 밖에.

남자의 부모는 보석을 팔았는데 가게 이름이 ‘에브리맨 보석상’이었다. 남자의 아버지는 말한다. “다이아몬드란 건 그 아름다움과 품위와 가치를 넘어서서 무엇보다도 불멸이거든. 불멸의 흙 한 조각, 죽을 수밖에 없는 초라한 인간이 그걸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다니!” 불멸을 꿈꾸며 다이아몬드를 손에 끼는 인간이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게 인생이다. 예외는 없다.

어렸을 때 ‘거친 바다 저 멀리 100미터나 나간 곳에서 대서양의 큰 파도를 타고 해변까지 단숨에 들어오던, 늘씬한 작은 어뢰처럼 상처 하나 없는 몸’이었던 남자는, 나이가 들면서 수술 없이 버티지 못하는 몸이 된다. 그는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혼란스러운 감정에 허우적댄다. 변함 없는 성욕, 관계가 소원한 두 아들에 대한 원망과 후회, 좋은 사람들을 떠나게 놔둔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회한, 내일이 오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이토록 무거운 죽음이 이토록 흔하다는 것, 그렇지만 각각의 죽음이 다 책 한 권씩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는 것, 손에 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남는다는 것, 그것이 이 소설 제목 ‘에브리맨’의 의미다. 주인공 남자의 이름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라서다. 팬데믹은 죽음을 흔한 것으로 만들었다. 무감해지지 않으려면 죽음 뒤에 놓인 이야기를, 우리 모두가 이야기를 가진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정창 옮김, 열린책들아마존 열대우림 인근 마을인 엘 이딜리오에 비극이 닥친다. 백인 사냥꾼이 살쾡이 새끼들을 죽여 어미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복수를 벼르는 암살쾡이가 인간들을 공격한다. 먹이가 부족한 우기에는 사냥하지 않는다, 동물 새끼들은 죽이지 않는다는 아마존의 암묵적 사냥 규칙을 무시한 대가였다.

평생 엘 이딜리오에서 살아온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가 이 문제의 해결사로 지목된다. 인디오들과 가깝게 지냈던 덕에 밀림 지리와 짐승들의 행태에 밝고 그곳에서 생존하는 법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토니오는 사냥꾼이 아니다. 제목처럼 그는 연애소설 읽는 것을 좋아하는 칠십대 노인이다. 일년에 두 번 마을을 방문하는 치과의사가 가져다주는 귀한 연애소설만이 그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준다. 하지만 분노한 암살쾡이 때문에 그는 책을 덮고 밖으로 나선다. 문제는 인간인가, 암살쾡이인가.

루이스 세풀베다는 작가이기 이전에 운동가다. 1949년 칠레에서 태어나 반독재, 반세계화, 환경 운동에 헌신했다. 피노체트 군부 독재에 저항하다 감옥살이를 했고, 그린피스 배의 승무원으로도 일했다. 그가 1980-90년대에 쓴 소설들은 최초의 환경 소설로 평가받는다. 마흔에 쓴 <연애소설 읽는 노인>도 무분별한 아마존 환경 파괴가 인간에게 재앙을 초래함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자신의 삶과 작품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주장한 작가 세풀베다가 지난해 코로나19로 사망한 것은 아이러니한 비극이다. 암살쾡이 한 마리가 인간 사냥을 멈춘다 해서 아마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듯이, 코로나19가 종식돼도 인간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여전하다. 자연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작품이다.

◇유정훈/ 변호사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올스 지음, 서창렬 옮김, 현대문학러시아 귀족 로스토프 백작이 볼셰비키 혁명 직후 처벌을 면하는 대신 호텔 종신연금에 처해진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다락방에 갇힌 신세지만 그가 인간으로서 가진 매력과 품위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그는 재봉사, 주방장, 지배인, 9살 소녀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일상의 행복을 찾는데 호텔은 좁지 않았다.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못하면 환경에 지배당할 수 밖에 없다."(52쪽)는 대목이 그의 삶을 잘 요약했다.

유한계급 한량이 음식, 와인, 역사, 문학, 음악에 관해 쏟아내는 교양과 지식은 소설의 장소적 배경이 오로지 호텔 안이라는 것을 잊게 만들었고,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코로나19로 어디 갈 수도 없고 누굴 만나기도 어려워 아파트에 갇힌 주말을 견디기에 충분했다.

주인공이 하나하나의 순간마다 천 번에 걸친 변화를 보여주는 과정인 인생(630쪽)을 직면하고, 그러면서도 관대한 마음을 잃지 않아 결국 ‘극히 명료한 순간’(687쪽)이 찾아든 것처럼, 우리도 그럴 수 있길!

