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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칼럼] ‘행동하는 韓銀’ 위해 정부‧국회도 움직여라

by | 2020년 4월 14일 | 국제, 정책


#美 연준 영리기업 여신은 대공황 산물
  2008년 버냉키의 SPV가 성공 모델
 특수목적회사에 대출하고 정부가 보증
#한은도 SPV로 최종대부자 역할해야
① 기재부, 국회에 지급보증 동의 구하라
② 금융위는 지원대상 기업군 파악을
③ 한국은행은 여신 실행하고 사후관리


지난달 25일 「피렌체의 식탁」을 통해 필자가 발표한 글  <“한국은행이 美 Fed처럼 담대하게 돈을 풀 때다”>가 작은 변화를 이끈 것 같다. 그 전에는 한국은행이 회사채나 CP를 직매입하는 방법만 논의되다가 이제는 우량 회사채를 담보로 증권사에 대출하는 방안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 방식을 제안한 필자로선 좀 더 바람직한 실행방식을 추가 제안하려 한다.

한국은행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부 지급보증이 비(非)금융기관 지원의 필수조건임을 강조했었다. 그때 필자는 “한국은행이 영리기업에 여신을 할 때 정부 지급보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정부 지급보증은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3월 31일자 칼럼)

하지만 정부 지급보증 없는 한국은행의 영리기업 여신이 최선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 글에서는 세계금융 역사를 통해 한국은행의 영리기업 여신이 갖는 의미와 한은, 정부, 국회가 각각 해야 할 역할을 살펴보겠다.

유럽 중앙은행들, 금융기관까지만 책임

최종대부자 개념이 소개된 것은 19세기 말이다. 1763년, 1772년, 1797년 금융위기가 거듭되는데, 그때마다 영란은행이 대출을 회수했고 수많은 기업과 은행들이 도산했다. 1844년까지는 영란은행이 발권독점권도 없는 일개 상업은행이었기 때문에 최종대부자가 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발권독점권을 갖춘 1866년의 금융위기에도 영란은행은 달라지지 않았다. 옛날처럼 경쟁은행의 파산을 수수방관했다. 그러자 월터 배젓(Walter Bagehot)이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다른 상업은행들과 경쟁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최종대부자가 돼라”고 촉구했다. 그 역할을 포기하면, 중앙은행으로서 자격미달이라는 뜻이었다.

배젓은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의 편집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고전으로 손꼽히는 『영국헌법론(The English Constitution)』을 쓴 저자다. 당대에 영향력이 아주 컸던 배젓의 지적을 받고, 영란은행은 최종대부자 역할에 눈을 떴다. 그때부터는 금융위기 때마다 발로 뛰었다. 1890년 아르헨티나에 과잉 투자한 베어링스 은행이 파산 직전으로 몰려서 금융경색이 시작되자 영란은행은 프랑스은행에서 금화를 차입해서 상업은행에 대출했다. 2008년과 2020년 체결된 한미 통화스와프 계약과 똑같은 메커니즘이다.

유럽의 다른 중앙은행들도 영란은행을 따랐다. 그러면서 18세기부터 주기적으로 반복되던 금융위기가 1880년경부터 사라지고, 제1차 세계대전까지 모든 분야가 큰  문제없이 잘 돌아갔다. 그 시기를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고 한다.

유럽에선 은행업의 범위가 매우 넓다(universal banking). 그래서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역할은 상업은행을 넘어서 할인상사(우리나라의 종금사)나 증권사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대공황 시기에는 금융업을 뛰어넘어 군수업체 등 산업체에도 중앙은행이 구제금융을 제공했다. 독일·이탈리아의 경우 중앙은행이 영리기업에 직접 대출하지는 않았지만, 상업은행을 우회하여 지원했다. 그래서 중앙은행의 산업지배력이 매우 컸다. 이탈리아에선 3개 대형은행이 중앙은행 대출을 받아 밀라노 증권거래소 상장주식의 절반을 소유할 정도였다.

그런 일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중단되었다. 중앙은행의 영리기업 대출은 결국 정부의 지시와 요구에 따른 준(準) 재정활동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역할이 금융기관까지만 미친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위기에서도 그렇다. 미국이나 일본과 크게 다르다.

