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편집 2019. 09-19. 08:00
성조기와 금성홍기를 흔들며 트럼프 대통령을 환영하고 있는 하노이 시민들. Official White House Photo by Joyce N. Boghosian
  • 1986년 도이모이, 2001년에야 미국과 무역협정
  • 제제 해제돼도 무역협정 없으면 경제성장 효과 거의 없어
  • 공산당 “시장경제체제는 인류 역사의 산물” 재인식
  • 중국식 특구 모델, 베트남식 전면 개방 모델. 북한 선택은?
  • 베트남은 시장경제 체제 경험 북한보다 많아
  • 박항서 신드롬. 유교 문화 공통점 주목
  • 베트남이 ‘전쟁 책임 사과’를 원하지 않는 이유
  • 사회주의+유교=높은 교육열: 다른 저개발국가와 다른 점

‘하노이 선언’은 없었다. 회담 장소 선정부터 ‘베트남식 모델’이 부각되며 대북제제 완화와 본격적인 북한 경제 개방에 관심이 쏠렸으나, 북미 정상의 합의는 다음을 기약하게 됐다. 베트남도 1986년 ‘도이모이’(Đổi mới/ 𣌒𡤓, 쇄신)를 선언하며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개방에 나섰지만, 미국이 베트남 경제제제를 해제한 것이 1994년이었고 무역협정을 체결한 건 2001년이었다. 베트남이 WTO에 가입하고 경제성장에 탄력이 붙기까지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베트남 모델’의 속사정을 들여다보기 위해 이번 주 <피렌체의 식탁>에는 베트남 현지 기업인을 초대했다. 곽문영 DS인터내셔널 대표는 1994년부터 25년 동안 베트남에서 사업을 해오며 ‘베트남 모델’을 현장에서 지켜봐왔다. [편집자]

[곽문영 / DS인터내셔널 대표]

제제 해제 이후에도 무역협정 없으면 경제 발전 힘들어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게 된 계기는?
“1981년부터 삼도물산에 다니고 있었다. 삼도물산은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있었는데 1991년 베트남에도 진출했다. 당시 베트남은 미국의 경제제제를 받고 있어서 미국은 안 되지만 유럽에는 수출이 가능했다. 하지만 유럽은 시장이 작아서 베트남 공장의 생산 비중은 크지 않았다. 그러다 1994년 2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엠바고(Embargo, 금수조치)를 해제하면서 영업책임자였던 내가 베트남 공장으로 가게 됐다. 그런데 1년 만에 모회사가 부도났고, 1996년에 내가 베트남 생산 시설을 인수 받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초반에는 많이 힘들었다. 1994년 미국이 제제를 풀면서 미국 시장에 대한 기대를 하고 간 건데, 미국이 1994년 제제조치를 해제하고 1995년 국교정상화도 됐지만 무역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국은 보호무역의 전통이 남아 있어서 별도의 무역협정을 체결하지 않으면 관세가 40%가 넘어 수출 경쟁력이 없다. 2001년 12월에야 비로소 베트남과 미국이 무역협정을 체결했고, 섬유협정을 체결하는 데는 더 걸렸으며, 2007년이 베트남이 WTO에 가입하면서 빠르게 성장한 것이다. 지금은 대미 수출의 절반 이상이 섬유와 신발이다.”

제제 해제 이후에도 무역협정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지정학적 이해관계도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베트남 남동부에 캄란만이라는 항구가 있는데 여기가 군사 요충지다. 베트남 전쟁 때까지는 미군의 태평양 함대가 주둔하면서 전쟁 물자가 오가는 창구였고, 공산화 된 이후에는 1979년부터 소련이 해군기지로 이용했다. 미국이 여기를 요구하는데, 베트남 입장에서는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2002년에 소련 해군 철수 이후에는 아무에게도 개방하지 않다가 최근에 일본과 미국 함정의 기항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신뢰 회복이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베트남은 선제적으로 캄보디아에서 철군하는 등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중국은 특구 모델, 베트남은 전면 개방 모델

베트남이 개방 경제로 나가게 된 이유가 뭘까.
“얼마 전 <경향신문>에 보도 된 베트남 사회과학원 팜반득 부원장 인터뷰에 잘 나와 있다. 메콩 델타 지역은 1년에 3모작도 가능하고, 그 외 지역도 기본 2모작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쌀이 모자란 쌀 수입 국가였다. 그러다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고 개방을 한 지금은 세계 2위의 쌀 수출국가다. 팜반득 부원장은 ‘시장경제 자체가 자본주의가 아니라, 인류 역사를 통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경제체제라는 점을 재인식하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경제 모델을 먼저 바꾸고, 정치 모델이 따라 갔다. 반면 동구권은 정치 모델이 깨지고 경제 모델이 바뀌면서 큰 혼란이 있었다. 북한은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은 고립을 택해 ‘고난의 행군’을 할 때, 베트남은 개방을 해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북한도 눈과 귀가 있으니 보고 들은 것이 있지 않겠는가.”

