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연합뉴스

도모하는 사람은 실패하고, 발목잡기(veto)는 쉬운 세상

대통령, 국회, 관료, 법조, 재벌 등 파워집단 키가 비슷해져

87년 체제의 후유증, 체제 튜닝으로 민주주의 위기 극복해야

헌법개정, 선거구제 개편 등 정치개혁에서부터 물꼬 열자

 

며칠 전 차를 타고 가다가 분당 아파트 단지를 바라봤다. 1990년대초 건립되었을 때에는 일산, 평촌, 산본, 중동 등과 함께 ‘신도시’라 불렸다. 지금 ‘신도시’ 호칭은 보통 명사일 뿐 상태를 지칭하는게 아니다. 분당 뿐만 아니라 강남, 수도권, 지방 대도시의 아파트들은 건립된 지 30-40년이 지나면서 낡았다. 문득 “저 아파트와 함께 우리 세대, 우리 나라도 늙어가는구나”하는 감상이 들었다.

대한민국이 다시 한번 힘찬 심장과 탱탱한 두 다리가 받치는 ‘활력 국가’가 될 수 있을까. 자랑스러운 ‘강한 국가’가 될 수 있을까? 그 답은 현재와 같은 거부권 민주주의, 비토크라시(Vetocracy)체제의 극복 여부에 있다.

강한 국가의 조건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중요한 공통 요소가 있다. 개방·리더십·제도가 그것이다. 개방을 통해 새로운 생각, 선진 제도, 다양한 사람을 받아들인 나라가 강한 국가가 되었다. 19세기에 일본과 조선, 중국은 ‘개방’과 ‘쇄국’에서 격차가 벌어졌다. 1990년대 이후에는 개방에서 앞선 한국이 일본과의 격차를 빠르게 줄였다.

국가, 기업, 정당 등 대부분의 조직은 개방적일 때 강해졌고 폐쇄적일 때 약해졌다. 폐쇄적 조직일수록 생각이 편협하고 적대적이다. 내부의 확증편향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성인 추대를 엄격하게 하기 위해 ‘악마의 변호인’을 둔 것이나 군대나 기업을 비롯해 많은 조직이 ‘레드 팀’을 운영하는 것도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결국은 지도자다, 지도자의 크기가 나라의 크기다

역사를 보면 국가·민족·종교·기업·조폭 등 어떤 조직이든지 살아남으려는 ‘집단의지’가 강한 공동체만 살아남았다. 그런 조직은 남다른 게 있다. 조직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는 사람이 많고 조직은 존경과 보상으로 반드시 보답한다. 지도자 역시 남다르다. 공동체의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고 솔선수범(노블레스 오블리주)한다. 위대한 지도자 없이 위대한 나라가 된 역사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지도자의 크기가 나라의 크기다.

지도자는 사회를 이끌 ‘통찰’과 자신을 향한 ‘성찰’을 겸비해야 한다. ‘현찰’만 좇는 자들이 꼭대기를 차지하는 조직은 반드시 망한다. 어떤 자리에 오르느냐에만 몰두하고 그 일이 어떤 일인지 궁리하고 연마하는 데에는 관심없는 사람, ‘직’에만 관심이 있고 ‘업’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은 결코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지도자는 혼자 크지 않는다. 위대한 리더는 자기의 성장에 걸맞게 조직을 성장시킨다. 아무리 대중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세상을 바꾸는 변화는 여전히 지도자의 몫이다.

뛰어난 정치 지도자는 사상가, 정치가, 운동가, 경영가의 자질이 있어야 한다. 통찰력(사상가), 결단력(정치가), 설득력(운동가), 추진력(경영가)이 있어야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통찰력’이 있어야 미래가 어떻게 오고 있는지,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고, ‘결단력’이 있어야 국가의 전략 목표와 실행 과제를 시기를 놓치지 않고 결정할 수 있다. ‘설득력’이 있어야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국민들에게 설명할 수 있고, ‘추진력’이 있어야 5년의 짧은 임기 안에 성과를 낼 수 있다.

개방적 문화와 위대한 지도자가 강한 국가를 만들 수는 있지만 지속가능하려면 제도가 중요하다. 공동체 구성원에게 강한 동기부여를 일으키는 인센티브와 패널티가 법과 제도로 촘촘히 시스템화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아무리 강한 제국도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민주공화국의 기반이 되는 국민주권주의·법치주의·민주주의가 중요한 이유다. 촛불보다 투표가 힘이 세고, 투표보다 제도가 힘이 세다.

 

 

1987년 체제와 위대했던 첫 번째 민주주의기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은 뛰어난 지도자들의 통찰과 결단으로 개방을 길을 선택했고 담대하게 폭을 넓혀 왔다. 선진국의 제도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거침없이 받아들였다. 이념적 대립으로 인한 불행한 역사와 비극적 사건은 끊임없었지만 세계사의 큰 흐름으로 보면 대한민국을 이끌어 온 지도자와 리더들의 애국심과 능력은 남달랐다. 그 결과 지난 70년간 대한민국은 ‘강한 국가’를 향해 빠른 속도로 전진해 왔다.