미 연준 영리기업 여신은 대공황 산물

미국은 유럽보다 엄격한 분업주의(은행업과 증권업의 분리)를 따르면서도 경제위기 시에는 중앙은행이 상업은행 이외에 증권사는 물론, 영리기업과 민생경제까지 챙긴다. 그런 점에서 무원칙하다. 미 연준(Fed)이 설립될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1914년 출범한 연방준비제도는 회원제다. 그러므로 대공황 초기에는 연방은행들이 상업은행, 그중에서도 회원은행에게만 대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할인상사와 주식 브로커까지 구제금융을 제공했던 영란은행에 비해서 최종대부자 역할의 범위가 훨씬 좁았다.

그 범위가 확대된 것은 1932년이었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도 대공황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특단의 대책으로 1932년 1월 재건금융공사(RFC)법을 제정했다. 정부 출자로 RFC를 설립하여 개인, 중소기업, 대기업, 은행을 가리지 않고 장기간 대출토록 하는 내용이다. 대출 대상과 취득담보 면에서 연준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이로써 최종대부자 기능을 두고 민주당이 세운 연준과 공화당이 세운 RFC가 은근히 경쟁하는 관계가 되었다. 여기에 불편함을 느낀 연준은 의회와 백악관을 찾아 비(非)금융기관에도 대출할 의사가 있다고 귀띔했다. 후버 대통령은 그 제안을 받고 1932년 7월 연준법을 개정했다. 그때 추가된 게 오늘날 연준법 제13조 3항이다. 유사시 개인, 기업, 조합 등에게까지 여신할 수 있는 근거이며, 한국은행법 제80조의 뿌리다.

훗날 후버 대통령은 연준법 개정이 자신의 최대 업적 중 하나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초라했다. 연준이 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바꿔 영리기업 여신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우량담보만 요구하고, RFC보다 금리도 높게 정했다. 그 바람에 2년 뒤 연준법을 다시 개정하기 전까지 고작 123건에 150만 달러를 대출한 것이 전부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연준은 잠재적 경쟁자인 RFC의 확장을 좌절시킨 데만 의미를 두었다. 과거의 영란은행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영리기업 여신, 법률 아닌 사람에 달려

뉴딜 정책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연준의 미온적인 태도가 불만이었다. 그래서 1934년 6월 연준법을 다시 개정하여 상업은행의 대출에 대해 연준이 지급보증까지 할 수 있도록 했다(제13조 b항). 아울러 연준의 이익잉여금 1억4000만 달러와 동일한 금액의 재정자금을 연준에 맡겼다. 연준에게 영리기업 여신을 2억8000만 달러까지 늘리라는 압박이었다.

이어서 연준에 마리너 에클스(Marriner Eccles)를 투입했다. 에클스는 자수성가한 재벌로서 뉴딜정책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대통령의 최측근인 에클스가 1934년 연준 위원으로 투입되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1935년 말 영리기업 여신액은 6000만 달러, 지급 보증액은 4000만 달러까지 늘어났다.

에클스는 영리기업 여신과 지급보증을 확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연준의 역할 확대를 위한 연준법 개정을 요구했다. 그에 따라 FOMC가 설치되고, 공개시장조작을 통한 선제적 통화관리의 길이 생겼다. (그런 공로 때문에 연준 건물을 에클스 빌딩이라 부른다)  법률 개정 직후 의장에 오른 에클스는 연준의 답답한 조직문화를 쇄신하고 더욱 공격적으로 돈을 풀었다. 그러면서 대공황의 어둡고 긴 터널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연준법 개정을 계기로 루스벨트는 연준의 인적청산 작업에 돌입하여 위원 거의 대부분을 교체했다. 창립 때부터 위원직을 지켜왔던 아돌프 C. 밀러가 그중 한 명이었다.

밀러는 관운만 좋은 ‘멍청이’였다. 오죽하면 뉴욕 연준의 벤저민 스트롱 총재가 1928년 10월 폐결핵으로 눈을 감을 때 “워싱턴의 완고한 멍청이 때문에 1년 안에 대공황이 올 것”이라고 예언할 정도였다. 결국,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대공황은 1929년 10월부터다)  밀러가 뉴욕 연준이 시도했던 공개시장조작을 증권투기행위라면서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밀러는 장인의 인맥 덕에 연준 위원이 되었지만, 융통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실수하지 않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알고, 새로운 변화를 싫어했다. 공개시장조작과 영리기업 여신에 반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밀러는 항상 진지한 표정으로 점잔을 빼면서 말조심을 했다. 그렇게 자신의 식견과 실력을 감추고 금융전문가로 행세한 덕분에 연임까진 성공했지만, 연준 안팎에선 아무 존재감이 없었다.

