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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그 담론의 전격적 재구성을 위해

제2차 북미 정상회담 얘기가 나오고 있지만, 기세좋게 나아가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주춤거리면서 빨간 불이 켜지고 있다는 관측들이 나돌고 있다. 그 주요 원인은 선비핵화를 주장하는 미국의 남북 접근 ‘속도 조절’ 요구, 곧 미국의 견제다. 경의선 철로 공동조사가 유엔사 쪽의 통과 거부로 무산된 뒤 보수언론들을 중심으로 나돌기 시작한 남북 접근 과속론과 한미동맹 균열론은 비무장 지대 내의 군사훈련과 주변 정찰비행 금지 등에 관한 남북 군사합의가 나온 뒤 더욱 거세졌고 한미동맹 균열은 기정사실처럼 유포됐다. 이대로 가면 개성공단 정상화와 서해 평화협력지대 구상, 남북 철도와 도로 연결, 나아가 한반도 신경제 구상 등이 모두 자국의 ‘승인’이 우선돼야 한다는 미국 정부의 고압적인 자세에 짓눌려 무산될지도 모른다.

김민웅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합의를 위반한 것은 남북이 아니라 미국이라고 지적한다. 김 교수는 이 난관을 돌파하기 위한 ‘담론의 전력적 재구성’을 제안했다. 김 교수는 지금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그것을 붕괴시키려는 국내외 세력의 방해로 좌절될지도 모를 위기에 봉착해 있다며, 여기에는 4.27 판문점 선언과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합의 등의 성과를 뒤엎는 논리 전도와 왜곡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김 교수는 그럼에도 이를 정면으로 문제삼고 돌파하려는 움직임이 없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대응논리 개발과 실행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그 논리 왜곡 뒤에 있는 미국 보수매파들 논리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미국 자체에 대한 인식, 곧 ‘미국관’울 바로잡아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미국이 지배하는 지금의 동아시아질서를 일제 ‘대동아 공영권의 아시아-태평양 번역판’이라며 미국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재고를 분단 해소를 비롯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기본 전제로 보는 김 교수의 주장을 들어보자. <편집자주>

 

위기지점에 대한 인식과 담론의 전격적 재구성

현실적으로 정책의 변화를 당장에 이끌어 낼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이나 자원이 부족하든지 또는 없을 때는 어떻게 상황 타개를 해나갈 수 있을까? 다른 파괴적 요인들이 작동하기 전에 단기적으로 속도전을 내면서 지향하려는 질서를 기성사실로 만들어 내기 어렵다면, 그 과정에서 어떤 작업이 절실해질까?

답은 “담론의 전격적 재구성”에 있다. 그러나 이는 난데없는 담론의 출현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가능하고, 동아시아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정밀해지면 더 정교하게 제출할 수 있다. 여기서 “전격적”이라는 의미는 기존의 틀이 가진 한계를 담대하게 돌파하는 의지를 반영하는 표현이다.

사안의 본질을 새로운 각도로 파악하고 공감하면서 추진동력이 확장될 수 있는 그림을 창출해내는 것은 정책결정 집단의 일차적이자 지속적인 책무이다. 변화의 정당성을 확신시키고 이에 대한 지지기반을 견고히 만들기 위한 정치사회적 인식의 틀이 없다면, 시대를 후퇴시키고 구질서의 기득권을 보장하려는 반동적 반격의 끊임없는 공세가 날이 갈수록 위력적으로 될 수 있다. 평화를 위한 정치적 통합력을 구성하는 일이 이로써 어려워진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한반도 평화로 가는 길은 지금 심각한 도전을 마주하면서 위기지점에 서 있다. 한반도 평화기획을 어떻게든 사멸시키려는 내외의 움직임이 상당히 거칠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적 전망이 여러 차원에서 계속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결과를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김정은 위원장 연내 서울 답방조차도 불투명해지려는 분위기다.

이런 사태 앞에서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정책은 보다 과감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초반에 의미가 있었던 조심스러운 접근에만 치중하는 태도가 체질화되어버리면, 경우에 따라 담대한 돌파력이 요구될 때에 무능력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가령 최근 남북관계 진전에 제동을 걸고자 하는 미국의 이른바 “속도조절론”에 대한 공개된 외교적 대응은 아예 없었고, 보수 언론들이 미국의 입장을 편들고 나서는 상황에 대한 대처 또한 부재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남북 철도 연결을 위한 기본 조사조차 가로막은 유엔사의 조처에 대해 아무런 문제제기나 항의도 하지 않은 정부가 그보다 더 큰 장애가 나타나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한-미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가겠다는 입장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우리의 평화적 의지를 현실화할 수 있는 조처 자체를 막아나서는 태도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다면 전쟁체제의 해체와 평화체제의 수립이라는 역사적 과감성을 발휘해야 하는 작업은 난감해진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세나 인식 못지않게, 미국의 역사적, 구조적, 전략적 책임 문제와 봉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한반도를 포괄한 “동아시아 평화담론의 전격적 재구성”과 직결된 문제이다.

