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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 칼럼] “좋은 유럽인은 죽었다”…한국은 변방 아닌 ‘제1세계’?

by | 2020년 4월 29일 | 국제


코로나19 위기는 반년도 안 돼 지구촌의 사고와 행동을 바꾸고 있다. 경제성장 위주의 가치관과 신자유주의 질서가 후퇴하고 가족, 공동체, 국가의 역할이 다시 부각된다. 코로나19는 한 국가, 한 지역의 시스템과 문화, 라이프스타일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됐다.

코로나19로 인해 동서양 시각 차이는 오랫동안 얼어있던 빙하의 바닥이 드러난 것처럼 곳곳에서 확인된다. <피렌체의 식탁>은 스위스에서 9년째 살고 있는 김진경 필자의 글을 싣는다. 필자는 한국에서 일간지 기자로 일하다 스페인 출신의 남편과 결혼해 2011년부터 스위스 취리히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30대 한국 여성 눈에 비친 유럽인들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양쪽을 비교하는 흥미로운 글이다.
<피렌체의 식탁>은 이와 관련해 김강기명 필자가 쓴 “유럽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4월 7일), 한승동 필자의 “코로나19 팬데믹, 서방 패권 소멸의 분기점”(4월 15일)을 게재한 바 있다.
[편집자]

#교육 과정에 아시아 역사·언어 부재
 유럽인 눈에 비친 아시아, 여전히 흐릿
#연대 외치며 방역규칙 어긴 유럽인들
 ‘성숙한 어른’ 아닌 ‘굼뜬 어른’ 가까워 
#남유럽 재정위기 때도 서로 손가락질
  개방성·연대 아닌 각자도생 예고편
#시민 연대와 개인 자유의 양립 위해
  한국도 새로운 문제설정 고민할 때

이틀 전 집에 반가운 소포가 도착했다. 주스위스 한국대사관에서 보낸 이 소포 안에는 KF94 마스크 24장이 들어있었다. 현재 한국산 마스크의 해외 수출이 금지됐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재외 동포에게 보내는 물량을 예외적으로 허용했다. 한국 국적자라면 1인당 8장까지, 1장에 3스위스프랑(약 4000원)을 내고 구입할 수 있었다. 우리집에선 한국 국적자인 나와 한국-스페인 이중국적자인 아이 둘이 쓸 것을 구입했다. 스페인 국적자인 남편 몫은 없었다.
남편이 말했다. “제1세계에서 보급품이 도착했네. 한국인이라서 좋겠다.”
스위스에선 코로나19 사태 초기부터 마스크, 손세정제 같은 의료 물품을 구할 수 없었고, 최근에야 마스크 생산 기계 2대를 구입해 국내 생산을 시작했다. 슈퍼마켓에서도 주요 식료품이 동이 났다. 

남편이 쓴 ‘제1세계’라는 표현은 흥미롭다. 미국과 유럽 선진국의 시민들이 코로나19 사태 이전까지 한국을 보던 시각은 제1세계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2009년 남편의 고향인 스페인 발렌시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의 친구가 내게 했던 질문을 잊을 수가 없다.
“한국에선 다들 지푸라기로 만든 집에 살지?”

#아시아·한국에 대한 고정관념

교육 수준이나 외국 경험에 관계없이, 많은 유럽인은 아시아에 대해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갖고 있다. 나에겐 65세 스위스 남성인 친구가 있는데, 한번은 그가 내게 ‘횡단보도를 건널 때 신호를 잘 지키냐’라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럼요. 잘 지키죠.”
“보는 사람이 없어도요? 오는 차가 없어도?”
“네, 지켜요.”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박장대소를 했다. 테이블까지 치며 웃던 그가 말했다. “역시, 전형적인 아시안이야(Typische Asiatin)!”

그가 웃는 것도, 내 대답에 ‘전형적인 아시안’이라는 반응을 보인 것도 나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은 한국이나 스위스나 비슷하게 많고, 운전자가 신호 안 지키기로는 한국이 훨씬 더 심하다.
“그게 왜 전형적인 아시안이라는 거예요?”
내 물음에 그가 말했다.
“규칙을 잘 따르잖아요, 아시안들은.”
그는 틀렸다. 나는 규칙을 따르려고, 또는 누가 볼까 봐 무서워서 신호를 지키는 게 아니다. 몇 초 앞서 가자고 굳이 위험을 무릅쓰거나, 다들 지키는 신호를 혼자 어기고 잘난 체하듯 앞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면 ‘찌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전형적인 것은 내가 아니고 그다. 유럽인이 아시안에 대해 갖고 있는 스테레오 타입은 너무나 구조가 뻔한 옛날 얘기 같아서 이제 지겹지만, 한번 정리해보기로 한다.

