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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동의 티핑포인트] <br>미국 일본 눈치보는 이등 ‘꼬붕’으로 살지 않으려면 – 06

by | 2018년 8월 31일 | 한승동의 티핑포인트

ⓒ 셔터스톡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예정됐던 방북이 전격 취소되면서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정체상태를 면치 못하던 북미관계가 뻐걱대고 있다. 협상 여지는 여전히 열어 두었지만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발언으로 한미 연합훈련 재개 논란까지 불거져 나와 한반도 정세는 그 전망이 더 불투명해진 느낌이다. 이런 변화에 대해 언제나 가장 민감하게 대응하는 곳 중의 하나가 일본의 아베 신조 정권이다. 골수 반북주의자 아베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폼페이오 장관 방북 취소를 발표하기 전에도 그와 통화했다. 역사적으로도 한반도 문제에서 미국과 일본 조합은 우리에겐 안심의 재료이기보다 불안의 재료이기 십상이었다. 이런 어수선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우리 정부 통일·외교 분야 관료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얘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 엄중하고도 민감한 시기에 그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미국 일본의 전략은 무엇인지, 거기에 우리는 어떤 전략으로 대응해야 할지 짚어본다. <편집자 주>

 

 

외교·통일 관료들마저 미국 눈치 먼저 보나?

9월 중에 평양에서 열린다는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은, 원래 우리 정부가 8월 30일에 열자고 제안한 것이다.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김영철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시진핑 중국 주석 방북을 이유로 늦추자고 했단다.

이런 일에 밝은 사람의 전언인데, 그는 남북 정상이 먼저 만나고 폼페이오 장관과 시진핑 주석,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순으로 북 정상과의 회동이 이뤄져야 일이 더 잘 풀리고 한국 정부 운전자론도 힘을 얻었을 텐데 아쉽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이 이렇게 된 데엔 통일부와 외교부 쪽 관료들의 미온적인 태도도 한몫했다고 했다.

“청와대에서 너무 앞서 나가지 말라고 제동을 걸어야 할 정도로 적극적이어야 할 그들이 유엔 제재를 너무 의식해 아예 움직이질 않는다더라. 전 정부 고위직들이 아직도 요직에 많이 남아 있다. 개성 만월대 복원사업 같은 것도 학자들 체류비 계산해 보고 액수가 상당하자 아예 손을 대지 않으려 한단다. 매사가 그런 식이다.”

유엔 제재라면 실은 미국 얘긴데, 관료들이 남북관계 일도 미국 눈치만 보고 있다는 얘긴가. 얼마 전 보수언론의 대표 논객으로 알려진 유명 칼럼니스트의 해괴한 글을 인터넷에서 읽었다. “트럼프는 조만간 한국이 미국 편에 설 것인가, 북한 편에 설 것인가를 문 정부에 단도직입으로 물을 것”이라며 그는 “어느 편에 서느냐가 생사의 갈림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트럼프를 앞세웠지만, 사실상 미국이냐 북이냐 양자택일하라는 협박으로 들렸다. “좌파 정부”니 “정부 내 친북 인사들” 운운하는 그의 상투어구만 봐도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게다가 그는 “결국 아시아는 미국 대 중국·러시아가 겨루는 신냉전시대에 돌입하게 되고, 한반도는 그 냉전 구도의 핵심적 뇌관으로 자리하게 될 운명”이라는 신묘한 묵시록적 예언까지 제시하며, 미국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무슨 주제넘은 운전자냐고 비웃는 듯했다.

 

 

구원자 미국’, ‘은혜의 나라 미국신화의 실체

국체론, 시라이 사토시 지음, 슈에이샤 펴냄, 2018

<영속 패전론-전후(戰後) 일본의 핵심> 등의 저서로 국내에도 알려진 일본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白井 聡)가 출간한 <국체론-국화와 성조기>를 읽다가 이런 글을 만났다.

“1960년대에는 (···) 미국은 이 나라들(일본과 옛 식민지)을 일본 중심의 지역적 무역 네트워크로 상호 통합하는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한국과 대만이 일본 식민주의의 과거를 극복하고 일본의 무역과 투자에 문호를 개방하도록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그렇게 해서 일본은 미국의 패권 하에서 경제적 배후지를 아무런 비용도 지급하지 않고 획득했다. 이들 배후지는 20세기의 전반기에 일본이 영토 확대를 통해 획득하기 위해 그토록 필사적으로 싸웠던 것인데, 최종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참패로 잃어버린 것이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더불어 세계체제론을 대표하는 전 존스홉킨스대 교수 조반니 아리기의 <장기 20세기-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기원>(The Long Twentieth Century, Giovanni Arrighi 지음, 백승욱 옮김, 그린비 펴냄, 2008)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요컨대 일본은 패전 뒤 피 한 방울,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패전으로 상실했던 옛 식민지들을 경제적 영토로 다시 장악했다는 얘기다. 미국 덕분에.

