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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칼럼] 코로나19 방역의 아세안 모델, 南南西로 눈을 돌려보자

by | 2020년 6월 2일 | 국제, 정책


코로나19 팬더믹(세계적 유행병)을 겪는 과정에서 세계 주요국들의 방역 성적표는 천차만별이다. 지난 5개월간 선진국인 미국·유럽이 낙제점을 받은 반면 아시아는 오히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코로나19 방역의 모범국가로서 대한민국 위상은 한껏 높아졌다.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선 K-방역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하지만 ‘방역 우등생’이라는 우리에게도 참고할 사례는 많다. 평소 관심이 덜한 곳으로 눈을 돌리면 배울 점을 더 찾을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인구 14억 명의 아프리카 대륙이 의외로 선방하고 있다. 6억 명의 인구가 있는 동남아 지역의 전체 사망자는 2700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10개국에서 확진자는 9만 명이 발생하는데 그쳤다.
우리가 동남아의 방역 사례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상대적으로 낙후 지역인데 의외로 방역 성적이 좋아서가 아니다. 동남아 국가들이 감염병 확산에 함께 대응해 역내 공동체 차원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방역 성공은 단일국가 차원일 뿐 동북아 차원의 성공이 아니다. 팬데믹 상황에선 한 나라만 홀로 대처할 수 없기에 지역적 방역의 성공 요인을 타산지석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선 한·중·일과 동남아를 묶는 동아시아 보건의료 공동협력을 우리가 주도할 가능성을 짚어보려 한다. 

아세안 10개국 확진수는 9만여 명

지난 5월 말 현재 동남아의 코로나19 상황은 흐림-맑음이 교차한다. 싱가포르는 외국인 노동자 집단 거주구역에서 대규모 감염 사례가 나와 확진자 수가 3만5000명에 육박한다. 경제발전 수준이 가장 높고 인구도 564만 명밖에 안 되는 싱가포르에서 확진자 중 40% 가까이 발생한 셈이다. <표 참조>

WHO의 팬데믹 선언 직후 중국에 비견되는 대량 확산이 동남아의 개도국에서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실제로 세계 4위의 인구대국인 인도네시아에선 확진자가 2만5000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미얀마에선 200여 명, 라오스 20여 명, 캄보디아에서 100여 명밖에 발생하지 않았다. 코로나19 사망자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한 명도 없다. 국경을 다닥다닥 맞대고 있는 지정학적 상황을 고려하면 코로나바이러스가 동남아 전역을 휩쓰는 게 시간문제처럼 보였지만 정말 선방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런 수치를 믿을 수 있을까? 의료 인프라가 취약하고 행정 시스템이 낙후된 동남아 지역이다 보니 먼저 의심부터 품게 된다. 실제로는 방역에 실패했는데 대외적으로 조작된 통계 수치를 내놓았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신뢰할 만한 데이터가 쌓이고 있다.
베트남의 경우 응우옌 쑤언 푹 총리가 일찍이 “4월 30일 해방기념일을 기점으로 코로나19를 극복했다”고 공식 선언했다. ‘성공적인 대처’도 아니고 ‘극복’이라니 ‘정신 승리’가 지나친 것이 아닐까. 동남아는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못하다는 편견을 잠시 거두면 숫자 이면의 진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코로나19 확산과 동남아 국가들의 대응

중국의 경우 코로나19의 진원지는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의 수산시장이었다. 12월 중순부터 확산되어 지난 2월 초엔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들어갔다.
동남아에서 가장 큰 고비는 지난 2월 말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있었던 이슬람 근본주의 집회 ‘타블리기 자맛’이었다. 모스크에서 2박3일간 함께 꾸란을 낭독하고 설교를 듣는 종교 행사에 동남아 전역의 무슬림 1만여 명이 참석했다. 참가자 중에는 27개국 출신의 외국인 1500여 명도 포함돼 있었다. 집회 참가자들이 각자의 나라로 돌아간 뒤 동남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확진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확진자들의 동선을 추적하던 각국의 방역당국에는 일제히 비상이 걸렸다.