‘학교에서는 주입식 교육을 받고 다들 수학을 잘한다, 창의적 문제해결엔 약하다, 술 못 마시고 놀지도 못한다, 돈을 밝힌다, 남자들은 ‘남성성’이 떨어지고 정력이 약하다, 그런 남자들이 집에선 여자들을 지배한다, 이 순종적인 여자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성형수술이나 미용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몸매가 좋고 예쁘다, 음식은 다 맛있는 건강식이다, 환경 보호엔 관심이 없다, 자연에서 하는 스포츠에도 관심이 없다, 강압적인 정부에 순종한다, 법이나 규범을 잘 지킨다, 나이 많은 사람을 공경하고 예의가 바르다, 여성 아동 장애인의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K팝 같은 대중문화가 끝내주게 발달했다, 그런데 그것은 대개 기획사에서 노예처럼 훈련해 나온 결과다.’
사족이지만, 물론 모든 유럽인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 스테레오 타입의 반대편에는 유럽인들이 스스로에 대해 가진 스테레오 타입이 존재한다.

#유럽인의 눈에 비친 아시아

아시아유럽재단(ASEF)은 2012년 <유럽의 눈에 비친 아시아: 부상하는 거인의 이미지(Asia in the Eyes of Europe: Images of a Rising Giant)>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유럽연합(EU)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8개 유럽 국가에서 일반 대중, 미디어, 전문가의 눈에 비친 아시아의 이미지를 분석했다. 나중에 같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는데, 이 책 서문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아시아는 아마도 (유럽인들에게) 가장 신비로운 대륙일 것이다. 유럽의 정신적 세계지도에서 아시아는 상대적으로 흐릿하게 잘 안 보이는 부분이다. 민족, 종교, 정치 집단의 엄청난 다양성이 그 이유 중 하나다.”

유럽인들이 아시아와 관련해 떠올리는 키워드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됐다.
‘멀다(far away)’, ‘이국적’, ‘가난하다’, ‘저가 무역’, ‘인구 과밀’, ‘돈’, ‘개발 중(developing)’, ‘홍수’, ‘쓰나미’, ‘쌀’, ‘향신료’.
이런 키워드가 현대 한국 사회를 얼마나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왜 유럽인의 눈에 아시아는 흐릿하게 보이는 걸까.

국가가 ‘표준 시민’을 양성하는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 의무교육의 내용을 비교해보자. 한국인인 나는 학교에서 한국사를 시작으로 동양과 유럽, 미국의 역사를 모두 배웠다(배워야 했다). 이에 비해 남편은 스페인과 유럽의 역사에다 미국 초기 역사만을 배웠다. 스페인에서 미국 초기 역사를 중시하는 이유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이 스페인사람으로 추정되는 콜럼버스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스위스도 다르지 않다. 스위스의 인문계 고등학교인 김나지움에서 학생들이 아시아에 대해 배우는 내용은 유럽과 접점이 있는 부분으로 제한된다. 알렉산더 대왕과 칭기즈칸의 정복 루트, 아시아까지 이어진 마르코 폴로의 탐험 경로, 남부 스페인을 점령했던 무슬림 세력, 아편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역할 등이 그것이다. 그 밖의 내용은 유럽인에게 알 필요가 없는 내용이다. 무엇보다, 많은 유럽인에게 아시아란 ‘지중해에서부터 일본에 이르는 거대한 덩어리’로 인식된다.

교육 과정에 아시아의 역사나 언어가 거의 포함되지 않는 곳에서, 아시아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 방식으로 구축될까. 전통적인 루트는 일본 애니메이션, 중국 무술 영화, 유럽 전역에 널린 저가 중국식당, 일본·한국의 전자제품, 중동 전쟁이나 북한 독재자 등을 다룬 국제 뉴스다. 요즘은 한국 드라마와 K팝도 큰 역할을 한다. 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하나 역시 균형 잡힌 루트라고 보기는 어렵다.

