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방콕 사원, 국왕, 군부 쿠데타, 탁씬 가문…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의 나라 태국을 생각하면 흔히 떠올려지는 이미지들이다. 그렇지만 5월 치러진 총선(하원)을 통해 태국의 이미지는 많이 달라질 가능성이 커졌다. 태국 정치를 주도해온 친군부 보수정당이 야당에 과반의 자리를 내줬기 때문이다.특히 왕실과 군 개혁 등 선명한 기치를 내건 까우끌라이당이 제1당을 차지해 눈길을 끈다. 태국 정치를 ‘상징’하는 인물인 탁씬 전 총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야당인 프어타이당은 제2당으로 밀렸다.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민심이 거셌다는 뜻이다.이제 관심은 까우끌라이당의 리더 피타 림짜른랏 대표가 차기 총리가 될 것인지 여부다. 차기 총리는 상·하원의 과반 지지가 필요한데, 상원 전체가 친군부 보수정당 인물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왕실과 군부 등 총리 결정에 영향을 미칠 중대 변수들도 적지 않다. 태국 전문가인 김홍구 필자가 향후 태국 정국이 어떻게 흘러갈지 친절하게 소개한다. [편집자 주]

✔ 개혁적 공약을 내세워 가장 많은 의석 차지한 까우끌라이당✔ '탁씬 대 반탁씬' 정치 구도가 '보수 대 개혁' 구도로 바뀐 선거✔ 진정한 정권 교체를 위해서는 개혁 양당이 연대 주축이 돼야✔ 새로운 왕권과 군사 정권 사이 호혜적 공생 모델 구축돼 왔어✔ 탁신과 프어타이당, 왕실·군부와 새 공생관계 형성할 가능성

까우끌라이당 피타 림짜른랏 대표 (사진: 연합뉴스)

5월 태국 하원 총선이 끝났다. 이번 총선에 출마한 여야 주요 정당은 모두 6개 정당이었다. 여권의 친군부 보수정당은 팔랑쁘라차랏당, 루엄타이쌍찻당, 품짜이타이당, 쁘라차티빳당(민주당)이며, 야권의 반군부 개혁정당은 프어타이당과 까우끌라이당(전진당)이다.

선거 결과 까우끌라이당이 하원 500석 중 152석(지역구 113/비례대표 39)을 차지했다. 왕실모독죄(형법 112조) 폐지 등 개혁적인 공약을 내세운 까우끌라이당은 선거 정국 중반을 지나면서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였던 프어타이당을 제치기 시작했다. 피타 림짜른랏(43) 대표도 총리 후보 지지율 조사에서 1위에 오르며 돌풍을 예고했고, 실제로도 예상을 뛰어넘는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개혁을 내건 까우끌라이당 피타 대표의 승리

피타 대표는 ‘넘사벽’의 스펙을 지닌 40대 초반의 금수저 정치인이다. 뉴질랜드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태국의 명문 탐마쌋대학을 졸업한 후 하버드대학과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각각 공공정책 석사학위와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5세의 나이에 가족기업으로 쌀겨기름을 생산하는 CEO애그리푸드(CEO Agrifood)의 부실 경영을 회생시켰고, 그랩 타일랜드(Grab Thailand)의 전무직을 맡기도 했다. 2018년 까우끌라이당의 전신인 아나콧마이당을 통해 정치에 입문한 뒤 2019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아나콧마이당이 해산되고 당 주요 인사들의 정치 활동이 금지되자 아나콧마이당의 맥을 잇는 까우끌라이당의 대표가 됐다.

탁씬 친나왓(74) 전 총리 지지 세력인 프어타이당은 141석(112/29)을 차지했다. 탁씬의 막내딸인 패통탄 친나왓(37)이 총리 후보로 나선 프어타이당은 ‘전가의 보도’인 화끈한 포퓰리즘 정책을 내세웠지만, 2001년 이후 선거에서 1당 자리를 처음으로 빼앗기며 야권의 맹주 자리를 내놓을 처지가 됐다. 이번 선거는 한 시대를 풍미한 탁씬 정치가문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어타이당 총리 후보이자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의 막내딸인 패통탄 친나왓 (사진: 연합뉴스)