우리나라의 경우 2월까지는 초기 방역에 성공했지만 3월 들어 대구 신천지 신도들을 중심으로 감염자가 급증해 확진자가 5000명을 돌파했다. 같은 시기에 동남아에서도 비상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진원지인 말레이시아가 제일 먼저 2주간의 자가격리 명령을 내렸다. 필리핀은 수도 마닐라와 루손 섬 전체를 봉쇄했고 라오스는 중국·미얀마와 오가는 국경을 닫아버렸다. 이에 비해 싱가포르, 브루나이, 태국은 행동 자제령만 발동했다.

동남아 각국이 개별적으로 방역 조치를 취한 셈인데 여러 나라가 국경을 잇대고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땅, 바다, 하늘의 다양한 루트로 국경을 넘는 게 가능해 어느 한 나라의 방역 조치만으로는 큰 효과를 내기 어렵다.
한 마디로 코로나바이러스의 왕성한 전파력을 고려하면 역내 집단 방역이 신속히 이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동남아의 개도국들은 의료 인프라가 부실하기 때문에 초기 방역에 실패하면 바이러스 확산 기세를 막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아세안을 컨트롤타워로 ‘공동전선’ 구축

동남아 국가들은 그때부터 아세안을 중심으로 방역 공동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코로나19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도 유럽연합(EU)도 해내지 못한 일을 아세안이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의 의심스런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동남아 각국은 쉽지 않은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세안의 리더십과 각국 간에 오랫동안 쌓아온 신뢰와 연대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아세안은 미소 냉전 시대에 동남아의 약소국들이 생존과 안전을 공동으로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위기의 순간에는 항상 회원국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1997년 외환위기가 태국·인도네시아를 시작으로 동남아를 강타했다. 당시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이들 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값진 교훈을 얻었다. 아세안은 당시 외화유동성 확보를 위해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에 합의했다. 한·중·일 3개국과의 통화스와프 및 아세안 회원국 사이 통화스와프로 구성되는 ‘스와프 네트워크’였다.
2004년 인도양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회원국들이 대규모 인적·물적 피해를 입을 땐 ‘재난관리 및 비상대응에 대한 아세안 협정’을 맺었다. 피해국에 구체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아세안 재난관리 인도지원조정센터(AHA Center)가 만들어졌다.

과거에 큰 위기가 닥쳤을 때 아세안이 제 몫을 했기 때문에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동남아 국가들은 아세안을 컨트롤 타워로 삼아 방역 공조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지난 1월 초 중국 우한에서 원인불명의 폐렴이 집단 발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아세안은 한 몸처럼 신속하게 움직였다.
동남아 지역의 질병·보건 문제를 다루는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아세안 보건개발 고위급 회의(ASEAN SOMHD)가 컨트롤타워가 됐다. 10개 회원국의 코로나19 발생 관련 정보는 아세안 긴급상황실 네트워트(ASEAN ECO Network)에 모두 취합되었다. 아세안 바이오디아스포라 가상 센터(ASEAN BioDiaspora Virtual Center)는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향후 방역 대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아세안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에 대처해왔는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아세안의 방역 정보 공유와 ‘아세안+3’

팬데믹 상황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부분은 국가 간 방역관련 정보의 공유다. 여러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경우 인접국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따로 또 함께 효과적인 대책을 세울 수 있다. 나라 전체를 봉쇄할 것이 아니라면 바이러스 유입 경로를 최대한 선제적으로 차단해야 하는데, 이웃 나라가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을 경우 방역 조치는 곧 난관에 부딪힌다.

전염병 공동 대처라는 명분이 있더라도 자국의 현황에 대한 데이터를 공개하기란 쉽지 않다. 자기네 치부를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확실한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 아세안은 회원국 간의 이해관계를 조율해 데이터 자율 공개를 끌어냈다.
동남아 국가들은 향후 아세안 차원에서 방역 물품, 개인방호용구를 공동으로 생산·분배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 어느 회원국이 원부자재를 대면 다른 회원국에서 제품을 생산한 다음, 그것이 필요한 회원국에 골고루 공급하는 방안을 의미한다.

