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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세 번째 10년을 말한다④ 문정인 선생] “북구형 선진국 되려면 남북한 사실상 통일 상태 만들어야”

by | 2019년 12월 13일 | 원로 인터뷰, 한반도

격변 시대일수록 대전략(grand strategy)과 방책(方策)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중국의 전국시대에 회자된 합종연횡책(합종책+연횡책)은 7웅(七雄) 중 여섯 나라가 최강자인 진(秦)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 고민한 결과였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 비스마르크(프로이센)의 ‘독일통일 전략’, 헨리 키신저의 ‘소련 포위 전략’ 등은 역사의 큰 흐름을 바꾸었다.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정세는 21세기 들어 급격하게 요동치고 있다. 중국의 급부상 앞에서 미·일은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맞선다. 미·중·일 사이에선 삼국지를 방불케 하는 패권 다툼이 벌어진다. 미국이 고립주의를 표방하는 가운데 일본의 재무장, 미일동맹 강화, 인도 및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10개국)의 흥기 등을 눈여겨봐야 할 이유다. 한반도에선 북핵 문제가 꼬이면서 남북관계가 답보 상태다. 한미·한일 관계도 평탄치 못하다.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는 그동안 우리 정부가 독자적 외교안보노선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문재인 정부 들어 외교안보특보를 맡은 문 교수는 ‘우리의 해법은 남북관계에서 시작돼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남북한 평화협력체제가 제대로 작동해야 주변 4강과의 사이에서 운신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문재인 정부 이후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조치가 작동하고 있었으나 우리 정부가 개성공단 및 금강산 관광을 선제적으로 풀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친미 성향인 언론·지식인들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피렌체의 식탁’은 한국의 외교안보 전략가로 일컬어지는 문정인 교수를 만났다. 21세기의 세 번째 10년을 맞이해 한국이 처한 현실 진단과 미래 전략을 들어보기 위해서다. 그래서 인터뷰 내용을 가급적 원문 그대로 싣는다. 문 교수는 까다로운 현안들에 대해 막힘없이 답변했다.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다양한 사례와 교훈을 물 흐르듯 소개했다. 인터뷰는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 있는 동아시아재단 연구실에서 두 시간가량 진행됐다. 문 교수는 2006년부터 영문 잡지 ‘글로벌 아시아’를 발간해온 언론인이기도 하다. [편집자]

<외교안보 현안>

北 ICBM 발사, 핵보유국 선언 땐
트럼프, 군사적 옵션 선택할 수도

-북핵 해결을 위한 북미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북한이 대결 모드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핵실험 또는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를 재개할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앞으로 남북한과 미국이 어떤 해법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가요.

“그걸 알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지금 미국과 북한 사이가 무엇 때문에 판이 깨졌는지 알아야 해요. 작년 6월 싱가포르회담 때는 잘 됐고, 올해 2월 하노이회담에서 삐걱대다가 6월 판문점에서 만나 딜(deal)이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10월 스톡홀름 실무회담에서 진전이 하나도 없었어요.

양측 차이가 뭐냐. 미국이 원하는 건 하노이에서도 얘기했던 것처럼 ‘핵을 선(先) 해체하라. 그럼 우리가 후(後) 보상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일괄 타결’이라고 합니다. 미국은, 핵‧화학 무기 및 미사일을 선제적으로 폐기하면 북한 경제의 밝은 미래를 보장해주겠다, 이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어요. 북한은 북한 나름대로 자기들이 ICBM 시험 발사도 중단하고 핵실험도 중단하고 성의를 다 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국 측에서는 성의를 보여주지 않고 요구도 굽히지 않고 있죠. 오히려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에 미국의 압박은 사실상 강화됐습니다. 대북제재를 15차례나 북한에 가해 왔어요. 요즘에도 북한의 해외활동 봉쇄를 계속 강화시키고 있어요. 싱가포르 행사에 참석하려는 (북한의) 비자 발급도 무산시키고, 독일에서 국제사격대회를 하는데 북한 선수가 출전하지 못하도록 독일 외교부에 압력을 넣었다고 합니다.

북한 입장에선 성의를 다하고 있는데, (미국이) 제재 완화를 안 해주니 트럼프 대통령에게 속은 것 아니냐, 수사(修辭)만 있는 이런 협상은 안 하겠다는 거죠. 지난 10월 스톡홀름에서 실무진이 만난 뒤 북한에서는 사실상 최후통첩을 했다고 봐요.

북한의 최후통첩은 대략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고 우리 인민의 생존권과 발전권을 저해하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을 완전하고도 불가역적으로 철회하지 않으면 핵협상은 없다. 연말까지 새로운 계산법을 갖고 나오지 않으면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많은데,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에 나온 북한 지도부의 발언을 살펴보면 이렇게 추측됩니다.

첫째는 핵보유국을 명실상부하게 선언하고, 비핵화 협상에 나오지 않겠다고 표명할 것 같습니다. 둘째는 미국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자력갱생해서 승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최선희(외무성 제1 부상)가 러시아에 간 것이나, 최근 북중 관계를 보면 중국·러시아와의 유대를 강화해서 생존 공간을 넓히려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행동을 보여줘야 하니까 ICBM을 쏘거나 인공위성을 쏠 가능성이 있어요. 서해 발사대는 인공위성을 쏘는 곳입니다. ‘은하-4호’가 올라간다면 ICBM 엔진 성능을 테스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 다음에, 서해 같은 우리의 취약 지역에서 북한의 군사적 행보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이렇게 되면 상황이 상당히 어려워질 것입니다. 북한이 ICBM을 쏘느냐 마느냐, 여기에는 북한의 전략적 판단이 있어야 합니다. ICBM을 쏘면, 트럼프와는 틀어지는 것이고, 트럼프의 군사적 행동 가능성도 배제 못하게 됩니다. ICBM까지 안 가고 인공위성을 쏘더라도 국제적으로 문제되고, 유엔 안보리의 추가 제재조치가 나오고 한반도의 상황은 상당히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럴 경우 트럼프 행정부가 군사적 옵션을 선택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북한은 트럼프가 ‘탄핵과 대선’ 국면에 처해 있으니까 강력한 군사적 행동을 못할 거라고 계산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오산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히려 선거 때니까 트럼프가 군사적 행동이나, 그에 가까운 제스처를 보낼 가능성이 큽니다. 한반도 긴장이 고조될 가능성이 있지요. 트럼프가 탄핵과 대선 국면 때문에 못할 거라고 단정적으로 본다면 낭패를 가져올 수도 있지요.”

“中에 핵우산 공여 요청” 보도는
보수 세력이 만든 악의적 가짜뉴스

-국내의 일부 언론에 따르면, 교수님께서는 최근 국립외교원 학술행사에서 옌쉐퉁(閻學通) 중국 칭화대 당대국제관계연구원장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만약 북한 비핵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중국이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하고 그 상태로 북한과 핵협상을 하는 방안은 어떻겠느냐’고 발언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국내외에서 상당한 논란을 낳았는데 그 발언의 진의는 무엇입니까?

“그 발언에 대해 JTBC에서 팩트체크를 한 뒤 오해가 가라앉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보도내용이 자유한국당은 물론 보수 쪽 유튜브에 이르기까지 많이 확산됐어요. 그 보도는 가짜뉴스의 확대재생산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케이스입니다. 가짜뉴스가 미국까지 건너가서 ‘라디오 프리 아시아(RFA)’ 기자가 미국 상원의원에게까지 (그 내용에 관해) 물어보기에 이르렀습니다.

옌쉐퉁은 내 오랜 친구여서 그 친구의 주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2023년이 되면 중국이 미국을 국력에서 앞지르게 되고, 그 때는 중국의 대전략을 새로 짜야 하는데, 주변국들과 동맹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러니 한국은 미국을 버리고 중국과 동맹을 맺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죠. 옌쉐퉁은 이런 논리로 ‘한·중 동맹론’을 주장하는 학자입니다.

(옌쉐퉁이 주장하는) 다른 하나는 북한이 핵을 보유해도 중국은 문제될 게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 파키스탄, 인도가 모두 핵을 보유하고 있는데 모두 중국과 잘 지내고 있다는 거죠. 따라서 관계만 좋으면 되는 것이지 북한의 핵 보유 자체가 중국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문제가 된 국립외교원 행사에서도 북한 핵보유를 두둔하는 듯한 (옌쉐퉁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막지 못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공격적인 질문을 이렇게 던졌죠. ‘만약에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고, 미국은 방위비 문제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일이 동시에 발생하면, 남한에는 완전한 안보 공백이 생긴다. 그렇다고 우리가 핵무기를 보유하겠다고 하면 미국도 중국도 반대할 것 아니냐? 남한이 핵무기 보유를 못하는 상황이 되면 중국이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할 능력과 의도가 있느냐?’

