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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석 칼럼] 인문학에 너무 빠져 있다, 우리는!

by | 2020년 4월 24일 | 국제, 정책


#그리스신화 나르시시스트처럼
  인문학은 인류의 집단 자기도취
#BC 5세기 ‘축의 시대’ 현자들
  폭력 없애기 위해 공감‧자비 강조
#
동식물의 일상화되고 강요된 죽음  
  우리 입에 들어갈 식량으로만 취급
#21세기는 ‘더불어 인문학’ 시대
  지구 생태계로 공감 대상 넓혀야

내가 어려서 읽은 계몽사의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에 ‘그리이스 신화’가 있었다. 그 ‘그리이스 신화’ 속 나르시시스트 이야기가 기억난다. 나르키소스라는 사람이 우물에 비친 자기의 아름다운 모습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그 우물에 빠져죽었다고 했다. 그 대목에서 무척 의아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그렇다고 그게 자살할 정도인가 해서 납득되지 않았다.

수십 년이 지나서 나르시시스트라는 게 무엇인지를 나는 확실히 알았다. 나, 그리고 인류는 자기 사랑에 도취되어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접하게 되었다. 바로 ‘셀카’다. 셀카를 끝없이 찍어대고, 그걸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SNS에 자기 얼굴 사진을 큼지막하게 올리는 사람을 보라. “내가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야. 너희도 좀 봐”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도 내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지만 자기 얼굴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올리는 사람은 나보다 더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다. 나르시시스트란 말을 만든 고대 그리스인이 존경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시대에 인간의 심리를 어찌 그리 꿰뚫어 보았을까,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셀카가 사람 개인의 자기도취 수단이라면, 인문학은 인류의 집단 자기도취가 아닐까 싶다. 자신과 남을 잘 알면 세상살이를 더 잘할 수 있다는 게 인문학의 접근법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는 개인이 모여 만든 인간 사회를 더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21세기 두 번째 밀레니엄까지는 이 말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 번째 밀레니엄에 접어든 지금, 내가 보기에는 현재의 인문학은 구태의연하다. 더 이상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약발이 떨어졌다. 변신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즉 거기에는 인간만 있다. 인문학의 우주는 인간 중심으로만 돌아가고, 인간이 그 구성원인 지구 생태계를 보지 못한다.

지구 생태계를 인간은 착취할 대로 착취해, 인간을 위해 뜯어고쳤다. 많은 생명체가 살아갈 공간을 잃었고,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기껏 동물원이나 그보다 좀 형편이 나은 국립공원에 살고 있을 뿐, 자연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그 같은 생태계 급변에 따른 미생물의 반응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 과다 배출한 이산화탄소와 같은 온실가스는 지구를 온실로 만들어가고 있고, 기후 급변을 초래할 가능성이 많다고 지구환경 과학자들은 연이어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목을 조이는 현재의 생활 방식에 제동을 거는 데 실패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알리는 북소리를 잘 듣지 못하고 있고, 우리 자신에게만 푹 빠져있다. 그 한 증거는 서점에서 인간 현상 관련 책(정치, 경제, 사회학 포함)만 줄곧 사보고 있다는 것이다.

카렌 암스트롱이라는 영국 종교학자가 있다. 그의 생각을 좋아해서 그가 쓴 책 <신을 위한 변론>, <축의 시대>,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등을 읽었다. 이중 <축의 시대>는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알다시피 축의 시대는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해 인류의 큰 스승들이 나타난 시기를 말한다. 중국의 공자, 인도의 붓다와 마하비라,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고대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유대의 예레미아가 전 지구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이들이 출현한 시대를 묶어 ‘축의 시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 현자들이 보인 통찰력은 ‘공감’과 ‘자비’라고 말한다. 남의 고통을 느끼는 것, 자비로운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축의 시대에는 폭력이 난무했고 그로 인한 고통의 시대였다.

현자들은 인간의 비참한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궁리했다. 이들이 보인 통찰력은 한 마디로 ‘황금률’이라고 불린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기독교 성경 마태복음 제7장 12절)라는 문구가 이를 잘 드러낸다.