#‘성인 유럽-아동 아시아’라는 프레임

‘우리는 그들을 알지만 그들은 우리를 모른다’는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이유는,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다시 등장한 ‘성인 유럽 vs. 아동 아시아’라는 오래되고도 논쟁적인 프레임이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강화돼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는 한국의 재빠르고 효율적인 대응에 경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프라이버시를 포기하고 권위주의 정부에 순종하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이라고 꼬리를 단다. 다른 어떤 가치보다 개인의 자유를 최고로 여기는 문화, 그리고 그 가치가 이상적으로 실현되는 곳은 유럽이라는 자부심이 어우러진 반응이다.

이같은 반응은 미디어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양한 국가 출신이 섞여 있는 우리 동네 주민의 와츠앱(WhatsApp) 채팅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스위스 전국의 학교가 문을 닫았는데도 동네 놀이터가 아이들로 북적이자 어느 일본인 주민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다섯 명 이상 모여 노는 건 피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독일인 주민이 ‘실망스럽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주민들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졌다. 일본인은 결국 ‘분란을 일으켜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독일인은 아이를 계속 놀이터에 내보냈다.
이후 한 달이 넘도록 이 채팅방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와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분명 자유민주주의의 기수는 서구 세계다. 경제적 번영부터 소수자 인권까지, 그들이 먼저 이루었고 우리가 따른 것이 맞다. 문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가 거의 따라잡거나 이미 판세가 바뀐 영역이 있는데도 그들에겐 관련 정보가 업데이트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번 사태는 전에 없었던 새로운 위기다. 새로운 대응 방식이 요구되는데도 유럽은 과거 자신이 자유민주주의의 선구자 역할을 할 때의 모습에 여전히 기대고 있다.
유럽에서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한 이후 소셜미디어에는 ‘연대(solidarity)’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했다. 주로 발코니에서 정해진 시간에 의료진에게 박수를 보내거나, 촛불을 켜거나, 작은 콘서트를 여는 사진과 함께 쓰였다. 사람들은 연대를 말하면서 방역 규칙을 위반하고 거리로 나갔고 놀이터는 여전히 북적였다. 그들이 말하는 연대는 20년 전 EU가 만들어질 때에 머물러 있는 개념으로 보인다.

과연 유럽 시민은 성숙한 어른이고, 아시아 시민은 엄마(정부)의 자상한 도움이 필요한 아동인가.
예를 들어 보겠다. 스위스에서 여성이 출산을 하면 14주의 유급 출산휴가가 주어진다. 놀라운 건 이것이 2005년에야 비로소 법적으로 보장됐다는 점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스위스는 직접 민주주의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국가다. 의회에서 입법이 되어도 국민 중 누군가 이에 반대한다는 내용으로 100일 안에 5만 명 이상의 서명을 모으면 국민투표(referendum)에 부쳐져 전 국민의 의견을 물을 수 있다. 여성 출산휴가 관련법은 1945년 이후 4번에 걸쳐 국민투표에 부쳐졌다가 모두 부결됐고, 2005년에야 어렵사리 통과됐다.
남성 출산휴가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올해 9월 남성에게도 2주의 유급 출산휴가를 주자는 법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질 예정이다. 출산휴가가 스위스에서 이렇게 난항을 겪는 이유는 유급 출산휴가가 생기면 국민 세금이 늘어날 것으로 생각해 아직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숙한 시민이 스스로 판단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까.

또 다른 예. 스위스의 기차역과 트램역에는 한국인인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승강장 바닥이나 안내 스크린에 저상(低床)칸이 어디인지 표시가 없다는 점이다. 기차와 트램에는 대개 저상칸과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칸이 섞여 있는데, 전체 차량의 길이나 진행 방향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승강장 어느 지점에 저상칸이 멈출지 알 수가 없다.
유모차를 밀고 다니던 시절엔 그게 큰 문제였다. 자주 이용하는 동네 역에선 기억을 해뒀다가 타면 되지만, 낯선 곳에서는 승강장 중간에 서 있다가 기차나 트램이 들어설 때 저상칸이 있는 쪽을 보고 허겁지겁 뛰어야 했다.

유모차 미는 사람이나 휠체어를 탄 사람에겐 필수적인 정보이고, 안내 스크린에 표시를 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안하는 것일까. 이 질문을 여러 스위스 친구들에게 하면서 ‘한국의 지하철 승강장에는 휠체어 칸 입구에 표시가 돼 있고, 지하철 앱을 설치하면 내릴 때 환승 통로로 바로 연결되는 칸까지 알 수 있다’고 설명하니 다들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표시를 하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발상 자체를 못한 것이다. 이런 서비스를 ‘한국 정부가 엄마의 마음으로 아동 수준의 시민을 돌보는 것’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기술 발달을 활용한 편의 제공’이라고 봐야 할까.