중국 공산화와 한국전쟁으로 굳어진 동서냉전 체제에서 일본을 동아시아의 미국 교두보로 육성하는 데는 값싼 노동력과 자원, 소비시장이 될 광대한 배후지가 필요했다. 1961년 박정희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 그 4년 뒤 한일협정을 체결하고 유무상 5억 달러로 일본과 ‘식민주의 과거 청산’을 선언한 배후에도 미국이 있었다.

당시 5억 달러면 큰돈이었겠지만, 1951년 미국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태평양전쟁을 청산할 때 일본은 식민지 수탈과 전쟁범죄로 인한 타국 희생자들의 가늠할 수조차 없는 피해에 대한 배상·보상을 최소한도로 억제할 수 있었다. 그것도 미국 덕이었다. 게다가 패전 뒤의 일본을 기사회생시킨 것은 한국전쟁 특수로 벌어들인 천문학적인 돈이었다. 아리기의 ‘장기 20세기’에는 “한국이 나타나 우리를 구해주었다”고 했다는 딘 애치슨 당시 미 국무장관의 말과 함께 이런 구절이 인용돼 있다. “이 ‘우리’에는 일본이 포함된다.” “한국전쟁은 1980년대까지 태평양 자본주의의 북동부 경계를 구획한 반면, ‘일본의 마셜 플랜’으로 작동한 (···) 전쟁 조달은 일본이 세계 제패의 산업적 길을 따라가도록 추동시켰다.”(브루스 커밍스, 제롬 코언)

그때 애치슨이 어떤 상황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다음 인용문에 잘 드러나 있다.

“반공주의라는 명목을 내걸더라도, 재정적으로 보수적인 의회에서 어떻게 그런 돈을 타낼 수 있는가는 행정부에 작지 않은 고민거리였다. 무언가 국제적인 긴급사태가 필요했고, 1949년 11월부터 애치슨 장관은 조만간 1950년에 아시아 주변에서 그런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는데, 그 지역은 한국, 베트남, 대만 중 하나 또는 그 셋 모두였다. 대통령이 NSC-68 보고서를 검토한 두 달 뒤 위기가 발발했다. 애치슨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나타나 우리를 구원해 주었다.’”(미국 역사학자 토머스 매코믹)

당시 미국은 냉전체제 구축에 들어갈 막대한 비용을 조달할 명분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이 그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 주었다는 얘기다. 애치슨은 그해(1950년) 1월 12일 한국을 미국의 태평양방위선에서 제외(‘애치슨 라인’)한다고 선언했고, 5개월 뒤 한국전쟁이 터졌다.

여기서 애치슨 라인과 한국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밝히려는 건 부질없는 짓이며, 그럴 생각도 없다. 다만 그 유명 보수 논객도 그렇듯이 한국인들 다수가 강박적으로 품고 있는 ‘구원자 미국’ ‘은혜의 나라 미국’이라는 주술에 가까운 신화를 좀 다른 맥락에서 한 번 떠 올려 보고 싶었을 뿐이다.

 

 

병든 아베노믹스

다시 시라이 사토시의 책으로 돌아가면, 그의 ‘국체론’은 그런 ‘구원자 미국’ 신화를 뒤집어버리는 전복적 독해의 전형일 수 있다. 시라이는 이 책에서 2차대전 패전 이후(戰後) ‘구원자 미국’ 신화 속에 살아 온 일본의 현재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끝나지 않는 ‘전후’, 그것은 일본의 전후가 ‘평화와 번영’의 좋은 시대로서 경험돼온 만큼 그 세계상에 집착하는 경향이 생겨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이제 그 노스탤지어가 얼마나 병적인 것으로 바뀌고 있는지는, 예컨대 제2차 아베 정권이 ‘아베노믹스’ 정책을 선전하기가 무섭게 서점의 경제 시사 코너를 가득 채운 아베노믹스 예찬 서적들 몇 권만 일별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런 서적들에 따르면, 아베노믹스 덕에 일본 경제는 대부활을 이룩했으나 중국과 한국 경제는 파탄을 맞고 있다. 이런 책들은 명백히 경제 시사 서적으로 위장된 헤이트본(혐오 서적)이다. 이런 류의 책 소비자들은 일본이 경제적으로 부활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중국 한국이 몰락해야만 마음이 놓인다. 여기에는 “경제적 번영을 되찾고 싶다”는, 순수하게 그 자체로는 온당한 바람(願望)이, 뒤쫓아온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국민이 “불행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으면 좋겠는데”라는 꺼림칙한 바람과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다. 거기에는 “아시아의 선진국은 일본만이어야 한다”는, 전후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밝은 비전 뒤에 감춰진 어두운 바람이 있다. 그것은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인들의 구미에 대한 콤플렉스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국민에 대한 인종차별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패전의 부인’을 통해 그런 심정과 바람을 전후에까지 연장했다.

