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식탁>은 창간 2주년을 계기로 주말판 ‘위크엔드 컬처’를 선보인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한 주의 긴장을 풀고 느긋하게 인문학과 지식, 문화, 성찰의 시간을 즐기도록 하기 위해서다. 토요일 아침에 찾아가는 주말판은 기존 매체와 다른 맛과 멋을 드리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위크엔드 컬처’의 두 번째 필자는 오랫동안 ‘마음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임성원 현덕경영연구소장이다. 임 원장은 20년 이상 상담과 교육, 컨설팅을 하면서 심리학, 뇌과학, 철학, 음양오행, 불교에 심취해왔다.
필자는 이 글에서 감정이 중요한 이유를 우리가 일상에서 뭔가 결정을 내릴 때 거기엔 감정이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이 ‘감정의 제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거다. 감정의 노예가 아니라 감정의 CEO가 되는 법을 소개한다. [편집자]

#감정 조절의 열쇠는 뇌 전두엽
  정보를 인지, 해석, 판단, 결정
#기억과 가치체계가 감정의 재료
  감정 과정 이해하면 행복감 높아져
#감정대로만 행하면 '경험하는 자아'
  객관화 거친 '성찰하는 자아' 필요
#명상은 자신의 생각을 보는 작업
  감정을 포착해 '마음 근육' 길러야


어느 회사 임원에게 CEO가 물었다. 신규 사업이 4년째인데 어떻게 돼 가느냐고? 임원이 속으로 되물었다. 나를 믿지 못하느냐고? 팽팽한 감정의 평행선, 둘 사이 긴장은 해소가 안 된 채로 악화되다가 결국 파국을 맞았다. 나는 중간에서 쌍방의 소통을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내 능력이 부족했겠지만, 그것 말고도 각자의 해석 체계가 다르다는 것이 큰 장벽이라는 것을 느꼈다. 감정이 인식에서 나오는지, 인식 때문에 감정이 생기는지는 몰라도 둘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 임원은 메시지의 내용에 집중 못하고 의도에 집중하는 경향이 명백했다. 그 의도는 그의 주변 상황과 독특한 인지체계가 만들어낸 ‘의도’였지 상대방인 CEO의 의도는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스스로 ‘내가 당신의 진짜 의도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나의 중재 노력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상담한 모든 임원은 ‘위기가 내부로부터 왔다’고 확신한다. 심지어 외부환경에서 촉발된 것이라 하더라도, 이미 자기조절이 어려운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를 무너뜨린 것은 내부로부터의 감정이었다.

상담을 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대체로 공통된 증상은 감정에 문제가 생겨 있다는 것이다. 조절이 안 되면 불편하고 통제가 안 되면 위험하다고 느낀다. 충동적인 행동을 하거나 어떤 감정에 깊이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험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하기 때문에 감정이 힘이 세다는 사실을 내심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신경과학적 연구의 결과물들은 감정이 건강이나 자기통제보다 더 중요한 일에 관계되어 있다고 말한다.

감정 조절은 행복을 위해 필요한 열쇠

감정이 중요한 진짜 이유는, 결정은 감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했다 하더라도 이미 암암리에 감정과 교류한 결과이며, 결국은 정서적 정향에 따라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감정이 일상과 인생을 지배한다고 하면, 감정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것은 단순히 불쾌감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나은 삶, 즉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감정은 행동을 위한 에너지를 제공한다. 이것은 원시시대에 가장 중요한 ‘투쟁 도피’ (fight or flight) 반응을 이끌어내 자기 목숨을 살리는데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면서 원인-결과를 연결시키는 문제 또한 복잡해졌다. 오늘날과 같은 복잡계에서는 편도체의 즉시 대응력보다 점점 더 전두엽의 해석 능력이 중요해진 것이다. 뱀과 새끼줄을 구분하고, 자라와 솥뚜껑을 구별하지 못하면 목숨이야 지킬지 몰라도, 인생에서는 손해를 보거나 패배할 수 있다. 스피드와 더불어 정확성이 중요해진 것이다. 이 두 마리 토끼 모두를 요구하는 현대는 우리를 눈도 머리도 핑핑 돌아가야 하는 압박에 던져 놓았다. 편도체와 전두엽은 24시간 혹사당하고 있다. 퇴근을 해도 접속 코드를 뽑아버릴 수 없는 것이다.

