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10월 30일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청구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일본 신일철주금에 대하여 피해자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 재판 결과에 대하여 승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을 자국 기업에 거듭 밝히며 국제 재판까지 고려할 것임을 밝혔다.ⓒ 연합뉴스

일제 강점기 징용 피해자들 손해배상 재상고심에 대한 대법원판결에 일본 정부가 거세게 반발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불편했던 양국 관계가 요동치고 있다. 한일관계는 늘 이랬다. 요동이 시작되면 대우조선에 대한 보조금 문제 세계무역기구 제소, 방탄소년단(BTS)<티비 아사히> 출연 취소 같은 데까지 일파만파로 번지고 양국관계는 그동안 쌓아올린 것 몽땅 까먹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간다. 진전 없는 유사 패턴의 무한반복이다. 뻔한 사죄배상이 아니라 그 근본원인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편집자 주>

 

1. 총리가 화를 냈다

이낙연 총리가 지난 15일 국무총리실 간부 회의에서 이례적으로 크게 화를 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대응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외교부는 총리 입장문 번역 외에 무엇을 하고 있느냐.”

10월 30일 대법원이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씨 등 4명(3명은 고령으로 사망)이 전범 기업 (주)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에서 “각 1억 원씩 배상하라”는 고법 환송심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일본이 거세게 반발하며 발 빠르게 대응했고, 이 총리는 이에 대한 우리 외교부의 미온적인 늑장 대처를 질타했을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11월 1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한국 쪽 판결이 “한일관계 구축을 위한 협력에 역행하고 있는 움직임”이라며 “매우 유감”이라고 했다. 그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다 해결된 일이라며 “국제법대로 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도 했다. 또 원고들은 징용당한 게 아니라 ‘모집’에 자발적으로 응한 것이라면서 “국제재판을 포함한 모든 선택지를 시야에 넣어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관련 일본기업들을 상대로 정부가 설명회를 열어 재판 결과에 승복하지 말도록 하겠다고 했고, 자민당 정무조사회는 분쟁해결 절차에 따라 신속히 대처하라고 고노 다로 외상을 압박했다. 그리하여 “폭거이자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는 외상의 튀는 발언까지 나왔다.

일본 쪽이 그런 매뉴얼에 따라 착착 대응책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동안 우리 외교부가 한 일은 이 총리가 7일 발표한 성명(입장문)을 “영문으로 번역해서 외교부 홈페이지에 게시하고, 추후 이를 포함해 4개 언어로 번역된 입장문을 제공하겠다”고 했다는 게 전부라는 얘기다.

총리의 성명은 일본 정부 지도자들의 발언이 타당하지도 않고, 현명하지도 못하다고 비판하면서, 사법부의 판단은 정부 간 외교의 사안이 아니며,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조약을 인정하면서 그 바탕 위에서 조약의 적용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판단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외교부 홈페이지]

 

2. 일본은 어떻게 나올까

일본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대처방안은 말로 하는 이런 요란한 외교전 외에 ‘청구권협정’ 규정에 따라 양국 협의, 협의로 안 되면 중재라는 분쟁해결 절차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으로도 안 되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는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협의는 먹혀들 리가 없고, 중재로 갈 경우 두 나라 정부가 합의해서 각기 1명씩 임명하는 위원과 제3국의 위원으로 3인 ‘중재위원회’를 구성하고 거기서 결정하는 대로 따른다. 하지만 한 쪽 당사자가 합의하지 않으면 진행이 될 수 없다. 한국이 응할 리 없으니 중재절차는 무용지물이다.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도 한국 쪽이 ‘동의’해야 진행되는데 이것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도 일본이 제소할 경우 한국은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대야 하는데, 그것이 일본 주장이 정당하며 국제법상 합법적이고, 한국 정부 주장은 억지요 국제법 위반이라는 사실이 저절로 드러나 일본 주장의 정당성을 온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일본 쪽은 주장하지만, 그야말로 주장일 뿐이다.

일본이 노리는 외교전의 최대 효과는 아마도 이런 주장 자체에 있을 것이다. 이미 그런 논리를 영문으로 작성해서 각국에 배포했다. 앞서 열거한 절차들은 사실상 실행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본 쪽도 잘 알고 있다. 설사 절차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일본의 정당성이 자동 입증되기는커녕 그 반대로 귀착될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 국제사법재판소 제소와 관련해 일본이 동원할 수 있는 판례로 독일이 승소한 독일-이탈리아 간 ‘국가 관할권 면제’ 판결 사례도 그것과는 상황이 전혀 다른 한일 간에는 적용될 수도 없다고 국제법학자 이장희 교수는 지적한다.