프어타이당은 동북부 지역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까우끌라이당을 앞서지 못했다. 탁씬의 고향인 치앙마이에서조차 총 10석 중 2석밖에 챙기지 못 했으며 7석은 까우끌라이당이 차지했다(2019년 총선에선 총 9석 중에 프어타이당이 8석 석권). 방콕의 33개 선거구 중 32개는 까우끌라이당이 싹쓸이했고, 프어타이당은 겨우 한 석을 얻는데 그쳤다(2019년 선거 때는 팔랑프라차랏당 12석, 아나콧마이당과 프어타이당이 각각 9석 확보). 유권자들은 동북부를 제외한 전 지역구에서 포퓰리즘 정책보다는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 까우끌라이당을 더 지지했다. 이번 선거는 2001년 이래 변함없이 유지돼 온 ‘탁씬 대 반탁씬’ 정치 구도가 ‘보수 대 개혁’ 구도로 확실하게 바뀐 선거였다.

여권의 핵심 정당인 팔랑쁘라차랏당은 40석(39/1)을 얻는데 그쳤으며, 분당해 나간 루엄타이쌍찻당은 36석(23/13)을 얻었다. 두 당은 76석을 확보했으나 팔랑쁘라차랏당이 2019년 총선에서 116석을 얻은 것을 상기하면 ‘폭망’ 수준의 결과로 볼 수 있다. 2014년 쿠데타 후 처음 치러진 2019년 총선을 앞두고 다양한 파벌연합으로 급조된 팔랑쁘라차랏당은 당권투쟁이 심화되던 중 쁘라윳 짠오차(69) 총리가 지지자들과 함께 신생정당인 루엄타이쌍찻당으로 옮겨감으로써 당세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여권의 분열은 일찍부터 친군부 보수정당의 몰락을 예견하게 했다. 여권에서 유일하게 존재감을 과시한 정당은 품짜이타이당이다. 품짜이타이당은 70석(67/3)을 얻어 제3당으로 올라섰다.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이 만성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도정당으로의 적절한 자리매김이나 정치적 양극화를 지향하는 정책 등이 호응을 얻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선관위의 가장 최근 발표에 따르면, 까우끌라이당은 지역구 의석이 한 석 줄어든 151석(112/39)으로, 지역구 의석수만으로는 프어타이당과 같게 됐다. 또 품짜이타이당은 한 석이 늘어 71석(68/3)을 확보했다. 앞으로도 의석수는 약간 조정될 여지가 있다.

총리를 차지하기 위한 복잡한 합종연횡이 필요한 까닭

여권의 분열 속에 치러진 이번 총선에서 야권은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바로 정권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제1당에게만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우선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총선 후 2개월 동안 본격적으로 연정 구성과 총리 선출을 위한 합종연횡의 수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게 된다. 태국 정국의 향방에 대한 관심이 총선 후에도 지속되는 이유다.

5월 총선 결과, 소규모 정당을 포함한 야권 5개 정당의 의석수는 309석이며, 여권 6개 정당의 의석수는 182석이다. 총선 후 까우끌라이당은 7개 정당을 연정 구성에 참여시켜 모두 313석을 확보한 상태다. 이처럼 야권은 하원의 과반수를 차지했지만 자신들이 지지하는 총리를 선출하기 위해서는 상하 양원 회의에서 376석을 얻어야 한다. 친군부 여권은 군부 지명인사들로 채워진 상원 250석의 지지를 모두 받으면 하원 선거의 패배와 관계없이 소수파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될 경우 심각한 정치 불안이 야기될 게 뻔하다. 더구나 지금과 같이 정치사회 변화에 대한 유권자들의 열망이 폭발적인 상황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애매한 상황이 빚어진 것은 2017년의 헌법 조항 때문이다. 이 헌법은 ‘다음 정부는 하원 의원 500명 과반의 찬성을 필요로 하지 않으나, 양원(750명)에서는 과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은 2017년 헌법에 따라 치러진 2019년 총선 후 5년간만 적용되며, 이 기간 동안에는 군부가 임명하는 상원 250명이 총리 선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상원의 임기는 2024년 5월 11일까지다.

현재는 여야 양쪽 모두 연정 구성과 자신들이 선호하는 총리 선출이 쉽지 않은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제1당인 까우끌라이당의 피타 대표는 376석을 확보하지 못해도 야권세력들로만 연정을 구성하고 자신이 총리에 나설 것임을 선언했다. 프어타이당은 일찌감치 까우끌라이당 주도의 연정에 동의했다. 문제는 상원이 참여하는 양원 회의의 지지인데, 피타 대표는 상원도 민의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다. 까우끌라이당은 상원을 설득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피타 지지세력들(UFTD)은 상원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의회 밖에서 집회를 열기도 했다.