제가 질문을 영어로 빨리, 압축적으로 말하다 보니까 맨 마지막 질문 하나만 뽑아서 조선일보가 악의적으로 보도한 것입니다.

시진핑 주석이 강조하는 한반도 정책의 제1 원칙이 평화와 안정이기 때문에 공백 상태가 됐을 때를 상정해 중국도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차원에서 질문한 것입니다. 중국이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할 수 없다면 북한의 비핵화에 앞장서라는 함의를 담고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앞뒤 다 자르고. 마지막 질문만 갖고 ‘중국에 핵우산 제공을 제안했다’는 식으로 조선일보가 보도했습니다. 유튜브에서는 아예 ‘문정인 특보, 중국에 핵우산 공여 요청’이라는 제목으로 영상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美측 ‘종북좌파’ 발언에 유감
국익 차원에서 서로 역지사지해야

-해리 해리스 대사가 지난 9월 여야 의원들을 만나 “문재인 대통령이 종북좌파에 둘러싸여 있다는 기사가 있는데 사실이냐”고 발언했다는 내용이 알려져 큰 파문이 일었습니다. 이 보도 역시 발언 전달하는 과정에서 ‘거두절미’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워싱턴 정가에선 문재인 정부를 불신하거나 한미동맹의 갈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의 여러 싱크탱크를 포함해 워싱턴DC에서 한반도에 관한 여론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 정부에 대해 상당 부분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 내부에는 ‘미국과 동맹을 맺으면서도 북한, 중국과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미국 주류의 시각에서 보면 그런 사람들이 종북좌파로 보일 수 있겠죠.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저도 종북좌파일 겁니다.(웃음)

‘미국의 국익’이라는 차원에서 보수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종북좌파’라는 사람들도 사실은 한국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 아닐까요. 청와대나 현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한국의 보수 세력이 하듯 (미국이) 종북좌파로 매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종북좌파란 용어의 적절성을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런 성향을 보인다 하더라도 왜 그들이 그런 성향을 보이는가, 그게 한국의 국익을 얼마나 반영하는 것이고, 한미동맹이라고 하는 상호 국익의 보완적 시각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역지사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트럼프 정부 들어서 그런 성향이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메리카 퍼스트’를 강조하는데,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고립주의, 둘째는 일방주의, 셋째는 보호무역주의, 넷째는 거래주의(transactionalism)입니다. 이것들은 미국이 과거의 패권적 지도국가로서 보였던 행태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미국의 지금 같은 행태에 우리가 익숙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미국이 고립적이고 일방적인, 그리고 거래하듯이 더 많은 것을 내놓으라고 얘기하면 자연히 한국에서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겠죠.”

방위비 증액-주한미군 감축 연계설
동맹 무시한 거래주의 행태 아닌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미국 측이 50억 달러를 요구해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방위비 분담금 증액과 주한미군 철수론 사이에서 바람직한 해결방안은 무엇일까요? 미국은 향후 주한미군 규모를 얼마나 감축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이와 관련해 국내에서는 주한미군의 존재를 다시 생각해보자, 부분 철수를 하겠다면 받아들이자는 여론도 있습니다.

“제가 JTBC 뉴스에 나가서 ‘(주한미군) 5000명 정도 빼도 괜찮다’고 말한 걸 두고 보수 측에서 난리법석을 쳤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방위비 50억 달러를 분담해라. 그렇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감축하거나 철수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거래주의’입니다. 한미동맹을 위해선 신뢰를 바탕으로 상호 이해 속에 합의를 구축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미국이 일방적 요구를 한다면 우리가 받아들이기 상당히 힘들지요.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만약 50억 달러에서 요구 금액을 내려주면 협상의 여지가 있지만, 만약 50억 달러를 끝까지 고집하면서 ‘더 안 내면 주한미군을 감축하거나 철수하겠다’고 할 경우 많은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하자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북한 협상에서 ‘주한미군 뺄 테니까 당신들도 핵을 폐기해’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겠죠. 사실 국립외교원 행사에서 저는 옌쉐퉁과 이런 얘기를 했던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런데 북한이 주한미군의 존재 때문에 핵 개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볼 때 80%는 한미동맹, 주한미군, 그리고 미국의 확대억지 정책을 통한 핵우산, 이 세 가지 변수가 북한을 핵무장으로 가도록 작용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북핵-주한미군 연계 협상 필요
中이 北 비핵화 보증 서게 하자

-우리가 남북 핵협상 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내세우기 전에 먼저 한미 간에 얘기할 경우, 대북 협상의 지렛대로 작동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미국이 한반도로부터 사실상 완전히 떠나는 것, 즉 disengagement 또는 decoupling 이 대두될 때 주한미군 문제가 대북 협상 카드로 대두 될 수도 있겠지요. 물론 국내 정치 지형으로 보아 쉽지 않겠지만. 그러나 그러려면 북한이 우리와 먼저 대화 통로를 재개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 한미동맹의 수준이 지금까지와 아주 달라질 텐데요.

“이건 분명합니다. 내 개인적 입장에서도 그렇고 국가를 경영하는 입장에서도 위험을 최소화하고 국익을 극대화하는 ‘risk minimization, benefit maximization’ 노력이 필요합니다. 국가 경영이란 관점에서 보면 한미동맹을 유지하는 게 제일 안전하겠죠. 문제는 미국이 동맹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면 사정은 달라지겠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바짓가랑이’ 발언으로 한때 논란이 됐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아서라도 안보 구걸을 해야 한다면 그것의 임계점이 어디냐에 대한 내부적 논란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미국에 대해 ‘갈 사람은 가라, 우리도 대안적 생존 공간을 모색하겠다’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겠죠.”

-그럴 때 보수 세력이 반드시 제기하는 문제가 한국의 자주국방 능력이나 남북 군사대결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겠냐는 현실적인 우려입니다.

“두 가지가 있겠죠. 분명히 말하지만, 한미동맹이 유지되는 게 좋고, 미국의 확장 억지력을 통한 핵우산 공여가 우리로선 최선의 방안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북한과 협상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어느 날 그냥 떠나겠다고, 시리아 북부에서 미군이 떠난 것처럼 일언반구도 없이 독단적 결정으로 떠나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그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북한과 재협상해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가속화해야 하겠죠. 우리도 독자적 카드를 가져야 합니다.

만약 북한이 핵을 보유한 상태에서 미군이 떠난다면 독자적 핵무장도 고려해야 하겠지요. 북한으로부터 실존적 위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술, 자본이 갖고 있으니 핵물질만 가져오면 빠른 시간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그런 식의 남북 간의 핵 군비경쟁을 반대합니다. 그렇게 되면 일본도 핵무장을 할 테고요. 동북아에서 핵 도미노는 어느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반도의 핵 경쟁, 핵 확산을 막는 방법 중 하나는 중국이란 변수입니다. 과거에는 중국이 북한에 핵우산을 제공하는 조건을 거론하면서 한반도 비핵화를 이야기했는데, (주한미군 철수 땐) 차라리 남쪽에 단기적으로 핵우산을 제공해주고 중장기적으로 한반도 비핵화지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중국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주장을 펴는 이들이 비록 극소수이긴 하지만.”

北이 비핵화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주한미군 철수 땐 핵무장 추진해야

-그럴 때 보수 세력이 반드시 제기하는 문제가 한국의 자주국방 능력이나 남북 군사대결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겠냐는 현실적인 우려입니다.

“두 가지가 있겠죠. 분명히 말하지만, 한미동맹이 유지되는 게 좋고, 미국의 확장 억지력을 통한 핵우산 공여가 우리로선 최선의 방안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북한과 협상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어느 날 그냥 떠나겠다고, 시리아 북부에서 미군이 떠난 것처럼 일언반구도 없이 독단적 결정으로 떠나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그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북한과 재협상해서 남북한 평화 과정을 빨리 하면서, 우리도 카드를 가져야 합니다.

만약 북한이 비핵화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이 떠난다면 우리도 핵무장해야겠죠. 북한으로부터 실존적 위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술, 자본이 갖고 있으니 핵물질만 가져오면 빠른 시간에 할 수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그런 식의 남북 간의 핵 경쟁을 반대합니다. 그렇게 되면 일본도 핵무장을 할 테고요.

한반도의 핵 경쟁, 핵 확산을 막는 방법 중 하나는 중국이란 변수입니다. 과거에는 중국이 북한에 핵우산을 제공하는 조건을 거론하면서 한반도 비핵화를 이야기했는데, (주한미군 철수 땐) 차라리 남쪽에 핵우산을 제공해주고 남북한 비핵화 추진을 중국이 외교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는 학자가 중국에 소수이지만 존재합니다.”

