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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동북아의 판이 바뀌고 있다. 판이 바뀌는 근본 원인은 김정은이 경제발전을 위해 핵을 내려놓고 밖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해야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꿈은 두 귀인이 있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끈기와 경청의 자세로 김정은을 회담장으로 끌어낸 문재인 대통령, 지금까지의 미국 기득권층과 달리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둔 트럼프 대통령이 없었으면 김 위원장의 꿈은 백일몽에 그치거나 자멸의 단초가 될 수 있었다.

냉전의 판이 흔들리는 데 그치지 않고, 구조적 변화를 일으키고, 새로운 평화의 판이 자리 잡으려면 해야 할 일이 백 가지도 넘는다. 나는 오늘 칼럼에서 이 가운데 딱 한 가지만 얘기하려 한다. 지금 이 시점에 북한에 대한 대대적이고 공개적인 퍼주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쌀이 가면 마음도 간다

퍼주기라는 말이 선동성이 강한 용어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경제지원이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남북 경협을 하면서 북한 사람들의 마음이 남으로 넘어오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낀 적이 있다. 내가 통일부 장관직에 있던 2년 5개월과 후임인 정동영 장관 임기 1년 동안 쌀 170만 톤을 지원하면서 원산지가 ‘대한민국’이라고 쓰인 쌀 포대 4,250만 장이 북으로 갔다. 북한 주민 1인당 1.7장의 포대가 북한에 뿌려진 것이다. 포대를 아주 튼튼하게 만들었더니 북한 주민들이 잘라서 배낭이나 우비로도 썼다고 한다. 한국에서 이런 대규모 지원을 했다는 걸 북한 주민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에 앞서 1995년 김영삼 정부 때에는 북한 동포들에게 안남미를 사서 주려고 하다가 결국은 우리 쌀 15만 톤을 보내준 적이 있다. 원래는 값싼 안남미를 보내려 했는데(그랬으면 안남미 1백만 톤을 보낼 수 있었다), 반대하는 쪽에서 ‘쌀은 민족주의다’라는 구호까지 들고 나와서 결국 우리 쌀 15만 톤이 건너갔다. 그때부터 북한 사람들의 대남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먹을 걸 입에 넣어주는 사람을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는가.

 

태극기 부대는 미국의 퍼주기가 만들었다

이런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일부 한국 사람들이 성조기 들고 데모하게 된 배경이 뭔가. 6·25전쟁 끝나고 그 배고팠던 시절에 미국이 우리한테 밀가루, 옥수수, 쌀 등 온갖 퍼주기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신생 한국에 대규모 자본 지원이나 투자는 하지 않았다. 그런 건 일본에서 청구권 자금 받아서 했고, 우리가 수출해서 번 돈으로 했다. 그럼에도 미 공법(美公法, Public Law) 480조에 따른 잉여농산물의 정서적 뿌리는 깊다. 아마 나이든 사람들은 그때의 밀가루 포대를 기억할 것이다. 어떤 점에서 미국은 당시 신생 한국을 먹여 살리다시피 원조를 했다.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 마음이 미 대륙으로 건너갔다고 본다. 잉여농산물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먹을 걸 주고 입을 걸 줬기 때문에, 즉 그걸 먹고 생존한 사람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성조기 시위가 있는 거다. 이렇게 미국의 퍼주기 덕분에 우리가 지금처럼 미국을 좋아하게 된 건데, 지금 북한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남북 해빙 무드 때 한때는 쌀 주고 비료 주고 빵공장 지어주고, 심지어 아이들 분유까지 보내는 사람도, 소 끌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퍼주지 말라는 것은 평화와 통일을 위해 꼭 필요한, 남북 민심을 연결하지 말자는 얘기다. 군비감축 같은 거는 나중에 할 일이고, 일단 같이 살고 싶어지도록 민심이 통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분단비용이 줄어들고 평화와 교류, 통일의 편익이 커진다. 퍼주기만큼 확실한 마중물은 없다고 본다.

미국이 퍼주는 건 괜찮고, 우리가 퍼주는 것은 안 된다? 말이 안 되는,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편협함이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야 하는 것처럼, 미국이 퍼줘서 우리가 오늘날 잘살게 됐다면 우리도 북의 경제가 어려울 때 똑같이 도와줘야 한다. 미국이 우리를 불쌍히 생각해서, 인도주의에 입각해서 도와준 거라면, 우리는 북을 같은 핏줄로 봐야 한다.