중립적 입장의 제3당인 품짜이타이당이 를 쥘까

이런 현실을 고려해 비교적 중립적 입장에 있는 제3당으로 선출된 여권의 품짜이타이당 등을 연정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까우끌라이당과 품짜이타이당은 적대적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 까우끌라이당에게 품짜이타이당은 연대 대상이 아닌 친군부 보수정당일뿐이며, 품짜이타이당은 까우끌라이당이 형법 112조(왕실모독죄) 개정을 추진하는 한 절대로 정치적 파트너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품짜이타이당은 오히려 까우끌라이당이 연정 구성에 실패한 후 프어타이당이 연정을 주도하는 정치적 상황이 오면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프어타이당과 품짜이타이당은 원래 그 뿌리를 탁씬계의 타이락타이당에 두고 있다. 이런 까닭에 일각에서는 탁씬계 정당에서 정치 활동을 한 인물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프어타이당, 품짜이타이당, 팔랑쁘라차랏당이 참여하는 연립정부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정치적 야합’이라는 비난이 따르긴 하겠으나 연정 구성이 지지부진하고 정치적 위기가 도래하면 불가능한 일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다양한 연정 구성 방식을 상정할 수 있겠지만 총선 민의에 따라 진정한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유사한 개혁 이념을 갖는 까우끌라이당과 프어타이당의 양당 연대가 주축이 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까우끌라이당은 보다 현실적이며 유연한 정치적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

태국 치앙마이의 한 사원에 있는 투표소 (사진: 셔터스톡)

7월에 귀국하는 탁씬, 왕실에 우호적인 제스쳐

현재 까우끌라이당 입장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은 프어타이당이 중심이 되는 연정의 추진 가능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총선 후 탁씬과 프어타이당의 언행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탁씬은 왕실에 대한 그의 가족의 충성을 맹세하는 한편, 까우끌라이당이 왕실에 영향을 미칠 어떤 움직임(형법 112조 개정)도 지지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오는 7월에 오랜 정치적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겠다고 발표한 탁씬은 자신의 귀국이 가족, 조국, 그리고 주인에 대한 사랑과 유대감에서 비롯된 결정이라는 점도 언급했다. 그가 말하는 주인은 국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탁씬은 2008년 부정부패 등의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해외로 도피했고, 법원은 지금까지 진행된 다양한 사건의 궐석 재판에서 모두 징역 12년 형을 선고한 바 있다. 프어타이당도 요즘 들어 부쩍 왕실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등 까우끌라이당과의 차별화를 꾀하면서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있다.

까우끌라이당과 프어타이당의 관계는 연립정부 구성에 성공하더라도 갈등이 예고돼 있다. 지금은 양 당이 반군부 개혁세력 측에 같이 서 있지만 실용주의 정치를 추구하는 프어타이당과 이상주의 정치 성향이 강한 까우끌라이당이 함께 정부를 구성할 경우 사사건건 충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까우끌라이당 주도로 연립정부 참여 의사를 밝힌 8개 정당 사이에 양해각서 체결식이 있었다. 그 초안에는 민주헌법 개정 추진, 징병제 폐지, 동성 결혼 합법화, 지방 분권, 토지개혁 등 획기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까우끌라이당의 핵심 공약인 형법 112조 개정은 제외됐다. 여야 정당 중 까우끌라이당을 제외한 어떤 정당도 형법 112조 개정에 찬성한 정당은 없었다. 까우끌라이당의 피타 대표는 앞으로 형법 112조 개정안을 (이에 대해 거부감을 표하고 있는 다른 정당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까우끌라이당 단독으로 의회에 상정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까우끌라이당의 외곽조직인 진보운동 사무총장 삐야붓 쌩까녹꾼(44)은 8개 당사자가 합의한 양해각서에서 두 가지 주요 문제, 즉 군주제와 관련된 문제와 (형법 112조 관련) 정치범 사면 문제를 제외하는 데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앞으로 연정이 구성돼도 이 문제는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이 틀림없다.

