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선거는 중년과 노인이 싸운 결과 청년이 졌다고들 말한다. 4050과 6070의 표는 간 곳이 뚜렷하다. 2030의 표는 젠더간 분리 속에 에너지가 자체 방전돼버렸다. 노인과 중년, 두 세대는 선거에서 자신들의 기존 관념에 충실했다. 필자는 그래서 이제 국민 다수가 만나게 될 현실은 중년의 독선에 이어 노인의 인지적 퇴행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탈 진실, 탈 민주주의의 확증편향 현실 또한 독재에 버금가는 메가 리더십을 키울 것으로 예측한다. [편집자 주]

✔ 한국의 정치권은 왜 아직도 철 지난 이념적 편견과 편가르기의 구태에 머물러 있을까

✔ 이번 정부에서 유독 두드러지던 지식인들의 정책 실패와 이율배반적 태도

✔ 탈민주주의 사회의 대중을 조작하고 탈진실의 미디어를 동원하는 작금의 메가 리더십은 갈등을 먹고 자란다

✔ 시민이 통치자로서의 안목을 갖고 국가와 사회 문제의 근본을 재정의할 수 있어야 

편견과 편향을 먹고 사는 ‘환상 속의 그대’들 

크나큰 환호도, 속 깊은 절망도 없었다. 국민은 문재인 정부를 심판했다. 여론조사에서 정권교체 응답과 대통령 국정수행 부정평가는 줄곧 과반수를 기록했다. 현실은 늘 복잡다단하기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편안한 환상에 안주한다. 

현재의 여권을 지지한 사람들은 대략 이렇게 위안한다. “이만하면 잘싸운 거”라고. ‘이대남’ 등의 분노와 혐오를 동원한 국민의힘에 맞서, 부동산에 대한 탐욕으로 분노의 칼끝을 정부에 돌린 수도권의 기득권에 맞서서 잘싸웠다고. 오히려 ‘이대녀’가 결집해서 미래 사회의 새로운 희망을 보여줬다고. 이 거대한 환상 만들기에는 새로운 얼굴이 필수다. 오래 이 동네를 봐온 사람들은 생각한다. 새 얼굴이구나, 시효는 언제까지일까? 

실체적인 현실은 이런 게 아닐까. 청년들은, 특히 남성들은 기존 현실과 자신들의 사회문화적 요구 사이에 괴리가 크다. 좌절과 분노의 원 체험이 누적되어 있다. 그러나 사회 변동을 다면적으로 이해해야 할 정책당국자의 머리 속에는 문제해결을 위한 지적 치밀함이나, 겸허한 태도가 없었다. 과거의 믿음에 고착화된, 반(反)실증적인 지적 게으름과 오만한 태도의 대표는 부동산 정책의 실패다. 가장 여실히 드러났다. 

집이 있든 없든, 최근의 부동산 가격 상승에는 보통 사람들이 분노할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는 부동산 폭등이 이전 정부의 실정과 글로벌 유동성의 증가 탓이고, 탐욕스런 강남 기득권과 국민들 때문에 부동산 문제 해결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그 일부가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는 점. 관념적인 실천 속에서 짐짓 일하는 척하고, 문제 해결 대신 이미지 만들기에만 골몰한 이들의 전형적인 변명이다.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두 번째 그대, 이번 정권교체에 한몫 했던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북한과 중국에 굴종적인(?) 정권이 나라를 위태롭게 이끄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고. 일방적인 경제·사회 정책을 추진하면서 자산 가진 이들을 범죄자 취급한 사회주의(?) 세력을 심판해야 한다고. 박근혜, 이명박 전직 대통령을 잇따라 감옥에 보냈으니, 이젠 문재인이 감옥에 갈 차례라고. 앞으로의 국정 대안?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중국과 북한에 맞서면서 자유민주주의 이념이 확고한 국가관을 토대로 법과 원칙에 맞게 국민을 엄정하게 다스려야 한다고들 한다. 

