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서양사에 있어 가장 큰 쟁점 중 하나다. 현대사회의 기초 요소인 민주주의나 자본주의의 등장과 정착 만큼이나 길고 긴 투쟁과 유혈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영국은 가톨릭에서 독립하면서 비로소 하나의 독립적 왕국이 되었고, 이 고유의 기독교 전통은 오늘날 보수/노동 양대 정당의 성격은 물론 청교도운동을 통해 미국 건국에도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라는 끔찍한 사건을 겪은 프랑스에서, 낭트 칙령(1598년)은 흰색과 회색의 공존과 상대적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한 주요 사례다. 그러나 1685년 칙령이 폐기되자 탄압을 받은 위그노들은 국외로 이주했고, 프랑스 혁명기에는 개신교도들이 다시 가톨릭을 박해했다. 이런 역사를 겪은 프랑스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종교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종교적 정당을 금지하는 강력한 세속주의인 '라이시테(laïcité)'를 고수하고 있다.이처럼 서양 역사의 변천 속에서 민주주의의 제도화, 정착화를 거치며 종교는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분리되거나 합리적 수준에서 별도의 영역을 갖게 되었다. 건국 이후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관습과 문화로서의 기독교와 민주주의적 정치체제는 공존하되, 별개였다. 하지만 미국 사회에서 이 원칙이 무너지며 종교가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위협하는 양상이 두드러지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보수 기독교와 보수 대법원의 ‘동행’이 자리잡고 있다. [편집자 주]

✔로우 판결 파기, 뉴욕 주 총기 규제 위헌,  EPA 권한 축소. 미국 어디까지 후퇴하나✔개신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는 별개로  헌법상의 정교분리 원칙은 명확했던 미국✔미국 보수 개신교의 싸움은 상징 아니라  정부 보조금과 세금 공제같은 이익의 문제

미국에서 기독교(church)와 정치(state)는 공존하되 별개의 존재였다. (사진:셔터스톡)

진격의 보수 연방대법원

6월 말 종료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2021~22년 개정기(開廷期)는 여러 면에서 역사적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후임으로 에이미 코니 배럿이 취임하여 '보수 6 대 진보 3' 구도가 된 후 처음으로 열린 개정기였고, 그 종료와 함께 스티븐 브라이어 대법관이 은퇴하고 최초의 흑인 여성 대법관 케탄지 브라운 잭슨이 취임했다.

이번 개정기에 대법원은 임신중지를 여성의 헌법상 권리로 인정한 1973년의 로(Roe) 판결을 파기하고, 뉴욕 주의 총기 소지 규제를 위헌으로 판단했다. 또 연방환경청의 탄소 배출 규제권한을 제한하는 등 6 : 3의 압도적 우위를 바탕으로 거침없는 보수 회귀 경향을 보였다.

정교분리 및 종교의 자유에 관한 사건에서도 대법원의 보수 회귀는 극명하게 드러났다. 케네디 대 브레머튼 학군(Kennedy v. Bremerton School District) 사건에서 공립학교 코치가 풋볼 경기 후 경기장에서 기도하는 행위를 종교의 자유로 인정했다. 이는 2000년 산타페(Santa Fe) 사건에서 풋볼 경기 전에 학생들이 참여하는 기도가 위헌이라고 판결한 것과 정반대의 결과였고,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금지한 역사적 사건인 1962년 엥겔(Engel) 판결과도 조화되기 어렵다.

대법원이 최소한 20년 더 멀리는 60년을 후퇴하여 보수 개신교에 승리를 안겨주었고, 정교분리보다 종교의 자유를 우선한 보수 대법관들에 대해 ‘아메리칸 탈레반’이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를 지지하는 로우 판결을 파기한 돕스 판결에 항의하며 연방대법원 앞에 모인 시위대 모습. 2022년 6월 24일. (사진:셔터스톡)

미국 헌법의 정교분리, 그 원칙에 충실했던 판결들

미국을 개신교 국가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왔다는 건국신화, 지폐에 새겨진 ‘In God We Trust’ 또는 국기에 대한 맹세에 나오는 ‘One Nation under God’ 등의 문구, 취임선서를 할 때 성경에 손을 얹는 관행 등을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하지만, 이민 국가이자 다인종 사회라는 특성을 고려하면, 종교 문제는 그리 간단한 영역이 아니다. 예컨대 기독교 기반 서구 사회의 대표적 기념일인 크리스마스는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소수그룹인 유대인이 인정하지 않는 날이다.