야권, 선거법 위반 등 정치적 장애물 넘어갈까

야권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는 하나 그 앞에는 정치적 장애물도 놓여 있다. 이는 까우끌라이당과 프어타이당이 이번 선거 결과를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느냐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거 직전부터 주요 정당들의 선거법 위반 사례가 거론되었다. 까우끌라이당의 피타와 프어타이당의 패텅탄의 미디어 관련사 주식 보유 건이 대표적이다. 태국 헌법 98조 3항은 후보자들의 미디어 회사 주식 보유를 금지하고 있다. 2019년 총선에서 승리한 아나콧마이당의 타나턴 쯩룽르엉낏(45) 대표도 유사한 사건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프어타이당은 탁씬 전 총리가 당무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한 혐의도 받고 있다. 외부인의 당무 간여를 인정하지 않는 정당법상 이는 정당해산과 관련된 중대 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선관위는 이미 정당해산을 요구하는 수많은 민원을 검토 중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태국 헌법재판소는 과거에도 정당해산이나 총리직 박탈과 같은 중대 결정을 여러 차례 내린 바 있다. 현재 헌법재판소 9명의 판사들은 모두 2014년 쿠데타 후 계엄령 하에서 만들어진 입법회의에서 선발된 인물들이다.

왕실·군 개혁 태풍의 눈될까쿠데타 가능성은?

이번 양해각서 체결과정에서 우여곡절 끝에 제외된 형법 112조 개정이나 군 개혁 등 왕실과 군에 자극적인 이슈들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면 심각한 반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미 총선일을 며칠 앞두고 육군 사령관 나롱판 찟깨우태 대장은 “국가가 혼란스러워지면 군이 다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고 발언한 바 있다. 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 후 22차례의 군사쿠데타(성공 13차례, 실패 9차례)를 겪은 태국은 지금까지 하원 선거 주기인 4년 남짓에 한 번씩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가 선거를 대신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태국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속설에 따라 그 가능성이 충분히 남아 있다.

2019년 총선 이후 지금까지 가장 민감했던 정치적 이슈는 왕실 개혁 요구였다. 태국 헌법은 국왕은 지존의 존재이며, 누구도 국왕의 지위를 침해할 수 없고,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소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태국 형법 112조는 국왕, 왕비, 그의 상속자나 섭정을 비방, 모욕하거나 위협하는 자는 3년에서 15년까지 형벌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왕실 개혁 요구의 가장 극적인 시위는 2021년 10월 발생했다. 10월 14일 대규모 시위에 이어 10월 15일부터 22일까지 방콕에는 왕실 자동차 행렬이 차단되었다는 이유로 비상사태가 선포되기도 했다. 결국 11월 헌법재판소는 왕실 개혁 요구는 국가안보를 해치는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불법으로 판결했다. 이번 총선을 통해서 까우끌라이당은 왕실 개혁을 중요 선거 이슈로 삼았다. 이는 까우끌라이당 주도의 연정 구성에 심각한 장애요인이 될 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선 정당해산과도 무관할 수 없는 사안이다.
공생관계인 왕실과 군의 복잡한 속사정

선거는 야권의 승리로 끝났지만 진정한 정권교체가 아직 불투명한 시점에서 왕실과 군의 속사정을 살펴보는 일은 앞으로의 정국을 보다 입체적이고 분석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해 준다. 왕실은 물론이고 선거에서 패배한 친군부 보수세력들은 총선 결과에 아직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2017년 새 국왕으로 등극한 와치라롱껀(71)은 2014년 군사쿠데타 세력의 호위 하에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군부와의 관계를 돈독히 했으며, 군사정권과 새로운 왕권 사이에는 호혜적 공생 모델이 구축돼 왔다. 국왕은 왕권 강화 대가로 군사정권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현재 왕실은 후계의 위기를 맞고 있으며 그동안 군부를 지배해온 정치군인 파벌인 ‘부라파 파약(tigers of the east)’의 핵심 세력은 퇴조 위기에 처해 있다.

와치라롱껀(왼쪽) 태국 국왕과 수티다 왕비 (사진: 셔터스톡)

와치라롱껀 국왕, 후계자 정하지 못해

태국 왕실은 왕실 호적에 올라 있는 1명의 아들과 2명의 딸 중 아직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상태다. 장남인 티빵껀 랏싸미촛(18) 왕자는 자폐증 환자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12월 첫째 딸인 팟차라끼띠야파(45) 공주는 불의의 사고로 쓰러진 후 의식불명 상태에 놓여 있다. 공주는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고, 국왕이 유일하게 왕족 출신인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장녀이기도 해서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지닌 인물로 평가된다. 태국은 1974년 헌법을 개정해, 공주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했다.

