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출신, 전 노동부 장관남재희 원로

리버럴(liberal)’ 등 정치계파 용어 명명·번역 어려워

 

문 정부, ‘선거제도개혁이나 대담한 토지 과세고려해야

 

최근 가열된 소득주도성장논란은 큰 의미 없어

 

남북 화해 프로세스, ‘태극기부대설득 없으면

극우세력급팽창한 유럽 따라갈 수도

남재희 전 장관(84)이 지난 717일 기고한 잘 나갈 때 긴장하고 조심해야이후 문 정부에 주는 다음 조언을 담은 원고를 보내왔다. 남 전 장관은 혁명적 시기에 등장한 문 정부가 소득주도성장논란에 휩쓸리기보다는 지난해 대선 당시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공약이었던 대담한 토지 과세나 독일 수준의 비례대표제 채택을 통한 선거제도개혁같은 정책을 고려하라고 조언했다. 더불어 남북화해 프로세스에서는 이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태극기부대를 설득하여야 그들이 유럽 극우세력처럼 급팽창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편집자 주>

1960, 70년대에 유명했던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의 이용희 교수와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던 끝에 미국 정치에서 자주 언급되는 리버럴(liberal)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우리말로 번역할 것인가에 관해 논의했으나 조선미술사에 관한 전문분야 외의 연구 저술도 있는 등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그도 끝내 알맞는 번역어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는 “커피의 참맛을 아는 사람을 리버럴이라고나 할까‘라고 재담을 삼아 말하였다. 그만큼 정치계파에 관한 이름짓기는 까다로운 것 같다.

4, 5년 전에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주간지가 한 칼럼에서 그 리버럴에 관한 정의를 내리려 시도하는 것을 읽었다. 이코노미스트 평론가는 리버럴이란 미국의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을 지지하고 그러한 방향의 정책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닐까하는 결론을 내렸다. 유럽에서는 사회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자주 쓰는데 미국에서는 그러한 용어를 철저하다시피 기피하고 있다. 무한하다시피 한 프론티어(frontier)를 가졌던 미국이었기에 그들이 떠나온 구대륙에서와 같은 사회민주주의 운운의 용어를 배격하는 심리작용 때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쉽게 얘기해보면 ‘리버럴’이란 유럽에서 말하는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아마 4-5촌쯤의 개념일 것 같다. 미국에서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영국에서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그리고 독일에서 사회민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집권하였을 때 그들은 ‘제3의 길’이라는 공동노선을 추구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자고 협의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말하는 liberalism과 Liberal의 함의는 겹치기도 하지만 크게 다르다. 한국헌법 제4조에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구절이 자유민주주의를 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그러나 그 조항은 “자유와 민주의 기본질서”를 말하는 것이지 자유민주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박명림 연세대 정치학 교수는 그 조항의 국가기관에서의 영어번역에 자유와 민주 용어 사이에 점이 찍혀있다고 밝혔다. 우리 헌법에서는 구두점(句讀點)을 찍는데 소홀했던 것 같다. 자유와 민주를 뜻하는 것이지 자유민주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의 뒷받침이 된다. 자유민주주의라는 해석을 고집하다 보면 자칫 민주사회를 말하는 것이 엉뚱하게도 민주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괜찮지 않으냐는 억지를 부릴 수도 있겠다.

정치계파의 이름 붙이기는 매우 까다롭다. 흔히 좌파, 우파라는 말을 쓰는데 사실은 별다른 게 아니다. 프랑스혁명 무렵 의회의 왼쪽 의석에 앉았다고 해서 좌파요, 오른쪽 의석에 앉았다고 하여 우파다. 그러나 6·25의 처참한 전란을 겪기까지 했던 한국에서는 그 좌익이나 우익이라는 용어에 피가 묻어있기도 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특히 좌파나 좌익이라는 이름 붙이기는 꺼려지기는 하고 매우 주의를 하게도 되는 것이다. 요즈음 흔히 쓰는 보수나 진보란 용어사용이 오히려 편리할 것 같다.

그러나 진보라는 개념도 따지고 보면 애매모호하다. 4·19후 오랫동안 ‘혁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그러던 것이 부지불식간에 ‘진보’라는 용어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 혁신이나 진보 모두가 애매한 구석이 있음은 물론이다.

