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하노이에서 북미 정상들이 두 번째로 만났다. 20세기에 가장 치열하고 절망적인 전쟁을 치른 두 나라 정상들이 흡사한 전쟁을 치른 나라의 수도에서 만난 ‘사건’을 기구하다고 해야 할까. 회담 ‘결렬’이란 표현까지 나왔지만, 그래도 이들 2자 또는 3자간의 만남은 분명히 절망이 아니라 희망적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 희망을 실현하려면 과거를 과감하게 청산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미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종전’ 이후를 설계하고 있는 그들의 행보는 향후 더 빨라질 수도 있다.

최근 한글판이 출간된 <종전의 설계자들>의 저자 하세가와 쓰요시는 동아시아 평화와 안정의 또 다른 핵심 당사자인 일본의 종전과 전쟁책임 문제를 거론하면서 “이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3·1운동 100주년, 2차대전 종전 74년. 일본계 미국 역사연구자인 그가 얘기하는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일본의 전쟁책임 문제는 의미심장하다. [편집자]

 

[한승동 / <피렌체의 식탁> 편집인]

여전한 일본의 식민주의, 그리고 3·1운동 100년

“종전(終戰)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이토록 일본 역사에서 중대한 사건인데도 왜 지금까지 별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는가. 거기엔 천황의 전쟁책임이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 우리는 전쟁 뒤(戰後)의 인간이지만,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해서는 이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2월 말에 번역 출간된 <종전의 설계자들>(메디치, 일본어판 <암투> 2011년, 영어판 <Racing the Enemy, 2006년>)의 저자 하세가와 쓰요시(長谷川毅, 캘리포니아대 샌타바버라 캠퍼스 명예교수)가 <세카이> 2019년 3월호에 실린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 이케다 요시로(池田嘉郎, 도쿄대 교수)와의 대담에서 한 얘기다. 그 대담에서 하세가와 교수가 지적한 또 다른 몇 가지 문제도 우리로서는 흘려들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뒤 미국에서 소련사로 학위를 받고 그곳에서 활동해온 그는 미국이 냉전시절 소련과 대결하면서도 핵무기 사용 가능성은 될수록 억제하는 쪽으로 소련과 협의하는 등의 ‘리버럴’(자유주의적) 사고의 전통이 있는데 일본에는 그게 결핍돼 있다고 했다. 와다 교수 같은 사람의 얘기를 일본인 대다수가 거부할 정도로. 그 결과 소련(러시아)과의 관계나 이른바 ‘북방영토’ 문제도 일본과 소련(러시아)의 바람직한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전제로 놓고 접근한 고르바초프식의 진지한 해결책을 일본에선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이건 한일관계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장기적 안목이 아니라 단기적·정치적 이해타산에 집착한다. ‘북방영토’와 관련해 그 희생자라고 할 수 있는 아이누족에 대한 진지한 고민, 즉 식민주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결여돼 있다는 점도 하세가와는 지적했다.

이 식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부재는 아베 신조 집권 이후 더욱 도드라진 일본 주류 우파세력의 역사수정주의(한국으로 치면 ‘뉴라이트’)적 세계관의 주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제 역시 홋카이도와 쿠릴열도의 아이누 선주민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제가 강점했던 조선과 대만, 그리고 중국에 대한 일본 우파의 뒤틀린 시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지금의 역사교과서 문제나 독도(다케시마)문제,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문제 등이 일본 우파의 편협한 식민주의적 사고·고정관념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징용공’ 배상문제 일본군 ‘위안부’ 사죄·배상 문제, 초계기 문제, 그리고 갈수록 태산인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문제 등에 대한 일본 우파세력의 대응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앞의 인용문에서 얘기한 일본의 ‘종전’문제, 천황의 전쟁책임 문제, 일본의 전쟁책임 문제. 하세가와 교수의 <종전의 설계자들>에서 천착하고 있는 핵심문제들 중의 하나인 이들 문제를 100년째를 맞이한 3·1운동과도 연관지어 살필 수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

“위대하고 성실하며 비장하고 정확 명료한 민의를 바탕으로…세계혁명사에 신기원을 열었다. 조선 민족에게 이러한 영광이 나타나…움츠러든 우리 중국민족을 더욱 부끄럽게 했다…보라, 조선인의 활동을…조선인에 비해 우리는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중국공산당 창설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베이징대의 천두슈陳獨秀가 1919년 3월 <매주평론>에 쓴 ‘조선독립운동의 감상’의 한 구절이다.(강덕상 <여운형 평전 1>) 바로 조선의 3·1운동에서 그가 받았을 충격이 느껴진다.