동아시아에서도 ‘황금률’을 발견했다. 공자는 <논어>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을 대접하라.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논어> 15편 23) 맹자도 똑같은 말을 했다. “만물이 내 안에 있다. 너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들을 대접하려고 최선을 다하면 이것이 인(仁)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임을 알게 될 것이다.”(<맹자> 13편 4절)

카렌 암스트롱은 황금률의 발견을 이렇게 해석한다. “축의 시대 현자들의 프로그램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폭력의 주된 원인인 자기중심주의를 없애기 위해 고안되었고, 황금률의 감정이입적 영성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카렌 암스트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폭력과 위기의 시대’라며 축의 시대 통찰력을 다시 묵상해 볼 때라고 한다.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위기의 시기에 사람들은 늘 축의 시대를 돌아보며 길을 찾았다. 우리는 축의 시대의 통찰력을 넘어선 적이 없다.”

카렌 암스트롱이 말한 대로 ‘축의 시대’의 통찰력을 다시 돌아본다. 인류를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할 길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기원전 5세기의 현자들이 가르쳐준 황금률에 그 단서가 있다. 즉 공감과 감정이입의 대상을 사람에만 국한하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축의 시대에 전쟁으로 고통 받았던 대상이 사람이었다면, 21세기 초에는 황금률의 대상을 지구 생태계의 다른 구성원으로 확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른 동식물을 먹고 소비하는 대상이 아니라, 지구 생태계를 같이 살아가는 이웃으로서 대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인간의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다른 생명을 죽인다면 그에 대해 아픔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인간에게 잡아먹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다. 그들도 지구 공기를 숨 쉬며 그들에게 주어진 삶을 누릴 권리가 있지 않을까?

아내가 권해 알게 된,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는 날>이라는 책이 있다. 아내가 내게 이것을 권한 이유는 책을 읽고 ‘아버지 노릇’을 잘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주인공인 어린이와, 돼지 도살장에 다니게 된 그의 아버지와의 따뜻한 부자관계를 느껴보라는 것이다.
작품 속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는 따뜻한 마음을 보고, 나는 내가 아버지 노릇을 잘못하고 있음을 다시 느꼈다.

그리고 그거 말고, 하나를 더 느꼈다. 그건 주인공의 아버지가 죽던 날, 도살장에서 직장 동료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 날 하루는 돼지들을 도살하지 않았다는 대목에서였다. 책 제목은 거기에서 나왔다. 나는 책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 대목에서 돼지라는 생명들의 일상화된, 강요된 죽음에 가슴이 아렸다.

다른 동물을 우리 입에 들어갈 식량으로만 보는 태도는 주변에 만연해 있다.
페이스북에 얼마 전 올라온 페친 글이 그렇다. 그는 서울 어느 곳에서 꿩 한 마리를 보았다. 수꿩이었다. 그는 군복무 시절 기억을 떠올렸다. 부대 안에서 꿩을 발견했고, 그 꿩을 잡고자 했다. 미군 장교가 그 장면을 보고서 ‘왜 새를 괴롭히느냐’고 질책했다. 그 페친은 기죽지 않고 ‘먹기 위해서’(to eat)라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새는 달아났다. 새를 놓친 뒤 그는 심사가 꼬였다. 미군 장교의 뒤통수에 “It tastes good!”이라고 말했단다.

이 글을 읽고 나는 얼굴이 화끈했다. 다른 생명체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지상에 같이 살고 있음을 기뻐하면 좋을 텐데, 왜 그리 ‘입에 들어가면 맛있을 텐데’ 하는 생각밖에 하지 않을까? 그 포스팅에 붙은 댓글에도 가슴 아프게 하는 게 있었다. “꿩 요리 맛있지”, “동물원에서 꿩을 본 아이가 ‘맛있겠다’라고 말해 같이 간 어른들이 충격을 받았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을 맨 앞에 두는 생각이 필요하다는 훌륭한 발상이다.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경제·사회 가치를 비판하는 말로 나는 이해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걸 구호로 내걸고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받아 청와대에 들어갔다.

나는 이제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자고 말하고 싶다. 그 구호가 뭔지는 모르겠다. 다만 다른 동식물이 살아갈 수 있는 이 땅에서는 인간만이 혼자 살아갈 수 없음은 분명해지고 있으니,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도 업그레이드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지구 생태계의 다른 동식물과 공존하는 삶을 비추는, 새로운 ‘더불어 인문학’이 필요하다. ‘휴머니즘 너머’의 새로운 세상을 비추는 시선이 21세기 초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최준석 필자

과학책을 읽다가 과학책에 빠져 과학책을 썼다. 그래서 과학작가가 되었다. 책이름은 <나는 과학책을 통해 세상을 다시 배웠다>. 신문사 기자, 주간지 편집장으로 일했다. 현재는 주간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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