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위기는 21세기 인류가 봉착한 가장 심각한 난제 중 하나로 손꼽힌다. 미국의 석학인 제레미 리프킨은 “인류가 15년 안에 변화하지 않으면 80년 안에 환경적 재앙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올해 세계경제포럼(WEF),  다보스포럼 2020에서도 기후변화 위기는 큰 이슈였다. 주목할 대목은 기후변화 위기와 관련해 정부·기업은 물론 중앙은행과 금융 분야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에선 그동안 환경 문제와 관련해 이벤트 정책이 많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그랬고 ‘녹색(그린)’ 단어를 앞세운 관변단체도 적지 않다. 기후변화 위기가 화두로 부각된 요즘, 산업구조 조정과 미세먼지·온난화 현상 등을 개선하기 위해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통화금융정책 차원에서 ‘녹색금융’이란 새 길을 열어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편집자]

미국·유럽 사이에 설전 치열

올해 다보스포럼에선 스웨덴의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개막 당일 각각 특별연설을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두 사람은 환경문제에 관한 한 소문난 앙숙이다. 포럼 폐막일에는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과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나란히 앉아서 기후변화 대응을 주제로 뼈있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 자리에서 라가르드는 탄소세 도입에 관해서 우호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므누신은 즉각 “세금을 매기려면 마음대로 해보시라. 그 세금은 결국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 괴롭힐 것(IF YOU WANT, GO AHEAD and put a carbon tax. That is a tax on hard-working people)”이라고 빈정거렸다. 세련된 미사여구가 난무하는 국제무대에서 그 정도 발언이면 상당한 독설이 아닐 수 없다.

라가르드와 므누신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가깝다. 라가르드는 지난해 8월까지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로 근무했는데, IMF의 최대 주주는 미국이다. 그래서 둘은 세계경제와 IMF의 현안과 관련해 자주 만나 호흡을 맞췄다. 그럼에도 대화가 부드럽지 못했던 것은 바로 트럼프 대통령 때문이다.

美우선주의, 인류 미래를 위협

잘 알려진 대로 트럼프는 2017년 6월 파리기후협약 탈퇴를 선언했다. 이 협약은 탄소배출량을 현재보다 20% 이상 감축시키는 것을 공동목표로 하는, 국제적 약속이자 국가 차원의 다짐이다. 트럼프는 대선 후보 시절부터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이를 ‘미국에 손해만 주는 불공평한 규약’이라고 비판해 왔다. 미국은 탄소배출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기 때문에 탄소 다이어트 노력도 제일 많이 요구된다. 지구 대기 중 탄소량은 1만 년 이상 평균 300ppm을 넘지 않았으나 현재는 400ppm을 넘었다. 유럽, 미국, 중국이 주범이다. 

탄소배출량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지구 평균기온을 올리기 때문이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탄소배출량이 급증하면서 지구 평균온도는 2℃ 이상 올랐다. 만일 지금보다 1.5℃ 이상 더 상승하면 지구상 생물은 대부분 멸종하게 된다. 이대로라면 종말의 시기는 금세기 말쯤 된다. 그러니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것은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다.

지난해엔 세계적으로 산불이 유난히 많았고, 그 규모가 컸다. 호주 산불은 아직도 훨훨 타고 있으며, 미국 캘리포니아, 러시아 시베리아, 브라질 아마존의 산불도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산불뿐만 아니다. 이탈리아 베니스에선 60년 만에 도시 대부분이 침수되어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올 들어 인도양 부근의 눈사태와 폭풍도 심상치 않다. 이런 기상이변도 탄소배출량 증가로 인한 지구온난화의 나비효과라고 분석된다.

그런데도 파리협약을 탈퇴한 미국은 느긋하다. 탄소 배출량은 장차 과학기술 발전으로 자연스럽게 감소할 것이고, 나무를 1조 그루 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지나친 낙관론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이 파리협약에서 탈퇴하면, 중국, 인도, 일본, 러시아 등 탄소배출량이 그 다음으로 많은 나라들도 줄줄이 빠질 가능성이 높다. 교토의정서가 바로 그런 실패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트럼프와 미국을 바라보는 유럽인의 시선은 곱지 않다.

