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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규 삼성전자 전 사장 인터뷰] <br> “한국 산업, 현재 잘하는 걸 조금 더 잘하자”

by | 2018년 9월 11일 | 정책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 ⓒ 피렌체의 식탁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

“미중 무역분쟁은 역설적으로 한국 기업에 기회”

“세계시장 크고, 혁신 빠른 산업이 한국엔 오히려 유리”

“유럽 국가들 2차산업혁명의 결과물로도 잘 먹고 살아”

“천재도 필요하지만 지식의 축적, 사회구조, 과학 수준이 더 중요”

 

보수언론에서부터 시작한 경제 위기론이 학자, 공무원, 언론인에 이어 전직 경제장관들까지 가세해 한창이다. 위기론의 타당성, 대안의 적실성을 떠나 <피렌체의 식탁>이 주목하는 점은 막상 현장의 기업인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먹거리’를 만드는 산업정책의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삼성반도체 신화의 주역 중 한 명인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65)을 만났다. 과연 ‘빵을 만들 줄 아는 진보(정권)’가 되려면 분배는 차치하고 어떤 산업 정책을 펴야 하는가.

임 전 사장은 “현재 잘하는 걸 좀 더 잘하자”고 했다. 반도체, 바이오산업, 작게는 화장품 산업 등이 그가 꼽은 오늘과 내일의 먹거리다. 미중 무역 분쟁 속에서 오히려 한국의 길이 있다고도 말했다. 미국이 중국과 경제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 미국 주도의 세계 70%시장에서 한국의 일류 제조업체들에 기회일 수 있다는 취지다. 사실 그를 만나게 된 이유도 거기 있다. 모두가 비관과 저주를 퍼붓는 것으로 자기 임무는 다했다는 세상에 그의 견해를 여러 사람이 들을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피렌체의 식탁>에 초청했다.

 

 

“모든 걸 다하겠다”는 중국의 도전

 

Q. 최근 지인과 얘기하다가 “미중 무역분쟁 때문에 한국 언론과 지식인들은 걱정이 태산인데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다”고 들었다. 수소문해서 임형규 전 사장을 뵙게 되었는데 어떤 판단에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우선 미중 무역 분쟁의 배경부터 듣고 싶다.

중국은 우리나라 하이테크 부품을 사서 제품을 만들어서 미국에 휴대폰을 포함한 각종 제품을 팔고 있다. 미국이 중국을 위험하게 보는 이유는 시장규모도 크고 미래 경제를 좌우할 이 분야에서, 반제품 조립에 그치지 않고 부품이나 소재까지 내부에서 R&D 해서 몽땅 자기들이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중국으로서는 인구가 13억이나 되니 당연한 일이고, 미국은 중국이 이런 내수시장 규모를 바탕으로 세계시장에서 추격해올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미국은 인구가 3억3천만 명 정도다. 농업도 강하고 2차 산업혁명의 결과물인 정밀기계, 철강, 제약, 화학 모두 강하고 3차산업혁명의 결과물인 정보산업, 컴퓨터, 소프트웨어 다 잘한다. 그러나 이 모든 걸 다 하기에는 인구가 작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에 일부분을 맡긴 것이다. 반도체의 경우 CPU나 DSP는 미국이 생산을 맡고 메모리는 일본이 맡다가 최근 한국이 가져온 것이다. 미국이 하이테크 산업을 끌고 나가는데 한국에 일정한 역할이 있었다.

 

Q. 정보산업은 미국이 주도하고 한국이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는 구조다?

그렇다. 미국은 소프트웨어 기반의 아마존, 애플, 구글 같은 기업 중심으로 세계 IT 혁명을 끌고 간다. 여기에 반도체를 포함한 하드웨어를 한국이 공급한다. 이런 파트너십으로 휴대폰, TV, 노트북 등 많은 제품을 만들었다. 중국은 이 모든 걸 스스로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화웨이의 경우 통신 시스템, 휴대폰을 만들어 세계정상권에 접근하고 반도체도 대형 펀드를 만들어 시도 중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만만치 않은 형국이다.

중국 산업은 대만이나 일본과 다르게 국가가 주도한다. 말하자면 정부가 1조 위안을 만들어서 투자를 할 수 있고, 인구도 많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시장외적 요소도 몇 가지 있어서 우리가 곧바로 경쟁해서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다.

 

Q. 중국의 기술적 구축은 어떠하다고 보시는가.

아직 수면 아래서 공사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중국의 도전이 어느 정도가 될지 현재로서는 가늠하기 힘들다. 반도체를 예로 들어 글로벌 기업의 성공 조건을 말하자면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현재 두 가지는 가지고 있다.