어느 나라에 얼마나 공급할지를 결정하려면 코로나19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경제 규모가 큰 인도네시아에는 마스크를 100장만 공급하고 훨씬 인구가 적은 캄보디아에 1000개를 공급하겠다고 결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도네시아의 확진자가 2만5000여 명인 반면 캄보디아는 불과 125명이기 때문이다. 아세안 차원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굳이 데이터를 조작할 이유가 없어진다. 자승자박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공동 방역은 투명한 정보 공유라는 첫 단추를 잘 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재난 관리를 아세안 자체적으로 하는 것만으론 아직 부족하다. 아무래도 여러 분야에서 뒤처진 개도국이다 보니 방역 선진국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세안이 필요로 하는 것은 방역 선진국의 노하우와 의료 기술이다.
그래서 아세안은 지난 4월 중순 ‘아세안+3(한·중·일) 특별정상회의’를 개최했다. ‘아세안+3’는 동남아에 이해관계를 가진 한국, 중국, 일본이 아세안과 함께 상호 관심사를 교환하고 조율하는 협의체다. 아세안은 감염 예방 및 통제를 위한 물적·인적 지원을 요청했고 한·중·일 세 나라는 이를 수락했다.

세계화의 종언과 롤 모델으로서 아세안

우리가 아세안 10개국의 코로나19 대응에서 배울 교훈은 무엇인가. 바로 전 지구적 위기는 개별 국가의 힘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국제 공조가 유일한 방안이라는 의미인데 요즘 글로벌 차원에선 오히려 각자도생의 분위기다. 동서 냉전이 종식된 후 세계는 다자주의(multilateralism)로 재편되었고, WHO나 WTO 같은 국제기구는 다자주의의 산물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다자주의는 무력함을 드러냈다. 세계는 미중 중심의 양자주의(bilateralism)로 회귀하고 있다.

다자주의는 국가 간에 사람, 상품, 자본이 국가 간에 자유롭게 이동하는 세계화의 바탕이었다. 세계화의 둔화를 의미하는 ‘슬로벌라이제이션’(slovalization)이란 신조어를 만들었던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 ‘코로나19는 세계화를 사망하게 했는가?’(Has covid-19 killed globalization?)에서 팬데믹으로 인해 세계화가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미국과 중국을 필두로 세계 주요국들이 자국 중심주의로 선회한다면 코로나19로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인류는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 아세안의 움직임은 주목할 만하다. 동남아 국가들은 여전히 아세안이라는 역내 공동체에 의지하고 있다. 아세안은 유명무실한 국제기구가 아니라 국제 공조가 필요한 상황이 닥치면 컨트롤 타워의 역할을 해낸다. 아세안은 여전히 국제적 협력·연대가 가능하며 효과를 낼 수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남남서로 진로를 돌리자

다행스럽게도 아세안이 지향하는 바는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통상 전략과 맞아떨어진다. 향후 미중 양국이 또 다시 경제 분야는 물론 국제정치·군사안보 분야에서 패권 경쟁을 벌이면 두 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나라로선 어느 한쪽 편에 설 것을 강요당하게 된다. 냉전의 희생양이었던 우리는 또 한 번 신(新)냉전의 포로가 될 가능성 또한 높다.

국제 질서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충분히 감지하고 문재인 정부는 일찍부터 신남방 정책을 추진해 동남아, 인도에서 새로운 대안을 찾아왔다. 지난해 아세안 10개국과 한·중·일, 호주, 뉴질랜드, 인도 등 16개국이 참여하는 메가 FTA인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CEP)이 체결됐을 때 우리 정부가 적극 참여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코로나19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치료제와 백신이 만들어질 때까지 앞으로도 몇 년간 인류를 괴롭힐 것이다. 한 세기 전에 지구를 휩쓸었던 스페인 독감의 사례가 보여주듯 2차, 3차 대유행도 우려되고 있다.

한국은 초기 방역에서 어느 나라보다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축구 경기로 치면 전반전을 막 끝난 것이다. 경제위기 극복, 2차 대유행 예방이라는 후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후반전에도 전반전만큼 잘 해낼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코로나19 방역을 둘러싼 국제 공조에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주도적 역할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동남아 국가들은 역내 협력 플랫폼인 아세안을 통해 새로운 협력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한국이 이 흐름에 동참할 이유는 충분하다. 미중 신냉전 시대에 대한민국 호(號)의 항로를 남남서 방향으로 틀어야 할 이유다.


김정호 필자

미국에서 사회윤리와 국제정치를, 인도네시아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현재 한국에서 인문교양 온라인교육 회사인 ‘알투스인’을 운영한다. 동시에 인도네시아에서는 한국 관련 콘텐츠를 공급하는 회사를 운영한다. 미중 G2 대립이 격화되는 시대에 대한국의 활로를 동남아에서 찾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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