미국 수정헌법 제1조 중 종교 문제에 관한 조항은 두 부분인데, 하나는 국교 창설을 금지하여 정교분리를 선언하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조항이다. 전자를 국교금지 조항(Establishment Clause), 후자를 자유활동 조항(Free Exercise Clause)이라 한다.

유럽에서 30년 전쟁 등 수많은 종교전쟁을 겪고 소수종파 신자들이 숱한 희생을 치른 뒤에야 종교의 자유가 확립된 것에 비해, 미국은 처음부터 정교분리 원칙을 헌법에 못박았다. 헌법을 기초한 건국의 조상 중 상당수가 인본주의자였고, 국가원수인 왕이 국교의 수장을 겸하는 영국에서 독립하는 입장이어서 정교분리는 합리적 선택이었다. 미국 독립을 선언한 최초 13개 주는 이민자 구성이 다르고 그에 따라 우세한 종파가 달랐기 때문에, 어느 주가 특정 종교를 채택하거나 우대하지 않는 것은 연방국가인 미국의 안정에 필수적이었다. 미국에서 개신교가 개인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과는 별개로, 헌법적 측면에서 정교분리 원칙은 명확했다.

정교분리 문제가 법원에서 본격적으로 다투어지게 된 것은, 1950~60년대에 민권운동과 함께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이 법원에서 다투어지고 얼 워렌 대법원장 체제(1953~1969)가 시대 흐름에 발맞추는 진보적 판결을 쏟아내던 무렵이다. 대표적 결과물이 공립학교에서의 기도를 위헌으로 선언한 1962년 엥겔 판결이다.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인 1971년 레몬(Lemon) 판결에서 대법원은 정책의 목적이 세속적이어야 하고 정책이 가져오는 주된 결과가 특정 종교를 옹호하거나 억제해서는 안 된다는 기준을 제시하며 주 정부의 종교사학에 대한 지원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의 이런 판결은, 개신교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회 분위기와는 다르지만, 기존 질서를 흔든다기보다 헌법이 규정한 정교분리 원칙을 확인하고 기본으로 돌아간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보수 개신교의 반격

하지만 보수 개신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법원에 종교의 자유 관련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 체제(1986~2005)에서는 보수 진영의 샌드라 데이 오코너,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이 대법원이 어느 한편으로 쏠리는 것을 막으며 정교분리에 관한 기조가 유지되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2000년에는 공립학교 풋볼 경기 전의 기도가 위헌이라 선언했고, 2004년 로크(Locke) 사건에서는 주 정부가 장학제도에 신학생을 제외한다 해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아니라고 판결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 체제(2005~현재)에서 새뮤얼 얼리토를 필두로 강경 보수 성향 대법관이 연이어 대법원에 진입하며 경향이 바뀌었다. 주 정부가 제공하는 프로그램에서 종교단체를 제외한 조치에 대해 종교의 자유 침해로 위헌이라는 판결이 연달아 나왔다. 주 정부가 보조하는 학교 운동장 재생사업에서 종교사학을 제외한 조치(2017년 Trinity Lutheran Church of Columbia 사건), 주 정부가 교육비 지출에 대한 세금공제 혜택에서 종교사학 등록금을 제외한 것(2020년 Espinoza 사건), 주 정부 바우처를 종교사학 등록금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 주 정부의 조치(2022년 Carson v. Makin 판결) 등이 줄줄이 위헌 판결을 받았다.

연방대법원 판결의 오류

개인에게는 종교의 자유, 제도적으로는 정교분리를 보장하는 것이 최적의 해법 같아 보이지만, 정치와 종교가 실제로 충돌하는 문제에서 양자를 조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구체적으로 보면, 어떤 사람이 종교의 자유에 따른 권리를 주장하는데, 그런 권리 행사를 정부가 허용하거나 인정하면 정교분리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문제다. 예컨대, 이번 판결에서 공립학교 풋볼 코치가 경기 직후 경기장에서 공개적으로 기도를 하는 행위는 개인의 권리행사인가 아니면 공무원의 종교 중립 의무를 위반한 것인가?