-중국에 대해 북한의 비핵화 보증을 서라는 말씀인가요?

“중국 시진핑(習近平)에게는 한반도 정책의 3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한반도 평화·안정. 둘째, 한반도 비핵화. 셋째, 모든 현안 문제를 대화·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푼다는 것입니다. 첫째 원칙이 평화·안정입니다. 만약 미군이 한반도에서 떠났을 때 중국이 역할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중국이 역할을 안 하면 우리는 핵무장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북한 간에 핵 군비 경쟁이 붙고, 일본도 핵무장을 하면서 동북아 핵도미노 현상이 촉발될 것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의 안보 환경은 더욱 나빠지겠죠.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해 한미동맹이 필요하고, 주한미군의 지속적 주둔이 한반도 평화·안정을 위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주한미군 역할, 한미 간에 시각차
韓은 ‘대북 억제’, 美는 ‘대중 견제’

-주한미군의 역할과 주둔 목적에 대해선 여러 주장이 많습니다. 교수님이 보시기에 주한미군의 가장 큰 주둔 목적은 2019년 말 현재 시점에서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앞으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위상이 어떻게 변화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한국이 생각하기에 주한미군의 목적, 한미동맹의 목적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한반도를 보호하고 대북 군사적 억지력을 구축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 입장에서 보면 동북아에서의 세력 균형 차원에서 미국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대중국 견제를 하면서 부차적으로 대북 억제라는 목적을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양국 사이에 한미동맹을 보는 시각이 대북 억제가 최대공약적 변수이지만 우선순위에서 보자면 대중 견제가 미국 입장에선 더 크고, 우리 입장에서는 대북 억지가 더 클 것입니다.

원래 1954년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 북한 위협을 명시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각기 다른 위협인식이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피렌체의 식탁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 전문을 소개합니다.

“본 조약의 당사국은, 모든 국민과 모든 정부가 평화적으로 생활하고자 하는 희망을 재확인하며, 또한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의 평화 기구를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하고, 당사국 중 어느 일국이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 고립하여 있다는 환각을 어떠한 잠재적 침략자가 갖지 않도록 외부로부터의 무력 공격에 대하여 자신을 방위하고자 하는 공동의 건의를 공공연히 또한 정식으로 선언할 것을 희망하고, 또한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 더욱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지역적 안전보장 조직이 발달될 때까지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자 집단적 방위를 위한 노력을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하여 다음과 같이 동의한다.”


미국이 주한미군 감축하더라도
해·공군, 정보·정찰·감시 자산 필요

-동아시아에는 주한미군 말고도 일본의 도쿄, 오키나와 등지에 주일미군이 5만4000명쯤 배치돼 있습니다. 주한미군을 빼더라도 주일미군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일본에 있는 7개의 미군기지는 주한 유엔군을 지원하기 위해 공여된 것입니다. 따라서 주한미군과 유엔군이 한국에서 사라지게 되면 주일 미군의 주둔이유도 새롭게 정의 내려야 하겠지요. 더구나 주한 미군은 대북 군사억지력 구축이라는 목적도 있지만 일본 방어를 위한 최전선군사 배치라는 의미도 있어요.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주한 미군을 빼고 동북아 방위를 생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게다가 군사력이란 다다익선 아닙니까.

사실 이승만 정부이래로 주한미군은 인계철선이라는 개념하에서 이해되어져 왔습니다. 주한 미군이 있음으로 북한이 남침 시 추가 미군의 자동개입이 보장된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이승만 대통령이 작전지휘통제권을 미군에 준 것도, 박정희 대통령이 1978년 한미연합사를 만든 것도 이러한 인계철선 논리에 따른 미국의 자동개입을 전제로 한 것이었죠.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왔던 ‘작계 5027’도 이런 논리에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이 개념이 상당히 달라졌다고 봐요. 한미동맹이 잘 유지돼 해공군 지원과 정보·정찰·감시 자산만 제대로 공여된다고 하면 주한미군 숫자가 줄어들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미래 비전>

향후 10년 비전은 세 가지 핵심
평화 우선, 공동 번영, 공동체 정신

-눈앞의 현안을 벗어나서 한반도의 미래 전략과 비전에 관해 묻고 싶습니다. 2020년, 새해는 21세기 세 번째 10년이 시작되는 해입니다. 한반도에서 향후 10년의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시대정신은 동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관념적 표상(ideational reresentation) 과 그들이 나가야 할 지향성(intentionality)으로 정의 내릴 수 있다고 봅니다. 시대정신에는 강한 규범적 정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세 가지가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평화우선주의입니다.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 것이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 아닌가 합니다. 미중 패권경쟁이 가속화되고 남북한 문제. 양안 문제, 동중국해, 남중국해 등 여러 가지 갈등 국면이 있지만 결국 전쟁은 안 되고 평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평화우선주의’가 향후 10년의 담론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 번째는 공동번영의 문제입니다. 미국에서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에 약육강식의 새로운 국제 경제 논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다자주의 원칙보다는 일방주의, 양자주의 통로에서 경제·통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저는 이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평화가 국제사회의 공공재이듯 번영도 공공재가 돼야 합니다. 그래서 ‘더불어 잘사는 동북아’라고 하는 시대정신이 구축돼야 한다고 봅니다.

세 번째는, 이 두 가지를 꿰뚫기 위해선 앞으로 공동체, 커뮤니티의 개념이 상당히 강조돼야 한다고 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는 한·미·일 3국 공조도 중요하지만, 그걸 과거의 냉전적 시대정신이라고 한다면, 한·중·일 3국 공조를 통해서 동북아에 새로운 평화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 경제공동체, 다자안보협력체를 만드는 것, 이 지역에 전쟁 없이 더불어 잘사는 공동번영의 비전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과 관련해선 원래 사회학·정치학 이론에서 (어느 국가든) 근대화, 세계화가 진전됨에 따라 민족주의 요소가 도태되고 고사된다는 것이 보편 이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계화가 절정을 이루고 탈냉전이 실현된 21세기에 와서도 (세계적으로) 민족주의가 되살아나고 있거든요. 민족주의라는 것은 일국 공동체의 개념입니다. 민족주의를 넘어선, 화해·협력의 동북아공동체를 이뤄낸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시대담론이라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 말고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동북아 정세, 아나키 상황은 최악
동북아 경제공동체 빨리 추진해야

-2020~2030년 사이에 한반도 정세의 가장 큰 위기와 도전은 무엇입니까? 2030년쯤 한반도 정세는 지금과 비교해 어떻게 변화할 것이라고 예상하십니까?

“역사를 단선적으로 보기 힘듭니다. 2019년 말, 2020년 초의 상황으로부터 여러 변수의 전개양상에 따라 다르게 나올 수 있겠죠. 저는 단순히 얘기하면 세 개의 큰 갈래 길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상당히 낙관적인 전망입니다. 동북아가 하나의 공동체로 가는 거죠. 그러려면 북핵 문제가 평화롭게 풀리고, 한·중·일 3국 협력이 가속화되고, 그러면서 RCEP(역내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을 통하든 뭘 통하든 간에, 동북아 경제공동체라는 게 하루빨리 이뤄져야 합니다. 또한 기존 동맹의 수준을 넘어서서 다자간 안보협력체제, 집단 안전보장체제, 유엔헌장에 나타나 있는 집단안전보장 체제가 지역 단위에서 이뤄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2030년엔 평화로운 동북아, 사실상의 통일을 이룬 남북한 관계를 기대해 볼 수 있겠죠.

그와 달리 최악의 시나리오도 가능합니다. 홉스(Hobbes)적인 아나키(anarchy) 상황이 올 수도 있겠죠. 결국 미중 갈등이 첨예화 되고 한반도에선 북핵 문제도 해결되지 않으면서 대규모 군사 분쟁이 일어나거나, 양안(중국·대만) 때문에, 또는 남중국해나 동중국해에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 수도 있죠.

미국의 동아시아 전진 배치와 중국의 대항 조치가 강화되고,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이 지정학적·지경학적으로 충돌하면 엄청난 세기말적 혼돈이 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북한 대치도 첨예화될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는 신냉전 대치 구도가 나올 수도 있을 겁니다. 남북한의 군사적 대결은 심화되고 군사적 충돌 가능성도 있습니다. 미중 간 패권경쟁이 대리전쟁으로 나타날 가능성도 있겠죠. 이렇게 되면 한반도에는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세 번째인데, 이런 가능성도 있습니다. 양자(兩者) 사이에 ‘악화된 현상유지’가 계속될 수 있겠죠. 미중 패권경쟁은 지금 같은 식으로 계속 투닥거리고, 남북한 간에 탈출구를 찾지 못하지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긴장 고조 상태가 지속됩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도 동중국해 문제로 긴장이 고조되고, 양안 문제도 대만 민진당 후보인 차이잉원 현 총통이 당선된 후 대만 독립 정서가 강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지역의 긴장은 계속 고조되지만, 핵 억지력, 즉 핵 공포의 균형이라는 것 때문에 큰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악화된 현상유지’가 이렇게 계속되면 남북한 관계도 그만큼 어려워지겠죠.