그러나 이미 얘기했듯이 그 연장을 가능하게 해준 조건은 소멸했다. 그리하여 전환을 위한 적응에 실패하고 그 실패를 직시하지도 못하고 콤플렉스와 레이시즘 투성이가 된 채 “냉전 시대는 좋았다”는 백일몽에 계속 잠겨 있는 시대, 한마디로 그것이 바로 헤이세이(平成. 현 아키히토 천황 연호) 시대다.

 

 

냉전붕괴 이후 미국의 비호수탈

시라이에 따르면, 일본사회의 ‘구원자 미국’ 신화는 늦어도 1990년대 초 냉전체제가 무너졌을 때 해체됐어야 했다. 일본을 냉전 교두보로 육성하고 ‘비호’했던 ‘전후 평화와 번영’의 시대는, 베트남 전쟁 개입에 따른 과도한 출혈과 경쟁자가 된 독일·일본의 성장 등으로 미국의 압도적 우위가 사라지면서 1970년대부터 흔들렸으나 1985년의 ‘플라자 합의’, 그리고 냉전 붕괴와 함께 그 번영을 가능하게 해 준 조건 자체가 소멸함으로써 끝났다. 시라이는 그 무렵부터 미국의 일본 ‘비호’는 ‘수탈’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 조건은 냉전 시절 미국에 독보적 이용가치를 안겨줬던 일본의 지정학적 조건이었다. 그 때문에 일본은 미국의 ‘첫째 꼬붕(수하)’으로 특권을 누렸고, 주변 아시아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우월(선민)의식도 그 특권이 보장해 준 일본의 돌출적인 경제적 우위 덕에 누릴 수 있었다.

그 차별적인 선민의식은 미국이 의도적으로 조장한 것이었다. 시라이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조약 체결에 주도적 역할을 한 존 포스터 덜레스(이후 국무장관 역임)는 “전후 미국의 일본 지배의 요건을 메이지 유신 이래 형성돼 온 구미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콤플렉스와 아시아 민족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우월감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봤다. 그것이 “일본인들을 미국에 종속시키고 아시아에선 계속 고립되게 만들 것”이라고 그는 내다봤다. (덜레스는 강화조약 초안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명기돼 있던 한국을, 한국의 전승국 포함이 일본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 당시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의 요구를 받아들여, 명단에서 빼버렸다. ‘독도 문제’도 그때 만들어졌다.)

주일 미국대사를 역임하기도 한 ‘지일파’ 에드윈 라이샤워가 “우리의 목적에 가장 적합한, (일본인에게) 엄청난 권위를 지닌 괴뢰(傀儡=꼭두각시)”로 천황을 전후 일본의 부흥과 서방진영으로의 편입에 보탬이 되는 존재로 지목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기 3년 전인 1942년 9월에 이미 그런 방침을 세웠고, 실제로 이런 지침에 따라 전후 일본의 설계가 이뤄졌다. 비슷한 시기(1943년 카이로회담)에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중국 장제스 총통의 요청으로 한국을 적절한 절차를 거쳐 독립시킨다는 방침을 세웠으나, 그때 루스벨트의 구상은 40년간의 한반도 신탁통치였다.(Racing the enemy : Stalin, Truman, and the surrender of Japan, Hasegawa Tsuyoshi‏ 지음, 일본어판 제목 <암투>)

일본의 ‘국체(國體)’란 바로 이 천황제 또는 가부장적 천황제 가족국가체제를 가리킨다. 시라이는 전쟁 전(戰前)엔 천황제를 가리키던 국체가, 전후에 미국이 상징 천황제를 활용해 일본을 대미 종속국가로 재편하고 재건과 번영을 보장함으로써 아메리카니즘 내지 팍스아메리카나로 사실상 대체됐다고 얘기한다. 이건 트럼프 정권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현실이다.