유럽, 환경 분야에서 도덕적 우위

유럽도 얼마 전까지는 탄소배출과 기상이변에 관하여 그다지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1990년 핀란드를 시작으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 일부 북유럽 국가와 영국이 탄소세를 도입했지만,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대부분의 나라들은 탄소세나 탄소배출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 하반기부터 분위기가 급반전되고 있다. 독일의 폰 데어 라이엔(Leyen)이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 의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다. 그는 ‘환경은 새로운 성장전략 그 자체’라고 밝혀왔다. 유럽인들은 요즘 사회·경제 시스템이 환경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안전한 환경 위에서 사회·경제가 지속적 발전을 할 수 있다는 쪽으로 인식을 전환해 나가고 있다. 경제-사회-환경이 한 몸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 참조>

라이엔은 EC 차기 의장 후보로 뛸 때부터 ‘그린 딜(European Green Deal)’ 구상을 공약했다. 신재생에너지 발전 등을 통해 2050년까지 유럽을 탄소중립대륙, 즉 탄소 순배출량이 제로(0)인 지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포부다. 취임 직후 첫 기자회견에서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1990년 대비 50% 감축하겠다’고 구체적인 목표와 시한을 밝혔다.

벨기에에 본부를 둔 유럽투자은행(EIB)은 라이엔의 정책 구상에 부응해 향후 10년간 1조 달러(약 1200조원)를 환경과 기후변화 대응에 투자할 계획이다. 또한 2021년부터는 화석연료만 사용하는 프로젝트에 투자를 중단하고, 2025년까지는 총투자금액의 50%를 환경 분야에 할당할 예정이다.

유럽이 탄소 배출과 기상이변 대응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미국을 압박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보인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디지털세 도입을 통해 미국을 압박하고 있고, 라이엔은 마크롱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EC 의장에 올랐다. ‘그린 딜’은 디지털세와 맥을 같이 한다. 200개에 가까운 파리협약 참가국 중에서 미국이 유일한 탈퇴 국가다. 이럴 때 유럽이 기선을 잡으면, 다른 나라의 이탈을 막으면서 미국에 대해 도덕적 우위에 설 수 있다.

도덕적으로 지탄받으면, 명분과 설 땅이 줄어든다. 그래서 손자병법에서도 도덕을 강조한다. 미국은 그와 관련된 쓰라린 경험이 있다. 바로 노예제도다. 19세기 중반에 이슬람 세계의 오트만제국과 농업국가 러시아까지 노예제도를 폐지했음에도, 미국은 끝내 노예제도를 포기하지 못했다. 당장의 산업생산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이 “경제학은 암울한 과학(dismal science)”이라고 한 것도 경제적 이득만 따지는 한 미국은 노예제도를 영원히 폐지하지 못한다는 암시였다. 암울한 것은 경제학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시대정신을 놓친 미국은 남북전쟁(1861~1865년)이란 내란을 4년간 치른 뒤, 즉 도덕적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은 뒤에야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21세기 들어 기후위기 문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유럽이 미국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국제금융계, 환경문제 관심 커져

기후위기 대응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명운이 달린 절체절명의 현안이다. 21세기 시대정신이다. 다행스럽게도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적 무관심 속에서도 미국 사회는 조금씩 시대정신에 동참하고 있다.

구글의 모기업인 알파벳은 EU 지역의 5개 데이터센터에서 사용될 전력을 100% 신재생에너지로 충당하기 위해 지난해 상당량의 풍력 및 태양광 에너지 전력을 샀다. 아마존은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로만 자사를 운영하겠다고 밝히고, 아일랜드의 풍력에너지 발전소를 인수했다. 맥도날드,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MS) 등도 비슷한 계획을 밝히고 있다.

물론 유럽은 훨씬 적극적이다. 정·재계는 물론 중앙은행도 발 벗고 나선다. 중앙은행까지 적극성을 보이는 이유는 중앙은행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어서다. 저성장·저물가 시대에 어차피 중앙은행으로선 할 일이 없으니 기후변화와 환경문제만이라도 제대로 기여하라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의 마크 카니 총재는 녹색금융(green finance)을 제안한다. 중앙은행과 상업은행들이 친환경 산업에 대한 금융 우대를 통해 기후위기 대응에 기여하자는 것이다. 1조 달러 규모의 국부펀드를 운용하는 노르웨이중앙은행은 투자전략을 짤 때 기후변화 리스크를 중요한 고려요소로 삼는다. 화석연료 의존도가 높은 산업과 국가의 투자 비중을 낮추어 금융정책 차원에서 온난화를 억제하겠다는 취지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최근 ‘그린 스완’이라는 보고서를 통해서 다음번 금융위기는 환경파괴로 인한 기상이변(그린 스완) 때문에 초래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기상이변으로 실물경제가 망가지면, 궁극적으로 금융기관도 파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정정책을 넘어서 통화정책, 더 나아가 금융감독정책까지 동원해서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과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금융 위기가 곧바로 뒤따라 발생했다. 간토 대지진 때 영업 손실이 너무 컸던 나머지 조선은행은 50%나 감자(減資), 즉 자본금 축소를 해야 했다.