정치계파 이름 붙이기에 관한 이야기는 이 정도에 그치고 문재인 정부의 내치를 살펴보자. 문 정부는 그동안 대체로 무난하게 합리적인 정책을 추구하고 집행해온 것 같다. 그러나 미국의 뉴딜정책 때와 비교하면은 혁명적 시기의 정부정책으로서는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것 같다. 뉴딜정책의 영향은 얼마나 컸던지 2차대전 이후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사령부에 따라온 뉴딜 신봉자들이 일본의 재계, 노동계, 농지문제에 일대 개혁을 단행하도록 촉진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해방 후 농지개혁에도 주한미군을 따라온 뉴딜정책 신봉자들의 영향이 얼마간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물론 미국의 그때 상황과 한국의 지금 상황은 전혀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독일 수준만큼의 비례대표제를 채택하여 우리국민의 표의 등가성을 높이는 선거제도개혁을 해봄 직하였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이재명 지사가 주장한 것과 비슷하게 토지에 대한 대담한 과세를 도입해봄직도 하였을 것이다. 토지의 지가상승은 국민들의 사회활동 증가에 따르는 것이지 토지 자체가 낳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근래 논란이 되던 ‘소득주도성장’ 운운도 무익한 이야기인 것 같다. 경제성장은 기업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고, 소득증대는 부차적으로 그 경제성장을 돕는 것이 아니겠는가.

근래 유럽 여러 나라에서 극우세력이 급속히 팽창하고 있다. 헝가리, 폴란드 등에서 극심하고 이태리가 뒤를 이으며 민주주의가 고도로 신장된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도 극우세력이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주된 원인은 아프리카에서 몰려 들어오는 무슬림계 이민자들의 대거 유입 때문이다. 그러한 현상을 무조건 비판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대립이란 지난날의 역사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흔히 말하는 유럽에서 등장하고 있는 ‘극우세력’이란 표현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극우세력’이라기보다는 ‘민족국가지상주의’ 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Nationalism을 우리는 민족주의라고만 번역해 왔는데 그것을 ‘민족지상주의’ 또는 ‘민족국가지상주의’라고 때에 따라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도 같다.

이 nationalism의 해석차이로 논란을 겪은 경험이 있다. 리처드 워커 주한미국대사가 한 연설에서 한국의 nationalism을 심하게 비판하였을 때 나는 한 신문에 그에 대해 반박하는 글을 실은 적이 있다. 지나놓고 보니 워커 대사는 ‘민족국가지상주의’라는 뜻에서 비판한 것인데 나는 한 민족의 자주독립을 뜻하는 ‘민족주의’라는 차원에서 그를 비판한 것 같다. Nationalism에 관한 미국인과 한국인 간의 인식상의 차이에서 유래한 듯하다.

성급한 판단이 될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서도 남북한 간의 화해와 접근이 급진전됨에 따라 유럽에서 일어난 것과 비슷한 또는 그 이상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최근에 어느 야당 정치인이 북쪽에서의 송이버섯 선물에 대한 답례로 남쪽에서 보낸 귤 상자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아느냐고 무서운 숨은 뜻이 담긴 공세를 편 것도 어떤 증표인 것도 같다. 의심암귀(疑心暗鬼) 같은 이야기이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난민의 유입이 극단적인 민족국가지상주의 세력의 팽창을 촉발했다면 한반도에서는 남북 간의 화합이 남에서 북으로의 퍼주기로 오해되고 6·25의 비극을 상기시켜 역시 극단세력의 확장을 촉발할지도 모를 일이다.

문재인 정부도 남북화해 노력의 진전에 관심을 쏟기만 하고 거기에 따라 발생할 수도 있는 부작용에 방심했다가는 자칫 큰 곤욕을 치를지도 모를 일이다.

남북한 화해 노력과 그 진전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세대에 따라 크게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노장년층에서는 좌우익의 투쟁과 6·25의 처참한 전란을 경험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거기에 대한 거부반응이 많이 보인다. 그것이 이른바 ‘태극기부대’ 등과 겹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들을 무조건 비난만 하는 것은 안이한 태도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부분인 그들을 끊임없이 설득하는 노력이 남북 간 화해의 노력과 병행하여 있어야 할 줄 안다.

남재희/전 노동부 장관, 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