#유럽인은 ‘성숙한 어른’ 아닌 ‘굼뜬 어른’

스페인은 코로나19 확진자가 6000명을 넘어선 3월 13일 이후 국가경계령을 발동했다. 시민들은 장을 보거나 병원에 가는 등의 필수불가결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리 통행도 할 수 없다. 지난 3월부터 여름 날씨가 이어지고 사교 모임부터 각종 축제까지 야외 활동이 많은 나라에서 6주째 락다운(lockdown, 제재)이 이어지다 보니 부작용도 많다.
개를 데리고 산책시키는 게 허용되는 점을 악용해 인터넷에서 ‘돈 받고 개를 빌려준다’는 글이 넘쳐났고, 하루에 열 번 넘게 장을 보러 나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스페인 정부는 이 때문에 외출할 때 시간과 목적을 명시한 문서를 갖고 나가도록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정부 조치를 위반해 벌금을 선고 받은 케이스가 지금까지 74만 건을 넘는다. 전국적 락다운이 시행된 프랑스, 이탈리아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스페인의 소셜미디어에는 특이한 규정 위반 케이스가 종종 올라오는데, 그걸 보면서 내 눈을 의심했다. 고층아파트 발코니에서 자기 집 안에 있던 옷장, 냉장고 등을 아래로 떨어뜨려 주차된 차를 파손시키는 사람, 속옷 하나 걸치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텅 빈 거리를 뛰어다니다 경찰에 붙잡힌 젊은 여성, 술을 마신 뒤 차를 몰고 근처에 주차돼 있던 경찰차를 반복해 들이받는 남성이 등장했다. 강제적, 전면적 락다운 조치가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아마도 락다운이 끝나 봐야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발코니에서 박수를 치건, 벌거벗고 거리를 헤매건, 사상 초유의 락다운 현실에서 유럽 사람들이 방향을 잃고 무력감을 느끼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그건 중국에서 바이러스가 퍼진 지 두어 달이 지나도록 손 놓고 대비를 하지 않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국민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해버린 무능한 정부의 탓이 크다.
왜 유럽이 두어 달의 황금 시간을 낭비했는지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있다. 나는 그 이유가 유럽은 오랫동안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데 익숙했고, 중국에서 시작된 바이러스를 ‘그들만의 문제’로 규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한국에선 바이러스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전부터 진단키트를 개발하고 드라이브 스루 방식 같은 확산 방지책을 실시했다. 집에 머물기, 자발적 동선 공개 등 유럽과 다른 방식으로 한국인들이 보여준 ‘연대’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역사가 아니라 테스트라는 보건의료 선진 기술과 투명한 정보 공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대규모 테스트와 매일 두 차례 이뤄지는 정부의 브리핑 덕분에(스위스는 상황이 가장 심각할 때도 주 2회만 브리핑을 했다) 한국인들은 바이러스의 전파 경로와 예방조치, 행동요령에 대해 준(準)전문가가 됐다.

코로나19 사태에서 내가 새롭게 발견한 두 사회의 차이점 중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소셜미디어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행태였다. 소셜미디어 상의 내 친구는 3분의 2가 한국인, 3분의 1이 외국인(대부분 유럽인)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아시아에서 출발해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번지는 동안 유럽인들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평소보다 줄어든 포스팅 내용의 대부분은 ‘저녁 O시에 다 같이 발코니에서 박수를 치자’, ‘이럴 때일수록 정신적 안정이 중요하다’, ‘집에서 아이들과 시간 보내는 방법’과 같은 것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인들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전염성, 감염 경로 같은 특징에 대한 전문적인 포스팅을 엄청나게 해댔다. 전 세계 언론 기사, 전문가 인터뷰, 최신 논문 등이 따끈따끈하게 퍼져나갔다. 왜 손 씻기가 가장 중요한지, 마스크의 효능은 어디까지인지, 집단 면역이 왜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페이스북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었다. 김연아 선수 덕분에 전 국민이 피겨스케이팅 해설자가 됐던 때가 떠올랐다.