 

 

신냉전 꿈꾸는 일본의 수구 어리석은 우파

냉전 붕괴는 일본의 지정학적 가치도 무너뜨렸다. 과도한 군비경쟁 끝에 소련이 무너질 때 미국의 돈줄 노릇을 하며 거기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일본의 전후 번영의 조건도 그때 무너졌다. 일본은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경제의 무게중심도 아시아 쪽으로 옮겼다. 시라이에 따르면 일본 자본의 최대 수익처는 1990년대에 이미 미국에서 아시아로 이동해,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그때 이미 탈미입아(脫米入亞)가 이뤄졌다. 아시아를 버리고 서구 쪽으로 가자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살짝 비튼 이 탈미입아의 정치적 표출 가운데 하나가 동아시아공동체론을 들고나온 하토야마 유키오의 민주당 집권(2009년)이었다. 그러나 오키나와 후텐마 미 해병대 기지의 헤노코(오키나와섬 북부) 이전에 반대하며 아시아 중시를 표방했던 하토야마 정권은 미국의 강력한 견제로 1년도 채 넘기지 못했다.

다시 미국으로 유턴한 아베 정권의 등장은 말하자면 탈아입미(脫亞入米)라고 할 수 있다. 시라이의 분석대로라면 탈아입미는 성공할 수 없다. 냉전붕괴와 함께 일본의 전후번영을 보장했던 일본의 지정학적 가치라는 번영의 전제조건이 소멸해버렸기 때문이다. 시라이가 보기에 ‘일본 문제’의 핵심이 바로 전제조건이 사라져버린 구체제를 온갖 수단을 동원해 억지로 떠받치려는 데에 있다.

그것을 주도해온 세력이 1990년대 초 일본 거품경제 붕괴 전의 좋았던 시절에 대한 강한 향수를 지닌, 나아가 전전의 ‘제국 일본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어리석은 우파”이며, 그 정점에 아베가 있다.

이들이 번영의 전제조건 소멸에 대처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그 조건이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 믿게 만들거나, 새로운 전제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전자의 방법에 동원되는 핵심 도구가 바로 책의 제목인 ‘국체론’이다. 전전의 천황은 전후에도 존재한다. ‘어리석은 우파’들은 그 신성한 국체를 호지(護持, 보호하고 지킴)하기 위해 전쟁범죄 등 천황과 관련된 모든 부정적인 요소를 부정하거나 감춰버린다. 심지어 전후의 번영을 선전하며 패전 자체까지 부정해버린다. 과거사 청산이 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과거청산 없이는 새로운 출발도 불가능하다.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든 주역이 바로 상징 천황제(국체)를 이용해 일본을 철저한 친미 종속국가로 만든 미국이며,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전후체제는 시라이가 얘기하는 영속적인 패전체제다. 시라이에 따르면 지금은 그 국체가 아메리카니즘, 즉 골수 친미보수주의로 사실상 대체됐다.

따라서 일본 전후 민주주의 위기=상징 천황제의 위기는 “‘영속 패전레짐’이 공중누각이 돼 있음에도 청산되지 않고 거꾸로 온갖 강인한 수법을 동원해서라도 사수하려 하는 데서 생겨난 위기”이며, 그것은 또한 “대미 종속레짐의 위기, 더 정확하게 말하면, 특수한 대미 종속을 기초로 유지돼 온 레짐의 위기”다.

“현재 정(政)·관(官)·재(財)·학(學)·언(言)의 주류를 형성한 친미보수파의 모습은 미국의 국익 실현을 위해 분골쇄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일본사회를 황폐화시킴으로써 ‘국민의 통합’을 위에서부터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이 체제를 떠받치는 대중적 기반으로 눈을 돌리면, 현 정권의 열혈 지지자인 우파 활동가들이 가두선전 행동 때 성조기를 들고 나가는 것은 이미 우리 눈에 익숙한 광경이 됐다. 그들에게 성조기는 일장기와 동등한 것이거나 그 이상의 국기일 것이다.”

일본 우파들이 거리시위에 나설 때 미국 국기를 일장기와 함께 들고 나간다는 얘기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일장기 대신 태극기로만 바꾸면 양국 우파들의 행동양식이나 세계관, 이념은 거의 닮은 꼴에 가깝다. 미 해병대 기지의 오키나와 내(헤노코) 이전 반대조차 모조리 ‘반일’ ‘반미’로 받아들이고 중국의 사주나 돈을 받고 하는 ‘친중’으로 매도하며, 친미는 애국 반미는 매국으로 간주하는 것도 한국 우파의 행태와 다를 게 없다.