 

미국의 책임 문제와 판문점, 센토사 공동성명의 원칙

남과 북 사이의 논의는 진전되고 있으나, 북한과 미국 사이의 협상은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원점에서 맴돌고 있는 형편이다. 이렇게 되고 있는 근본적 원인은 명백하게 미국에게 있다. 이것은 결코 인식의 편향이 아니다. 미국은 자신이 공동으로 서명하고 약속한 것조차 지키지 않고 이를 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논의가 먼저 정리되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 자체가 오류에 빠지고 만다. 현재 발생하고 있는 근본적 장애가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면 상황정리의 중심을 잡을 수가 없다.

북한이 지금까지 취한 점진적 핵 폐기 절차와 그 수준에 대응하는 움직임을 미국은 일체 보이지 않았다는 점 하나로도 이는 타당한 문제제기다. 한미 군사합동 훈련의 “연기”가 있지 않는가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핵 실험장 “폭발파기”의 되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성과는 다른 수준의 가역적(可逆的) 방식에 그친다. 당연히 북한은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 조건에서 일체의 평화적 구조를 보장하지 않은 채, 북한의 전면적 무장해제라고 해석할 만한 요구를 바꾸지 않는 한 사태의 진전은 기대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다시 전쟁의 위기를 불러일으킬 힘의 대치가 복원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반드시 상기해야 할 바가 있다. 지난 6월 12일 싱가폴의 북-미 정상회담은 “비핵화가 상호신뢰로 이어진다”는 논리가 아니라 “상호신뢰가 비핵화를 증진할 수 있다(mutual confidence building can promote the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라는 새로운 논리를 제시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핵문제 해결과 평화체제 수립과 관련해서 대단히 획기적 관점의 변화였다. 서로 신뢰하고 친해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나가면 비핵화 문제는 어렵지 않게 풀 수 있다는 논법과 틀이었다. 상호신뢰의 내용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는 비핵화 절차보다 선행되게 되었다.

비핵화는 북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적대적 패권전략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는 과정에서 도달할 수 있는 목표이며, 미국은 북의 이러한 입장을 이해하고 북에 대해 “체제 위협적 조처를 하지 않겠다(committed to provide security guarantees to the DPRK)”는 입장을 유지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목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사태는 “선 비핵화, 후 관계정상화”라는 과거의 논리를 그대로 관철하려는 미국의 입장 변경에 의해 협상은 지지부진한 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미국은 자신이 공동으로 서명한 센토사 공동성명의 원칙을 스스로 어긴 것이다. 북한이 일단 핵폐기 절차를 시작한 상태에서 오히려 대북제재를 강화하겠다고 나선 것은 북의 입장에서는 체제 위협적 조처에 해당하며, 북한의 대미신뢰구축을 훼손한 행위였다. 이와는 달리 북한은 이후 핵실험을 하거나 미사일 실험을 한 바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센토사 공동성명에서는 남북관계 개선을 표명한 판문점 선언을 지지한다고 해놓고 속도조절론으로 판문점 선언의 실행에 제동을 거는 것도 원칙 훼손 행위다. 판문점 선언은 남북 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외세가 간섭할 수 없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했다. 또한 “이미 채택된 남북 선언들과 모든 합의를 철저히 이행함으로써 관계 개선과 발전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기로 하였다”는 입장을 밝혔다.

남북 철도 연결 문제도 2007년 10.4 공동선언 등을 비롯한 후속합의에 따른 사안이기에 판문점 선언을 지지한 미국이 제재 내지 제동을 걸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다. 더군다나 이를 실행하기 위해 판문점 선언이 밝힌 “각 분야의 대화와 협상을 ‘이른 시일’ 안에 개최하여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문제들을 실천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나가겠다는 의지 역시도 미국이 논란거리로 삼을 수 없다. 보다 적극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판문점 선언을 지지했으니 도리어 이런 실행과정이 원활하게 되기 위해 필요한 지원을 해야 옳다.

“빠르고 적극적인 해결”을 지향하는 판문점 선언은 기본적으로 남북관계 진전의 속도전을 뜻한다. 따라서 속도조절론 논란은 판문점 선언 방해 내지 훼손 또는 지지 철회로 이해되는 행위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 자신이 서명한 약속을 기준으로 미국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속도는 미국과의 협의 내지는 미국의 재가 대상이 아니라 남과 북의 자주적 결정에 따른 결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를 존중하면 될 뿐이다.