밀러는 22년의 근무기간 중 업적도 시원찮았다.(그가 떠난 뒤 지어진 연준 건물에는 그의 명패조차 없다)  그래도 자리에 미련은 많았다. 자기 때문에 연준법이 개정되는데도, 임기보장을 앞세우며 새 연준법의 시행일까지 자리를 지켰다. 경제학자 어빙 피셔는 밀러가 연준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 경제가 더 어려웠다고 평가했다.

한편, 에클스 의장이 떠나면서 분위기가 다시 바뀌었다. 그의 후임자 윌리엄 마틴은 의회를 설득해서 연준법에서 제13조 b(지급보증)를 뺐다. (1958년)  그리고 영리기업 여신을 중단시켰다. 이후 연준은 1987년 블랙먼데이와 1998년 롱텀캐피탈(LTCM) 파산 때에도 영리기업 여신을 실시하지 않았다. 영리기업 여신을 재개한 사람은 벤 버냉키 의장이었다. 이처럼 미 연준의 영리기업 여신활동은 의장을 누가 맡는지에 따라 크게 바뀌었다.

한국은행은 리스크 전가에만 급급

에클스 의장 시절인 1940년대는 미 연준의 영리기업 여신과 준 재정활동이 왕성했다. 진주만 공습 직후인 1942년에는 대통령 긴급명령(제9112호)이 발동되어 연준에 정부대행기관의 역할까지 부여되었다. 연준은 군수업체에 직접 대출하거나 상업은행들이 대출할 때 지급보증을 섰다. (Victory Loan Program)

개도국 중앙은행들이 그런 전철을 밟을 것을 우려했는지 미 연준은 1948년 필리핀중앙은행법을 자문할 때 영리기업 여신 조항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필리핀보다 더  후진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이듬해 한국은행법을 자문할 때는 영리기업 여신 조항을 두는 대신에, 다만 “심각한 통화, 신용의 수축기”라는 강력한 조건을 붙였다. 그래서 한국전쟁 중에도 영리기업 여신은 실시되지 않았다. 정부대행기관에 대한 여신은 많았지만, 일반 영리기업 여신은 없었다.

1970~1980년대 한국은행의 최종대부자 역할은 상업은행을 대상으로 수동적으로 수행되었다. 사채동결 조치(8·3 조치)나 산업구조조정 등 정부정책에 따라 특정 은행의 자금흐름이 크게 악화된 경우 대통령 긴급명령에 의해 한국은행이 저리로 대출해서 해당 은행의 손실을 보전했다.

1990년대에는 한국은행의 최종대부자 역할이 투신사, 증권사, 종금사 등 비은행 금융기관까지 확장되었다. 그때마다 한국은행은 제3의 기관을 우회해서 대출하는 전대(轉貸)방식을 취했다. 즉 1992년 투신사를 지원할 때는 상업은행을 동원했고, 1997년 증권사·종금사를 지원할 때는 한국증권금융(주), 신용관리기금을 동원했다.

한국은행이 전대 방식을 취한 것은 리스크를 낮추기 위해서였다. 경영난을 겪는 투신사, 종금사, 증권사에 직접 대출하는 대신 상업은행이나 한국증권금융(주)나 신용관리기금에 대출하면 한국은행의 리스크는 없다. 1992년 투신사 대출 땐 정부 지급보증까지 요구했다.

