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편집 2020. 04-03. 18:32

[박상현의 ‘리더의 말과 글’] 호아킨 피닉스의 오스카 ‘남우주연상’ 수상 소감

by | 2020년 3월 2일 | 국제, 박상현의 '리더의 말과 글'

2월 9일에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대 관심사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었다. 이는 한국 영화를 응원하는 한국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기생충’은 작년 말부터 현지에서도 큰 관심을 끌고 있었기에 미국 언론들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작품상, 감독상 같은 주요 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할리우드 역사상 최초로 외국어로 제작된 영화에게 수여됐다는 의미까지 더해져서 봉준호 감독은 그날 저녁 시상식 행사의 중심인물이었다.

게다가 봉준호 감독은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전달한 수상 소감에서 자신과 함께 후보에 오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말을 인용하며 거장(巨匠)에게 찬사를 바치는 멋진 모습으로 더욱 큰 박수를 받았다. 원래 길고 지루하기로 소문난 아카데미상의 수상 소감이 풍부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날 또 하나 빛나는 보석이 있었다. 바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호아킨 피닉스<사진>의 수상 소감이었다.

정치적 수상 소감에 대한 호불호

그런데 왜 수상 소감은 길고 지루할까?
우선 수상자가 자신이 상을 받기까지 함께 노력하고 도와준 사람들을 일일이 언급하는 감사의 말(acknowledgment)에 정작 청중들은 관심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다른 하나는 전 세계인들이 시청한다는 사실을 이용해 배우를 비롯한 영화인들이 자신의 (대개는 정치적) 신념이나 견해를 말하는 기회로 삼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1993년 시상식 때 리처드 기어가 중국의 덩샤오핑을 향해 “티베트를 해방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73년도 시상식 때 영화 ‘대부’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말론 브랜도의 행동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시상식에 참석하는 대신 인디언 여성을 보내 수상을 거부한 후 미국 정부의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탄압과 할리우드가 영화에서 인디언들을 스테레오 타입으로 묘사하는 문제를 비판할 기회를 주었다. 

정치보다는 윤리, 짧지만 깊은 울림

영화상 시상식에서 하는 배우와 감독의 정치적인 발언은 때로는 큰 환호와 박수를 받지만, 일부 참석자와 언론으로부터는 야유를 받기도 한다.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사회를 본 코미디언 리키 저베이스는 수상 후보들을 향해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은 학교에 다닌 시간이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등교거부운동을 한) 그레타 툰베리보다 적다”고 뼈있는 농담을 던졌다.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사람들이 괜한 설교를 하지 말고 감사 인사만 하고 들어가라는 메시지였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정치적인 수상 소감이 등장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트럼프에 관한 것도, 홍콩 시위에 관한 것도, 혹은 기후변화에 관한 것도 아니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연설의 일부를 놓쳤다면 횡설수설하는듯한 느낌마저 줄 만큼 (정치보다는) 윤리에 관한 짧지만 깊은 울림을 가진 발언이었다. 남우주연상을 받은 호아킨 피닉스의 수상 소감 영상을 보자.


발언권 없는 이들을 위한 발언

“인터넷을 다운시킨 연설”이라는 별명을 붙인 피닉스의 연설은 미리 써온 원고 없이 이루어졌지만, 즉흥연설이라고 하기에는 깊은 생각을 담은 내용이었고, 외워서 온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주어진 짧은 시간을 고려해) 빠르게 전달되었다.

무슨 내용이었을까? 아래에 전문을 옮긴다:

(“아, 제 마음은 지금 감사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와 함께 후보에 오른 다른 분들, 혹은 이 행사장에 계신 어떤 분보다 더 뛰어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영화에 대한 같은 사랑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라는) 표현 양식은 제게 그 누구보다도 특별한 삶을 허락해주었습니다. 저는 영화가 아니었으면 제가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영화가 제게 준, 그리고 이곳에 계신 많은 분들께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을 대신하여 우리의 목소리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God, I’m full of so much gratitude right now. And I do not feel elevated above any of my fellow nominees or anyone in this room because we share the same love, the love of film. And this form of expression has given me the most extraordinary life. I don’t know what I’d be without it. But I think the greatest gift that it’s given me, and many of us in this room, is the opportunity to use our voice for the voiceless.