이들이 공유하는 환상도 지나간 과거의 잔상이 짙게 드리워 있다. 조야한 민족주의와 이념으로 북한에 대해 비현실적으로 과다한 호의를 가졌던 NL 운동권 세력은 이제 사회의 주류도 아니고, 대북 외교 정책을 이끌지도 못했다. ‘소득주도성장’ 등의 어설픈 수사로 경제정책을 추동했던 지식인들의 정책적 실패와 이율배반적인 태도는 이번 정부에서 유독 문제적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무서운 빨갱이’는 아니다. 흘러간 이론, 또는 탁상공론을 대안이라고 믿는 지적 나태주의자들일 뿐이었다. 게을러도 지식인이 될 수 있던 과거의 군상이다.   

선거 이후 두려워해야 할 것이 새로 나타났다. 곧 집권할 ‘보수 세력’의 인지적 퇴행에 대한 우려다. 선진화된 대한민국이 과거와 달리 국제 무대에서 얼마나 복잡미묘한 외교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을까? 상당수 워딩에서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을 운영하던 경험이 훅 치고 들어온다. 미국에게 나라를 송두리째 맡기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믿는 듯하다. 시장 근본주의를 신봉하지만, 현대 시장 질서가 축적한 세밀한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법과 원칙’, ‘공정과 상식’을 되뇌이지만 당사자 중 적지 않은 수는 자신은 법과 원칙 위에 존재한다고 믿는, ‘빽’과 ‘줄’의 문화에 가장 익숙한 세대다. 늙은이들의 더 낡은 과거에 익숙한, 권위주의의 망령이 돌아오고 있다.

무능과 편견이 낳는 메가 리더십의 시대

적어도 민간 영역의 전문가들 중에서는 극단적인 이념과 편견에 사로잡혀 문제 해결 능력까지 형편없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권은 왜 아직도 철 지난 이념적 편견과 편가르기의 구태에 머물러 있을까. 정치적으로 손쉽고, 대중을 조작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불가리아계 프랑스 정치학자인 안나 크라스테바(Anna Krasteva)는 언론과 미디어의 탈진실(post-truth), 사회 곳곳의 정치-경제 카르텔이 심화시키는 탈민주주의(post-democracy)의 위기가 갈등과 분열을 통해 기성 권력을 공고화하는 메가 리더십(mega-leadership)의 발흥을 부추긴다고 꼬집는다. 크라스테바가 말하는 작금의 메가 리더십은 갈등을 먹고 산다. 탈진실의 미디어를 동원하고, 탈민주주의 사회의 대중을 조작하면서 정치는 현실적인 문제 해결의 길에서 이탈한다. 단순히 무능한 것이 아니라, 무능과 편견으로 초래된 실패와 위기마저도 권력 강화의 자양분이 된다.

삼프로TV 토론 직후 열세에 있던 윤 후보의 지지율을 만회해 준 것은 그가 페이스북에 올린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였다. 이미 벌어진 일 앞에서, 혐오와 편견을 동원하는 편가르기 정치의 폐해를 얘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듯하다. 곧 국정 책임자가 될 윤 당선자 뿐만 아니라, 여성가족부 폐지에 반대하는 이들 역시 정체성 정치의 진지에서 나와 생산적인 결자해지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불만을 가진 다중이 특정 언설에 지지를 보낸다면 거기엔 분명 이유가 있다. 성평등이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지, 성평등이 추구한 근본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보다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다. 