따라서 일본이 정말로 그런 조치를 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그런 조치를 취하는 순간 그것은 일본이 써먹을 수 있는 카드로서의 효용은 사라지고 도리어 일본 자신의 날조된 과거를 겨냥한 위험한 창날로 바뀔 수도 있다.

게다가 일본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국제법이라는 것이 국가 행위의 정당성을 최종적으로 보증해 주는 보편타당한 장치가 될 수 없다. 1965년 한일협정에서 두 나라 대표들은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이미 무효”를 한국은 ‘합방조약’ 체결 자체가 불법이고 무효라고 해석하는데 비해 일본쪽은 여전히 조약 자체는 국제법상 합법이었고 한일협정으로 무효가 됐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애초에 서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도록 양해한 것이다. 미국이 중재하고 체결을 압박한 한일협정은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덮어 감추기 위한 임기응변이었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법은 현실 힘관계의 반영이며, 국제법은 국가간 힘관계를 반영한다. 근대 이후 일본은 한국(한반도)보다 힘이 훨씬 더 셌다.

 

3. 한일협정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대법원 판결문도 지적했듯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도 한일 기본조약으로 소멸했다는 일본 법원 판결이나 정부쪽 주장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합법적이라는 인식을 전제한 것”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는 국내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대법원은 지적했다.

이장희 교수도 지적했듯이, 1965년 한일협정(기본조약) 역시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가 국제법적으로 합법이었다는 전제 위에 성립된 것이고, 그것을 사실상 강제한 것이 1951년 9월에 체결되고 1952년 4월부터 발효된 미일 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다. 한국전쟁 중에 체결된 그 강화조약은 미군의 일본 장기주둔을 보장해준 미일 안보조약과 동시에 체결됐다. 한국전쟁으로 최고조로 치닫던 냉전의 긴장 속에 미국은 그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을 반영구적으로 확보하는 대신 일본의 전쟁범죄에 사실상 눈감았고 천황을 비롯한 전전(戰前)체제의 지배구조의 근간이 전후(戰後)에도 연장됐다.

 

4. 무산된 독일식 해법, 한국 탓인가 일본 탓인가?

이낙연 총리가 국무회의실 간부회의에서 외교부를 질책하기 하루 전인 11월 14일의 <아사히신문>에 박준우 전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과 사사에 겐이치로 전 일본 외무차관의 대담 기사가 실렸다. 그 두 사람은 1998년 10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서명, 발표한 ‘한일 공동선언-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작성의 외교부 실무 담당 과장들이었다. 정치, 경제관계 강화뿐만 아니라 과감한 문화개방까지 포함한 그 공동선언과 함께 양국간 교류는 급속히 확대됐고, 종합적인 양국 관계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양국 모두에서 ‘그때가 가장 좋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급진전됐다. 밀려들어 올 일본문화를 감당할 수 있을까를 걱정했던 문화개방은 오히려 ‘한류’의 탄생과 수출이라는 뜻밖의 사태 전개를 낳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때 청와대에 들어갔던 박 전 수석에 따르면, 그때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을 위한 방안의 하나로 양국 정부와 기업들이 재단을 만드는 ‘독일식 해법’을 추진했다.

“두 나라가 징용 피해자들이 징용을 강제당한 일본 기업, 국교 정상화 당시 일본으로부터 경제협력 자금을 받은 한국 기업, 그리고 한국 정부가 재단을 만들어 피해자를 지원하는 만들어 검토에 들어갔다.” 매우 합리적일 수 있었던 그 방안 검토작업은 그러나 “2013년 12월 아베 신조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중단됐다.”

두 사람의 대담을 관통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사에 전 차관이 거듭 얘기하는 불신감이다. ‘한국 정부의 태도가 또 어떻게 바뀔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의 경위만 보더라도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겠다고 했다가 필요 없다고 하기도 하고, 그때그때 심하게 왔다 갔다 한다. 어떻게 신뢰성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이번 재판에서도 사법부의 판단은 그렇다 치더라도, 행정부가 국제적인 신의, 약속을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한국은 정권에 따라 정책이 크게 흔들리는 듯이 보인다. 많은 문제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 대통령이 교과서 문제를 거론하거나 다케시마(독도)에서 행동을 취한다든지.”