물론 유럽 각국이 모두 똑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다. 화석연료 의존 비중이 높은 체코·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은 오히려 미국 쪽에 더 가깝다. 자국 경제구조를 친환경적으로 전환하는 데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유럽의 리더 역할을 하는 독일은 좀 다른 이유로 영국의 녹색금융 제안에 반대한다. 중앙은행이 친환경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EU협정 제127조 위반이라는 것이다. 즉 ECB는 물가안정을 위해 설립된 기관이며, 대출이나 채권 매입을 통해 특정 산업을 지원하는 것은 시장 중립성의 원칙(market neutrality principle)에 위배된다고 본다. 한 마디로 영국·프랑스와 독일로 나뉘어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그런 논란에서 벗어나 있다.

녹색금융, 일탈 아닌 正道로 부상

독일의 주장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주류경제학계에서는 녹색금융을 일탈로 보는 견해가 더 강하다. 즉 중앙은행이나 금융감독당국이 금전적 혜택이나 규제를 통해 특정 산업·부문을 배려하는 것은 금융정책이 아니라 산업정책으로 취급한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중앙은행이 녹색금융을 넘보는 것은 시류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일 뿐이다.

주류경제학계에서는 가장 안전한 금융자산인 국채를 사고 팔아서 유동성을 조절하는 것을 이상적인 통화정책이라고 본다. 현재 미국이 수행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미국의 통화정책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재정정책의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링컨 대통령은 금본위제 포기를 선언하고 상업은행들에게 법정화폐 발행권을 부여했다. (※당시에는 중앙은행이 없었다) 대신 화폐발행액의 90%는 반드시 연방정부의 국채를 지급준비자산으로 보유하도록 했다. (1863년 은행법) 그것이 지급준비제도의 시작이었는데, 상업은행과 화폐제도를 연방정부의 자금조달 채널로 동원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런 방법을 통해 링컨 대통령은 안정적으로 남북전쟁 전비(戰費)를 조달했고, 그것으로 남부 분리세력을 진압했다.

1914년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설립되면서 미국의 화폐제도는 정상을 되찾는 듯 했다. 그런데 바로 그 해에 1차 대전이 시작되었고, 1929년 대공황이 찾아와 막대한 재정적자를 떠안게 되었다. 그러자 연준은 국채 매입을 통해 유동성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공개시장조작(open market operation)이라고 한다. 중앙은행이 국채를 사들이면, 국채금리(수익률)가 낮아져 결국 정부를 돕는 셈이다. 통화정책이 재정정책의 보조 수단으로 흐른다. 남북전쟁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중앙은행이 돈을 푸는 가장 전통적이고 건전한 방법은, 융통어음(국채)이 아닌 상업어음을 할인하는 것이다. 투자·생산 등 실물경제 활동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유럽의 중앙은행들이 공개시장 조작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유럽과 일본에선 오늘날 중앙은행이 양적 완화를 할 때도 민간 회사채까지 사들인다. 국채만 고집하는 공개시장 조작은 재정정책에 예속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미국식 통화정책이 과연 바람직하며, 녹색금융보다 덜 일탈된 행동일까? 전 세계에서 국채발행액이 가장 많은 미국은 여기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중앙은행이 기후변화 문제에 대응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미국과 미국 방식을 세상의 기준으로 삼는 ‘미국 따라 하기’에 불과하다.

중앙은행 역할 놓고 ‘영·프 vs. 독일’

그렇다면, 유럽에서도 왜 독일은 영국·프랑스와 생각이 다를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상적 전통 때문이다.

중앙은행은 돈을 풀 때 공중에서 화폐를 뿌리지 않는다. 무엇인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산으로 확보한 뒤 화폐를 발행한다. 중앙은행이 무엇에 가치를 둘 것이냐에 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하나는 실물경제 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금이다.

중앙은행이 화폐 발행의 근거로 삼을 대상을 민간의 경제활동, 즉 상업어음 할인에 두는 견해를 신용화폐관(credit money view)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화폐 발행의 근거를 금에 두는 견해를 상품화폐관(commodity money view)이라고 한다. 상품화폐관에 따르면, 화폐발행을 결정하는 것은 민간의 경제활동이 아니라 조물주가 땅 속에 심어 놓은 금이다. 16세기 초 남미의 금광이 발견된 이후 유럽 경제가 갑자기 좋아지고 인플레이션이 확산되었던 이유다.