술김에 홧김에…뇌 전두엽 기능 마비

뇌는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처리해야 한다. 그것도 신속하고 정확하게. 그렇다고 모든 정보를 다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뇌의 시상에서 무수한 정보를 스팸으로 처리한다. 통과를 위한 좁은 문은 정보가 ‘강렬한가, 중요한가, 감동적인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엄선된 정보는 이제 ‘파페츠 회로’라고 하는 진짜 정보처리 과정에 들어간다. 이 프로세스는 뇌간, 변연계, 대뇌피질의 각 영역이 협응하여 정보를 해석하고, 판단하고, 정서적 정향을 정립하기 위해 작동하는 회로다.

이 과정에서 전두엽은 가장 유능한 지휘관이 되어야 한다. 사실과 허위를 판별하고, 사실과 진실을 구분하고, 맥락과 상황을 살피고, 목적에 비추어 최종적인 감정을 정해야 한다. 논리와 직관, 도덕적 기준과 생물학적 본능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고집불통의 변연계와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하고 설득하며, 궁극의 목적에 일치(align)시켜야 한다. 탁월한 CEO가 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전두엽 특히 전전두엽은 진화 과정에서 보면 가장 최근에 발달한 따끈따끈한 신상(新商)이다. 그래서 품질의 안정성이 떨어진다. 개인차가 크고, 개인에 있어서도 상황에 따라 편차가 크다. 술김에, 홧김에, 흥분해서, 슬퍼서… 전두엽은 가끔씩 아니 자주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감정반응은 분명히 변연계에서 일어난다. 특히 쾌락 신경계인 선조체와 통증 신경계인 편도체는 강렬한 양대 산맥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감정이 변연계 특정 영역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뇌는 전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어떤 감정이 뇌의 어떤 영역에 불이 켜지게 하는지를 fMRI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해도 뇌가 그렇게 단순하게 작동되는 게 아니다. 감정은 최소한 변연계와 전두엽 간의 긴밀한 상호작용 결과다. 인간은 하등 생명체처럼 자극-반사 시스템이 아니라 정보-반응 시스템으로 진화한 존재다. 즉 들어온 정보는 인지, 해석, 판단, 결정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우리는 찰나에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하는 존재가 맞다.


감정의 재료들, 기억-욕망-가치기준

40대 남자가 상담을 하다가 눈물을 터뜨린다. 난감하다. 처음엔 불면증이 주제였는데, 점점 우울감과 죄책감을 토로했다. 불면의 원인은 꿈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추억이 꿈으로 나타나며 잠을 깨게 된다는 것이다. 40대의 누구나 겪을 일이지만, 그는 중간 정도의 치매 증상이 있는 부친을 요양원에 모시자는 가족회의 주제 때문에 고민하던 중이었다.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한다는 ‘당위’는 이 주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마치 자신이 부모를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고 고백한다. 양로원이나 요양원에 모시는 게 마치 옛날 고려장같이 느껴져서 마음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도 아니고 확정된 미래도 아니지만 정서적으로 벼랑 끝에 몰린 상태였다.