종전의 설계자들과 히로히토

<종전의 설계자들>을 보면,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천황의 측근인 내대신(內大臣)으로 일본 황실 안팎의 궁중정치의 실세였던 기도 고이치(木戸 幸一)가 일본 항복 직전인 1945년 8월 12일 천황을 알현했다. 기도는 당시 미국이 일본에게 압박하고 있던 항복 조건을 수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일본이 내몰린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 요구를 받아들여 서둘러 항복해야 한다는 이른바 ‘화평파’ 주장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당시 군국일본의 국시라고도 할 수 있는 ‘국체 호지’를 부정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결국 그는 그날 천황 앞에서 바로 그 고민을 털어놨다. 그때는 더 깊이 고민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이어 또 다른 원폭이 언제 투하될지 알 수 없었고, 만주로 내려오던 소련군은 일본 본토까지 금방 삼킬 기세였다. 화평파 반대쪽에는 그때까지도 결사항전을 부르짖는 계전파(전쟁계속파)가 버티고 있었으므로 천황의 답변 한 마디가 전쟁과 일본의 운명을 가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뜻밖에도 천황은 기도의 그런 고민을 한꺼번에 다 날려버릴 해결책을 제시했다. 기도는 천황의 그 말을 들었을 때 “눈이 번쩍 뜨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그때 미국이 제시한 일본 항복조건(당시 국무장관이던 제임스 번스가 정리한 이른바 ‘번스 회답’)의 핵심은 “일본이 항복한 때로부터 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 권한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에 종속된다”는 제1항과, “궁극적인 일본의 국가체제는 일본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한 의사에 따라 정해질 것”이라고 한 제4항이었다.

‘번스 회답’에는 일본 화평파와 계전파가 모두 가장 듣고 싶어 했던 천황과 황실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었다. 기도는 패전국이 될 테니 권력이 점령군 사령관에게 종속된다는 건 당연하다 하더라도 천황과 황실, 즉 ‘국체’에 대한 확답 없이 항복하는 건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건 국체 사수를 내걸고 최후의 일인까지 항전하자는 계전파의 파멸적인 주장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었다.

기도의 그런 고민에 “눈이 번쩍 뜨이는 듯한” 천황의 해결책이란 이런 것이었다.

“천황은 바로 번스 회답 속에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한 의사’라는 표현을 언급하면서, 국민이 황실을 지지한다면 황실의 안태(安泰)도 더욱 견고해질 것이므로 국민의 자유의사 표명을 통해 결정하는 것은 명백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언명했다.”(<기도 고이치 일기>)

천황은 번스 회답의 제4항에서 자신과 황실이 전쟁범죄 책임에서 놓여나 살 수 있는 구멍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그것을 미국이 제시한 타협안으로 받아들였음이 분명하다. 그 무렵 천황 역시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자신에게 유리한 항복조건을 받아내느냐에 쏠려 있었다. 그가 전세 불리를 자각한 뒤 처음에 생각한 것은 항복을 하더라도 적에게 강력한 타격을 입혀 가능한 한 많은 양보를 받아내겠다는 이른바 ‘일격 화평주의’였다. 그와 함께 그는 당시 중립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에게 중재를 알선해 미국 영국으로부터 더 유리한 양보를 얻어내는 방안에도 마지막까지 집착했다. 천황 히로히토의 그 집착은 8월 6일과 9일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 하세가와에 따르면 물론 원폭 투하 영향도 컸지만, 그 집착을 버리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9일 자정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대대적인 만주침공이었다.

미국의 한반도 분단, “일본을 독점하라”

소련군이 만주·한반도·홋카이도를 향해 물밀 듯 내려오자 미국도 다급해졌다. 미국은 10일부터 11일에 걸쳐 육·해군부와 국무부 3부 조정위원회를 열고 “본 스틸과 딘 러스크 소령에게 조선에서 미소 군사행동 범위를 결정하는 과제”를 내렸다. 그때 본 스틸이 벽에 걸려 있던 작은 극동지역 지도를 보면서 북위38도선을 분단선으로 그었다.

번스 회답이 정리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고, 그것은 11일 일본 쪽에 통보됐으며, 천황 히로히토도 바로 그때 번스 회답 제4항에서 자신이 살 길을 발견했다. 그가 보기에 패전 뒤 일본 국민의 의사대로 일본 정체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는 미국의 통보는 무조건 항복 요구를 사실상 포기한 것이었고, 일본 당신네들이 알아서 정리하라는 얘기였으며, 그것은 곧 천황과 천황제의 존속을 의미했다. 다만 미국이 그은 상한선은 일본 ‘국체’의 핵심 내용인 천황의 무소불위 통치대권, 즉 현실정치 개입만은 안 된다는 것이었고 히로히토는 그것을 냉큼 받았다. 그로써 그와 황실은 살아남았고, 대신 일본이란 나라는 통째로 미국에 넘어갔다.