하지만 박 전 수석이 독일식 해법 검토작업 중단이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때문이었다고 지적했듯이 한때 양국 정상들이 수시로 왕래하는 ‘셔틀 외교’로까지 발전했던 양국 관계 파탄 책임을 한국 쪽에 지울 순 없다. 박 전 수석은 오부치 총리가 과로로 급서한 뒤 일본 역사 교과서의 과거사 왜곡 문제와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가 터지고 2005년에는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제정하면서 셔틀 외교도 끝났다고 지적했다.

양쪽 주장 다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어딘가에 구멍이 크게 뚫려 있다. 두 사람의 주장은 그 자체는 진심이고 진실일 수 있겠지만,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거죽만 건드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거죽만 건드려서는 100년이 지나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한일관계 문제의 본질은, 말장난 같지만,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 책임은 거의 전적으로 일본 쪽에 있다.

 

5. 문제의 핵심이른바 자유주의 사관이라는 것

일제의 아시아태평양 침략전쟁을 “아시아민족 해방전쟁”이라 예찬하는 아베 총리의 전도된 역사관·국가관(‘전후 70주년 총리 담화’)의 이론적 토대요 그가 쓴 <아름다운 나라로>의 모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후지오카 노부카즈 도쿄대 교수(교육학)의 <자유주의사관이란 무엇인가>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메이지 유신을 했지만, 농민들 삶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발달하자 노동자들은 심하게 착취당했으며, 노동운동은 탄압당했다는 식의 스토리가 계속 이어지는 ‘암흑사관’, 메이지 초기부터 일본은 대륙침략에 나서 이웃 나라들을 짓밟은 끝에 전쟁으로 국민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일본국가는 오직 악역무도(惡逆無道)했다고 묘사하는 ‘자학사관’. 그것이 역사 교과서의 기조였다.” “교육헌장의 이런 ‘자학사관’ 때문에(···) 외국의 국익을 위해 일본을 적대시한 반일 프로파간다를 그대로 역사적 사실인 양 취급하고 가르쳤다. 근대 일본은 일관되게 아시아 나라들을 침략한 악당이라는 관념이 어린아이들 머릿속에 주입됐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일제히 서술된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연행’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통용되고 있다.”

과장되거나 왜곡돼 있긴 하지만, 한편으론 상당 부분 사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침략전쟁을 일으켰다가 패전하고 전쟁 당사국에 장기간 점령 통치당한 나라의 역사 교과서의 기본줄기가 그 침략전쟁을 일으킨 세력의 과거에 대한 부정적 평가일 것은 자명하다. 자업자득이기도 하고, 그래야 전승국의 점령행위도 정당화될 테니까. 그리고 군국주의 악몽에 대한 거부감과 패전에 대한 반동으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당시 냉전의 한 주역이었던 소련(러시아) 사회주의에서 그 대안을 찾았다. 그리하여 일본 교과서의 근대사 서술은 패전 뒤 사회주의적 혁명의 미래를 꿈꾸는 이들에 의해서도 부정적으로 그려졌다.

후지오카 노부카즈는 그 결과 일본이 암흑사관, 자학사관에 빠졌고 그런 사관 주입을 종용한 것이 점령국 미국과 그와 대립하며 해방의 희망을 찾은 사회주의자들의 근거지 소련이었다며, 이를 각기 ‘도쿄재판 사관’, ‘코민테른 사관’이라고 명명했다.

그에 따르면 도쿄재판 사관은 패전 일본의 주역들을 단죄한 도쿄 전범재판을 주도한 미국이 강요한 것이다. 코민테른 사관은 1930년대 아시아 공산당들을 지도한 코민테른(Comintern=Communist International)을 붙여 지은 이름이다. 미국과 소련은 냉전 대립의 양대 축이었지만 침략전쟁 끝에 파산한 일본 근대를 부정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미국은 그래야 일본을 점령통치할 명분이 생겼고, 소련은 2차대전 말기 일소 중립조약을 일방적으로 깨고 만주와 북한, 홋카이도 북쪽 섬들을 점령한 자신들의 참전과 전리품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했다. 자업자득이라 해도, 그리고 그게 아무리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런 역사를 자나 깨나 접해야 하는 당사자들이 심한 좌절감과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도쿄재판 사관은 후지오카가 주장하듯이 그렇게 철저하지 못했다. 냉전의 시작과 함께 미국 대일정책의 “역코스”, 즉 기존정책을 뒤집어 전범자들을 다시 공직에 앉히고 일본을 냉전 기지로 만드는 일본 육성 정책을 취하면서 일본의 과거 기본골조는 온존됐다.