그의 기억과 가치 기준은 새로운 사태를 맞이하여 그에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황에서 해석, 판단, 결정에 이르는 우리의 인지 과정에서 꼭 필요한 기초 재료가 두 개 있는데 그 하나가 기억이다. 그리고 이 기억에 관하여 밝혀진 중요하고, 한편으론 곤란한 사실이 있다. 기억은 감정으로 채색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억은 물류창고에 보관된 제품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다. 기억이 생성될 때 내용뿐만 아니라 그 맥락과 감정적 단서들도 함께 기억된다.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는 기억이 맥락을 잃어버린 결과로 나타나는 혼란이다. 평화로운 거리의 엠뷸런스 사이렌을 순식간에 전쟁터의 공습경보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기억을 인출하는 사람의 당시 상태도, 역으로 인출되는 기억에 영향을 미친다. 뇌는 이처럼 기억과 보이는 것에 대하여 역으로 투사하는 기관이다. 있는 것을 보거나, 있었던 사실을 기억한다고 생각하는 소박한 반영론은 폐기된 지 오래다. 기억은 객관적이지도 고정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을 다룬다는 것은 이토록 불확실하고 가변적인 기억에 기초한 인지(認知)에 손을 대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착각과의 싸움이다.

기억에 이은 다른 하나의 재료는 우선순위를 정하는 가치관(이라 쓰고 욕망의 목록이라 읽는다)이다. 우리의 욕망과 가치체계가 일단 형성되면 그것은 거꾸로 무엇을 볼 것인지(정보 수용), 어떻게 볼 것인지 (해석의 기준), 무엇인지(판별), 무엇을 해야 하는지(결정) 하는 전체 인식-감정 과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감정 과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각 단계마다 작동되는 자신의 욕망체계, 가치체계를 확인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은 이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가치관을 처음으로 직면하는 사람도 많다. 평소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삶을 이끌고 있었던 실체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상대하며 주도해야 하는 전두엽을 강화시키는 것은 한 사람의 의사결정의 질(質)을 끌어올리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좋은 의사결정이란 감정에 휩쓸리지도 무시하지도 않으며 정확한 해석과 판단이 뒷받침된 결정이다.
사실 좋은 결정을 논하기 이전에, 감정조절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데서 오는 자유감과 자기효능감은 그 자체로 매우 큰 행복감(good feeling)을 준다.

전두엽 강화: 독서, 여행, 자기 객관화 

어떻게 하면 이렇게 중요한 전두엽을 강화시킬 수 있을까? 좋은 영양 공급과 적절한 운동은 기본상식이다. 하지만 전두엽의 지적 역량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자극과 경험이다. 전두엽의 뉴런들은 끝도 없는 자극과 경험을 원한다. 사실 학습하는 기계와 같아서 심심함과 지루함을 참지 못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와 여행이다. 그 중에서도 낯선 곳에서, 낯선 상황과 사람을 만나는 것이 가장 효과가 크다. 계몽 시대의 유럽에선 청소년기에 대륙을 여행하여 청년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 진짜 교육이었다. 경험이 쌓이고 안목이 넓어지면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깊어지고 풍부해지는데 바로 전두엽이 잘 발달한 것이다. 사물을 해석할 프레임이 하나밖에 없다면, 그것으로 이해가 안 되거나 해결책이 없을 때 받는 스트레스는 폭증하고 감정은 폭주할 위험이 있다. 갖고 있는 연장이 망치밖에 없는 목수는 세상을 못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하나의 프레임만 가지고 세상을 보는 것, 이것이 감정 조절을 어렵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다. 끝없이 스스로를 새로운 자극에 노출하고, 학습하고, 프레임을 재구성해서 자신의 인지적 자산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서.

이제 감정조절을 위한 전두엽 강화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남았다. 바로 자기 객관화다. 이것을 초인지(meta cognition)라고도 하는데, 의미는 자신의 생각, 감정, 느낌을 제3자의 시각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학 분야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찰하는 자아’와도 통하는 개념이다. 생각대로 감정대로 느낌대로 행한다면 그것은 ‘경험하는 자아’만 작동하는 것이다.