첫째 이공계 출신의 우수한 반도체 전공 인재, 둘째 충분히 큰 내수시장, 셋째 경영주체다. 중국이 첫 번째, 두 번째는 괜찮은데 세 번째가 불투명하다. 이미 칭화대, 중국과학원, 베이징대 주요 대학에서 상당히 우수한 반도체 쪽 인재들이 많이 공급된다. 내수 시장도 수십조 정도다.

문제는 경영, 인사, 보상, 투자를 이끌 경영주체다. 삼성은 경영자들이 잘하고, 조직문화도 잘 형성돼 있다. 최근에 중국의 관련 업계 리더들을 여럿 만났는데 그 경영주체를 선정하고 추진체계를 정비해가고 있다. 성공의 수준은 두고 보아야 한다.

 

Q. 장기적 관점에서 중국이 산업 강국이 될 수 있다고 보는가? 산업 전문가로서 세계의 산업 판도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중국은 21세기 2, 3차 산업 혁명 기술의 뿌리가 강하다고 할 수 없다. 군사력, 경제력도 산업에서 나온다. 2, 3차 산업혁명에서 중국은 좀 늦었다. 일본과 유럽은 화학, 정밀 기계, 제약 같은 2차 산업혁명이 가져온 산업부분에서 먹고살고 있다. 한국, 대만은 3차 산업혁명의 결과물인 전자, 반도체 산업이 성장해서 세계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중국이 이러한 산업을 추월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긴 시간이 걸리는 분야가 많다. 다만 인공지능 같은 새로운 산업은 중국도 같은 출발 선상에서 시작하는 것이므로 불리하지 않다.

또 하나의 이슈는 기존의 선진국들이 미래의 주력사업을 육성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80-1990년대만 해도 세계 반도체 탑10은 미국, 일본, 유럽에 3개 정도 있고, 그 안에 우리나라는 삼성전자 하나 정도 있었다. 옛날엔 유럽도 반도체 많이 했는데 유럽의 반도체는 자동차 유관 사업만 살아남았다. 일본은 도시바 정도.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은 3차 산업 결과물인 반도체 외에도 자동차 같은 먹고살 만한 산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도체를 죽어라 했는데 그들에게 반도체는 신흥 산업의 하나였다.

환율 부분도 있다. 우리는 반도체가 잘 안 되면 환율이 난리 나지만 선진국은 아니다. 그래서 후발주자가 더 싸게, 더 빠르게 발전하려고 하면 이기기가 힘들다.

 

 

“미국이 중국 차단하면 한국기업에 역설적 기회 온다”

 

Q. 미국이 소프트웨어 주로 담당하고 한국이나 일본, 대만이 주로 하드웨어 담당하는 IT 산업 생태계가 있었다. 여기에 중국이 별도 생태계를 만들어서 도전하려고 하니까 미국이 경계심을 갖는 것이라는 말씀 같다.

중국의 2025 계획도 중국이 스스로 반도체 산업까지 성장시키겠다는 말 아닌가. 그럼 나중에 군사력까지 올라가니까 미국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라이벌이 떠오르는 거다.

최근에 나온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이라는 책에서는 미국이 브레턴우즈 체제 이후 시장을 개방하고 이 기조로 지금까지 세계를 끌고 왔는데 중국이라는 슈퍼파워가 떠올라서 G2가 되는 상황에 놀랐고 이를 방지하려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무역분쟁에서 미국의 패권 유지에 가장 중요한 하이테크 분야는 반도체다. 이걸 중국이 가져가면 새로운 판국이 된다고 보는 거다. 한국이나 일본, 대만은 미국과 수직적 협력을 하는 관계로서 이러한 갈등과 이해관계가 깊다.

미국의 중국 차단 정책이 시장에 구체적으로 반영되면 한국의 일류 제조업체들에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다. 미국 중심의 세계시장이 전체 세계시장의 70%다. 여기서 점유율을 더 높일 수 있다. 각 산업의 주도업체들에서는 이미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고 있을 거다. 세계 최고의 혁신 국가인 미국과의 파트너십은 앞으로 성장하는 미래 산업에도 많은 기회를 줄 것이다. 중국의 부상이 오히려 한미 산업혁신 파트너십을 공고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본다.

