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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편집 2020. 11-23.17:32

[임성원의 ‘마음 공부’] 말을 했는데 안 통하네…진정한 소통의 전제 조건들

by | 2020년 10월 30일 | 위크엔드 컬처

사회학적으로 어떤 개념이 강조될 때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이 그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무척 중요한데 정작 실행이 지지부진해서다.  ‘소통’이 시대의 화두가 아니었던 적이 없지만 현대에 와서 더욱 강조되는 충분한 이유다. 지금은 잔잔한 호수에서 일사불란하게 노를 젓는 조정 경기 시대가 아니고 상하좌우에서 부딪히는 거센 물살을 타고 내려가는 래프팅의 시대다.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고 똑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노를 저으면 보트는 뒤집힌다.

온갖 것들이 서로 얽혀 있는 복잡계 속에서는 각자가 상당 수준의 자율적 정보처리 기관이 되어야 하고, 또 동시에 전체의 목적에 잘 정렬된 행동이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니 첫 번째로 소통해야 할 것은 정보와 방향이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되는 것이다. 길을 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볼 필요도 없다. 이 불통의 시대에 유일하게 이심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정말 소통 안 되는 세상’이라는 것일 테다. 명색이 정보화 시대가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데 소통 시대는 여전히 요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동양에선 나를 비워 상대에 공간을 내어 주는

한자로 소통(疏通)은 트일 소(疏)와 오고 갈 통(痛)이 합쳐진 말이다. 疏란 다시 짝 필(疋) 자와 흐를 류(㐬)가 합성된 말이다. 나에게 남이 깃들만한 공간이 만들어진 후에 비로소 통(通), 즉 서로 오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동양의 소통 개념은 보다 내면지향적이다. 내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나, 감정, 이래야 한다는 당위, ‘너는 그런 사람이다’라는 낙인이 가득 차 있다면 소통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소통을 원한다면 반드시 선소(先疏), 후통(後通) 해야 한다. 내 마음의 나라에 거할 방이 너무 없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만의 성을 쌓고 산다. 자신은 해자와 견고한 성벽과 각종 기관장치로 둘러싸인 철벽 속에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상대방의 고슴도치 같은 태도를 문제 삼는다. 그러나 고립을 안전이라고 생각해 소통과 맞바꾼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몽골의 속담이 있다.
‘집을 짓는 자, 그곳이 무덤이 되리라.’

서양에선 공동체로 만들어나가는 과정

뇌 좌반구에 들어찬 브로카 영역(Broca’s area)이나 베로니케 영역(Wernicke’s area) 같은 언어중추를 보면 인간은 소통함으로써 인간다워지는 동물임에 틀림없다. 언어 이전에는 무리 안에서 털 고르기 같은 친화적 행위가 있었을 것이다. 언어는 최소한 네 사람에게 털 고르기 효과를 줄 수 있다고 한다. 정서적 유대를 가질 수 있는 무리의 크기가 커지는 만큼 인간의 생존력도 강해지는 것이다.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번역되지만, 서양의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공동체인 폴리스(polis) 안에서만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인간은 공동체적 동물인 것이다. 공동체를 코뮌(commune)이라고 한다. 소통을 의미하는 단어 커뮤니케이션 (Communication)은 그러므로 ‘공동체로 만들어가다’라는 해석이 가장 정확한 것이 된다.

공동체로 만들어가는 작업은 단순히 문자와 도량형의 통일로 완성되지 않는다. 생산과 분배, 방어와 육성이라는 생활의 공동체이자 생활양식, ‘우리 의식’ (we concept)을 만들어내는 부단한 과정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단순히 모여만 있고 결합되어 있지 않은 상태(mixed but not combined)란 오래가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나누어지지 않기 위해서 나누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 공동체(commune)고, 이를 위한 모든 행위가 소통(communication)이다. 소통은 말을 넘어선다.

소통을 가로막는 사회적 장애: 동상이몽

때문에 소통에 있어 가장 큰 착각은 서로 말을 주고받은 대화 자체만을 소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BC 5세기경 당대의 세계대전이었던 페르시아 전쟁은 아테네와 페르시아가 대화를 통해 서로 소통했다고 여겼지만 결과적으로 소통이 되지 않았던 상황이 도화선이 됐다.