한국은행이 신용리스크를 피하려 하면, 그 리스크는 결국 전대자금을 취급하는 경유기관에게 전가된다. 경유기관 입장에서는 부채비율이 높아지고, 담보물 관리의 운영리스크까지 늘어난다. 결국 한국은행의 최종대부자 역할에는 ‘갑질’과 도덕해이가 깔려 있었다. 이런 방법은, 한국은행이 과거에 은행감독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은행감독기능이 분리된 후에도 한국은행은 리스크 최소화를 중시했다. 금융시장이 경색될 때 정부가 사태해결을 주도하면, 한국은행은 채권 환매 등을 통해 필요한 유동성을 공급하는 데 머물렀다. 이는, 미 연준이 1930년대에 RFC와 은근히 경쟁할 때 가장 경계했던 모습이다. 중앙은행이 정책당국이 아닌, 현금자동지급기(CD기) 역할만 담당하면서 정부의 들러리가 되어 버리는 상황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한국은행은 금융위기 시에 책임감 있고 당당한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못했다. 소극적이고, 비겁하고, 무기력했다. 

특수목적회사(SPV)를 통한 대출이 최선

한국은 미국처럼 분업주의를 취하고 있으나 거기에 더해서 금산분리(은행과 산업의 분리) 원칙까지 작동하고 있다. 은행과 산업체 간의 간극이 외국에 비해서 훨씬 크다. 그런 제도 아래에서 한국은행이 미국처럼 비금융 영리기업에 여신하려면,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소개한 3개국(영국, 미국, 한국)의 사례를 종합하면, 한국은행이 취할 수 있는 행동양식은 세 가지다.

첫째, 미국 후버 대통령의 모델이다. 후버 대통령은 미 연준이 국채를 인수토록 하고, 그 자금으로 정부나 정부투자기관(RFC)이 영리기업과 실물경제를 살리게 하려 했다.(국가부채는 크게 늘어난다) 최근 영란은행이 정부에게 당좌대출을 대폭 늘리기로 한 것도 같은 모델이다. 중앙은행의 역할은 현금을 공급하는 것에 그친다.

둘째, 미 연준 에클스의 모델이다. 중앙은행이 정부와 제쳐두고 영리기업의 회생에까지 의욕적으로 발을 담그는 것이다.(국가부채는 늘어나지 않는다) 회사채는 물론 주식까지 거침없이 매입하는 일본은행의 모습이 이 모델에 속한다.

이런 방식은 중앙은행의 존재감이야 과시할 수 있지만, 부작용이 크다. 히틀러 정권의 라이히스방크, 오늘날 중국인민은행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통화정책이 자원배분에 동원되어 중앙은행이 정치도구화된다.(실제로 라이히스방크 총재는 나치당원이었고, 중국인민은행 총재는 공산당원이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입후보자 선발(정치자원 배분)에 간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셋째는 폴슨(재무장관)-버냉키(연준 의장) 방식이다. 2008년, 2020년 위기시 미 연준은 영리기업인 특수목적회사(SPV)에 대출하고, 정부가 원리금 지급을 보증했다. (국가부채는 늘어나지 않는다)  SPV는 대출금으로 회사채나 CP를 매입한다. 이런 방식은, 특정 기업이나 금융기관을 구제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있다. 그래서 정치적 부담이 적다.

유사시 한국은행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세 번째다.(3월 25일자 필자의 칼럼은 바로 이 방법을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첫 번째 방식은 국가부채가 늘어나기 때문에 정부도 채택하기 곤란하다. 두 번째 방식은 불가능에 가깝다. 부의 축적과정이 공정하지 않았다고 지적받는 우리나라에서 한국은행이 단독으로 특정 (대)기업을 지원하면 한국은행이 국민적 갈등과 여야 정쟁에 그대로 노출된다.
정부에 대해선 국가부채를 줄이기 위한 ‘꼼수’라는 비판이 따른다. 당장의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한 비상대책이 정치적 시비를 키울 수 있다.(정부와 여당 모두에게 유리하지 않다)

한편, 세 번째 방식을 취할 때 정부의 지급보증 규모에는 타협의 여지가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미국 정부의 지급보증액은 200억 달러에 불과했지만, 연준은 그 두 배가 넘는 430억 달러를 여신했다. 금번 코로나19 위기에는 정부 지급보증액이 4540억 달러나 되지만, 연준의 실제 여신액은 그것을 훨씬 넘을 것이 확실하다. 그래도 연준은 그것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 한국은행은 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한국은행의 의지가 관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행법 제80조는 한국이 필리핀보다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생긴 조항이다. 그 출생의 비밀까지 염두에 두고 영리기업 여신의 불가피성을 잘 따져야 한다. 그것은 정책판단의 문제이며, 법리문제가 아니다.(3월 말까지 우리 언론에서는 법리문제만 부각했는데 이는 사안의 본질을 제대로 짚지 못한 것이다)

그런 고민을 거쳐 한국은행의 영리기업 여신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이르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①기획재정부가 한국은행과 협의를 거쳐 국회의 지급보증 동의(보증비율 50~100%)를 구하고, ②금융위원회는 지원대상 기업군을 파악하며, ③한국은행은 여신을 실행하고 사후관리를 한다.