그러므로 “담론의 전격적 재구성”은 이미 공동선언들이 공식적으로 확보한 영역을 망각해버린 것에 대해 정면으로 환기하고, 우리의 평화 동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보장되어 있음을 확실하게 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니라면, 지금까지의 주요 정상회담은 모두 종이 위에서 춤을 춘 것밖에 되지 않는다.

 

왜 묻지 않는가? 왜 설명하지 않는가? 역사는 어디에 두었는가?

문제는 이러한 논의나 주장, 또는 항의와 반론이 정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고 국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권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진보언론조차 이를 토대로 미국의 정책과 태도에 대한 비평적 논설을 전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북을 대변하는 일이 아니라 남과 북, 북과 미국에 이루어낸 공동의 의지를 재확인하고 재천명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한 논의전개가 보이지 않는다.

공동선언의 내용대로 원칙을 재조명하고 해결의 방향과 해법을 설명해나가기만 해도 그것으로 평화담론의 영역을 상당하게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정부와 여당은 조심이 지나쳐 이미 만들어진 것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태도가 체질화되는 위험에 빠져 있다고 보인다. 이런 식으로는 상황이 지지부진해지면, 적대적 냉전질서 해체에 반발하는 세력의 담론에 서서히 포위되는 형국에 처하고 말 수 있다.

희망적 관측에 따른 상황의 변화에만 기대를 거는 듯한 태도는 “수동적이며 무책임하고 무지”한 모습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혼자서만 열심히 뛰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도 정치적 비극이다. 미국 내의 여러 여론 집단과 세력의 존재를 의식하고, 냉전세력과 냉전해체 세력의 구별을 통해 적대적 대북 압박 논리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정교한 담론의 제기를 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 역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은 기껏해야 협상 당사자들의 “맥락이 빠진 발언”이나 보도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트럼프가 어쨌네, 폼페이가 어쨌네 하는 식으로 중요한 단서도 되지 않는 발언에 촉각을 세우고 진상도 알지 못하는 내용에 대한 추측기사만 그득한 언론보도는 정치권과 마찬가지로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관점 자체가 냉전해체에 대한 의지를 적극적으로 담고 있지 않다.

사태 파악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저널리즘의 이와 같은 단발성 보도 태도는 이데올로기적 선택에 따른 경우도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사안의 역사적 구조와 세계 체제적 틀에 대한 이해의 빈곤에서 비롯되고 있다. 한반도 평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체제의 패권구조와 냉전체제의 기원 사이에 놓여 있는 역사적 연관성에 대한 이해는 우리에게 절실한 인식 대상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체제와 냉전, 그리고 탈식민기획

이 지면에서 이와 관련한 역사논의를 정밀하게 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그 요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냉전질서는 대체로 제2차 대전이 종료된 이후 미국과 소련의 양극체제로 나뉜 이후의 대립관계가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으로 구조화된 결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미국의 영향권 내에 편입된 경우의 경험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한계가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종전 이후 대소관계가 냉전의 축이겠지만, 과거 식민지였던 지역과 주민의 입장에서는 탈식민지체제의 수립이 보다 우선적인 관건이었다.(Odd Arne Westad, The Global Cold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London, 2007) 미국이 추진한 냉전정책은 이러한 탈식민지 체제의 수립을 좌절시키는 방향으로 해당 지역의 정치질서를 만들어간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구 식민지 지역은 탈식민지 체제의 주체적 수립이 이루어지기 전에 미국의 지구적 패권질서에 흡수되면서 자신의 주체적 선택의 여지없이 냉전질서 경계선의 반대편과 “적”이 되는 구조에 갇히게 된다. 이 “적” 의식은 좌우라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면서 대량살상이 무참하게 저질러지는 상황(권헌익, <또 하나의 냉전: 인류학으로 본 냉전의 역사>, 민음사, 2010)에 대해 심리적, 구조적 제동을 걸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되었다는 점도 아울러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를 결코 되풀이할 수 없다.

시기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시아의 2차 대전 종전은 일본의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을 미국이 접수, 관리하는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일본을 냉전구도의 핵심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 “역코스(reverse course)”를 선택, 구 파시즘 체제의 완전한 해체가 아니라 거꾸로 이에 대한 정치적 복원을 통해 일본의 군사화를 촉진한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군사정책에 대해 좀 더 거론해보자면 보다 심각한 국면이 존재한다. 이제는 잘 알려지게 되었듯이, 한국전쟁에서 구 일본군 8천여 명의 참전이 비밀리에 이뤄지고 이 시기에 생체실험으로 악명이 높은 731부대 창설자와 책임자들이 전쟁에 동원된 일본군의(軍醫)시스템의 책임자가 된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의 아시아 냉전전략의 틀(The Korean War In Asia; a hidden history, ed. by Tesaa Morris-Suzuki, Rowman & Littlefield, New York, 2018)이 어떻게 구 식민지 체제 전쟁장치의 연장과 활용을 기반으로 삼았는지를 보여준다.