베트남식 경제개혁의 특징은 무엇인가.
“중국과 베트남은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 모델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전략에서는 차이가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특구 모델이다. 화교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처음에 선전부터 시작해 광저우, 천진으로 확장해갔다. 개방에 대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북한도 나진선봉, 신의주, 개성공단 등 중국처럼 특구를 지정했지만 결국 실패하지 않았나. 특구 모델로는 자본 유치와 기술 습득에 한계가 있다. 단순 노동 제공이 될 가능성이 크다. 개혁개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정책 입안자들의 개방된 자세가 없으면 헛수고다. 상대적으로 자본과 시장이 부족한 베트남은 전면적인 개방을 했다. 북한도 전면적 개방을 통해 스스로가 변하는 모습부터 보여야 한다.”

북한이 베트남 모델을 전적으로 받아들일까.
“중국과 베트남 모델의 또 다른 차이는 정치 체제다. 양국 모두 공산당 1인 독재 체제라는 점은 같지만 중국은 최근 시진핑 주석이 연임 가능하게 법을 바꾸는 등 1인 독재 체제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에 비해 베트남은 철저한 집단지도체제다. 철저하게 토론 베이스로 의사 결정을 하고, 결정된 것은 철저하게 추진한다. 총리 임기가 5년인데 연임이 가능해도 연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국은 지방과 군벌 등의 세력이 강한데 베트남은 권력이 분점돼 있는 구조다. 베트남 권력층에도 부패는 있지만 구조적인 부패는 별로 없다. 상대적으로 청렴하다. 당의 권력에도 차이가 있다. 베트남 젊은이들은 굳이 당에 들어가 출세하고자 하지 않는다. 내가 베트남에서 사업하면서도 관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내가 지금 베트남에서 상대하는 관청은 세무서가 다다.

김정은 위원장 체제를 영속적으로 유지하고 싶어 하는 북한은 정치적으로는 중국 모델에 더 관심이 있을 것이다. 북한의 기득권 세력들도 베트남 정치 체제는 달갑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중국과 베트남 모델을 섞어 북한 모델을 만들고자 할 것이다. 그럼에도 베트남 모델이 더 바람직해 보인다.”

남베트남은 1975년까지 시장경제 체제였다

북한 지도부의 이번 베트남 방문이 북한 내부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북한 내부에도 기득권층에 시장경제 도입에 반대하는 세력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번에 대거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직접 봐라. 전세계가 시장경제로 통합돼 있는데, 우리만 빠져 있으면 되겠냐’고 북한 내부에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베트남 개방 초기부터 진출해 사업을 했는데,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업을 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베트남이 유교 배경을 가진 나라여서 문화적 차이는 생각보다 덜했다. 대신 초반에는 사회주의적 의식을 극복하는 게 힘들었다. 합작투자라고 해서 가보면 막상 허름한 건물 한 채 지어진 땅이 전부였다. 베트남은 90% 투자가 가능하다. 우리 쪽 이사가 9명이고 그 쪽 이사가 1명이어도 의사결정 구조가 만장일치제여서 1명이 반대하면 아무 것도 못했다. 바가지도 많이 썼다. 가격을 높게 부르길래 항의하면 ‘너는 잘 사는 나라에서 왔으니까 더 내야지’라는 식이었다. 직원들 임금을 줄 때도 성과급 체계를 만들어 차등을 하면 ‘다 똑같이 줘야지 왜 다르게 주냐’고 항의했다. 하지만 그건 25년 전 이야기이고 지금은 완전히 시장경제화 돼 있다.”

베트남이 빠르게 시장경제화 될 수 있었던 배경은.
“자연스러운 적응이라고 봐야겠지. 배급제를 폐지하고 난 뒤에는 스스로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으니까. 배급제를 하던 집단농장 시절에는 베트남이 쌀수입국이라고 하지 않았나. 배급제 폐지하고 잉여 생산물을 팔수 있게 하니까 금방 쌀 수출국이 됐다. 사적 욕망이 너무 커지면 제어를 해야 하겠지만 기본적인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면서 사회 발전의 동력을 찾는 길이 시장경제 체제라고 베트남은 결론을 내린 것이다.”

북한도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면 빠르게 적응할까.
“아마 그럴 것이다. 다만 베트남과 차이가 있다면 역사적 경험의 차이일 것이다. 북베트남은 1945년 공산화 됐지만, 남베트남은 1975년 통일이 될 때까지 시장경제 체제였다. 1986년 도이모이를 기점으로 보면 남베트남은 공산주의 계획경제 하에서 10년밖에 안 있었다. 시장경제 전환이 용이했을 수 있다. 반면 북한은 1945년부터 70년 넘게 공산주의 계획경제를 해왔다. 사고방식 전환을 하는데 상당한 진통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베트남은 상대적으로 수출 기반이 탄탄했다. 냉전 시절 소련에서 석유제품을 수입해 오고, 의류 등 경공업 제품을 임가공해 갚는 방식으로 무역을 했다. 북한은 철저하게 자급자족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수출 산업 기반을 마련하는데 상당한 투자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곽문영 대표. ⓒ피렌체의 식탁