탈북자들이 대개 먹고살기 힘들어서 온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에 탈북자가 3만이나 있다는 것은 북이 먹고 살기 어렵다는 걸 입증하는 것이고, 그럼 줘야 한다. 미국 사람들이 우리에게 줄 때 동포라서 준 건 아니다. 인도주의에 입각해서 준 거다.

 

노무현, ‘북을 돕는 건 (인간의) 도리

대북 퍼주기와 관련해서 가장 인상적인 사람이 고 노무현 대통령이다. 2003년 2월에 노 대통령이 취임하셨고, 이어 4월에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 장관급회담을 앞두고 회담 전략과 목표, 회담 운용 방안 등에 대해 대통령께 보고를 한 적이 있다. 보고를 마치고 나자 노 대통령이 “협상의 명수시니 잘 하시겠죠”라고 했다. 그러더니 대뜸 “우리가 북을 돕는 건 인도주의도 아니고 동포애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얘기 들으면서, 변호사 출신답게 법리적인 말을 하시려나 생각하면서 “인도주의도 아니고 동포애도 아니면 뭡니까”라고 물었다. 노 대통령은 “우리가 북을 돕는 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도리. 자식에 대한 부모의 도리,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 이런 거는 무조건적이고 해야만 하는 당연한 행동을 말하는 거다. 내가 속으로 감탄하면서 “이번에 평양 가서 확실히 설명하고 그에 대해 북쪽도 잘하라고 얘기하고 오겠습니다”라고 했다.

노 대통령은 도리라고 말해놓고도 본인이 대단한 얘기를 했다고 생색내거나 그러지 않으셨다. 속으로 ‘괜찮은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쪽에선 퍼주기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선 도리라고 말하는 것, 이건 의식 수준의 차이다. 도리 밑에 동포애, 동포애 밑에 인도주의가 있는데, 대북 지원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동포애까지는 가 있다. 그런데 그보다 높은 게 바로 도리라고 생각한다. 같은 민족으로서의 도리, 이런 게 아니겠는가 싶다. 사랑도 여러 가지 사랑이 있지만, 도리라는 수준으로 가면 일종의 아가페 수준으로 올라가는 거다.

당시 북한에 가서 회담을 마치고 환영만찬까지 끝나고 나서 내가 별도로 수석대표끼리 만나자고 해서 그 ‘도리’ 얘기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가 북쪽을 돕는 건 인도주의나 동포애가 아닌 도리라고 하셨다, 굉장히 차원이 높은 이야기인데, 그런 대통령이 지금 남북 관계를 발전시켜나가려 한다, 북한도 그에 걸맞은 태도로 나오는 게 도리다, 당신들도 잘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도와주는 게 도리이듯, 당신들도 상호 협조하는 게 도리 아니냐, ‘도리론’이 있는 한 남북 관계가 좋은 쪽으로 발전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나누었다.

 

종북 딱지처럼 퍼주기도 이번에 딱지 떼야

지금은 싱가포르에서의 트럼프-김정은 회담 이후 약간 숨고르기를 하는 순간으로 보인다. 6·12 이후 현재까지의 두세 달은 앞으로 펼쳐질 몇 년간의 긴 협상기로 보면 짧은 기간이지만, 당장은 좀 답답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겨울의 차가운 기운 아래서도 땅속에서는 식물들의 뿌리가 자라고 새싹이 힘을 키우듯이 한반도라는 동토의 땅속에서는 새로운 모색이 차차 힘을 얻어가고 있다.

내놓고 퍼주기 하자고 하면 걱정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안은 정면 돌파해야 한다. 위에서 말한 대로 논지를 세워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 범위나 시기, 규모와 기준에 관한 것도 공론화해서 국민 여론을 모아나가는 과정으로 삼으면 좋겠다. 북미협상이나 남북협상은 그대로 하고, 우리 내부에서는 통합된 의견, 당당한 의견을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종북이라는 딱지는 피해 다니려고 하면 신이 나서 딱지를 더 붙이려 하는 게 이 땅의 낡은 보수들 습성이었다. 퍼주기 문제도 그렇다. 퍼주기라는 표현을 피해서 지원하려 하면 일이 더 힘들다. 이런 일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국민들 설득해나가면서 정면 돌파해야 한다.

피렌체의 식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