성찰하는 자아는 내면(inner world)을 관찰하여 자신의 해석, 판단, 결정에 사용되는 기준들을 확인하고, 그 기준들의 속성과 맥락, 매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모든 작업의 주 재료가 되는 기억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경험하는 자아’는 인정 받고, 위로 받고, 긍정적 지지를 받기 원한다. 그러므로 내담자의 스토리를 공감하며 경청하는 것은 빠뜨릴 수 없는 과정이다.

하지만 ‘성찰하는 자아’가 작동하지 않으면 결국은 자기감정의 직면(confrontation)과 자각(self-enlightenment)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다시 그 상황이 되면 감정조절에 실패하게 될 것이다. 전두엽이 편도체를 제어하는 유일한 무기는 지식과 안목, 즉 식견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제3자의 입장에서 자기감정과 대화하는 연습’은 평상시에 꾸준히 해야 할 전두엽 단련법이고 진정한 마음의 근육(mind muscle) 만들기다.

최종병기 명상, 내 마음 속을 들여다봐야

마지막으로 전두엽 강화법으로 잘 알려져 있는 명상(冥想)을 소개한다. 이 말은 원래 디야나(dhyana)라는 힌두어다. 영어로는 meditation, 그리고 한자로는 음을 따라 선나(禪那) 혹은 줄여서 선(禪)이라고 한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意譯은 思惟修 혹은 精勵다. ‘생각을 닦는다’ 또는 ‘정밀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부좌하고 앉아서 심신을 잊어버리는 삼매에 드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수많은 신비주의적 선입견과도 다르게 매우 현실적인 작업이다. 명상의 冥자는 두 개의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생각 어두울’ 冥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 깊게 할’ 冥이다. 이것은 명상의 본질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첫 번째는 잡념을 떨치고 고요해진다는 뜻이고, 다음엔 사물을 깊고 올바르게 생각한다는 의미다. 차분함과 통찰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어떻게?’가 늘 문제다. 그러나 방법은 사실 정해져 있다. ‘자신의 생각을 생각한다(think)’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본다(see)’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이 말은 자신의 인식 과정 전체를 객관화하여 관찰한다는 초인지(meta cognition)와 정확히 개념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니 명상이란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즉시로 행하는 것이다. 감정이 일어나고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해내는 알아차림을 힌두어로는 사띠(satti), 영어로는 mindfulness라고 한다.

주먹이 날아올 때 눈을 감지 않는 복서는 처음엔 맞겠지만 언젠가는 주먹을 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영원히 이루지 못한다. 감정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자기의 마음을 보겠다는 의지를 발동하고 그 기량을 높여가는 것은 이름을 뭐라고 하든지 명상임에 틀림없다.

감정은 힘이 세다. 그것이 우리의 생존율을 높였다. 그러나 온전해지려면 전두엽의 지혜와 함께해야 한다. 스피드만 빠른 폭투를 다스려 콘트롤 능력까지 갖춘다면, 우리는 가까스로 감정에 잡아먹히지 않는 수준에서 나아가 능수능란하게 감정을 활용하여 동기부여와 실행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 때는 살아남았고 먹을 것이 있다는 것으로 정의되는 행복 이상의 행복을 누리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산다는 것은 끝없이 이물질의 유입으로 상처 입는 조개와 같다. 폐사될지, 진주를 만들어낼지 그것은 감정의 조절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어로 감정을 emotion이라고 한다. 행동(motion)이 되어 밖으로(e)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감정이다. 나의 마음속에 불쑥 튀어나올 무엇을 키우고 있는지 살피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임성원 필자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및 행정대학원 수료. 롯데그룹 기획조정실, 한국생산성본부에서 일하다 휴맥스에서 인사담당 임원을 맡아 수많은 기업들을 상대로 자문·인사·교육 서비스를 제공했다. 2000년부터 1인기업 ‘현덕경영연구소’를, 2002년부터 평창에서 힐링캠프를 운영해왔다. 저서로는 <직장인 울랄라>가 있다. 20년 이상 상담·교육을 하는 한편으로, 심리학, 뇌과학, 철학, 음양오행, 불교를 꾸준히 공부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