20세기 들어 금본위제도가 사라지고 국채 중심의 공개시장 조작이 정착했다. 그러나 상품화폐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정부를 조물주로 보고, 화폐 발행의 근거를 금에서 국채로 대체했을 뿐이다. (※실제로 미국 연준법(제14조 공개시장조작)에는 국채와 금을 동급으로 간주한다)

화폐공급에서 정부를 조물주로 보는 견해를 국가화폐관(state money view)이라고 한다. 오늘날 독일이 미국식 공개시장조작을 지지하는 것은 이런 전통 때문이다. 이것에 따르면 중앙은행이 민간에게 여신을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 국채 중심의 공개시장조작만으로 충분하다. (※밀턴 프리드먼, “A Program for Monetary Stability(1960년)”)  그런 시각에서 보면 녹색금융은 중앙은행의 일탈행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소득재분배와 기후변화 대응에도 활용될 수 있다'는 취지의 보고서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주류경제학의 금기에 도전하는 주장들이다. 

 

韓銀도 녹색금융 개척 자세 갖춰야

누누이 강조하건대, 기후위기 대응은 21세기 시대정신이다. 한국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한국은 산업화 과정에서 상당한 화석연료 에너지를 소비하고 탄소를 배출했으며, 지금은 똑같은 과정을 겪는 중국을 이웃에 두고 있다. 그만큼 골치 아픈 문제다. 더욱이 200개 국가가 서명한 파리기후협약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이쯤 되면 한국도 탄소배출 억제와 기후변화 대응을 국가적 아젠다로 삼을 만하지 않은가?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선 환경문제가 실체도 없이 정치적 포장 도구로 이용된 우울한 기억이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녹색성장이 그것이다. 그 시절에 ‘녹색성장’과 ‘녹색금융’이라는 말을 얼마나 귀가 따갑도록 들어야 했나? ‘녹색’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관변단체들이 난립하고, 금융인들은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자전거보험 가입을 독려했다. 그것이 녹색금융이라고 치부되었다.

그런 해프닝 또는 흑역사 때문에 문재인 정부의 신재생에너지 정책도 국민들로부터 쉽게 믿음을 얻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탄소배출이나 기후변화 대응에 관해서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책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국민과 야당을 적극 설득하고 동의를 끌어내는 노력이 절실하다.

한국은행도 달라져야 한다. 경제개발 시기에 한국은행은 수출기업이나 중화학공업, 중소기업, 심지어 방위산업체까지 지원했다. 그 결과를 두고 세계가 한국 경제를 부러워하지만, 막상 중앙은행 차원에선 부끄러움과 불만이 많았다. 정부의 산업정책에 자의반타의반으로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국은행은 미국식 공개시장 조작과 국가화폐관을 흠모했다. 그 결과 지금은 한국은행 여신활동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상업어음 할인이 정상적인 정책수단이라면, 저탄소산업,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 발행되는 어음을 화폐 공급의 원천으로 삼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한국은행이 자산으로 삼기에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미국식 정책 틀 벗어나는 계기 되길

선진국들은 얼마 전까지 특정 산업이나 부문에 대한 정책적 우대가 불공정무역이라고 간주했다. 그런데 기후변화에 관한 한, 영국과 프랑스는 최근 그런 정책을 도덕적·이념적으로 지지한다. 한국은행이 선진국 중앙은행들을 제치고 기후위기 문제에서 명분과 실리를 챙길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전대미답의 새 길을 찾겠다는 개척정신만 있으면 된다.

최종 결론은 이러하다. 최근 유럽에서 시작된 녹색금융 논쟁은 이명박 정부 시절의 녹색금융과 차원이 다르다. 인류의 장래뿐만 아니라 중앙은행의 정체성까지 연결된, 형이상학적 주제다. 한국은행이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인류의 공동과제인 기후변화 문제 앞에서 한국은행은 무엇을 할 것인가? 여전히 미국식 통화정책과 독일식 국가화폐관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을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한국은행은 아직 침묵을 지킨다. 서양에서 시작된 논쟁이기도 하거니와 기존의 믿음과 행동을 바꾸는 모험이 두려운 것 같다.

차현진 /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차현진 필자

금융전문가. 서울대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유펜) 와튼스쿨에서 공부했다. 대통령비서실, 미주개발은행(IDB)과 한국은행 워싱턴사무소장, 기획협력국장, 금융결제국장, 부산본부장을 거쳤다. 저서로는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 없는 경제학>, <금융오디세이>, <중앙은행 별곡>이 있으며 그동안 여러 매체에 칼럼을 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