태평양전쟁 시작 이후 변함없이 미국이 천명한 것은 일본의 조건 없는 항복, 즉 ‘무조건 항복’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스탈린에게 소련이 독일과 한창 전쟁 중일 때부터 소련의 극동전쟁 참전, 특 일본에 대한 소련의 공격을 거듭 요청한 것도 타협 없이, 그러나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일본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루스벨트나 그가 1945년 4월 12일 급서한 뒤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해리 트루먼이 걱정했던 것은 일본 본토 점령을 위한 전투 때 발생할 엄청난 미군 피해였다. 소련의 참전은 그것을 크게 덜어 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랬던 미국이 줄곧 종용해 오던 소련의 극동전선 참전 요구 태도를 버리고 어느 때부터 180도로 방향을 바꿔버린다. 미국을 그렇게 만든 것은 일본 패전 약 한 달 전인 1945년 7월 16일의 원자폭탄 실험 성공이었다. 그해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전후처리 관련 미국 영국 소련 정상회담(포츠담회담) 중에 그 소식이 트루먼에게 전달됐다. 트루먼은 그때부터 소련의 극동전선 참전을 막기 위한 방략 짜내기에 골몰했다. 소련의 극동전선 참전을 막기만 하면 그해 2월 4~11일 흑해 연안 얄타에서 루스벨트가 소련의 극동전선 참전 대가로 스탈린에게 약속한 사할린과 쿠릴, 만주에 대한 엄청난 이권(전리품)을 주지 않아도 되고 한반도를 포함한 일본을 온전히 미국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장제스의 국민당이 지배하는 중국대륙과 한반도, 일본 등 동북아시아 전체를 지배할 수 있게 되고 블라디보스토크 기지를 비롯한 소련 연해주 태평양함대의 태평양 진출 통로도 차단할 수 있게 된다.

일본이 조금만 더 일찍 항복했다면 트루먼과 미국의 반소 강경파들은 그 꿈을 이룰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황 히로히토와 대본영의 일본 군부 및 정부 지도자들은 계속 꾸물거렸다. 천황은 번스 회답을 받아 본 8월 11일, 12일쯤에야 미국이 제시한 형식상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14일에 어전회의를 열어 천황의 ‘성단’ 형식으로 계전파들 주장을 물리치고 그날 정오에 그것을 최종 확정했다. 거기에 불복한 계전파들은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천황의 항복 방송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아나미 고레쓰키 육군상 등은 할복자살했다. 그 며칠 사이에 한반도는 영구분단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분단 획정자들은 처음에 40년간의 신탁통치를 상정했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천황과 천황제는 일본 ‘패전’이 아니라 ‘종전’을 거쳐 ‘상징’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아남았고, 일본은 통째로 미국 손에 넘어갔으며, 대신 한반도가 아무런 합당한 이유도 없이, 그야말로 뜬금없이 분단 당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 지정학·지경학 구조를 결정지은 ‘사건’이다. 소련과 오스트레일리아, 중국은 천황의 전쟁책임을 물어야 하며 그가 직접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전범재판을 통해 그를 처형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으나 일본을 통째로 차지한 미국은 그런 요구를 모조리 무시해 버렸다. 당시 미국 내 여론조사도 압도적 다수가 천황의 전쟁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답했고 그들 중 다수는 천황을 처형하는데 찬성(33%)했다. 하지만 미국은 천황과 천황제를 살려 놓음으로써 일본에 대한 지배체제를 손쉽게 다지고 영속화할 수 있었으며, 냉전 붕괴 이후까지 일본을 확고부동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거점으로 확보했다.

한반도와의 악연, 영국의 중대한 역할

미국의 그런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영국이다.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영국 지도부는 줄곧 천황에 대한 전쟁책임을 묻지 말고 천황제를 온존시키겠다고 일본에 약속해 주는 것이 일본의 항복 시기를 앞당기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세가와는 미국이 번스 회답을 통해 항복 조건을 그렇게 타협하는 데에도 영국의 그런 조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영국 수뇌부는 아마도 전후에 천황제하의 친서방적 일본을 존속시키는 것이 소련의 대두에 대처하는 유효한 방안이라고 계산했을 것이다. 영국 리더들의 그런 계산은 19세기 러시아와의 ‘그레이크 게임’에 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유서깊다. 일본이 영국과 1902년 영일동맹을 맺을 수 있었던 것도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려던 영국의 그런 제국주의적 세계지배전략과 얽혀 있다.