다만, ①이 선행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제21대 국회의 원 구성이 늦어지면, ②와 ③부터 할 수도 있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사이에 그 정도 신뢰는 쌓여있다고 본다.(1992년 투신사 특융 때도 그렇게 했다)

필요하면 한은의 여신 과정에 회계법인, 법무법인, 컨설팅회사를 투입할 수도 있다. 2008년 미 연준은 BlackRock, Ernst&Young, KPMG, McKinsey, PIMCO 등을 활용했다. 금융기관 파견직원으로 운영되는 주식·채권시장안정펀드 관리방식보다 훨씬 투명하고 공정하게 업무가 처리된다. 처리결과를 국민에게 낱낱이 공개할 수 있어서 정치적 책임에서도 자유롭다. 정부의 요구대로 회사채와 주식을 사면서도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밝히지 못하는 일본은행의 처사와 좋은 대비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숱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도 아직까지 제대로 된 ‘한국은행 사용법’을 만들지 못했다. 이제는 해답을 찾아야 한다.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재정·통화정책의 새로운 협업 모델이 시도된다면, 우리나라 금융·재정사에서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다.

국회도 한국은행법을 돌아봐야

마지막으로 한 마디.
일부 언론과 기업들은 한국은행이 미 연준이나 일본은행처럼 과감하고 신속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은행은 그렇게 행동할 수 없다. 바로 정보부족 때문이다. 미 연준은 법률에 따라 은행감독업무를 수행한 최초의 중앙은행이다. 감독업무를 통해 금융시장 동향을 소상히 파악함으로써 위기 시에 기민한 대응이 가능하다.

최종대부자 역할은 은행검사 업무와 불가분의 관계다. 유럽의 중앙은행과 일본은행은 법률상 감독권이 없었으나 대공황이나 간토대지진 때 최종대부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은행검사업무가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이에 비해서 한국은행은 기존의 은행감독업무마저 1998년 금융위원회 설치와 함께 폐지되었다. 일본에서 금융청 설치와 무관하게 일본은행이 계속 은행검사업무를 수행하는 것과 대비된다.

한국은행은 자신이 대출한 상업은행들과 단독으로 접촉하여 조사할 수도 없다. 대출기업을 찾아가서 탐문하는 상업은행만도 못하다. 그런 상태에서는 미 연준이나 일본은행처럼 한국은행이 회사채나 CP를 인수하는 것이 무모하다.(필자의 제안에 금융위원회가 들어있는 이유도 한국은행이 사실상 ‘눈 뜬 장님’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현재 우리나라의 금융시스템은 한국은행이 금융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언제라도 닥칠 수 있는 경제위기에 보다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한국은행을 바란다면 제21대 국회가 움직여야 한다.

(참고로 필자가 최근 출간한 책의 부제가 “The Bank of Korea in the Act”다. <행동하는 한국은행을 만들기 위한 법률개정안>을 담고 있다)

150년 전 월터 배젓이 영란은행을 향해 최종대부자가 되어 줄 것을 요구할 때 그는 이렇게 충고했다. “인간의 가장 큰 고통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고통이다.” 옛것을 깨고 새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인 동시에 용기다. 그 용기는 한국은행만 필요한 게 아니다. 지급보증을 하는 정부, 법률을 다루는 국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차현진 필자

금융전문가. 서울대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유펜) 와튼스쿨에서 공부했다. 대통령비서실, 미주개발은행(IDB)과 한국은행 워싱턴사무소장, 기획협력국장, 금융결제국장, 부산본부장을 거쳤다. 저서로는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 없는 경제학>, <금융오디세이>, <중앙은행 별곡>이 있으며 그동안 여러 매체에 칼럼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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