최근의 대법원 판결은 명확하게 종교의 자유를 편들고 있다. 종교단체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정부에서 못하게 하거나 도와주지 않으면 종교의 자유 침해라는 주장을 하고,보수 법관들이 이를 인정함으로써, 실질적으로 Free Exercise 조항(종교의 자유)이 Establishment 조항(정교분리)을 압도하는 결과가 되었다.

공립학교 행사에서 기도를 허용하면, 기도를 하겠다는 종교인은 좋을지 몰라도 무종교인 혹은 다른 종교인의 권리를 침해한다. 보조금 혹은 세금공제 혜택에서 종교단체를 제외하는 것을 위헌으로 선언하면, 이를 통해 이익을 보는 것은 납세자 일반이 아니라 특정 종교단체다. 최근 대법원의 보수 회귀는 정교분리 약화 그리고 특정 종교단체의 이익으로 귀착되고 있다. 그 특정 종교단체는 대부분 보수 개신교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진:셔터스톡

미국 정치와 사법 보수화는 신앙 아닌 이익 문제

여기에서 눈여겨볼 또 다른 측면이 있다. 미국의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인종 문제가 있다는 말이 있는데, 종교의 자유 사건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종교의 자유 관련 소송을 하는 주체는 많은 경우 종교사학이다. 종교사학이 활성화된 배경에는 민권법 시행 및 대법원의 진보적 판결로 공립학교에서 인종분리가 금지되자 백인만 입학시킬 수 있는 종교사학을 대안으로 추구한 백인 유권자들이 있다.

보수 개신교 세력이 대법원에서 싸운 주된 전장은 공립학교에서의 기도 혹은 십계명 조각상 설치 같은 상징을 다루는 사건이 아니었다. 상당수의 사건은 종교와는 무관해 보이는 이슈, 즉 사립학교 등록금에 관한 정부 보조금 혹은 세금공제 문제였다. 보조금이나 세금공제는 이들의 현실적인 지출 부담 및 종교사학의 지속 가능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즉 이들 사건에는 인종차별, 낙후된 도심과 중산층이 사는 교외지역의 대립, 공립학교와 사립학교 중 어디에 주 정부의 예산을 집중할 것인지 등의 문제가 얽혀 있다.

보수 개신교는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해 스스로를 유권자 집단으로 세력화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고, 뉴딜과 민권운동을 주도하며 지지세를 넓힌 민주당에 맞서려는 공화당은 이런 새로운 유권자 집단의 부름에 응답했다. 복음주의 개신교가 노골적으로 지지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결정적 사건이었고, 이후 공화당 대통령들은 이들의 입맛에 맞는 연방법관을 지명하 며 보답했다. 임신중지 또한 가톨릭은 몰라도 개신교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었는데, 보수 개신교를 단일한 유권자 집단으로 결집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이슈에 가깝다.

결국 최근 연방대법원의 일련의 판결을 낳은 것은 보수 개신교의 신앙이 아니라 이들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이다.

연방대법원의 보수적 판결이 가져올 미국 사회 분열

미국 연방대법원의 보수 회귀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미국의 보수적 법 해석이 직접 한국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서가 아니다. 이런 판결이 사회 통합과 안정을 저해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Roe를 파기한 Dobbs 판결처럼, 정교분리에 관한 일련의 판결은 문제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다. 공립학교에서 종 교적 색채가 강화될 가능성이 높고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립학교가 힘을 얻을 것이다. 유대교, 무슬림 등의 종교에서 유사한 행동을 하겠다고 나서면 미국 사회에서 보수 개신교를 대하는 것처럼 용 인할 리 없고 새로운 갈등 요소가 될 수 밖에 없다.

대법원의 보수적 판결은 절차를 거쳐 도출한 최종적인 합의가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의 입장을 선동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임신중지, 총기, 환경규제 등 다양한 이슈에서 이미 공화당 우위 주와 민주당 우위 주, 공화당이 우세한 농촌과 민주당 성향 도시지역의 분열이 큰 상황이다. 사람들의 정념에 불을 붙일 가능성이 큰 종교 문제에 관한 대법원의 거침없는 보수 행보로 그러한 분열의 간극이 더욱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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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유정훈은변호사(한국 및 미국 뉴욕 주). 2011년 버락 오바마에 맞설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시점에 미국 연수를 하며 미국 정치·선거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페이스북에서 꾸준히 미국 정치와 법에 관한 ‘덕질’을 계속하고 있다. 메디치미디어가 출간한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의 공저자이기도 하다. 각종 언론매체의 칼럼니스트로도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