그의 수상소감은 “배우 주제에 왜 정치적인 발언을 하느냐”는 (대개는 보수주의자들의) 항의, 혹은 무시를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시작한다. 발언권이 없는 이들을 대신해서 발언을 하는 행위는 연기이기도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그들을 위한 발언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뒤이어 이 시대에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슈들을 하나씩 언급하면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어젠다를 가지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는 그동안 우리 모두가 함께 직면한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왔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서로 다른 목표와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고 느끼거나, 그렇게 느끼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공통성(commonality)을 목도합니다. 저는 우리가 젠더 불평등을 이야기 하든, 인종주의를 이야기하든, 혹은 퀴어의 인권이나 원주민의 인권, 동물권을 이야기하든 우리는 불의에 대항해서 싸운다고 생각합니다. 한 국가, 한 민족, 한 인종, 한 젠더, 혹은 한 종(種)이 다른 집단을 지배하고, 제어하고, 사용하고, 착취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고방식과의 싸움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I’ve been thinking a lot about some of the distressing issues that we are facing collectively. I think at times we feel, or we’re made to feel, that we champion different causes. But for me, I see commonality. I think, whether we’re talking about gender inequality or racism or queer rights or indigenous rights or animal rights, we’re talking about the fight against injustice. We’re talking about the fight against the belief that one nation, one people, one race, one gender or one species has the right to dominate, control and use and exploit another with impunity.

그리고 그의 수상소감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동물권(動物權)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자연세계로부터 너무나 분리되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우리는 자연세계로 쳐들어가 자원을 약탈합니다. 우리는 소에게 인공수정을 시켜도 된다고 생각하고, 그 소가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를 빼앗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미소가 괴로워 우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새끼에게 돌아가야 할 어미소의 젖을 빼앗아 우리가 마시는 커피에 붓고, 우리가 먹는 시리얼에 넣습니다. 저는 우리가 개개인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우리가 무언가를 희생하고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인류가 가장 뛰어난 순간에는 우리는 정말로 창의적이고, 창조적이고, 독창적입니다. 저는 우리가 사랑과 연민을 우리를 이끄는 원칙으로 사용하면 세상에 지각을 가진 생명체와 환경에 이로운 변화의 체계를 창조하고 발전시키고 적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I think that we’ve become very disconnected from the natural world, and many of us, what we’re guilty of is an egocentric world view – the belief that we’re the center of the universe. We go into the natural world, and we plunder it for its resources. We feel entitled to artificially inseminate a cow, and when she gives birth, we steal her baby, even though her cries of anguish are unmistakable. Then we take her milk that’s intended for her calf, and we put it in our coffee and our cereal. And I think we fear the idea of personal change because we think that we have to sacrifice something, to give something up, but human beings, at our best, are so inventive and creative and ingenious. And I think that when we use love and compassion as our guiding principles, we can create, develop and implement systems of change that are beneficial to all sentient beings and to the environment.

하지만 “너는 얼마나 잘났기에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비판이 나올 것을 알고 먼저 아래와 같이 고백한다. 그리고 한 번 더 기회를 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면서 그것을 인류 전체의 가능성으로 승화한다.

(“이렇게 말하는 저는 불량배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기적이었고, 때로는 잔인했고, 함께 일하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계신 많은 분들이 이런 저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가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과거에 한 실수로 내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지지해주고, 서로가 성장하도록 도와주고, 서로를 가르쳐주고, 구원을 향해 가도록 서로를 인도해줄 때 우리는 가장 뛰어난 존재입니다. 그게 인류가 가장 뛰어난 순간입니다.”)

Now, I have been, I have been a scoundrel in my life. I’ve been selfish. I’ve been cruel at times, hard to work with, and I’m grateful that so many of you in this room have given me a second chance. And I think that’s when we’re at our best, when we support each other, not when we cancel each other out for past mistakes, but when we help each other to grow, when we educate each other, when we guide each other toward redemption. That is the best of humanity.