물론 모든 전쟁의 배경에는 지역 내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페르시아 전쟁도 마찬가지다. 그리스의 식민지 개입과 페르시아 제국의 이익 충돌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하지만 전쟁 발발 이전 두 나라가 먼저 대화를 통한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전쟁 발발 전 아테네는 페르시아에 사절단을 보냈다. 목적은 아테네를 스파르타의 침공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다. 제국인 페르시아의 입장에서는 동맹이란 주종 관계를 의미한다. 수직적이다. 그 관계는 형식적으로 아테네의 물과 땅을 바치는 것으로 체결된다. 그에 비해 뼛속까지 상인인 아테네인들에게 모든 것은 거래다. 수평적인 것이다. 아테네 사절단은 내키지 않았지만 고객만족 차원에서 그쪽에서 원하는 모양새를 갖추어 주었다. 문제는 페르시아와 달리 충성 서약이 아니라 동맹 체결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했다. ‘땅과 물을 바침’이라는 형식의 해석이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수평적으로, 한쪽에서는 수직적 의미로 받아들인 두 해석은 진실의 순간 이전까지는 원만한 소통으로 서로에게 인식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 복종과 충성을 맹세한 아테네가 이오니아의 반란군을 도와서 페르시아를 공격하게 되자 이 행복한 동상이몽은 서로 간에 전쟁이라는 최악의 악몽으로 변하게 된다. 호되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한 페르시아는 실질적 필요가 아니라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상징적 차원에서 아테네를 정벌하기로 한다.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은 중요한 문제들에 묻혀 이것을 잊어버릴까 봐 하인을 시켜 식사 때마다 말하게 한다.}
“폐하, (괘씸한) 아테네인들을 기억하소서.”

집단 내의 소통 장벽, 권력 때문? 영향력 때문?

페르시아 전쟁은 아테네와 페르시아 간 불통이 도화선이 되었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집단 내의 소통에서도 문제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특히 페르시아는 무리하게 아테네 원정에 나섰다가 마라톤 전투에서 패했고 다리우스 대왕은 2차 원정군을 보내려다 그리스 반도에 페르시아의 군대가 집중되는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킨 이집트에 신경을 쓰다 병사했다.

만약 페르시아 제국의 지도층 사이에서 전쟁의 실익을 놓고 소통이 원활했더라면 다리우스 대왕의 무리한 그리스 원정 지시를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의 명령이 곧 법이 되는 절대왕정에서 군신 간 소통이 원활했다고 추론하기는 어렵다. 이처럼 집단 내부의 소통은 본질적으로 조직문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문화란 살아가는 방식(way of life)이다. 소통의 방식도 여기에 영향을 받는다. 정보란 옛날부터 희소한 자원이었다. 그래서 정보를 누가 차지하느냐가 권력의 척도였고, 정보의 통제와 독점을 통한 권력의 유지, 강화가 가능했었다. 요즘은 소통을 강조하는 시대다. 그러나 실제로 소통이 충분한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생존이 외부 환경에 좌우된다는 의미에서의 열린 조직(open system)은 대체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해석과 솔루션을 잘 제시하는 사람에게 영향력이 주어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문제를 해결해야 살아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 외부 환경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닫힌 조직(closed system)에서는 정보를 통제함으로써 권력으로 삼고자 하는 경향이 생겨날 수 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어이가 없지만 내부에서는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정보를 향한 치열한 각축이 벌어진다.

문제 해결을 위해 소통을 잘하려고 하는 의지가 분명한 집단조차도 장벽에 직면한다. 즉 의사소통 과정에서 발행하는 커뮤니케이션 누수 문제(communication loss)다. 대체로 현장 수준, 관리자 수준, 경영자 수준에서 한 단계 오르내릴 때마다 소통 내용은 유실, 왜곡, 오해의 과정을 피하기 어렵다.

선의를 가진 경우라도 이처럼 구조가 소통을 방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정보 직거래를 위한 여러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도 조직화의 필연적인 부작용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꼭 소통되어야 할 것이라면 소통 경로의 다양화나 지겨울 정도의 반복 같은 확실한 행동을 해야 한다.

집단 내 소통의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신뢰의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소통의 수직적 측면인데, 아래와 위의 소통에 대한 해석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아래에선 뮈토스(Mythos), 즉 ‘신뢰할 만한가’를 중시한다. 위에서는 주로 이론적이고 바람직한 것, 즉 로고스(Logos)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둘이 가슴에서 만나기란 참으로 어렵다. 공감과 공명이라는 파토스(Pathos)는 서로의 관심사가 달라서 어긋나기 십상이다.