 

Q. 일본은 어떠한가. 한중일 3국의 산업간 관계는?

산업화의 역사가 긴 일본에는 기계, 화학, 소재 등의 오래된 산업이 많다. 아직 모두 주력산업이다. 전자, 반도체등 정보산업은 전후에 산업화된 한국, 대만에 많이 빼앗겼지만. 반면 산업화 역사가 30년에 불과한 중국의 경우는 50년 된 한국의 산업과 경쟁관계가 많지만 100년 된 일본의 산업과는 상호 협력이 가능한 보완관계가 많다. 일본에는 한국, 대만의 추격을 따돌린 산업만이 생존했으므로 4차산업혁명에서 중국과 협력해도 빼앗길 것이 별로 없다. 반면 한국은 중국과의 협력에 항상 산업 유실(流失)의 위험이 있다.

덩치가 큰 정보산업을 놓고 보자면 중국의 정보산업이 급성장하기 때문에 현재는 우리가 반도체 등 정보산업에서의 대중(對中) 부품수출이 많다. 한국으로부터 반도체만 연간 50조 원 정도 구매하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급하고 싶어 한다. 반면 자급하면 한국은 설 땅이 크게 줄어든다.

다만 최근 들어 미중 무역전쟁으로 중국의 속도와 규모가 축소될 가능성이 생겨나고 있다. 중국이 모든 걸 가지면 미국도 불편하다. 중국의 굴기에도 불구하고 정보산업을 잘 지켜내야 한국에 미래가 있다. 기술개발과 투자에 더 노력해야 한다. 정부도 이를 알고 지원은 아니더라도 길을 터줘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미동맹은 안보뿐만 아니라 한국의 먹거리에도 매우 중요하다. 한국과 미국의 정보산업은 지난 30년간 상호보완적으로 진화해왔다.

 

Q. 미중 무역분쟁, 또는 미국과 중국의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향후 더 크게 이슈가 될 대목은 무엇인가?

산업을 중심으로 보면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또 다른 이유는 특허나 지식재산권 부분이다. 미국 같은 나라가 소송을 걸면, 신흥공업국으로서는 돈을 내든, 그 특허를 안 쓰든 해야 하기 때문에 지재권 부분은 선발국가가 신흥공업국의 추격속도를 슬로다운(slowdown)시키는 주요 수단이다. 우리도 10년 이상 미국에 소송도 많이 당하고 특허료도 많이 냈다. 중국은 그 나라 안에서 쓰는 제품 속에 있는 외국기업의 지식재산권에 대해서 관심이 부족하다. 미국은 이 점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3조 달러에 이르는 외환보유고를 바탕으로 한 M&A도 문제다. 피인수 회사의 이사회를 통해 기술을 중국으로 이전시키려고 한다. 미국도 이 문제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중국이 독일기업 사는 것을 무산시킨 일도 있다.

 

 

“한국인은 혁신 빠르고 각국이 총력 기울이는 업종에서 이길 역량 있다”

 

 현재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와 미래 주력 산업으로 꼽히는 바이오 산업은 기술개발과 생산 단계에서 초정밀 설계와 가공이 중요하다. 사진처럼 방진복도 필수다. 한국의 산업이 그만큼 고도화되었다는 얘기다. 임형규 전 사장은 이처럼 한국인의 장점을 살린 산업정책을 주문했다. 그 산업의 세계시장 규모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벽을 넘을 수 있을 정도로 클 것, 혁신이 수시로 일어나 여차하면 탈락 위험성이 있는 업종, 한국인의 DNA나 그간의 축적을 최대화할 수 있는 업종을 한국이 잘할 수 있는 업종으로 제시하고 현재와 다음의 먹거리 산업으로 추천했다. ⓒ 셔터스톡

 

Q. 한국은 어떤 기준과 원칙으로 미래의 주력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보나?

한국이 진입해서 큰 성과를 거둘 만큼 세계 시장규모가 있어야 한다. 내수보다는 수출형을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 혁신이 빠른 산업이어야 한다. 정체된 시장이나 산업이 아니고 각국의 주요 업체들이 집중해서 총력을 기울이는 산업이 한국에 차라리 유리하다. 남하고 경쟁해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우리가 잘할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현재 산업 인프라나 국민성 같은 부분이다. 우리나라는 그래도 과학고등학교나 카이스트 같은 이공계 기초교육 체계는 잘 갖춰진 편이다. 이를 통해서 고급 인력을 계속 육성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꾸준히 기술 축적을 하여온 반도체를 필두로 첨단소재, 정밀화학, 정밀기계 등 기술의 깊이를 확보한 산업들에서 지속적으로 기술 축적하고 경쟁력을 확충하는 게 더 현실적인 선택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사업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특히 미래에 필연적으로 대세산업이 될 ‘필연산업’을 잘 육성해야 한다.

