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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석의 ‘과학과 세상 사이’] 한국은 문과형 지식인 사회…이젠 과학과 만나야 한다

by | 2020년 5월 29일 | 정책, 최준석의 '과학과 세상 사이'



지난해 말 과학책을 쓰고 과학 작가로 데뷔한 뒤 강의에 좀 불려 다녔다. 그 때마다 참석자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사람 핏속에 철분이 있다. 이 철분, 즉 철(Fe) 원소는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이 질문을 던지면 좌중은 조용해진다. 움직임이 없어진다. 생각하고 있다는 표시다.
나는 잠시 기다린다. 그리고 누구도 말을 하지 않으면 다시 묻는다.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요? 포스코 용광로에서 왔나요? 그러면 일부 사람이 웃는다.
그러나 이게 답이 아니라는 건 그들은 안다. 주기율표에 나오는 원소들은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제대로 답을 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내가 만난 그들은 거의가 문과형 지식인들이었다. 현대과학의 성과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관심이 없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아시는지? 답은 별이다.

철이 별에서 만들어진다는 걸 소개한 건, 나와 우주가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내 몸을 이루는 원소들이 도대체 별에서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경로로 해서 지금 내 몸 안에 있는 것인가를 알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주의 역사, 별 탄생과 죽음의 역사가 우리 몸에 다 생생히 남아 있다. ‘내 안의 우주’가 얼마나 신비로운가?

프랑스의 철학자 오퀴스트 콩트(1798~1857)는 철학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런데 과학사에도 그가 이름을 한 줄 올린 걸 과학책을 읽고서야 알았다.(마커스 초운의 <마법의 용광로>) 명예로운 이름이 아니고, 부끄럽기까진 않지만 어쨌든 자랑스럽지는 않은 거다. 콩트는 저 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인류는 결코 알아낼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별에 가서 확인해볼 수 없으니, 별 내부 상황이 어떨지 지구에 앉아있는 인류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그럴 법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아서 에딩턴(1882~1944)이라는 사람이 별 내부의 물리학을 알아냈다. 별 내부를 들여다보지도 않고, 자신의 머리로 항성 내부의 일을 설명해냈다.

에딩턴은 20세기 초반 사람이다. 그런데 2020년의 한국인 성인(주로 40대 이상)은 20세기 초반의 연구 성과를 모르고 있다. 수소폭탄, 핵융합, 핵물리학 원리가 모두 이 안에 있다. 이 정도는 과학상식으로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 한국의 문과형 지식인은 과학 발전에 등 돌리고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자연에는 무관심한 채 아침저녁으로 마음만 갈고 닦았던 조선의 지식인과 같다. 조선이 자연에 관해 무지했다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운 게 있나 싶다. ‘정의’는 입으로만 떠들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또 한 명의 영국인을 만나보자. 물리학자이자 영문학자인 C. P. 스노우(1905~1980)다. 그가 쓴 <두 문화>라는 책이 있다. 책 부제는 ‘과학과 인문학의 조화로운 만남을 위하여’다. 책 제목의 ‘두 문화’는 과학과 인문학을 가리킨다. 스노는 “두 문화가 서로 만나지 않는다”고 1959년에 낸 이 책에서 말한다. 그는 과학자이고 인문학자인 독특한 배경을 갖고 있어, 양쪽 지식인 세계의 분위기를 잘 안다. 그렇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스노우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현대물리학의 위대한 체계는 진보한다. 그런데, 서구의 가장 현명하다는 사람 대부분은 물리학에 관해 신석기 시대의 선조들과 같은 통찰력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당시 영국의 문과형 지식인 몇몇에게 열역학 제2법칙을 설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반응은 냉담했고, 또 부정적이었다. 그는 ‘당신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은 일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과 맞먹는 과학의 질문을 던진 셈이었다. 과학에서 열역학 제2법칙은 셰익스피어 작품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기본 상식이다.

21세기 초 한국의 지식인에게 ‘열역학 2법칙을 설명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면 어떨까? 이건 너무 쉬운 질문일까? 그렇다면 이런 걸 묻고 싶다. 당신은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를 아는가? 두 가지를 구분해 설명할 수 있는가?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는 현재 물리학자와 천문학자의 핫 토픽이다. 암흑물질이 뭔지를 발견하면 바로 노벨 물리학상이다.

며칠 전에 들은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BTS)의 책 이야기에도 나는 아쉬웠다. BTS의 한 멤버가 언급한 덕에 그 책이 하루 새 1000권이 팔렸다는 즐거운 소식이었다. 해당 책은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이라는 제목. 이 소식을 알게 된 건 그 출판사(동아시아) 대표가 페이스북에 자기에게 닥친 행운을 자랑하는 글을 보면서다.
그는 관련 기사의 링크를 걸어놓았고, 나는 그걸 따라가 매일경제신문 사이트를 열어보았다. 기사에는 ‘방탄소년단 앨범 관련 도서’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BTS가 팬들에게 알려온 책 리스트가 나와 있다. 모두 12권.
그런데, 과학책은 한 권도 없다. 모두가 소설, 철학, 인문, 아니면 자기계발서다. BTS는 글로벌 시장을 흔들고 있는 아이돌 그룹이지만, 이 같은 독서에 관해서는 그다지 글로벌하지 않았다.