와치라롱껀 국왕은 왕세자 시절 빈번하게 자질 시비가 일어 왕위 계승에 심각한 문제점이 노정되었다. 그의 여동생인 씨린턴(68) 공주에게 왕위가 계승될 것이라는 설이 상당히 퍼져 왕세자 시절 내내 괴롭힘을 당했었다. 국왕은 지금도 성공적인 카리스마적 지배로 존경받는 그의 선친 푸미폰(1927~2016년) 국왕과 비교돼 자질을 의심받고 있다. 국왕이 무엇보다 후계문제에 신경을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태국과 같이 국왕이 상당한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입헌군주제 아래서 안정된 왕위 계승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야권이 총선에서 대승하고, 그동안 왕실과 공생하면서 보호막이 돼 주었던 친군부 정치세력이 퇴조 위기에 몰리게 된 것이다.

태국판 하나회세력의 영향력 떨어져

총선 결과 그동안 군부를 지배해온 태국판 ‘하나회’격인 부라파 파약 그룹의 핵심 세력인 쁘라윗 웡쑤완(78) 팔랑쁘라차랏당 대표, 쁘라윳 짠오차(69) 현 총리, 아누퐁 파오찐다(74) 내무부 장관 세 사람(3P로 불림) 모두 정치적 영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부라파 파약 그룹은 (태국 동부에 위치한) 보병 제21연대를 기반으로 한 군내 사조직으로, 선후배 사이에 정치적으로 밀고 당겨주는 관계가 각별하다. 현재 이 그룹의 수장은 쁘라윗 팔랑쁘라차랏당 대표다.

군과 왕실 관계는 ‘순망치한’의 관계로 비유될 수 있다. 총선 결과 순식간에 바뀌어버린 불리한 정치 상황 속에서 상호간 의존도는 더욱 강화될 것임이 틀림없다. 군과 왕실은 구조적인 정치·사회 개혁을 어젠다로 내세워 자신들을 압박해 오는 까우끌라이당이 고울 리 없다. 자신들의 기존 이해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까우끌라이당을 견제할 수 있고 왕실과 군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보호막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면 그 대안은 아이러니하게도 탁씬계 정치세력인 프어타이당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들과 20여 년 동안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해온 프어타이당은 까우끌라이당보다 상대하기에 덜 껄끄러운 대상이다.

왕실과 군, 탁씬의 타협가능성

탁씬은 국왕의 왕세자 시절 그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한 적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법처리 대상자인 탁씬이 귀국 의사를 밝히고 왕실에 대한 충성을 자주 다짐하는 것이나, 프어타이당이 형법 112조 개정에 반대하면서 까우끌라이당의 견제세력임을 자임하고 나서는 것도 따지고 보면 국왕의 사면권을 염두에 둔 탁씬의 심모원려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탁씬은 사실상 군과도 인연이 깊다. 그는 군사예비사관학교 10기 출신으로 졸업 후 경찰사관학교에 입학해 중령으로 제대한 경력이 있다. 한때는 경찰과 군에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상당수 포진하고 있었다. 특히 군대 내에서 그를 지지하는 세력을 ‘타한 땡모(watermelon soldiers)’라고 부르기도 했다. 겉은 (군복의) 푸른색이지만 속은 (탁씬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인 레드셔츠의 상징색과 같은) 붉은색 군인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사실들은 탁씬과 프어타이당이 까우끌라이당과는 달리 왕실, 군부와도 공생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붉은 셔츠를 입은 시민이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초상화를 들고 있는 모습 (사진: 셔터스톡)


글쓴이 김홍구는동남아시아 연구자다. 한국외국어대에서 태국어과를 졸업한 뒤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산외국어대 태국어과와 동남아창의융합학부 교수로 재직했으며, 태국 치앙마이대에서 객원교수로 근무했다. 한국동남아학회장, 국제지역학회장, 한국태국학회장과 제10대 부산외국어대 총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태국군과 정치〉, 〈태국 정치입문〉, 〈태국 불교의 이해〉, 〈동남아 정치변동의 동학>(공저), 〈한국 속 동남아 현상>(공저), 〈동아시아의 한류>(공저) 등이 있다. hongkoo@b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