 

Q. 생명공학 같은 부분을 의미하는가?

제가 전문성이 없어서 다 알진 못한다. 굳이 말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업종은 바이오 쪽이다. 바이오는 미래 성장산업이며, 국가 사이즈와 관계없이 남이 못하는 기술이 있으면 국경도 장벽이 되지 않는다. 나름의 기술기반 축적도 상당하고, 세계적 업종이 될 만한 조건을 그나마 바이오가 갖고 있는 셈이다. 

바이오시밀러처럼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기술 베이스의 사업은 대기업에서 하는 것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 신약, 줄기세포, 유전병 치료 등 새로운 과학적 발명 기반의 사업은  그것을 잘 하는 벤처 혹은 기존의 제약회사 등에서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야 한다. 옛날 전자산업 시작할 때 삼성에 사람들이 모였듯이, 기업은 인재를 끌어모을 수 있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기업들이 바이오 분야에서도 등장해야 한다.

 

Q. 미래 산업 분야에서 한정된 자원과 인력을 어떻게 활용하는 게 유리하다고 보나?

글로벌 최정예부대를 만들어 전성기의 로마 군단처럼 한국을 지켜낼 군단이 필요하다.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술중심 기업집단의 육성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글로벌 시장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으려면 일정 규모 이상의 인적자본이 필수이다. 미래 산업분야에서도 충분한 인재를 확보할 수 있는 기업만이 글로벌 대기업이 될 수 있다. 공정한 경쟁을 거쳐 비전 있는 기업에 인재의 집중을 장려하는 제반 시스템이 필요하다.

 

 

“현재의 주력 사업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Q. 4차 산업혁명과 현재 주력업종과의 조화는? 

새로운 업종에도 주력해야 하지만 기존부터 우리가 해오던 사업이 있지 않나. 사업에는 왕도가 없다. 4차 산업혁명 전반에서 우리가 승자가 될 확률은 높지 않다. 우리는 이미 3차 산업혁명 분야에서 1인당 GDP 3만 달러 수준을 끌고 갈 걸 확보했다. 유럽, 일본은 2차 산업혁명 분야 산업에서 성과를 거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3차 산업혁명 분야에서 실패했다. 중국은 우리보다 헝그리하다. 중국이 전기차 같은 부분에 빨리 진출하는 이유다.

4차 산업혁명의 큰 부분은 하이테크 서비스인데, 우리나라는 크기가 작아서 이 분야에서 글로벌 대형 기업이 탄생하기가 미국, 중국에 비해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4차 산업혁명 안 하면 큰 위기가 올 것처럼 얘기하지만, ‘우리 국민 전체의 먹거리 산업’은 갑자기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기존 산업 중에 지속적으로 혁신이 따르고 시장이 성장하는 분야에서 글로벌 위상을 굳히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3차 산업혁명의 결과물인 인터넷, 소프트웨어, 전자, 반도체, 전자소재 산업의 꾸준한 기술 축적은 중요하다. 4차 산업혁명도 컴퓨터, 인터넷, 통신, 반도체 등 3차 산업혁명의 기술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 분야 산업의 경쟁력을 지키고 4차 산업혁명과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Q. 1960년대에 경제개발을 시작한 이후 우리의 발전단계를 나눠보면 첫 단계는 배고파서 무조건 열심히 한 시기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나 정주영회장의 횃불 들고 사우디 주베일항만 공사 같은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무언가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능력이 발달해 이 분야에서 세계 톱클래스가 된 거다. 올림픽, 월드컵의 유치와 성공적 개최, 삼성의 반도체 같은 부분이다.

이제 세 번째 단계로 창의성을 키워 한두 명의 창의적인 천재나 발명가가 산업을 주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이 시대의 당위론이자 교육의 목적으로 얘기되는데, 임 전 사장은 그런 데에서는 우리가 1등 하기 힘드니까 선진국을 지켜보다가 바로 따라가는 ‘패스트팔로워 전략’을 말씀하신 것 같다. 이건 현실론인데, 그렇다면 한국의 4차 산업 대박론은 허상인가?

물론 4차 산업 분야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도 유럽처럼 기존에 해오던 2차, 3차 산업혁명 분야가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는데 큰 비중을 차지할 거라고 본다. 그 분야의 포지션을 꾸준하게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4차 산업혁명 분야는 그 자체로도 승부를 걸어야 하고, 그 결과물이 2차, 3차의 결과물에 접목해야 살아남는다. 산업은 연결이고 맥락이다. 유럽 국가들에서 반도체가 성장산업이 못됐어도 그 영향으로 자동차산업이 유지된 거다.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면, 4차 산업혁명은 독일과 한국에서 유난히 많이 쓰이는 단어이다. 다보스포럼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원래 그런 포럼은 변화를 좀 과대 포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 용어가 변화지향적이고, 뭔가 단절과 매듭짓기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구미에 맞았던 것 같다.