이 영일동맹 덕에 일본은 1904년 중국 뤼순과 아산 앞바다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공격함으로써 전단을 연 러일전쟁을 배후의 위험 없이 감행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한반도를 완전히 차지했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통감이 됐고, 그는 그 때문에 4년 뒤 하얼빈의 역두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었지만, 일본과 짜르 체제의 러시아는 그 뒤 손을 잡고 만주와 조선 이권을 나눠가졌다. 부패하고 무능한 짜르 체제는 결국 1917년 혁명으로 무너진다. 일본의 대륙침공 야심은 그때부터 무르익어 가서 1915년 중국에 칭다오 등이 있는 산둥반도와 자오저우만을 장악하고, 남만주와 외몽골 일부 조차까지 요구한 ‘21개조’를 들이대고, 1931년 만주침략과 1937년 중국 본토침략으로 치닫는다.

일본의 산둥반도 장악은 바로 영일동맹 때문에 손쉽게 이뤄졌다. 그 땅은 원래 1900년 ‘의화단 사건’을 기화로 중국에 군대를 앞세우고 밀고 들어온 서구 열강의 하나였던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곳이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일어나자 독일은 유럽전선에 집중하느라 산둥 등에는 손 쓸 겨를이 없었고 그 틈을 타서 일본이 밀고 들어갔다. 그때 명분이 독일과의 전쟁 당사국이었던 영국의 동맹국이라는 것이었다. 영국의 동맹국이라는 것이 독일에 대한 일본의 선전포고 근거였던 것이다. 그때의 21개조 요구가 지식인들을 비롯한 중국 대중들을 분기시켰고 그것이 중국 근대의 또 다른 시작을 알린 1919년의 ‘5·4운동’으로 이어진다. 이 중국의 5·4운동에 그해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천두슈陳獨秀가 부끄럽다며 중국 청년들의 권기를 촉구한 뒤, 5·4운동을 주도한 또 한 사람 푸쓰녠傅斯年도 ‘조선독립운동의 신교훈’에서 “조선인의 굳센 힘을 목도하게 돼 우리들은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창피함을 느낀다”면서 “중국학생들은 조선학생들로부터 불굴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호소했다.(고지마 신지 ‘3·1운동과 5·4운동-그 관련성’, <여운형 평전 1> 강덕상, 역사비평사 2007)

재일동포 역사학자 강덕상의 <여운형 평전>에 나오는 관련 부분을 좀 더 인용해 보겠다.

“중·일 양국이 산둥문제를 두고 팽팽하게 대립하던 중에 3·1운동에 관한 뉴스가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 지사들은 매일 중국의 각 언론을 통해, 중국의 이웃에게 잔인한 행동을 하는 장본인은 누구인가, 어느쪽이 야만인가, 일본 병사는 왜 조선인 기독교도들을 불태워 죽였는가, 헌병은 왜 민중에게 방아쇠를 당겼나 등 일본의 잔학상을 세계에 발신했고, 조선의 비극이 중국에도 닥쳐올 것이라고 경종을 울렸다.”

그때 베이징 정부는 만주의 군벌 장쭤린에게 훈령을 보내, 조선인들의 독립운동 지원요청을 단호히 거절하라고 지시하는 등 일본에 영합하고 있었고, 거기에 분노하던 중국 지식인과 학생들에게 불을 붙인 것이 3·1운동이었다. 그것이 5·4운동을 촉발시켰다. 루쉰(鲁迅)도 3·1운동이 중국인민에게 “정면의 모범이 되어 상호 우의연대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고 썼다. 그해 4월 초에 간디가 주도한 인도의 제1차 사탸그라하 운동(Satyagraha, 비폭력·불복종·비협력 저항운동) 역시 3·1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들도 있다.

물론 3·1운동이 그 모든 운동들의 시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 전에 중국 신해혁명(1911)이 일어났고, 제1차대전 중에 러시아 10월혁명(볼셰비키)이 일어났으며,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고, 21개조에 이르는 중국인들의 광범한 저항이 있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구성은 그런 국제정세 변화를 잘 읽고 기회를 포착해서 기민하게 대응한 주체적 독립운동이었고, 그것은 또 다른 운동들을 촉발했다.

장기 20세기 청산과 21세기

100년이 지났지만 3·1운동의 목표는 여전히 달성되지 못했다.

외세의 직접 통치에선 벗어났지만, 나라는 분단되고 동족이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남북 모두 주변 대국들의 눈치를 보며 서로 오가지도 못하고 있다. 하세가와도 지적했듯이, 일본의 전쟁책임 문제는 청산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득을 본 것은 그것을 온존시킨 세력뿐. 따라서 세상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청산되지 못한 20세기의 유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장기 20세기의 과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고는 진짜 21세기도 시작될 수 없을 것이다.

한승동 / <피렌체의 식탁> 편집인, 전 한겨레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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