(“제가 열일곱 살 때 제 형이 이런 가사를 썼습니다. ‘사랑을 가지고 도우러 달려가라. 평화가 따라올 것이다.’”)

When he was 17, my brother wrote this lyric. He said, ‘Run to the rescue with love, and peace will follow.’”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여기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이야기하는 형은 1993년, 스물세 살의 나이에 요절한 배우 리버 피닉스다. 누구나 당대 최고의 배우로 성장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던 리버 피닉스의 돌연한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던 호아킨은 뒤늦게 영화배우로 활동하게 됐다. 항상 “리버 피닉스의 동생”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지만, 그것을 마다한 적이 없을 만큼 형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호아킨 피닉스의 수상 소감은 배우의 발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모험을 하는 연설이다. 듣기 싫다는 바로 그런 종류의 발언을 할 때는 그 어떤 발언보다 강한 설득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피닉스의 비판을 무시하는 대신 인정하고, 끝까지 겸손한 자세를 취하면서 자신이 받은 은혜를 인류애로 승화시킨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을 그의 형의 말을 전달함으로써 아무도 불평할 수 없는 확실한 마무리를 했다.

하지만 그의 수상 소감의 진정한 코다(coda: 종결부)는 무대 위가 아닌 다른 곳에서 보여줬다. 약혼녀이자 아카데미상 수상자이기도 한 배우 루니 마라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비건 음식점 ‘Monty’s Good Burger’에서 비건 버거를 함께 먹는 <아래 사진>이 그것이다.


박상현 필자

뉴미디어 스타트업을 발굴, 투자하는 ‘메디아티’에서 일했다. 미국 정치를 이야기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워싱턴 업데이트’를 운영하는 한편, 조선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에 디지털 미디어와 시각 문화에 관한 고정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아날로그의 반격≫,≪생각을 빼앗긴 세계≫ 등을 번역했다. 현재 사단법인 코드의 미디어 디렉터이자 미국 Pace University의 방문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신기사 링크

[고한석 칼럼] 4‧15 총선 후 혁신 없다면 ‘죽음의 계곡’에 빠진다

#정치 주도 세대 30년 주기로 교체    2030년까지 586세대, 그후엔 90년대생 #독재국가에서 민주화 쟁취한 정당  국정운영 서툴러 舊세력에 정권 뺏기나  자기혁신 성공하면 장기집권 가능성  한국 말고도 대만·몽골도 비슷한 패턴#대선·총선 연패하고서야 뼈를 깎는 혁신  10년 단위로 재집권해 시대정신 구현  차기 대선, 21세기 어젠더 격전 벌일 듯  4·15 총선의 전체 판세와 격전지 결과를 예측하느라 요즘 국내 언론과 여론조사기관들은 무척 분주하다. 한국정치를...

[한윤형 칼럼] 정의당, 생사 갈림길…청년·비정규직과 사회적 약자를 껴안아라

#준연동형 선거제로 존립 위기 봉착   민주당이 정의당 몫을 빼앗고 있다?   민주당 행보 맞춰 '개평' 얻어왔을 뿐#정의당 지지층, 따로 존재하긴 했나?  586의 사회운동 부채의식에 기댔지만  지지기반 더 넓힐  명분·근거 확보 못해#기존 진보담론보다 상황 따라 진화해야  하다 못해 민주노총 변화라도 좇아가라 정의당은 지난해 연말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될 때까지만 해도 최대 수혜자가 될 거라 기대했다. 현재 의석수인 6석을 넘어서는 것은 물론, 4·15 총선에서 바람을 타면...

[책 세상으로 초대] 이런 시절에 읽어볼 만한 책

세계 주요 도시들이 통제, 폐쇄되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대의 구호가 된 시절에 사람들은 고립되고 있다. 역사가 코로나 19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도는 가운데, 사람들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장기적 혼돈과 불안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얼마 전에 <파이낸셜 타임스>(FT)가 이런 시절에 읽을 만한 책들을 자사(自社) 편집자들과 기고자, 작가들의 추천 형식으로 실어 관심을 끌었다. 다시 들여다 본 고전에서부터 위안과 도피, 정신의 고양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