 

못난 이등 꼬붕이 되지 않으려면

더 두려운 것은 전제조건 소멸에 대처하는 두 번째 방법, 즉 새로운 전제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냉전체제를 구축해 과거 냉전붕괴 이전 일본의 지정학적 가치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이 신냉전 구도의 새로운 주적은 예전의 소련에서 중국·북한으로 대체됐다. 미국이 촉발, 주도하고 있는 보호무역주의와 미중 무역전쟁을 통해 진행되고 있는 헤게모니 쟁탈전, 그리고 거기에 호응하면서 반북 캠페인에 앞장서고 있는 아베 정권을 보면 신냉전이 현실로 다가오는 듯하다. 신냉전은 한반도를 영구분단과 전쟁 쪽으로 몰아갈 것이다.

하지만 일본 상황도 별로 좋지 않다. 최근 구인난까지 겪고 있다는 정권하의 ‘호황’의 실상은 밝지 않아 보인다. 이토 미쓰하루 도쿄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아베노믹스’의 근간은 대규모 국채 발행과 미국 국채 다량 매입 등을 통한 돈 풀기와 이에 따른 엔 약세화(비공식적인 환율조작), 이를 토대로 한 대기업 위주 수출확대 전략이다.(<세카이> 2018년 5월호) 수출 확대로 기업들 형편은 좋아지고, 주가도 오르고, 일자리는 늘었지만 국가 부채는 눈덩이처럼 커지고(GDP의 250%), 소득 배분과 소비확대는 기대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양극화는 심화되고 성장도 제자리걸음(올해 1분기 마이너스 0.6% 성장)이며 디플레에서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여전히 ‘잃어버린 30년’의 장기불황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연간 예산의 30% 가까이 국가부채 원리금 상환에 써야 할 만큼 늘어난 국가부채는 금리가 1%만 올라도 국채 이자로 지급해야 할 돈이 연간 10조 엔(100조 원)이나 불어나 정부 예산편성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란다. 복지 등 미래 세대를 위한 예산 배정이 어려워지면 국가 장기전망도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이런 경제적 쇠퇴와 좌절감, 상대적 국가 지위 약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나라들의 대두는 ‘아시아 유일의 일등국’이라는 일본인들의 관념을 무참할 정도로 뭉개버렸다. 시라이는 그 결과 중국 한국에 대한 무조건적 혐오를 드러내거나 선민의식에 집착하는 병적인 증세를 “일본의 집단적 발광”, “발광한 노예”라는 말로 설명했다.

왜 일본은 몰락하는가, 모리시마 미치오 지음, 장달중 외 옮김, 일조각 펴냄, 1999

<왜 일본은 몰락하는가>라는 책을 쓴 모리시마 미치오는 “지금 만일 아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나 미국이 팍스아메리카나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의 힘을 필요로 할 경우, 일본은 거기에 응해 대활약을 펼칠 것”이라고 했다.

9월 20일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압도적 다수 지지로 3기 총재(임기 3년), 곧 총리로 선출돼 일본 역대 최장수 총리가 될 가능성이 커진 아베 신조 정권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기를 기대할 것이라며, 시라이는 그 이유는 충분하다고 했다. 전쟁 특수에 전쟁 뒤의 재건 특수로 경제적 곤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번영을 구가할 것이고, 자위대의 정식군대화와 집단적 자위권 발동을 명기한 헌법 개정 등 모든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될 것이다.

미국의 두 번째 ‘꼬붕’이 돼 이웃의 첫 번째 ‘꼬붕’을 모시면서 계속 북쪽의 동족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고 소모전을 펼치면서 다른 약한 이웃들 앞에서 으스대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가 거기에 가담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필사적으로 그것을 막아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다.

한미동맹에 ‘올인’하고 한미일 삼각동맹을 추구하며, 나아가 한일동맹 체결까지 바라는 이들은 그것이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 한번 곰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기득권층의 구미에 맞는 일이 늘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며, 민족 전체로 본다면 분단 반쪽의 이익이 전체에겐 손실이 될 수도 있다. 미국 비판이나 일본 비판이 반미, 반일은 아니며, 그게 곧 친북 친중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현실을 직시하고 변화된 정세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며 우리 다수에게 더 이익이 되는지 알고자 할 뿐이다.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으며, 한미동맹이나 미일동맹, 한미일 삼각동맹도 예외가 아니다.

앞서 얘기한 그 유명 칼럼니스트 논객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관료들도 전쟁을 바라진 않을 것이다.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이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젖히기 바란다.

 

한승동/ 본지 편집인, 전 <한겨레> 국제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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