어두운 면도 있었다. 초기에 집단 감염이 발생했던 신천지 신도들을 대상으로 한 차별부터, 2주 자가 격리 대상인 해외 입국자들에 대한 유튜버들의 마녀사냥 식 감시까지, ‘전체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는 희생시킬 수 있다’는 무의식 내지 공감대가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한국 사회로선 공공 이익과 개인 자유가 대립할 때 어느 선에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수 있는지 활발한 토론이 이뤄질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냥 흘려보냈다고 생각한다. 토론을 앞장서 이끌어야 할 정치 리더와 정당들이 제 역할을 전혀 해내지 못했다는 점도 아쉽다. 시대에 뒤떨어져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정치인들, 거리두기 지침을 잘 지키며 성공적으로 총선을 치러낸 시민들 사이의 간극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 모순이다.

#‘좋은 유럽인’은 죽었다

한국과 유럽, 두 사회의 차이를 비지니스 세계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유럽이 다국적기업이라면 한국과 몇몇 아시아 국가는 스타트업이라 할 수 있다. 다국적기업들은 그간 쌓은 실력으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지만 기민함이 떨어져 위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스타트업은 같은 목표로 뭉친 사람들이 재빠르게 시장 변화를 읽고 대응한다. 잘되면 대박이고, 안되면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한국은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쪽박을 찼다가 이번에 대박을 터뜨린 스타트업이다.

다시 ‘성인 유럽 vs. 아동 아시아’ 프레임으로 돌아가 보자. 유럽이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겪고 성인이 된 건 맞지만, 여전히 황금기를 구가하는 성숙한 어른인 건 아니다. 오랫동안 운동을 하지 않은 굼뜨고 둔감한 어른이라는 비유가 더 맞을 것 같다. 이건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2010년 남유럽 재정위기 전부터 감지된 변화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유럽, 미국, 아시아 국가들을 모두 같은 자리에 세워 놓고 객관적 비교를 가능하게 했다. 덕분에 우리는 유럽을 보는 눈에서 장막을 한 꺼풀 벗겨낼 수 있었다.

코로나19 사태의 첫 번째 라운드(바이러스 확산 방지)에서 유럽 전체의 연대는 실종됐다. 모두가 국경을 닫아 걸고 각자도생에 전념했다.
유럽정책연구센터(CEPS)는 <COVID-19 위기에서 유럽연합 회원국의 협력> 보고서에서 ‘(코로나19 사태는) 위기 대응이라는 면에서 유럽연합이 맞닥뜨린 가장 큰 시험대다. ‘통합된 유럽’의 조종(弔鐘)이 울렸다는 시각도 있다’고 전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의 가장 큰 피해국인 이탈리아, 스페인은 EU 회원국에게 ‘버림받았다(abandoned)’고 느끼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에선 EU에 대한 회의주의(Eurosceptic)가 증폭되고 있다.

‘좋은 유럽인(Good European)’이라는 표현이 있다.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수호하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함께 연대할 때 최고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유럽인’ 정도의 의미다. 이 표현의 저작권은 니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생전에 그가 즐겨 쓰던 표현이고, 니체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엔 ‘저는 나쁜 독일인일지라도 좋은 유럽인이고 싶습니다’라는 부분도 있다. 인종주의에 반대하며, 여러 국가와 민족이 자발적 연대를 이룬 유럽이야말로 이상향에 가까운 곳이라고 니체는 생각했다.

유럽 국가의 개방성과 연대를 강조한 니체의 저작들이 그의 사후에 짜깁기돼 히틀러의 나치 체제 하에서 선동용 문서로 이용됐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남유럽 재정위기 때 메르켈, 캐머런 같은 EU 국가의 수장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좋은 유럽인’이니, ‘나쁜 유럽인’이니 하면서 서로 손가락질했다는 점도 아이러니다.
어쩌면 니체가 생전에 유럽 바깥으로는 한 발짝도 나간 적 없이 ‘좋은 유럽인’이라는 이상을 가졌을 때 이 같은 아이러니는 예견됐을 수 있다. 코로나 사태에서 ‘좋은 유럽인’이란 차라리 반어적 표현으로 들린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문제설정(problématique)이 필요하다. ‘어떻게 유럽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유효기간을 상실했다.
‘코로나 시대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코로나 시대의 시민 연대와 개인 자유는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는 여전히 변방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김진경 필자

한국에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미국에서 만난 스페인 출신의 남편과 2011년부터 스위스 취리히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한국 및 스위스 매체에 문화 다양성(cultural diveristy)에 대한 글을 쓴다. 여전히 정체성을 고민 중이고, 심리적 이방인의 새로운 시각을 글에 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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