후지오카는 이런 도쿄재판 사관마저 코민테른 사관과 함께 해체돼야 할 반일적 사관이라 공격하면서 대안으로 그 둘을 지양하는 ‘자유주의 사관’이라는 것을 내세운다. 그는 도쿄재판 사관이나 코민테른 사관이 잘못된 만큼이나 그에 대적하려 했던 일본 국수주의자들의 역사관도 잘못된 것이라며 거기에 ‘대동아전쟁 긍정사관’이란 명칭을 붙였다. 그러니까 자신들은 일본이 저지른 과거 전쟁을 무조건 옹호하는 대동아전쟁 긍정사관과는 다르다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역사관은 그 양 극단이 아닌 중간쯤에 위치하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공정한 것이라며 거기에다 자유주의 사관이란 이름을 붙였다. 거기에는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통절한 자기반성보다는 반성을 압박한 타자에 대한 원망이 앞선다.

한국의 ‘뉴라이트’가 바로 이런 논리를 이승만·박정희로 대표되는 친미 독재체제 비판에 대한 반비판 작업에 가져다 써먹었다.

 

6. 자유주의 사관 뒤에 있는 건 시바 료타로

후지오카는 <자유주의 사관이란 무엇인가>에서 그 사관의 원조가 베스트셀러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 1923~1996)라고 얘기한다.

“시바 료타로는 현대 일본의 국민적 작가다. 어느 나라든 자국의 과거에 대해 국민이 간직하고 있는 이미지는 역사학자의 저술보다 위대한 작가의 작품에 의해 형성되는 것 같다. 비교문학연구자 히라카와 스케히로에 따르면, 프랑스인들이 리슐리외 시대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 덕택이고, 미국인들이 남북전쟁이라는 치열한 내전을 또렷이 기억해 낼 수 있는 것도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대 베스트셀러 덕이다. 마찬가지로 현대일본인들이 메이지 유신과 그 뒤의 메이지 국가에 대해 품고 있는 이미지의 상당 부분은 시바 료타로라는 한 사람의 작가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바 료타로는 국민의 역사관, 역사의식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다.”

후지오카는 <언덕 위의 구름> 등 일본의 근대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시바의 역사소설들을 탐독하면서 역사 교과서로 멍든 가슴이 뻥 뚫리는 엄청난 해방감을 맛본 듯하다. 시바가 후지오카를 만들었고, 후지오카와 그의 동료들이 만든 자유주의 사관이라는 게 아베 총리와 새역모와 일본회의의 사상적 틀이 됐다면, 메이지 유신을 극찬한 시바의 생각이야말로 현대 일본의 사상적 원류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겠다. 시바는 러일전쟁 이후 대륙침략으로 치달은 군국 일본까지 차마 노골적으로 찬양하진 않았지만, 그 침략의 출발점이요 토대가 된 메이지 유신에서 청일전쟁, 러일전쟁까지의 일본을 예찬했고 후지오카는 거기서 자부와 해방을 느꼈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의 실체를 부정하는 데서도 보듯, 자유주의 사관의 실제 내용은 대동아전쟁 긍정사관을 살짝 수정한 그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나 유사한 국회의원들의 모임처럼 1990년대 중반부터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한 일본의 우익단체들이 이 자유주의 사관의 산물이거나 그에 동조하는 세력들의 조직들이다. 아베 총리와 그의 정부를 사실상 지배한다는 우파 거대조직 ‘일본회의’도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다.

자유주의 사관이란 이름의 후지오카 변형사관은 1990년대 초 냉전체제의 붕괴로 주적 소련이 해체되면서 찾아 온 이데올로기적 이완기에 등장했다. 그 시기는 1980년대까지의 거품경제로 대표되는, <재팬 애즈 넘버원>(에즈라 보겔)으로 상징되는 일본경제 전성기가 냉전과 거의 동시에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위기의식이 팽배했던 때이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역시 냉전기의 이데올로기 금압에서 풀려나기 시작한 한국의 민주화운동으로 한미일동맹 내지 한일 정권유착 속에 드러나지 않았던 일본의 과거사, 한일관계의 이면이 들춰지면서(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문제’ 공개 폭로 등) 선망의 나라였던 일본에는 전쟁범죄 이미지가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자유주의 사관은 그런 이데올로기 해체의 전환기에 경제거품마저 꺼지던 위기의식 속에서 “좋았던 일본, 영광의 일본”에 대한 갈망 속에 탄생했다.