우리가 하기 나름이지만, 2030년 상황을 제가 예측해 본다면, 첫 번째로는 상당히 긍정적인, 화해·협력·평화 공동체로 가는 길이 하나 있겠고, 두 번째로는 홉스가 말하는 무정부적 상태에서 혼란이 가중되는 상태도 가능할 테고, 세 번째로는 현상을 유지하지만 ‘불안한 평화(unstable peace)’ 속에서 그때그때 외교적 노력을 통해 위기를 해결하는 상황도 상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미중 관계, 한반도 앞날 최대 변수
세력 전이보다 세력 균형으로 봐야

-그렇다면 세 가지 상황의 시나리오를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는 무엇일까요?

“결국 미중 관계 변수가 되겠죠.”

-미중 관계를 ‘세력 전이 이론’으로 볼 수 있을까요?

“세력 전이를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세력 전이를 어떻게 조정하느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세력 전이라는 게 미시건대학의 오간스키(Organski) 교수가 1958년에 출간된 ≪세력 전이 이론(power transition theory)≫이란 책에서 펼친 주장이에요. 세력 전이라는 게 뭐냐면, 유럽 근현대사를 보면서,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 패권국의 국력 신장 속도는 완만해지고, 도전국의 국력 신장 속도가 빨라졌을 때, 도전국이 패권국이라는 호랑이의 꼬리를 밟는 그 지점(tangential point)에서 세계대전과 같은 큰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엔 조건이 하나 있는데, 도전국이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국제적 지위에 대한 만족도가 높으면 전쟁이 안 일어난다, 그러나 만족도가 낮으면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간스키 교수는 두 가지 변수를 봅니다.

첫째, 국력이 어떻게 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국력은 군사력, 경제력으로 나뉘고, 군사력에서는 해군력, 경제력에서는 철강 생산력에 초점을 두고 국력을 비교합니다. 둘째는 지도자의 인식(perception)을 놓고 만족, 불만족으로 나누어 분석을 했습니다. 그런 분석의 결과, 오히려 세력 균형이 가까워져 세력 전이 현상이 일어날 때 전쟁이 일어난다고 봐요. 반면 기존의 세력 균형 이론(balance power)에서는 A 국가와 B 국가의 패권 경쟁에서 양쪽의 세력이 비슷해질수록 전쟁 발발 가능성이 적어진다고 주장합니다.

헨리 키신저를 포함해서 전통적 현실주의자들은 전부 세력 균형 이론에 따른 주장을 한 거예요. 그런데 오간스키는 이것을 완전히 뒤집어서, 오히려 도전국 쪽이 패권국의 세력에 가까워질 때 전쟁 발발 가능성이 크다는 거예요.

가령 1914년 제1차 세계대전도 그런 시각에서 본 것이고, 1894년 청일전쟁, 러일전쟁도 그런 시각에서 봅니다. 그런데 세력 전이가 꼭 전쟁 형태로만 나타나지는 않아요. 20세기 초에 영국 패권에서 미국 패권으로 넘어갈 때가 하나의 예외라고 얘기합니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이 이론 자체가 그렇게 정확한 이론은 아녜요.

과거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부재 상태에서, 지배계급(aristocracy)의 힘이 독점화됐을 때는 지도자의 만족‧불만족을 따져야 되지만, 지금 단계에서 그 이론을 미중 관계에 바로 적용하기에는 문제점이 많이 있습니다.”

중국 위협론, 워싱턴 정가의 허구

-앞으로 미중 간 세력 균형, 양국 지도자들의 역량이나 혜안, 이런 것들이 많이 필요하겠네요.

“제가 미국 학자들과 계속 논쟁해온 주제인데, 세력전이 현상이라든가, 중국 위협론은 워싱턴 정가의 소위 ‘기득권 세력’이 만들어놓은 하나의 조작된 것, 만들어진 위협(contrived threats)이라고 봐요. 현실적으로 중국이 미국을 위협하는 게 뭐가 있어요?

국립외교원 행사에서도 이런 얘기를 했다가 찰스 쿱찬(조지타운대학 교수)에게서 비판을 들었는데, (웃음) ‘중국의 무엇이 미국에 위협입니까?’ 물었더니 남중국해 딱 하나 갖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중국이 국제 사회에서 지탄을 받는 것 아닙니까. 1979년 중국이 베트남 침공을 한 이후에 주변국에 대해 군사적으로 행동한 게 있습니까. 오히려 미국이 그 후에 전쟁을 더 많이 하지 않았나요. 아프간, 이라크, 시리아 등….

제가 볼 때는 미국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그래요. 소련이 냉전 시대에 적(敵)으로 만들어지고 매카시즘(McCarthyism: 극단적인 반공주의 운동)이 득세했던 걸 보면, 외부에 적이 있어야 미국이라는 다민족 사회에서 단결의 구심점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때는 일본을 적으로 만들었다가, 지금은 중국이라는 적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냐는 것이죠.”

평화·번영·행복이 우리 미래 비전
문명국가·미들파워 목표에 반대

-우리가 한반도 미래 비전을 놓고 이야기할 때, 문명국가, 중견강국, 평화행복국가 등 다양한 용어들을 동원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 상황은 저출산‧고령화, 저성장‧양극화, 이념대결 정치 등에 발목을 잡히기 있습니다. 이런 현상 때문에 2100년을 지나면 대한민국이 사실상 소멸할 것이라는 ‘퓨처 포비아’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미래는 어떤 빛깔일까요?

“저는 문명국가론에 동의하지 않아요. 마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문명론이 100년이 지난 뒤 되살아나는 것 같아요.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것 그 자체에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 헌팅턴 같은 사람은 문명을 문화의 집합으로 보거든요. 그 문화라는 것에 각자가 갖는 맥락적 특수성이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뭐가 문명인지 뭐가 비문명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문명국가론이라는 것은 언제나 야만과 문명이 대립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우월의식의 표현이기도 하고, 우리가 남과 다르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편적 가치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그것의 옹호자인 것 같은 인식을 주기 때문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중간국가론이라는 것도 영어로 ‘미들 파워’(middle power)라는 개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미들 파워라는 게 지리적 개념으로서의 중간이 있고, 힘의 위계질서, 즉 국제 사회에서 강대국, 중간국, 약소국 등 힘의 위계질서에 있어서 우리가 중급 정도의 힘을 가졌기 때문에 중간 세력 국가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능적으로 중간세력 국가가 될 수도 있거든요. 강대국끼리 일이 잘 안 풀리면 새로운 의제를 만들어서, 중간적 역할을 하는 기능적 중간국가 개념이 있어요. 문제는 ‘미들’이라고 하는 용어 자체의 애매모호성 때문에 우리가 미래를 보는 비전이라고 하기에는 힘들 것 같아요.

제가 보는 미래의 개념이라는 건 뭐냐. 간단해요. 전쟁 없고, 평화롭고, 번영하면서 서로 나누며 행복하게 사는 사회, 어떻게 압축시킬지 모르지만, 담론은 간단합니다.”

-그런 국가모델이 있다면 어떤 나라를 꼽아 볼 수 있을까요?

“스위스를 비롯해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같은 노르딕 국가들이 그런 역할을 잘하고 있어요. 그러나 제일 큰 것은 평화의 담론과 통일의 담론입니다. 남북 관계가 법적인 통일은 안 되더라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강조했듯이 사실상의 통일을 이뤄야 돼요. 사람과 물자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고, 남북한 간의 신뢰를 구축하고, 평화공존을 이룩하고. 이런 상태가 와 있어야 우리가 새로운 외교적 공간을 찾을 수 있고, 국제사회에서 리더십 가질 수 있습니다. 남북한이 대치돼 싸우는 상황에서는 우리가 결국 다른 나라에 가서 구걸하고 사정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제가 볼 때는 그게 핵심인 것 같아요.

2030년 미래를 생각할 때, 우리에게 가장 화급한 문제는 남북 관계를 평화로운 관계, 사실상의 통일 상태로 이끌어 가는 게 중요합니다. 거기에서 진전되면 4강 외교라는 강대국 외교도 훨씬 쉬워질 겁니다. 그것만 이뤄지면 국제 사회에서 우리가 리더로서 어젠다 세팅(의제 설정)도 하고, 그것만 이뤄지면 평화 번영도 이뤄진다고 봐요.”