필자는 수년 전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유명인들의 성폭력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을 때, 문제의 본질이 한국 사회에서 성과 밀접하게 결부되기 쉬운 권력의 사유화와 남용이라고 지적했었다. 문제는 젠더가 아니라 권력이라는 생각이다. 한 여성을 무조건 피해자로 상정하고 역권력을 부여하는 방식보다는, 권력의 작용이 어떠한 약자도 짓밟지 못하도록 하는 근본적인 의식의 변혁과 제도의 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휴머니즘’이 공허한 수사가 되지 않으려면, 인간의 다면성에 대한 성찰을 토대로 피해를 예방하고 검증하고 복원하는 보다 똑똑한 제도와 시스템을 강구해야 한다. 여성가족부를 발전적인 방식으로 해체한다면, ‘인간평등부’ 같이 메타 가치를 지향하는 보다 사회 통합적인 부처의 신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과도하게 정치화된 ‘공정’ 담론 역시 그 근본적인 의미를 엄밀하게 되새겨야 한다. 박권일은 <한국의 능력주의>에서 한국인이 외치는 ‘공정’이 실제로는 경쟁을 통한 적자생존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담론으로 기능한다고 지적한다. 최근 교육학의 연구들 역시 능력주의의 한계에 천착하면서, 협소한 경쟁의 틀이 선발의 타당성은 물론 인간 계발의 합리성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간 언론은 교육학적 성찰과 대안 없이 학생부 종합 전형의 문제점을 다분히 선정적으로 보도해 왔다. 황급히 정시 전형을 확대한 문재인 정부의 대응 역시 교육학적 타당성과, 능력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사회 개혁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입시 전형을 자꾸 바꿀 것이 아니라, 대학 졸업장이라는 ‘지위재’ 획득에 매몰된 한국 교육의 인센티브 시스템 자체를 변혁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트럼프의 당선을 통해 적나라하게 그 실체가 드러난 메가 리더십의 쇼맨십과 대중 동원은 복잡다단한 정치·경제·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정치 리더십이 발휘되지 못하고 구조적 무능이 고착화되면 정치인들은 실질적인 통치를 관료들에게 의탁한다. 마치 그들이 각 영역의 전문가인양. 이 경우, 관료들은 그럴듯해 보이는 보고로 행정을 포장하는 정책 홍보 마케터 역할을 하면서 공적인 책임을 회피하고 사회의 다른 부문에 고통을 전가하는 방식을 제도화한다. 막대한 예산과 재능의 낭비, 꼭 부패가 아니더라도 권위주의와 무능이 구조화된다. 

‘5년 단임에 불과한’ 선출 권력을, 이미 광범위하게 네트워크화 되고 강고하게 권력화 된 기득권 조직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특히나 선출된 이들이 정치와 행정에 무지하거나 무능력함을 드러낼 때는 서슴없이 무시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메가 리더십의 불씨는, 정치인들이 ‘촛불정신’을 호명하고 대외적으로 ‘민주주의’를 홍보하면서도 대내외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주체적으로 성찰하고 해결하기 위한 전문적인 역량을 결집하지 못했을 때 이미 증식되고 있었다.

노인 동아리의 재림? 시민의 리더십으로 넘어서야 

이번 대선에서 60대 이상의 남성은 투표율이 90 퍼센트에 육박했다. 반면, 한창 사회활동이 활발한 40대는 투표율이 70 퍼센트에 그쳤다. 같은 40대로서 그들을 대표할 자격은 없지만, 나름 그 이유를 이렇게 짐작한다. ‘생각이 낡고 권위주의적인 구세력이 다시 집권하는 것도 달갑지 않지만, 좋은 말만 갖다 붙이면서 문제 해결은 커녕 실생활에 심대한 피해를 주고, 각종 실패에 대해 뻔한 수사를 동원하며 변명으로 일관하는 사적 동아리 수준의 집단에게도 지쳤기 때문’이라고. 복잡다단해진 사회와 조직의 일선에서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실제로 해 본 사람들은, ‘일은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있다. 오퍼레이션은 중간 관리자의 기예가 아니라, 최고리더십까지 체화해야만 하는 철학이다.