“과거의 문을 닫고 미래의 문을 열자” 속사정은

화제를 바꿔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도 살펴보자. 박항서 감독 신드롬이 화제인데.
“박항서 감독이 오기 전에는 독일인, 일본인 감독이 있었다. 박항서 감독이 왔을 때 80%가 부정적이었다. 선진 축구를 배워도 모자랄 판에 한국에서 3류 감독을 데려왔다는 거였다. 그런데 독일, 일본인 감독 성적은 신통치 않았는데 박 감독이 좋은 성적을 올리니까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렇다고 베트남 선수들의 실력이 갑자기 일취월장한 건 아닌 것 같고, 박항서 감독의 지도력을 눈여겨봐야 한다. 나는 그 중에서도 유교 문화권이라는 점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베트남은 기본적으로 유교 국가다. 그런 점에서 우리랑 비슷하다. 조상신을 모시고 어른을 공경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한다. 상례를 치를 때도 우리처럼 상여 매고 뒤에 상주가 굴건제복 입고 지팡이 짚고 가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있다. 박항서 감독의 ‘온화한 아버지’ 리더십이 잘 융합됐다. 히딩크 감독에게서 전수 받은 기술도 베트남 수준에서는 적절했던 것 같다. 박항서 감독이 태국에 가서 감독했으면 이런 성적이 나왔을까?”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좋겠다.
“아주 좋다. 한류의 영향도 크다. 박항서 감독 신드롬 이전에도 드라마, K-POP 등 한류 열풍이 불었다. 한국 제품에 대한 인식도 아주 좋다. 베트남 시장에는 일본이 먼저 진출했지만, 한국 제품은 일본 제품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좋기 때문에 인기가 좋다. 여러 모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좋다. 박항서 감독은 정점을 찍었다. 외교관 100명, 기업인 100명이 못할 일을 박항서 감독 혼자서 한 거다.”

그렇지만 베트남 전쟁 참전이라는 아픈 역사가 있다. 이에 대한 감정은 없나.
“팜반득 사회과학원 부원장이 ‘공산당의 지침은 과거의 문을 닫고 미래의 문을 연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할 때 공식 사과를 할 의향이 있었으나 베트남 공산당이 말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실 여기에는 더 깊은 속사정이 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민이 미국, 한국하고만 싸운 게 아니었다. 베트남 전쟁은 기본적으로 내전이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사과를 받게 되면 베트남 내부에서도 얼마나 많은 갈등이 터져 나오겠나.

역사적 배경도 있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침을 겪었다. 한나라 시절에는 한사군이 설치돼 있었고, 당송 시절에도 계속 침략을 받았다. 원나라 군대를 우리나라 살수대첩 방식으로 무찌른 적도 있다. 200년 넘은 왕조가 없었다. 근대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고 일본도 침략했으며, 미국과 전쟁을 벌였고, 이어 중국과도 전쟁을 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원한이 있고 부역자가 있었겠나. 그런데 매번 이들을 다 처단하고 간다면 나라가 유지됐겠나. 보복을 최소화 하고 용서하는 전통이 있는 것 같다. 통일이 된 뒤에도 진짜 악랄하게 고문한 책임자들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재교육’을 했다. 특정 지역에 철조망을 쳐 땅과 기구만 주고 스스로 집을 짓고 우물을 파고 농사를 짓게 해서 교화했다고 한다.

물론 직접 피해를 입은 유가족들은 원한을 잊지 못할 것이다. 다만 국가의 이익을 위해 책임을 묻지 말자는 것이다. 외국의 투자 유치를 통해 이득을 얻는 기득권층의 논리일 수도 있겠지만, 과거사 문제가 베트남 내부에서 크게 논란이 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승전국이라는 우월감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 대한 거부감도 거의 없다.”

베트남에서 비즈니스를 할 때 장점이 무엇인가.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 중 하나는 소득 수준이 낮아도 교육 수준이 높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시스템을 끊임없이 교육을 해야 하니까 교육 시스템이 잘 돼 있다. 베트남도 예전에는 우리나라처럼 과거시험 제도가 있었다. 유교 국가의 전통이 남아 있어서 교육열도 높다. 베트남도 문해율이 95% 이상이다. 이는 북한에도 해당되는 장점일 것이다.

베트남은 젊은 인력도 풍부하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게 1975년이니까 베트남의 베이비부머라고 할 수 있는 1980년대 생이 많다. 이력서를 받아보면 기본적으로 가족이 7~8명은 된다. 인력 구조로 보면 우리나라 70년대랑 비슷하다. 그리고 매년 경제가 7~8%씩 성장하고 있어 사회의 활력이 넘치고 젊은 친구들의 사고도 상당히 개방적이다.”

인터뷰 / 한승동 편집인

피렌체의 식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