개성·금강산, 초기에 추진했어야
미국과 공조 맞추려다 호기 놓쳐

-그런데 남북한 관계라는 게 우리가 개선하고 싶다고 해서 개선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북한이라는 상대가 있지 않습니까?

“노력을 해야죠. 그리고 북한도 기존의 태도를 바꾸어야 하겠지요.”

-지금까지는 노력을 안 해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상당 부분은 우리가 미국과 공조를 맞추면서 남북 관계 개선의 많은 기회를 놓쳤다고 봅니다. 그만큼 우리가 창의적으로 생각하지 못한 겁니다.”

-한국이 미국과 분리돼서 자주적으로 행동했을 때 외교안보의 추동력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있을까요?

“해 봐야 알겠죠. 해 보지 않았으니 모르죠. 지금까지 노무현 정부도 그렇고, 문재인 정부도 그렇고 ‘자주적으로 한다’고 했지만 자주적으로 한 게 거의 없거든요.”

-지금 단계에서 우리가 자주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이미 시간을 많이 놓쳤다고 봐요. 2018년 남북 관계가 좋았을 때 개성공단, 금강산관광을 치고 나갔으면 상황이 달라졌을 텐데, 지금은 상당히 어렵죠. 사실상 미국에 모든 걸 위임한 상태이기 때문에 북미 관계가 잘 되면 남북 관계도 잘되겠다는 선순환을 믿었습니다. 그렇게 미국과 공조된 대북 정책을 펴면서 남북 관계가 완전히 망실된 상태란 말예요.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뭘 하기 어려워요. 뭘 하려고 해도 북측과 충분한 교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교감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동아시아 정세>

‘2023년 미중 국력 역전’ 예측은
트럼프 집권 이후 완전히 틀렸다

-중국이 경제 규모, 국내총생산(GDP) 규모로는 2030년 안에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봅니다. 군사적으로도 10월 국경절의 군사 퍼레이드를 보면 핵·미사일과 ICBM, 육·해·공군 전반적으로 미국에 맞먹는 군사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시진핑 주석의 중국몽(中國夢)에 따르면 2050년에 중국은 세계 최강국이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020년부터 2030년 사이에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탄생할 것 같습니다.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첫째로, 미중 간의 완벽한 세력 전이가 일어날 수 있는 지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해요. 중국의 국제정치 전문가인 옌쉐퉁 교수가 2013년에 ≪역사의 관성≫이라는 책을 냈는데, 2023년을 기점으로 1인당 소득을 빼고 경제력, 군사력 등 모든 면에서 중국이 미국을 압도하게 되리라고 전망했습니다. 지금으로선 옌쉐퉁 교수의 예측이 틀렸죠. 그 당시엔 중국 경제가 연 8% 성장을 기본으로 한다고 본 건데 지금은 6%대이고, 앞으로 4%안팎으로 내려갈 수 있다고 합니다.

중국의 성장 속도가 감속되고 있는 그 사이에, 미국 경제는 예전에 연 1%대였던 성장률이 최근 몇 년간 2.7~3%로 높아졌어요. 국방비도 6000억 달러쯤 쓰다가 오바마 정부 시절인 2012년에 ‘2021년까지 4000억 달러를 감축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어요. 국방비 가운데 인건비만 쓰고 전력 증강비를 없애겠다는 오바마 정부의 국방계획을 두고 봤을 때는, 중국이 2030~2040년에는 군사력 면에서도 우뚝 서고 미국은 2등 국가로 전락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어요.

그러나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뒤 이런 모든 예측이 다 틀려버렸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하면 미국의 국방비는 거의 1조 달러에 이를 겁니다. 올해도 이미 9000억 달러쯤 됩니다. 2011년 시퀘스터라는 향후 10년 간의 국방비 감축 계획을 트럼프가 완전히 뒤집어 버렸어요. 엄청난 해군력을 증강시켰고, 핵무기 생산도 늘리겠다고 합니다. 반면 중국은 경제성장이 둔화되니까 그만큼 군사비 지출도 줄어들 수밖에 없어요. 국력이란 지표는 가변적이에요. 그런 지표를 가지고 미중 간 세력 전이를 논의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아요.

이런 것들은 솔직히 말해서 중국 위협을 과장하는 친구들이 가져온 오류이기도 해요. 중국의 전력 구조, 전력 강령, 무기 체계까지 모든 것을 들여다보면 중국이 세계 패권을 노리는 국가는 아닙니다.

패권국이냐 아니냐를 판단할 때 제일 먼저 해군력을 봅니다. 5대양, 6대주를 재패하려면, 동맹을 통해 관리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패권국의 군사력이 투사돼야 합니다. 군사력 투사는 결국 해군력, 항공전투력이에요. 미국을 보세요. 1, 2, 3함대가 미국 본토를 둘러싸고 있죠, 4함대가 카리브해, 5함대가 걸프, 6함대가 대서양·지중해, 7함대가 인도-태평양을 커버하고 있어요.

반면 중국은 고작 항공모함 2척 정도를 진수한데다, 그 항모조차 전투기를 30대 정도 탑재할까 말까입니다. 미국 항공모함은 FA-18 호넷 같은 전투기를 70~90대 정도를 탑재합니다. 중국의 항공모함 배치도 북부의 다롄(大連)쪽에 1척, 중부 닝바오(寧波)와 남해 하이난다오(海南島)에 1척뿐입니다. 결국은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한 방어적 항모 배치인 셈이죠. 그걸 패권국으로 연결시키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2050년에 가더라도 중국이 미국 군사력을 능가하기는 어렵다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세력 전이를 얘기하는 것 자체가 문제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중국 같은 경우 이런 건 있어요. 미국은 자기가 가졌던 걸 빼앗길까 하는 우려를 하고 있어요. 말로는 해상통로 안전 문제라고 합니다. 과거에 자기들이 자유롭게 군사활동하던 지역에서 중국의 국력이 신장돼 자유롭게 못하게 되니까 생기는 충돌입니다. 미국이 조금만 조율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봐요. 제가 볼 때는 미중 대결이라는 것을 너무 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걱정은 됩니다. ‘중국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해 미국 내에는 두 개의 학파(school)가 있어요. 하나는 ‘상하이 학파’, 다른 하나는 ‘크로우(Crowe) 학파’입니다. 상하이 학파는 1970년 상하이 코뮤니케를 중심으로 해서 미중 관계 개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상하이 학파의 중심은 헨리 키신저인데, 그가 중국을 보는 시각은 이렇습니다. ‘중국이 5000년 역사의 대부분 시기에 패권을 쥐고 있었고, 최근 200년만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미국의 패권이 예외이고, 중국의 패권이 규칙이다. 따라서 중국의 부상을 억지로 억누르지 않고, 중국과 협력해서 공동 진화(co-evolution)의 길을 가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크로우 학파의 대중국 접근법은 달라요. 에어 크로우는 1907년 영국 외교부에서 독일을 담당했던 심의관급 관료였습니다. 아버지가 영국 외교관이고 어머니는 독일 사람이었습니다. 1870년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하고 난 뒤 독일의 국력이 30년 동안 엄청나게 커집니다. 당시 독일이 철강·선박 생산에서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합니다. 영국에서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빌헬름 2세 황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략적 의도는 무엇인지 알아내려 합니다. 결국 크로우에게 독일에 가서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렇게 나온 게 유명한 ‘크로우 보고서’라는 겁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빌헬름 2세의 전략적 의도는 강해진 독일의 힘을 바탕으로 우선 유럽을 제패하고, 이어 세계무대에서 영국과 겨뤄 도전하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의 부상을 막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프랑스, 러시아와 ‘트리플 앙땅뜨’(triple entente: 3국 협약)를 맺어 독일을 견제하기 시작한 겁니다. 키신저는 크로우의 보고서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당시 독일의 국력이 커진 만큼 독일 국내에서는 기업인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세력도 많았고, 그들과의 협력을 구축해 빌헬름 2세의 정책 방향을 바꾸도록 유도하면 되는 것인데, 영국이 잘못된 결론을 내려서 압박만 하다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크로우 학파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부상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는 겁니다. 미국에 도전해 패권을 가져갈 거라는 인식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대중 견제·봉쇄를 강화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문제는 미국 내에 키신저 지지 세력은 20%도 안 될 겁니다. 80%는 크로우 학파의 시각을 갖고 있어요. 민주·공화 양당이 공통적으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죠.”

미중 다툼 속에서 최선의 생존법
남북관계 개선과 긴장 국면 해소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 가지 옵션이 있을 겁니다.

첫째, ‘대중 균형론’입니다. 한국의 보수들이 주로 주장하는 것인데, ‘미국 편을 들어 중국을 견제(pro balancing)해야 한다’는 겁니다.