한국인의 인문학 도서 편식 혹은 과학책 외면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5월 20일에 발표한 ‘2020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 사업 선정 결과’에서도 확인된다. 이 사업은 우수한 책을 구매하여 출판계와 저자를 지원하고자 한다. 이번에 모두 137권을 선정했는데 이중 ‘과학’은 단 6권이다. ‘인문교양’은 42편, ‘문학’은 39편, ‘사회과학’은 9편 등이다. 과학책 출판 지원이 제일 작다.

‘인문교양’이 무엇인가? 인문교양 못지않게 이 시대에 우리가 필요한 건 ‘과학교양’이다. 달리 말하면 ‘과학교양’이 바로 ‘인문교양’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고? ‘인간의 조건’을 더 잘 설명하는 건 과학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셰익스피어와 같은 작가가 본능적으로 인간의 조건을 잘 설명했으나, 이 시대에는 그걸 과학자가 더 잘한다. 한 생물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순수철학은 고상한 목적과 역사를 지녔지만, 인간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포기한 지 오래다. 그것은 철학자에게 고르곤(그 얼굴을 쳐다보면 돌로 변한다는 그리스 신화 속의 괴물)이었다. 최고의 사상가조차 응시하기 두려워하는 얼굴이다. … 철학자는 과학이 아직 진출하지 않은, 더 다루기 쉬운 분야들로 이주했다. 지성사, 의미론, 논리학, 수학기초론, 윤리학, 신학, 그리고 가장 돈벌이가 되는 개인의 생활 적응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철학계는 이러한 다양한 시도를 통해 번창하고 있다. 그러나 크나큰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과제는 과학에 내맡겼다.”(하버드대학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책 <지구의 정복자>)

몇 년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사피엔스>가 있다. 이 책이 성공한 이유는 많겠지만 나는 사학자인 유발 하라리가 과학과 만났기 때문이라고 본다. 과학의 연구 성과를 공부하고 폭넓은 시야를 보여줬기에 전통적인 사학자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류가 왜 성공했는가’에 대한 성공작을 쓸 수 있었다. 책 곳곳에 그가 과학을 공부했다는 표시가 있다. 가령 이런 거다. 책 모두에 나오는 역사 연대표의 첫 줄은 ‘135억 년 전. 물질과 에너지 등장, 물리학 시작’이고, 이어 ‘38억 년 전 생명체 등장. 생물학 시작’이 나온다.

<사피엔스>의 첫 장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동물’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역사의 진로를 형성한 것은 세 개의 혁명이었다. 7만 년 일어난 인지혁명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1만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전 속도를 빠르게 했다. 과학혁명이 시작한 건 불과 500 년 전이다.”
역사학자 책에서 ‘인지혁명’, ‘과학혁명’과 같은 단어를 보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를 내놓기 전에 쓴 책으로는 <대단한 작전>,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이 있다. 이 책들은 한국에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사피엔스>만큼 시선을 끌지 못했다. ‘과학’이라는 시선을 더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그냥 역사책인 것이다.
반면 <사피엔스>의 후속작 <호모 데우스>는 다르다. <호모 데우스>는 유발 하라리의 과학 독서의 흔적이 <사피엔스>보다 더 많이 보인다. 이 책 역시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다.

예술가가 과학을 만나면 그들에게 새로운 작품세계가 열릴 수 있다. 빅 히스토리(Big History)의 긴 시간(deep time)은 예술가의 예민한 감각을 자극할 수 있는 소재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음악가가 생물학을 공부하면 가령 중생대 교양곡, 고생대 교향시를 쓸 수 있을 거라는 식으로 말한 바 있다.
나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프랑스 화가 고갱은 타히티에 가서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1897년)란 대작을 남겼다. 고갱이 표현한 건 그 당시 시대인들이 갖고 있던 ‘빅 퀘스천’에 대한 답이었다.
그리고 이 시대의 화가는 이 시대의 과학적 발전에 맞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그려야 한다.

한국 사회에도 과학에 다가가는 인문학자 없는 건 아니다. 철학자 김용규 선생이 과학을 공부하는 눈에 띄는 인문학자다. 그의 책 <생각의 시대>를 보고 놀랐다. 이 책은 ‘지식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생각의 시대다’라면서 오래된 생각의 도구를 소개한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인이 만들어낸 도구를 설명하면서, 신경과학자 제럴드 에덜먼(1972년 노벨 생리의학상, <뇌는 하늘보다 넓다> 저자), 찰스 다윈, 인지과학자 조지 레이코프(<몸의 철학> 저자), 생물학자 콘라트 로렌츠(1973년 노벨 생리의학상, <솔로몬의 반지> 등 저서)와 같은 과학자 이름을 줄줄이 언급하고 있다.
그 결과 풍요로운 책이 되었다. 시대의 학문 발달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과학의 성과를 따라가지 않은 인문학자들의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엉뚱한 소리가 책에는 없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속에서 미‧중 대립은 격화되고, 국경선은 흐려지는 조짐이 없다. 국가 간 경쟁은 과학기술의 힘과 그걸 창출해내는 사회 구성원의 지지에 달려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에 과학을 아는 책임 있는 문과형 지식인이 필요하다. 인문학 지식인들 역시 과학의 핫 이슈가 무엇인지 따라가야 하고, 자연과학 책을 펴들어야 한다. 재미있고 유익한 교양과학서가 서점에 수 없이 나와 있다. 내 책도 그중의 하나다. 


최준석 과학 작가/주간조선 선임기자

<나는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웠다>(2019년)를 썼다. 과학책을 읽다가 과학책에 빠져 과학책을 썼다. 그래서 과학 작가가 되었다. 신문사 기자, 주간지 편집장으로 일했다. 현재는 주간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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