<태어난 게 범죄> 트래버 노아 지음, 김준수 옮김, 부키미국에서 활동하는 유명 코미디언 트레버 노아의 스토리. 그는 타인종 간의 성관계 자체를 범죄로 규정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하의 남아공에서 흑인 엄마와 백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떤 사람의 존재 자체가 범죄의 결과이자 증거라는 현실이 기막히다.숨 막힐 정도로 억압적인 체제, 지독한 가난, 역기능 가정 등의 어두운 소재를 유머가 넘치면서도 가볍지 않게 풀어내는 스토리텔링이 대단하다. 스탠딩업 코미디로 청중을 쥐락펴락하는 트레버의 면모를 엿볼 수 있고, 인간에 대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진짜 이야기라 울며 웃으며 단숨에 읽었다.

이 책은 그가 ‘첫 번째 팬’ 엄마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아들을 세계적 코미디언으로 키워낸 극성 엄마 얘기가 아니라, 엄혹한 인종차별 체제에 굴하지 않는 삶을 살아내고 그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한 인간을 길러낸 사람의 스토리가 펼쳐진다.

◇정진영 소설가/ <침묵주의보> <젠가> 등 지음

 

 

<이완의 자세> 김유담 지음, 창비인생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나는 오래전부터 많은 어른이 해준 그 말을 매년 나이를 먹으며 아프게 체감하고 있다. 노력하지 않고 잘 살기는 어렵지만, 노력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장해주지는 않음을. 노력하지 않는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지만, 노력하는 사람은 운 좋은 사람을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코로나 펜데믹은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중요한 사실 하나를 내게 일깨워줬다. 아무리 운 좋은 사람이라도 혼자서 살아나갈 수 없는 게 세상이란 사실을 말이다. 코로나 펜데믹은 내 이웃이 안전해야 내 안전도 보장할 수 있음을 세상에 보여줬다.

모든 게 불확실해진 세상에서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일상을 지키려면 연대해야 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이 소설은 목욕탕을 배경으로 주변부의 삶을 사는 여성들의 자화상을 그려내며, 느슨한 연대의 힘이 우리의 일상을 지키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스레 깨닫게 한다. 그동안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성공의 조건에 짓눌려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긴장만 하며 살아온 게 아닐까.

이 소설은 뻣뻣한 몸 때문에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주변부로 밀려난 주인공을 통해 독자에게 따뜻하게 말한다. 일단 몸에서 힘을 빼고 주변을 돌아보라고. 그리고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아직 가야 할 인생길이 기니까 함께 손잡고 걸어보자고.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세상의 작은 표본이 이 소설 속에 있다.

<내 방 여행하는 법> 그자비에 드 메르트르 지음,  장석훈 옮김, 유유코로나 펜데믹 이후, 사람들이 느끼는 가장 큰 갈증 중 하나는 여행에 관한 갈증이 아닐까. 코로나 펜데믹은 시간과 금전의 여유가 여행의 필수 조건이라고 여겨왔던 우리의 생각을 근본부터 박살냈다. 어디로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시간과 금전의 여유는 철저히 무력했으니 말이다.예나 지금이나 여행은 견문을 넓히는 좋은 기회로 취급받고 있다. 일상과 거리를 둬야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주변을 더 사랑할 수 있다는 그럴싸한 명분도 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해보자. 여행이 우리의 견문을 정말로 많이 넓혀주던가. 남는 건 사실 사진 아니던가.

이 여행기는 집안에서도 얼마나 훌륭하게 여행하고 견문을 넓힐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내 방을 여행하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는 너스레로 시작해 침대, 의자, 그림, 판화 등 주변의 사물을 소재로 삼아 미술, 음악, 철학, 과학 등으로 여행의 주제를 확장하는 저자의 입심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200여 년 전 책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현대적인 내용과 문장도 놀랍다. 저자는 불법으로 결투를 벌인 죄로 가택 연금을 당한 뒤 무료한 마음을 달래고자 이 여행기를 썼다.

공교롭게도 저자의 처지가 코로나 펜데믹 속 자가 격리와 닮아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칸트는 평생 자신의 고향 반경 150km 밖을 벗어나지 않고도 위대해지지 않았던가. 다시 여행이 자유로워지는 시간이 오면, 이 여행기와 더불어 자신과 주변을 돌아봤던 시간이 먼 곳에서 보낼 시간을 풍요롭게 해주지 않을까.

◇홍윤희/ 무의 이사장·이베이코리아 이사

 

 

<장애의 역사> 님 킬슨 지음, 김승섭 옮김, 동아시아코로나는 우리 사회에 숨어 있던 차별의 민낯을 드러냈다. ‘우한폐렴’ ‘중국바이러스’라는 말이 정치 지도자의 입부터 기사 댓글까지 공격적으로 쓰였다. 소득이 낮고 불안정한 위치의 노동자들은 가장 먼저 일을 못하게 되거나 ‘필수노동자’라는 이름으로 감염을 무릅써야 했다. 차별은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미국에서 아시아계 미국인들을 향한 범죄는 지난 1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난 중국인이 아니야!”라는 방어는 소용없고 어떤 경우 어리석기까지 하다. 아시아계를 겨냥한 증오범죄를 규탄하기 위해 미국에서 아시아계가 단합해 시위를 하는 이유다.