둘째, ‘중국 편승론’이 있습니다. 한명기 교수를 포함해서 진보 성향 역사가들은 병자호란 얘기를 하면서 ‘뜨는 중국, 지는 미국’을 잘 보고, ‘뜨는 중국’에 우리가 미래를 걸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셋째, ‘홀로서기론’이 있는데, 방법에 따라 적극적 홀로서기론, 소극적 홀로서기론으로 나눌 수 있어요.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과 조갑제, 정몽준 같은 분들은 우리가 핵무기를 보유해서 강대국 의존 없이도 설 수 있는 적극적 홀로서기론을 주장합니다. 어떤 분들은 구한말 유길준 선생이 이야기했던 대로 영세중립국이 되어 강대국의 정치에서 벗어나자, 그러니까 소극적 ‘홀로서기론’을 주장해요.

넷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논두렁론’입니다. 영어로 ‘muddling through’라고도 합니다. 일종의 이중보험전략(double hedging)이라고 할 수 있겠죠. 김 전 대통령은 소가 논두렁에서 풀을 뜯어 먹는데 오른쪽 논두렁에서만 풀을 뜯는 게 아니라 왼쪽 논두렁에서도 풀을 뜯는 것처럼, 우리도 미·중 사이에서 미국과는 안보를 잘하고, 중국과는 경제를 잘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편을 갈라서 어느 한 쪽을 배제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략이 미중 관계가 좋을 때는 원만하게 되는데, 요즘처럼 미중 관계가 좋지 않을 때는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미국의 동맹 일부가 됐기 때문에 미국과 함께 갈 수밖에 없고 중국과는 간접적·우회적으로 적이 될 수밖에 없어요. 제일 좋은 것은 남북 관계를 개선해 강대국 정치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외교적 구상을 창의적으로 제시하고,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허황되다’고 하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균형자론’과 관련된 이야기죠. 노 전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균형자’라는 것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하드 밸런싱(hard balancing)’이 아니라, 외교적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하는 ‘소프트 밸런싱(soft balancing)’을 하겠다는 겁니다.

미중 경합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최선의 길은 남북 관계 개선과 한반도의 긴장 국면을 없애는 겁니다. 자꾸 우리가 미국과, 중국과 어떻게 조율하느냐만 따지는데, 대중·대미 정책은 남북 관계에서 결정이 됩니다. 그런데 남북 관계는 보지 않고, 미국과 중국의 대결만 보고 있는 겁니다. 남북 관계가 개선돼 한반도 긴장이 완화되면 우리가 왜 한미동맹에 목을 걸겠습니까? 한미동맹에 목을 걸지 않으면 중국과 불편할 게 뭐가 있겠어요? 일본은 물론 모든 국가들과도 사이가 좋아질 겁니다.

우리가 노력만 하면 2030년까지 사실상의 남북통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데, 그렇게만 돼도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아세안과 다 좋은 관계를 맺어 북구형 국가가 될 수 있단 말입니다. 문제를 푸는 시발점이 남북 관계에 있는데, 자꾸 한미동맹의 틀 안에서만 남북 관계, 미중 패권경쟁을 보지 말자는 게 제 지론입니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최근 서울에 와서 미국을 겨냥해 ‘패권주의와 일방주의로 강권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중국은 한국의 사드 배치를 전후해 우리 경제에 대한 보복조치를 사실상 유지해왔습니다. 중국도 요즘 중화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전체주의와 국수주의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한국이 중국을 움직일 수는 없겠지만 중국에 한국을 ‘경시할 수 없는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주려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현명하고 명민한 정책을 펴야죠. 사드 배치는 대북 효과가 없다는 게 다 알려진 거 아닙니까. 그런데 미국이 압박을 가한다고 해서, 국내 보수세력이 정치적 압력을 가한다고 해서 수용한 것엔 문제가 있었죠.”

중국, 사드 때 뒤통수 맞았다 생각
한반도 중거리미사일 배치에 단호

-그렇다면 지금 미국에 사드 철수를 요구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어렵죠. 2017년 10월 말에 남관표와 쿵쉬안유(孔鉉佑)가 합의한 것이 3불(不) 아닙니까. 첫째, 추가 배치를 안 한다. 둘째, 미국 주도의 동북아 미사일 방어체제에 한국이 참여하지 않는다. 셋째, 한·미·일 3국 동맹 체제에 가입하지 않는다. 세 가지 모두 현실적으로 어려운 건데, 상식적인 선의 합의에서 끝나기는 했습니다. 저도 3주 전에 베이징에 가서 주요 인사들을 만났는데, 사드 문제와 관련해 시진핑 주석이 저렇게 화를 낸 데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고 봅니다. 2016년 6월 당시 황교안 총리가 동북 3성을 방문한 뒤에 베이징에 가서 시진핑 주석을 면담합니다. 시진핑 주석이 사드 문제를 묻자 황 총리는 ‘절대 배치 안 한다’고 확답을 해줬다는 겁니다. 한국 정부가 2017년 1월 갑자기 사드 배치를 결정하고, 이 과정에서 중국과 협의도 안 했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서는 완전히 배신당했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공산당 유일 지도체제 내에서 시진핑 주석이라는 최고 영도자가 그런 인식을 갖고 있으니 누구도 이야기를 못 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정부가 중국에 다 설명을 했습니다. 사드 기지의 엑스밴드 레이더 서쪽으로 산맥이 있어서 중국은 감시 범위에서 벗어난다고요. 그랬더니 중국 고위 인사들은 저에게 ‘다 안다. 문제는 한국 정부의 자율성이 그렇게 없어서야 한국과 어떻게 외교적 협력을 해 나갈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중국의 최고 지도자에게 약속한 것을 상의도 통보도 없이 뒤집는데 그런 국가와 뭘 할 수 있겠느냐’는 불신이 아직도 해소되고 있지 않는 겁니다.

사드 문제가 다시 나오는 것은 미국의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이 일본에 와서 ‘INF(중거리 핵전력협정)이 폐기됐으니까 대중 견제를 위해서 일본이나 한국에 중국을 겨냥한 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배치할 수도 있다’는 발언을 했어요. 우리 정부가 ‘노(NO)’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측은 아직 배치 안 된 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얘기할 수는 없으나, 사드 문제 때처럼 확실하고 단호하게 얘기 해두지 않으면 한국 정부가 사드 배치 때처럼 결정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중국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필요해요. 우리가 중국에 ‘사드는 중국에 위협이 안 된다’고 100번을 이야기해도 ‘위협’이라는 것은 인식(perception)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인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위협을 받는 상대방이 위협이라고 인식하면 그들에게는 문제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도 그런 시각에서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제가 친중 인사라고 낙인이 찍혀 있는데 (웃음), 중국이 1979년 베트남 침공 이후에 중국이 주변 국가에 공세적 군사행동을 한 게 있나요? 2010년 센카쿠 열도(중국 이름으론 다오위다오)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의 외교적 실수로 충돌 일보 직전까지 가고 인도와의 국경 분쟁이 있긴 합니다만.”

-남중국해에서 필리핀·베트남과 영유권 갈등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외교적 논쟁이 있는 건데, 역사적 연고권이 있다고 해서 자기 영토라고 우기는 것과 그렇지 않은 지역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하는 건 다르다고 봅니다. 남사군도(南沙群島), 서사군도(西沙群島), 황암도(黃岩島) 세 개 섬을 이어 구단선(九段線)을 그려 중국이 수·당 시대부터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그런데 구단선을 그어 해상통로를 봉쇄하겠다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섬이 자기네 영토이니 12해리 안쪽에 들어올 때는 중국의 허가를 받으라는 것이지, 12해리 밖의 해상에선 항행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어요. 물론 서사군도, 남사군도의 무인도를 인공 섬으로 만들어서 공군 기지를 세우는 게 문제가 되고 있죠.