정치적 리더십이 안착되고 국가와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선 장기적인 전망을 가진 정치 주체에 의한 권한과 책임의 합치가 필요하다. 사반세기에 이르도록 5년 단임제와 소선거구제에 머물러 있는 87년 체제의 개편도 시급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법제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어느덧 반세기가 넘은 양당 정치 체제이지만, 이들 정치 세력은 통치의 관점에서 공히 무능하다. 각자의 정체성을 대변할 만한 수십년간 축적된 정책 연구도 없고, 전문가 풀도 빈약하다. 보통 사람들은 권력을 장악한 정치집단이 최고의 지식인과 전문가들을 파악하고 동원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내밀한 현실은 후보자를 중심으로 동아리처럼 모여 있는 사적 집단이 유유상종인 사람들과 어울리는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이 개발도상국이던 시절, 어느 정치 지도자는 ‘머리는 빌릴 수 있다’고 했다. 모든 면에서 고도화된 현재의 지식 사회에선, ‘좋은 머리’가 자신이 모르는 영역에 대해 전문성을 가진 다른 좋은 머리를 알아보고 연계해야만 집단 지성이 발현한다. 핵심의 머리가 성찰적인 경험으로 충만해야 다른 좋은 머리들도 모여든다.

꽤 오래 전부터 젊은 유능한 인재들이 정치권으로 갈 인센티브가 소멸하면서 정치 문화는 노쇠하기 시작했다. 정치권이나 공직을 거친 나이 든 사람들은 정권교체의 가장 직관적인 의의가 적게는 중앙의 1만8천여 개에서 많게는 지방 기관의 감사직까지 포함한 4만여 개 공직 일자리의 교체임을 밝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노쇠한 정치의 틀에 가뭄에 콩 나듯 끼어든 젊은이들은, 새로운 변화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그저 얼굴마담 역할을 하거나 점차 잔꾀나 부리는 젊은 꼰대로 흑화되기 쉽다. 새 권력자들이 협치를 얘기하지만, 갈등으로 정치적 이득을 봐 온 집단들이 협치를 할 인센티브는 희소하다. 보복은 보복을 부를 것이고, 권위주의적이고 선정적인 정치 문화는 전문가적 성찰이 운신할 폭을 줄일 것이다. 

편가르기의 무대를 벗어나, 새로운 시민의 육성을 미래의 대안으로 준비해야 한다. 정치 지도자에 대한 자기 동일시, 맹목적인 열광과 야유, 이념과 정체성 정치에의 함몰, 정책을 선거용 아이템 정도로 여기는 포퓰리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는 시민이 통치자로서의 안목을 갖고 국가와 사회 문제의 근본을 재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진영과 정치 성향을 떠나, 진지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새로운 품성과 지적 수준을 갖춘 시민의 육성을 위한 범사회적인 투자와 노력이 필요하다. 스마트 중도층이라 불릴만한 대안적인 정치 시민 주체가 가까운 미래에 생겨나지 못하면, 우리는 갈수록 늙어가는 정치 동아리의 주기적인 교체만을 반복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아마도 허무하게 읊조릴 것이다.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단지 그것 뿐인가 그대가 바라는 그것은

아무도 그대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대의 환상 그대는 마음만 대단하다

그 마음은 위험하다

자신은 오직 꼭 잘 될 거라고 큰소리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대가 살고 있는 모습은 무엇일까

세상은 빨리 돌아가고 있다

시간은 그대를 위해 멈추어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고

그대는 방 한 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얘기하려 한다

환상속에 그대가 있다

  • 서태지와 아이들, <환상 속의 그대>


글쓴이 김도훈은사회학을 공부한 학자이자 데이터 전문가이다. 데이터를 분석하지만 그는 숫자와 도표 안에서 시민을 읽는다. 데이터 분석 자체를 사람을 이해하는 실용적인 예술이라는 생각에 회사 이름도 라틴어로 이를 뜻하는 '아르스 프락시아'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