베트남 전쟁까지 포함해서 사고할 경우, 우리의 미국에 대한 역사인식과 체제적 인식은 보다 확실해질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국은 세계적 전쟁국가로서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지역의 탈식민지 체제의 수립을 용인하지 않았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막대한 희생을 자초하는 선택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미국의 체제적 위상과 역사는 과거에 비해 달라진 바 있으나 아직도 청산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의 유지를 관철하려는 움직임은 미국 내 우파세력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존 볼턴과 같은 네오콘 세력이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같은 영향력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 자체가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의 평화추구적 안정성을 신뢰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남북 공동대응체제의 강화가 답

미국은 단순히 강대국이 아니다. 그 역사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거대한 전쟁기계를 장착한 제국이며, 자본을 중심으로 한 패권체제라는 점이다. 자신의 영향권에 속한 지역, 나라, 주민은 식민주의 없는 식민체제에 속해야 그것을 “질서”라고 부른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아시아적 질서가 미국이 추구하는 냉전체제의 핵심이다.(A.G. Hopkins, American Empire: Global History, Princeton University, 2018, Howard Zinn, The People’s History of American Empire, Metropolitan Books, 2008) 달리 말하자면 대동아 공영권의 아시아-태평양 번역판이다.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이나 폼페이 국무장관이 한국에 대해 자신들의 “승인(approval)”없이는 아무것도 진전될 수 없다고 한 발언은 이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상할 바가 없다. 한국정부나 언론이 이에 대해 더는 논란을 벌이지 않는 까닭도 있긴 하나, 그 발언이 트럼프의 기질에서 나온 것이나 과한 발언으로 치부하는 것은 현실인식의 오류에 해당한다.

우리는 스스로 인정하기 싫지만 미국의 세계 체제적 인식 속에는 독립적인 주권국가로서의 위치를 지키고 있지 못하다. 여기에 인종주의까지 가세하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최근 미국 내에 벌어지고 있는 백인우월주의 극우파의 테러는 이른바 “증오의 소용돌이(spiral of hate)”가 얼마나 통제력을 상실한 채 극단적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New York Times, Nov. 5th, “How US law enforcement failed to see the threat of white nationalism”)

이러한 미국의 정치구조와 정치문화의 본질을 살펴보면서 만들어지는 담론이야말로 우리에게 의미있게 작동할 수 있다. 미국 내의 아랍계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공세적으로 해체해나갔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노력은 그런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높다.(Edward Said, The Question of Palestine, Vintage, New York, 1992) 그는 제국의 논리로 규정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팔레스타인 자체의 목소리로 사안의 본질을 규정하는 학술적, 저널리즘적 시도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 없이 우리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미국의 관점을 우선하면서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는 태도를 하나의 제도로 만들어버리게 한다. 상상력조차도 식민지적 사유로 편입시키는 노릇이 되고 만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에게 냉전의 해체는 남북 간의 적대상황을 해체하는 것 못지않게 미국의 패권질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탈식민지 기획 또한 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다. 이를 대중의 정치언어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의 문제는 그다음 과제이다. 우선은 이러한 관점을 세우는 작업의 중요성을 주시하는 일이다.

북에 대한 미국의 제재는 사실상 우리에 대한 제재로도 기능하고 있고 남북 간 민족자주의 원칙도 속도조절론의 통제대상이 되고 있지 않은가? 미국은 이러한 시스템을 안보와 자본의 대동맹체제(NSCC: National Security State Corporate Complex)로 작동시키고 있다.(Thomas Ehrlich Reifer, “Globalization and the National Security State Corporate Complex(NSCC) in the Long Twentithe Century, in The Modern/Colonial Capitalist World-System in the Twentieth Century, ed. by Ramon Grosfoguel, Praeger, 2002) 현실이 이럴 진데 언제까지 북과 미국 사이의 가교역할만으로 적대적 분단체제 해체를 위한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고 여길 것인가?

냉전체제 해체와 직결된 탈식민기획은 미국과 적대적 상황에 진입하자는 것이 아니라 주권국가의 위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가자는 의지이다. 이것은 북한도 마찬가지의 처지이다. 이러한 지점을 출발선으로 한다면, 우리는 남과 북의 공동대응체제를 보다 견고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대북 제재나 대남 통제는 모두 우리의 미래를 옥죄는 것일 뿐이다. 우리에게 평화는 남과 북이 패권체제 안에서 분리당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한 불가능하다. “속도전에 따른 남북관계의 진전”은 평화체제의 기성사실화(de facto)를 가져오는데 결정적 토대이다. 바로 이를 위한 담론의 창출이 가장 긴요하고 든든한 수단과 동력이 될 것이다.

 

김민웅/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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