중국이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강권적 행동을 보이고 있다고도 볼 수 있죠. 중국이 아무리 지난 150년 동안 치욕적인 역사를 겪었다 하더라도 대국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소국처럼 문제를 풀고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홍콩·위구르·티베트는 내부 문제
국제 이슈로 삼는 건 바람직 못해

-중국 지도부가 홍콩 민주화 시위를 강경 진압을 했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1950년대 중반 위구르와 티베트, 1989년 천안문 사태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중국 내부 문제입니다. 국제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홍콩 문제라는 것은 중국이 아무리 배후 조종을 하더라도 홍콩 행정청과 홍콩 입법회가 결정하면 되는 겁니다. 아직 중국 공안이나 인민해방군이 투입돼 진압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 문제를 너무 중국 정부 탓으로 돌리는 것에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홍콩이나 티베트 문제는 분리주의 문제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국제화시켜 보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옌쉐퉁 교수는 중국의 고대 철학자인 순자를 인용해 설명하는데, 특정 국가가 세계적 지도국가로 가는 데에는 네 가지 길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가 왕도의 길. 왕도의 길은 덕치가 주를 이뤄요. 옛날 주나라 왕은 힘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모든 제후국이 숭상을 했어요. 둘째 패도의 길, 패권입니다. 국력도 적당히 있고 도덕성도 적당히 강조를 하면서 천하의 일부를 통치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강권의 길입니다. 강권은 법도도 없고 덕치도 없고 힘이 조금 세다고 해서 가까운 이웃을 무력으로 침공해 점령하는 천인공노할 행동입니다. 마지막으로 옌쉐퉁이 꼽은 길은 ‘아네모크래틱(anemocratic)’이라고 해서 ‘변덕스러운 리더십’입니다. 꽃 중에 아네모네라고 있잖아요. 바람에 잘 흔들리는…. 옌쉐퉁은 트럼프를 비판하기 위해 ‘아네모크래틱’이라는 말을 만든 것 같아요.

옌쉐퉁 교수는 도덕적 현실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해요. 중국의 지향은 왕도의 길로 가야 한다고 주장해요. 국력만 가져서 밀어붙이는 패권의 힘으로는 천하를 통치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중국의 행태를 보면 왕도로 가겠다고 하면서, 시진핑 주석은 덕치를 그렇게 강조하면서, 법과 질서, 다자주의 등 좋은 것을 다 이야기하면서, 동중국해에서는 패권의 행동, 남중국해에서는 강권의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중국 국력이 빠르게 커지다 보니
스스로도 전략적 포석 못한 것 같아

-한국의 어떤 중국 고전 연구자는 중국의 요즘 이런 행태를 ‘표리부동(表裏不同)’, ‘명실상이(名實相異)’라고 표현하더군요.

“그렇지 않아요. 나는 동의하지 않아요. 중국은 2000년 이후 지난 20년 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었어요. 중국은 일대일로 전략(新실크로드 전략)을 내놓고 ‘대전략’이라고 하는데 저는 대전략이라 보지 않아요. 중국은 앞으로 20년을 어떻게 열어갈지 잘 모르고 있어요. 중국은 2000년대 들어오면서 ‘공산당 창건 100주년이 되는 2021년까지 소강(小康)사회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내걸었습니다. 소강사회는 중국 인민의 80%가 유족하게 살 수 있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에 중국이 선진국 문턱을 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원래의 ‘중국몽’은 이겁니다. 중국은 아직 사회주의적 성격의 개발도상국가인데, 중국이 완전한 선진국에 들어서는 걸 2049년으로 보는 겁니다. 시진핑 주석이 취임하면서 얘기한 중국몽은 이것입니다. 첫째, 국가 부강. 둘째, 민족중흥. 여기서 민족은 한족(漢族)이 아니라 중국민족입니다. 셋째, 인민행복. 3대 목표예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단계적, 조작적 목표를 세운 게 2021년 소강사회 건설, 2049년 중국의 선진국화입니다.

저는 중국이 아직도 혼미스럽다고 봐요. 중국공산당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중국 국력이 부상했고, 부상하는 국력에 맞게 어떻게 전략적 포석을 해야 되는지에 대한 확실한 답은 없고, 내부 논쟁은 계속 진행 중입니다. 그 중 하나가 일대일로 전략입니다. 지금도 중국에 가서 고위층 인사들에게 물어보세요. 어떤 사람은 ‘화평발전론’을 펴고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화평굴기’라고 이야기하고, 나이든 관료들은 대부분 ‘도광양회’가 중심이 돼야 한다고 답합니다.

그런데 외교부는 자신들의 국력이 되기 때문에 책임대국론을 내세우고, 옌쉐퉁 교수나 인민해방군에선 ‘유소작위’로 ‘대국굴기’ 해야 한다고 얘기해요. 그래서 ‘분발유위’(奮發有爲)라는 표현을 써요. ‘분발해서 떨쳐 일어나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상황 대처 방식이 다 다르게 나오는 겁니다. 본심이 어떤 게 따로 있는데, 명분과 행동을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국력이 커진 중국이 급변하는 국제 환경에 즉흥적으로 대응을 하다 보니까 남중국해에서는 강권적 행동을, 동중국해에서는 패권적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쪽에 가서는 원조를 막 주면서 왕도의 길을 보입니다. 혼재된 전략을 보이는 겁니다. 어떤 나라가 불과 20년 만에 세계 1~2위 초강대국이 됐다면 전략적 포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엄청나게 고민될 것 아닙니까?

하나 분명한 것은 중국은 반사적(reactive)인 국가이지, 주도적(proactive) 국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미국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대응하는 것이죠. 미국이 ‘피봇 아시아(아시아로의 회귀)’를 내놓으니까 ‘일대일로’를 해서 ‘피봇 웨스트’, 서쪽으로 트는 겁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1985년 덩샤오핑이 인민해방군 해군의 전력이 거의 없을 때인데, 해군사령관 류화칭(劉華清)에게 해군의 미래전략을 구상해보라고 지시합니다. 그 때 제1열도선, 제2열도선, 원양으로 나누면서 2000년까지는 제1열도선을 커버하고, 2020년까지는 제2열도선을 커버할 수 있는 해군력을 키우겠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어 2050년까지는 5대양 6대주를 누빌 수 있는 대양해군을 만들겠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것은 그냥 말로 하는 개념 계획일 뿐인데, 미국 펜타곤에서는 이 보고를 있는 그대로 받는 겁니다. 미중 패권경쟁이라는 것은 실제 존재하는 것보다 인위적으로 부풀려지고, 부풀려진 게 다시 현실이 된 게 많습니다.”

중일 관계, 잘 유지되는 것 아냐
땜빵 외교에 진실의 순간 올 것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짜면서 한국과 일본에 중국 견제에 가담하라고 합니다. 일본은 여기에 가담했는데, 최근에 보면 일중 관계는 잘 유지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결이 뭘까요?

“중일 관계가 잘 유지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아베 신조 총리가 (중국 측에) 고개를 많이 숙였고, 사실 인도-태평양 전략은 처음에 일본이 대중 견제를 위해 만들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미국이 참여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중 관계에도 진실의 순간이 올 것입니다. 판이 깨질 가능성이 있어요. 사실상 중일 사이에 땜빵 외교가 이뤄지지 않나 생각합니다.”

-2010년 전후에 중일 대립·충돌이 요란했는데. 요즘은 잠잠해졌습니다.

“주변 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기본전략은 시진핑 주석이 말하는 ‘친성혜용’(親誠惠容) 정책입니다. 주변 국가들과 친선 관계를 만들고, 성의를 다해 대하고, 혜택을 베풀고, 포용적 자세를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중국으로선 주변 국가들과 각을 세울 필요가 없어요. 14개 나라들이 중국과 육지로 국경을 맞대고 있고, 바다 건너까지 넓히면 21개 나라가 중국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 나라들과 각을 세워 좋을 게 뭐 있겠어요.”

과거사·독도 문제 정리 않은 채
일본이 정상국가 되기는 힘들다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적 역할을 일부 넘겨받고, 미국도 그러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한·일 간의 지소미아(GSOMIA·군사정보보호협정) 사태도 이런 연장선상에 있는데, 일본이 재무장을 하게 된다면 한국은 어떤 전략을 택해야 할까요?

“쉽지 않겠죠. 일본이 보통국가가 되려면 평화헌법 개정의 문제가 있어요. 그럴 경우 일본이 타국에도 군사행동을 할 수 있게 되고 독도 문제 등으로 한일 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겠죠. 이 상황에서 미군이 철수해 동북아에 힘의 공백이 생기면 홉스적인 무정부 상태가 올 수도 있어요. 일본이 평화헌법을 개정해서 정상국가가 된다는 게 과연 일본 안보에 도움이 될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방법은 있겠죠. 과거사 문제를 명확히 하고, 독도의 한국 영유권도 인정하며, 한일 친선관계를 강화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어요. 반대로 과거사 문제나 독도 문제가 정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이 평화헌법 개정을 통해 정상국가가 된다면 우리의 전략적 포지션도 변화하기 어렵고,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 것입니다.”

-일본이 우경화 경향을 보이는 상태에서 한일 관계가 개선되기 어려워 보입니다.