미국 장애학자 킴 닐슨이 쓴 <장애의 역사>는 모든 차별이 근본적으로 통한다고 말한다. 책에서는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장애인, 동성애자, 흑인을 비슷한 맥락에서 차별한 미국의 역사를 서술한다. 노예가 있던 시절 미국에서는 소위 ‘능력있는 몸’을 가진 백인/남성/노예소유주가 아니면 다 장애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탈출하려는 노예를 정신질환이 있다고 해석하거나, “고등교육은 여성의 몸을 아프게 한다”는 식의 논리로 차별을 정당화했다. 책은 이런 소수자들이 연대한 기록도 전한다. 1970년대 공공건물을 점거하고 인권 투쟁을 하던 백인 장애인들에게 음식을 갖다 주었던 이들은 게이단체, 유색인종인권단체, 약물사용자, 흑인인권운동단체 블랙팬서였다.

이 책을 번역한 고려대 김승섭 교수님이 2019년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책을 소개했던 말이 기억난다. "인종 성차별 등의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몸의 이슈로 귀결된다. 장애학의 풍부함이 그런 소수자성의 심장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책에서는 모든 차별은 공기와 같아서 기득권은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지만,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삶의 모든 순간을 차별과 함께 살아간다고 말한다. 코로나 시대는 우리 모두가 상처받을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그 약함을 나눌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보통사람들의 전쟁> 앤드류 양 지음,장용원 옮김, 흐름출판미국 바이든 정부는 코로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출범과 함께 다음 슬로건을 내걸었다. “팔에는 백신 주사를, 주머니에는 지원금을 (Shots in arms. Money in pockets).” 이 중 ‘주머니 속 돈’의 경제적 효과는 2020년 코로나 상황에서 전세계적으로 증명됐다. 트럼프 행정부가 재난지원금을 미국인들에게 지급하기 위해 자문했던 사람이 바로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로 나왔던 앤드루 양이다. <보통 사람들의 전쟁>은 앤드루 양이 기본소득에 대해 쓴 책이다. 양은 대도시에서 명문대를 나온 졸업자들을 중소도시로 보내 그 곳의 비즈니스를 키우게 한다는 취지의 소셜벤처 ‘벤처 포 아메리카’를 경영하며 미국 중소도시의 참담한 현실을 목도했다. 생계가 무너진 이들이 이민자를 공격하는 트럼프 논리에 경도되면서 트럼프에게 투표한 것에 충격을 받아 2018년 이 책을 썼다.

기본소득에 대한 책이지만 이 책의 진가는 사실 앤드루 양이 기본소득을 옹호하게 된 철학에 있다. 양은 ‘결핍의 마음가짐’이란 개념을 제시한다. “결핍은 정신적 여유를 없애 사람을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으로 만든다”는 데이터를 제시한다. 주머니가 비어 있고 생활이 안정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 창의성,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동정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거다. 기본소득은 이런 결핍의 마음가짐을 풍요로 바꾸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게 양의 주장이다. 대선경선 과정에서 양은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양의 아내는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자폐아인 큰아들을 돌보기 위해 일을 그만뒀다. “아내는 나보다 더 열심히 일하지만 대가를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내의 돌봄노동이 내 노동보다 값어치가 없을까요?”

코로나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돌봄노동이 매우 고귀하지만 참담할 정도로 불평등하게 여성에게 몰리고 있음을 목격했다. 우리의 입에 들어가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사람은 한국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재택근무를 버티게 해 준 택배기사와 배달기사들은 감염 위험과 과도한 노동, 직업 불안정성에 시달린다. 앤드루 양의 책에서는 이런 노동의 존엄성을 직시하자고 말한다.

코로나 감염자, 사망자, 실업자, 취업자 숫자를 보며 통계 뒤 인간의 존재를 종종 잊을 때가 있었다. 그 때마다 앤드루 양의 책 마지막 부분을 기억한다. 양은 마크 에드먼슨 버지니아대 교수의 책 <자아와 영혼>을 인용한다. 서구 문화에서는 용기, 동정심, 사색이라는 3가지 주요 이상을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 이 이상은 현대에 들어와 ‘중산층 가치를 지닌 세속적 자아’, 즉 잘 먹고 잘 살며 남보다 앞서는 것으로 대체되어 갔다. 양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인간적 자질은 기술과 시장 중심적 능력에 밀려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금융이 용기이고 포장이 동정심이며 코딩이 사색이다.”

미국 대선 경선에서 무명 후보로 시작한 양은 오는 11월에 치러질 뉴욕시장 선거에서 유력 후보가 됐다. 시장 중심적 능력주의가 전염병과 만나 차별과 양극화를 가속화하는 코로나 상황에서 앤드루 양이 내세운 ‘휴머니즘 퍼스트(Humanism First)’구호가 많은 미국인들에게 공명하고 있다는 건 위로가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