 

7. 진짜 문제의 본질

자유주의 사관의 여러 문제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후지오카가 주장하는 이른바 도쿄재판 사관과 코민테른 사관의 오류 내지 과장을 그대로 답습 내지 복제한다는 점이다. 그가 생각하는 오류의 핵심은 도쿄재판 사관의 경우 미국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탄 투하 등의 대규모 전쟁폭력과 일본 점령, 그리고 그 이후 사실상의 반(半)식민지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의 근대사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일관되지도 않았고, 그 정도가 심하지도 않았지만, 자유주의 사관은 그 부정적 시각 구도, 그 틀을 한국의 식민지배나 중국침략을 정당화하거나 전쟁범죄 혐의를 축소하는 데로 돌려 그대로 써먹었다.

후지오카는 미국이 자국의 일본점령과 반(半)식민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 역사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며 이를 거부하면서, 자국이 침략했던 이웃 나라들에 대한 자국 주류의 역사관에 대해서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그리하여 대동아전쟁 긍정사관이든 자유주의 사관이든 자국이 패전한 2차대전(아시아태평양전쟁)의 가해국이 아니라 피해국이라는 뒤집힌 관념을 끊임없이 내면화하는 한편으로, 일본의 침략을 당한 이웃 나라들의 피해 의식이나 전쟁범죄에 대한 기억은 잘못된 것이라고 강변한다. 한국의 산업화와 아시아 민족들의 독립이 일본의 침략전쟁 덕이라는 가당찮은 주장들이나 난징 대학살, 위안부 강제연행 부인 내지 피해 규모 축소 등이 그 전형적인 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였던 1953년 10월 제3차 한일회담 때 일본 쪽 수석대표였던 구보타 간이치로의 ‘망언’도 그렇다. “일본은 36년간 벌거숭이산을 푸르게 바꾸었다던가, 철도를 건설한 것, 수전(水田, 논)이 상당히 늘어난 것 등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던 그는 한국 대표가 한국인은 일본에 점령당하지 않았더라면 스스로 근대국가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응수하자 “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되어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야말로 기고만장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더 지난 지금도 일본 우파 주류 지배세력의 역사관이나 세계관은 전혀 변한 게 없어 보인다. 문재인 정부를 “비정상”이라고 공개발언까지 해대는 일본 보수 주류의 무지 내지 기고만장은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등 일본 우파정권과 강력한 유착관계 속에 미일동맹의 뜻대로 움직였던 과거 반공주의 군사정권하의 한국을 ‘정상’으로 본다는 자기 고백 과 다름없다. 그들에겐 그때가 좋았을 것이다. 사실상 자민당의 일당 지배가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주류세력은 한국의 정권교체가 낯설고 위험해 보일 것이고, 특히 그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대일정책과 달라진 얼굴들이 매우 불편할 것이다. 권력변동이 거의 없는 그들은 정권교체 때마다 요동하는 한국의 대일 정책을 종잡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세상이 변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자신들의 불변이야말로 문제일 수 있다는 의식은 없고 그것을 ‘정상’, 변하는 것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며 때론 적대시하는 것이다. 한국 주재 대사까지 지낸 일본 고위 관료 출신자나 우파 매체 저널리스트 중에 일본과 유착했던 군사정권 청산을 지향하는 한국의 정치세력을 ‘반일’, ‘비정상’, ‘친북 좌파’로 매도하며 극도로 혐오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사사에 전 차관이 역동적인 한국정치를 정치보복이 계속되는 비정상적 ‘원한(怨念)정치’로 보는 인식의 천박성도 거기서 비롯됐다.

그때 그 유착관계의 한국 쪽 수혜자들 또는 그 후예들 역시 지금 반독재민주화세력을 ‘비정상’으로 몰며 친북좌파 딱지를 붙이는 세력의 주류를 구성한다. 이른바 ‘반문 세력’의 선봉장 중 상당수도 거기서 거기다. 끊임없이 박정희를 그리며 그때의 체제를 최선으로 기억하는 세력의 역사관이 일본 우파 지배세력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들에게도 그때가 ‘정상’이고 지금은 ‘비정상’인 것이다.

이장희 교수도 얘기했듯이 그 뒤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있고 전후 동아시아 질서를 짜고 지배한 미국이 있다. 일본 주류의 뒤틀린 역사관이 문제의 본질이라면, 그것을 온존시킨 ‘미국의 지배’ 역시 본질의 하나일 수 있다. 어쩌면 더 근본적인. 이로 인한 벽을 돌파하지 못하는 한 한일관계도 한미관계도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한반도 분단은 계속될 것이다.

이낙연 총리를 화나게 만든 외교부 직원들이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본질적인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그들로서는 어찌해 볼 수 없다는 생각을 그들은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그런 체념과 타협과 안주가 정당화될 순 없겠지만.

 

한승동/ 본지 편집인, <한겨레> 국제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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