“지도자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겠죠. 일본 최고지도자가 위안부 할머니들한테, 빌리 브란트나 앙겔라 메르켈 식으로 무릎 꿇고 진정한 사죄를 하고, 징용공 피해자의 마음을 치유해 낼 수 있다면 가능할 수 있다고 봅니다.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지도자의 결단만 있으면 됩니다. 한일 간에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는 이겁니다. 일본에서는 ‘고노, 무라야마, 간 나오토의 담화 등을 통해 통렬한 반성과 사죄를 해왔는데, 한국이 왜 그러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문서로 사죄를 한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겁니다. 피해자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살아 있는데요. 피해자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참된 사죄가 필요합니다.”

-일본이 그렇게 참된 사죄를 하고 나서면 자민당과 우익 세력들은 존립 근거가 무너진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지도자의 담론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베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갖고 지지기반을 넓혀 가면서, 새역모 등 우파 어젠다에 베팅해서 정치세력과 지지기반을 키웠어요.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의 아들이 리더가 된다면 다를 수 있겠죠. 일본의 지도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남북 관계 20년 역사에서 아쉬운 점
어렵게 합의한 것들을 이행 못 했다

-교수님께서 개인적으로 지난 20년 간 남북관계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무엇입니까?

“찾아온 기회를 놓친 것이죠. 6·15 공동선언을 이행 안 한 것, 10·4 정상 선언을 이행 안 한 것, 판문점 선언을 이행 안 한 것, 평양 선언을 이행 안 한 것. 남북이 서로 문서로까지 합의한 것은 어떤 대내외적 압박이 있어도 이행했어야 되는데, 그게 제일 아쉽습니다. 그렇게 합의문을 만드느라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쳤습니까? 그런데 만들어 놓고도 이행을 못 하니 이게 무슨 꼴입니까.”

-김정은 체제는 변화할 수 있을까요? 북핵 문제가 안 풀려도 남북 평화공존이 가능할까요?

“북한의 변화는 얘기 안 하는 게 좋아요. 북한도 인민의 삶을 행복하게 하고, 부국강병하기 위해서는 변해야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그걸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북한 스스로 알아서 하고 있고, 김정은 위원장이 많은 점에서 보여주고 있잖아요. 시장 기제도 많이 들어가고, 26개 경제특구도 만들고, 농업도 혁명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과학기술은 인센티브 베이스로 큰 업적을 내고 있어요. 북한이 변하고 있어요.

저는 대북 제재를 완화시켜 주면, 북한의 개혁개방과 시장화는 더욱 활성화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럼 북한에도 시민사회가 열리게 되겠죠. 북한 지도자들도 그런 제약 속에서 나라를 운영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자꾸 어떤 상황을 가정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행동으로 보여줘야죠.

국제사회가 북한이 개혁개방을 하고 시장화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러려면 대북 제재를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하는데 지금은 제재를 위한 제재를 하면서 제재가 하나의 종교처럼 돼버렸어요. ‘맥시멈(maximun) 제재’라는 것에 중독이 돼 있는 상태에요. 제재는 북한의 전략적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제재 그 자체가 목적이 돼 있어요. 마찬가지로 한미동맹도 대한민국의 국익 신장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인데, 한미동맹 그 자체가 목적처럼 되면서 남북문제를 풀기 어려워진 겁니다.”

남북한 강경세력이 적대적 제휴
깨어있는 시민들이 행동 나서야

-남북관계도 외교관계도 합의 해놓고 약속을 못 지킨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독일통일 전에 서독이 그랬던 것처럼 여야 간에 정권이 바뀌어도 국가 간 약속이나 협정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써야 하겠습니까?

“‘깨어 있는 시민’이, ‘행동하는 양심’이 그걸 만들어줘야죠. 현실주의 이론에 따르면 정치는 국경에서 멈춰야 합니다. 그런데 옛날의 국가 중심적 국제관계에서는 그 이론이 활용되는데, 지금은 국가의 경계가 정보기술(IT), 인터넷 등에 의해 허물어지고, 비국가적 행위자들 사이에 비국가적 연합(transnational coalition)이 형성돼 있어요. 동맹 형성 가운데 선의의 제휴뿐만 아니라 적대적 제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보수 세력이 ‘북한을 때려 부수고 흡수 통일하자’고 하면 북한의 군부와 보위부는 ‘이것 봐라, 남쪽을 못 믿는다’고 하면서 핵무장 강화의 근거로 삼습니다. 남한의 보수적인 분들은 국익을 위해 자기들 이념적 시각에서 강조하지만, 오히려 북한을 더 강경하게 몰아세우면서 남북관계를 어렵게 만듭니다.

한국의 민족주의 세력과 일본의 우익 세력도 적대적 제휴 관계라고 할 수 있죠. 일본에서 한 마디를 하면 한국에서 반발하고, 다시 일본의 우파들이 다 모여서 망언을 쏟아냅니다. 일본 우익과 한국의 민족주의 세력은 가장 큰 적인데 이런 식으로 적대적 제휴관계가 형성되는 겁니다. 결국 국제관계를 위해선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지역적 협력·화해, 자유주의, 공동체주의의 모집단이 커져야겠죠. 그래서 깨어있는 시민, 행동하는 양심들이 많아져서 좋은 정치인을 뽑아주면 좋은 정치, 좋은 외교를 지속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흔히 외교 없는 나라의 비극을 거론할 때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폴란드를 거론합니다. 폴란드는 나치독일과 소련으로부터 분할 점령을 당하고 종전 후에는 동부 지역을 소련에 빼앗겼습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선 주변 4강과의 외교가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 국민이 외교를 알고, 외교를 하는 국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국민들이 많이 알아야 합니다. 외교하려면 제일 중요한 게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둘째는 내부적 합의와 단합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셋째, 정확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처럼 가짜뉴스가 횡행하면서 가짜뉴스를 활용해 잘못된 정치적 주장을 하면 국내적 합의도 못 얻고 외교도 망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깨어 있는 시민들, 소위 뉴스와 정보·지식의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좋은 지도자를 뽑고 좋은 외교관들이 나오게 해야죠.”

신냉전 질서로 회귀해선 안돼
한미일 못지않게 한중일 공조 중요

-현실적으로 신냉전 질서,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로 회귀하려는 복원력이 강한 것 같은데, 동아시아에서 그런 것을 끊어낼 시기라고 봅니다. 새로운 것도 중요하지만 과거로 돌아가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피니언 리더나 디시전 메이커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합니까?

“보수 언론들을 포함해서 보수 세력이 북·중·러의 북방삼각 구도와 한·미·일의 남방삼각 구도가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조장하는 게 현실입니다. 한·미·일 3국 공조 못지않게 가장 중요한 것이 한·중·일 3국 공조입니다. 어느 누구도 한·중·일 3국 공조에 대해 관심을 안 줘요.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당연히 한·중·일 3국 공조를 강조해서 새로운 공통점을 찾아내야 합니다. 지금은 경제 분야 논의만 다루고 있는데 안보 쪽 논의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데 과거 냉전의 관성에 젖어 냉전의 경로종속성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럽은 이미 확연하게 벗어던졌고, 우리는 아직도 그 늪에 빠져 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우리 국민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지요?

“문재인 정부가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동안 내세운 방향은 옳다고 봅니다. 평화 번영, 공동체를 강조하고 우리가 외교의 중심이 되겠다는 것인데, 구조적 제약 때문에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힘을 합쳐, 위기 극복의 힘이 우리 안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내부가 나뉘어져서 힘들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 노무현 전 대통령의 ‘깨어있는 시민’이 접목돼서, 그 분들이 합의와 단합의 원동력이 된다면 강대국 외교라는 구조적 제약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인터뷰: 이양수 편집인
정리: 김하영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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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당한 이란의 2인자 2020년 새해를 맞이하는 기쁨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 3일 새벽 0시 47분, 미국이 운용하는 드론 한 대가 이라크의 바그다드공항을 나서는 자동차 두 대에 폭탄을 몇 발 떨어뜨려서 타고 있던 사람 열 명을 모두 사살했다. 잘 알려진 대로 미국이 노린 것은 이란의 특수부대인 쿠드스군 사령관이자, 이란 대통령인 하산 로하니에 이어 사실상 제2인자인 거셈 솔레이마니였다. 이라크의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암살 사건은 삽시간에 전 세계에 알려졌고, 트럼프의...

[고한석 CES 참관기] 세계 서비스 노동시장의 대격변이 꿈틀댄다

서울디지털재단의 고한석 이사장이 지난 주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 2020(CES 2020)에 다녀왔다. 서울시는 CES 2020의 스타트업 전문관인 ‘유레카 파크’에서 서울 지역의 스타트업 회사 20개와 함께 ‘서울관’을 개설하였다. 서울디지털재단은 서울시로부터 해당 사업을 위탁받아 기획부터 운영까지 총책임을 지고 진행하였다. ※관련 언론 보도: https://news.joins.com/article/23678216 세계 최대의 전자제품 쇼가 된 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