조직 소통의 방해 요소-숨김과 부서이기주의 

괜찮은 소통이란, “나는 비록 조직의 의사결정에 찬성하지 않지만 조직이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 지를 알고 있다. 조직은 그것을 감추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조직이다. 가장 기본적인 신뢰를 주는 것은 내용보다 의도, 맥락을 소통하는 것이다. 이런 소통을 메타 커뮤니케이션(meta-communica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조직에서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는 문제가 있으니 숨김과 부서이기주의로 해석할 수 있는 섹티즘(Sectism)이다. 소통의 수평적 문제다. 병은 자랑하는 것이 낫고, 문제는 조기에 드러내어야 해결하기 쉽다. 치러야 할 대가도 적다.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조직의 하부 단위에서는 거의 통하지 않는 얘기다. ‘문제없는 부서는 없다. 끝까지 기다렸다가 먼저 문제가 터진 부서에 묻어간다’가 본능적 행동 양식이다.

부서이기주의는 소통의 현실이다. 회의에서 심지어 결론이 난 사항에 대해서도 회의실 밖에서 회의를 기억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이것은 집행력을 현저히 떨어뜨리고 종국에는 실패를 불러온다. 부서이기주의의 끝판왕은 문제가 생기면 해결을 위해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서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에 급급해하는 것이다.

조직 내에서 오랫동안 소통을 다루어 본 경험으로는 조직은 협업의 체제이지만 그렇다고 좋은 소통의 체제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하기 위한 조직이므로 일 중심으로 짜인 조직은 일하는 사람의 문제를 최우선에 두기 어려워서다. 이 때문에 ‘사람에게 소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심리적 장애물들: 아전인수, 동문서답, 내로남불

이혼 법정을 나오면서 법적으로 남남이 되는 부부가 마지막에 서로에게 하는 말은 주로 무엇일까? 법조계에 있는 지인들에 따르면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다소 당황스럽다. ‘잘 먹고 잘 살아라’나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보자’가 아니란다. “당신 그때 그 말이 그런 의미였어?”라는 말이 가장 많다고 한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들마저도 오해 없는 소통이 어렵다는 역설이다.

마음 이론(THEORY OF MIND)에 의하면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마음으로 미루어 상대방을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최선이다. 그러니 우리의 ‘타인 이해’란 사실 이해가 아니고 짐작이나 추론이다. 이 TOM이라는 정신적, 가상적 기관이 잘 발달해 있으면 타인의 마음 상태를 인지하고 이해하며 공감하는 능력이 커진다.

그 반대라면 오직 자신의 시각으로만 타인을 이해하고 행동하게 되는데 이것이 오해와 충돌의 근원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이기적인 마음보다 더 문제가 된다. 자기 생각에 좋은 것은 타인에게도 당연히 좋을 거라고 생각해버리면, 진심을 담아 선의로 행했지만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TOM의 품질을 결정하는 자기 객관화와 공감 능력이 결여되면 아전인수, 동문서답, 곡학아세, 내로남불, 적반하장이 다반사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최초이자 최후의 소통자기와의 소통

우리는 탄생 이전과 죽음 이후를 알지 못하며,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시원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정말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올바름의 확신이 없는 ‘열심’이란 가끔씩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것을 막아내지는 못한다. 사랑을 해보면 사랑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듯이, 세상과 소통을 해 보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역시 깨닫게 된다.

나는 귀가 약해서 목소리가 크다. 마찬가지로 내면의 소리를 듣는 힘이 약하면 목에 핏대만 세울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신과의 소통이 소통의 첫걸음이자 최후의 소통이다. 그 후에는 마당에 가득한 생각과 고정관념들을 치우고, 문을 열고 나와서, 세상과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소통이란 궁극적으로 먼저 소리를 듣는 데 있다. 안이 들려야 밖의 것도 들린다.


임성원 필자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및 행정대학원 수료. 롯데그룹 기획조정실, 한국생산성본부에서 일하다 휴맥스에서 인사담당 임원을 맡아 수많은 기업들을 상대로 자문·인사·교육 서비스를 제공했다. 2000년부터 1인기업 ‘현덕경영연구소’를, 2002년부터 평창에서 힐링캠프를 운영해왔다. 저서로는 <직장인 울랄라>가 있다. 20년 이상 상담·교육을 하는 한편으로, 심리학, 뇌과학, 철학, 음양오행, 불교를 꾸준히 공부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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