이건 3차 산업혁명, 즉 정보혁명의 후반기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사회를 근원적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므로 혁명은 맞으나 그 기술적인 요소는 기존의 반도체, 통신, 컴퓨터 기술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이 기술적 혁신의 연속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미래경쟁력 관점에서 보면 신기술에 대한 투자뿐만 아니라 기존 정보기술의 경쟁력에도 더 힘을 실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핵심을 이루는 반도체, 소프트웨어 기술은 원래부터 그 기술에 경쟁력을 확보한 집단이 계속 리드해나가는 것이지 돌출적 신흥 강자의 탄생은 어렵다. 기왕의 기반 위에 새로운 시장과 응용을 개척할 수 있는 질적, 양적 도약이 긴요한 것이다. 미래는 현재를 리쉐이프(reshape)하는 것이다. 산업도 마찬가지다.

 

 

“천재 한 명보다 총체적인 국가 과학기술 역량이다”

 

Q. 매사 연결성을 중요시하는 말씀 같다. 그러면 천재는 불필요한가. 학교 공부에서 뒤처졌던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브 잡스가 성공하는 사회는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가. 

아이슈타인도 잡스도 당시 과학지식이 가장 앞선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다. 잡스도 실리콘밸리라는 환경의 뒷받침이 있어서 혁신할 수 있었다. 어느 나라든 사회 전체의 역량을 뛰어넘는 천재 하나로 앞선 나라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신제품 개발(develop)과 새로운 산업을 연구(research)해 먼저 찾아내는 건 정말 다른 일이다. 반도체 개발은 우리가 몸으로 때워서 이겼다. 그러나 세상에 없는 기술을 찾아내려면 천재도 필요하지만 기본적인 지식이나 사회 구조, 과학 수준 등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천재나 발명가가 산업을 이끄는 건 원칙적인 이야기고 그렇게 성과가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뒤쳐져 있다가 천재 한 명으로 성과 내는 걸 기대하기보다 지식의 수준, 사회적 축적, 과학 수준 같은 사회적 토양을 쌓는 게 더 중요하다. 국가 경제 전체를 놓고 드리는 말씀이다.

 

인터뷰 김현종(발행인), 정리=박지은 수습 편집자

<임형규 전 사장은 누구인가>

반도체, 신수종, 인재양성 고루 경험한 전자맨

 

임형규 전 사장은 좀처럼 인터뷰를 하지 않으려 했다. 여러 가지 언사로 겸양을 보였다. “경제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시면 안 하셔도 좋다, <피렌체의 식탁>까지 비관론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고 하자 인터뷰에 나왔다. 한국이 가지고 있는 장점도 잘 보려 하지 않는, 부박(浮薄)한 현재의 논의 풍토에 “이건 아니다”는 반대 의사가 분명했다.

임 전 사장은 반도체 불모지 한국을 세계 1위 국가로 만든 주역 중 한명이다. 메모리와 비메모리 개발을 고루 주도한 드문 케이스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카이스트 석사과정을 거쳐 삼성전자의 ‘해외연수 제도’ 1호로 선정돼 미국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전자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삼성 반도체의 성공에는 임 전 사장과 같은 미국 유학파 임직원들의 기여가 크다는 평이다. 이들은 반도체 개발과 생산, 수출 과정에서 미국인들과 협업하며 “아시아 사람이지만 미국식 소통방식과 영어에 능통한 삼성 사람들”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미국과 아시아 국가 간의 반도체 협업은 80년대까지 일본이 독주했으나 임 전 사장 등이 본격 가세한 이후 90년대부터 일본을 추월해 현재까지 독보적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임 전 사장은 삼성그룹 안에서 한 사람이 3가지 의미 있는 타이틀을 차례로 역임한 드문 경우다. 반도체 개발의 수장(삼성전자 메모리 개발사업 부장, SLSI 사업부장), 신수종 사업의 기획자(삼성전자 신사업팀 사장)이자 미래 기술 역량의 책임자(삼성종합기술원 원장) 등이다. 삼성에서 물러나온 뒤에는 SK 그룹의 권유로 반도체 사업의 자문을 몇 년 맡았다.

국제고체회로학회 (ISSCC) 편집위원, 대한전자공학회 부회장, 반도체 Society 회장, 한국 임베디드 소프트웨어산업협의회 회장, 한국과학기술원 이사,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CTO 클럽 대표간사 등을 역임했다. 국제전기학회 (IEEE) 등에 26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국제특허(미국) 17건을 보유하고 있다. 1953년, 경남 거제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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