‘쿠데타’와 ‘혁명’을 동시에 폐기처분하고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하도록 합의한 ‘1987 체제’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위대한 전환이었다. ‘운동권’을 포함한 ‘재야’ 세력을 체제 내로 끌어들인 결단은 민주주의가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임을 깨달은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전쟁과 스포츠의 중간에 있는 정치가 마침내 전쟁 같은 ‘적과 동지’의 시대를 끝내고 스포츠 같은 ‘경쟁자’의 시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폭력이 아닌 선거를 통해 승자는 ‘여당’이 되고 패자는 ‘야당’이 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사무엘 헌팅턴은 신생 민주주의 국가가 두 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거치면 민주주의가 공고화 된다고 했는데 대한민국은 ‘첫번째 민주주의기’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단계를 지난 30년 동안 거쳐왔다. 이 시기에 개헌과 선거제도 개편(소선거구제)을 포함한 수많은 법과 제도의 변화가 있었고 새로운 도입된 제도는 기대한 역할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문제는 ‘1987년 체제’가 30년 만에 ‘재건축’이 필요할 정도로 노후화 되었다는 것이다. 시대는 흘러갔고, 제도는 그대로이다. 헌법과 선거법을 포함한 제도의 순기능은 거의 소진되고 역기능만 남은 상황이다.

지금은 인식과 제도의 재건축을 통해 ‘두번째 민주주의기’로의 이행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기간 동안 정당과 지도자들은 정권을 잡는 데만 몰두한 느낌이 있다. 정치는 30년 전의 포용성, 개방성을 잃고 ‘적과 동지’의 시대로 되돌아갔다. 30년 전에는 ‘체제 전복’의 급진적 세력도 체제 내로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지금은 역사인식과 이념은 말할 것도 없고 크고작은 정책을 놓고 전쟁 중이다. 국정을 맡기 위해 선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를 위해 국정을 정쟁으로 만든다. 생각이 달라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싸우기 위해 생각을 다르게 하는 듯하다.

미래를 말하다, 폴 크루그먼 지음, 박태일 외 옮김, 현대경제연구원 펴냄, 2008

폴 크루그먼은 <미래를 말하다(원제: The Conscience of a Liberal, 진보주의자의 양심)>에서 경제적 양극화가 정치적 양극화를 낳는 게 아니라 반대로 정치적 양극화가 경제적 양극화를 낳는다고 했는데 지금 한국의 상황이 딱 그 지경이다. 집권 1년이 넘은 민주당은 위기의 책임을 전 정권에서 찾고, 보수 야당은 집권 1년 밖에 안 된 문재인 정부 탓으로 모든 책임을 돌린다. 정치가 당파적 진영의 전쟁터가 되자 서민들은 삶의 현장이 전쟁터가 되었다.

 

 

비토크라시를 버리고 데모크라시로 돌아가야

2018년 한국 정치는 1990년대 이후 대통령의 힘은 빠지고 국회, 관료, 사법부의 힘은 커진 ‘과두(寡頭)’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파워집단간 키가 비슷해졌다. 그 누구도 어떤 일을 결정할 힘은 갖지 못하고 상대의 정책과 의도는 모조리 거부할 수 있는 ‘비토크라시의 늪에 빠져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 위기의 핵심적 문제다. 누구도 일을 못되게 할 수는 있으나 누구도 일을 해낼 수는 없다. 여야를 떠나 대통령과 국회, 관료, 사법부 간의 관계로 확장해보아도 이러한 발목잡기의 연쇄체인이 스쿠루지의 쇠사슬처럼 온몸을 감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힘을 쓸 수 없는 구조다. 대통령과 청와대는 장차관, 공기업 사장 등 제한된 고위 공무원 인사 외에는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인사도 현재의 청문회 제도에서는 상당수 지명자가 사상자로 퇴장한다.

ⓒ 셔터스톡

과거는 어떠했던가. 과두정, 비토크라시는 언제부터 등장했던가. 시대의 주역에 관한 관찰을 통해 설명을 덧보태고자 한다. 1980년대는 ‘군인의 시대’였다. 대통령도 군 출신이고, 집권당의 대표도 군 출신이던 시대였다. 일부 법률가들이 조력자로 가세해 집권당을 육법당(陸法黨)이라 불렀다. 정부의 장관들과 국회의원도 군 출신이 실세였다. 무소불위의 군인들 앞에 모두가 숨을 죽이던 시대였다. 그 때는 분노의 대상이 분명했다.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왜 싸워야 하는지 분명했다. 단지 용기만 있으면 충분했다. 가장 힘이 센 사람과 가장 자주 보는 사람과 가장 분노해야 할 사람이 같았다. 반독재 투쟁이 쉬웠던(?) 이유다. 전선에서 이탈해 군인에게 포섭되는 순간 ‘어용’ 교수가 되고 ‘사쿠라’ 야당이 되었다. 1980년대의 파워그룹은 군인, 관료, 재벌, 정치의 순서로 서열이 분명했다.

1990년대는 ‘정치인의 시대’였다. 1993년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다 지난 30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했던 군인들은 과거의 위세는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몰락했다. 군인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3김을 필두로 한 정치인이었다. 그 뒤를 이어 관료들과 재벌들은 영향력을 더 확대했고, 남은 한 자리는 언론이 차지했다. 1990년대는 언론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기업을 망하게 할 수도 있고, 대통령을 만들 수 있다고 스스로 믿던 시대였다.

2018년 대한민국의 패권은 누가 차지하고 있을까? 정권을 잃은 사람들은 대통령과 청와대가 제왕적 권력을 가졌다고 말한다. 10여년 전부터는 재벌 패권론, 관료 패권론이 득세해왔다. 최근 들어서는 대법원·헌법재판소·검찰·로펌 같은 법조 패권론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법조 패권론의 등장은 혁명 전야, 또는 구체제 말기적 현상이라는게 필자의 해석이다. 프랑스 혁명은 절대 왕정의 부패와 기근때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의 농민들은 법복귀족의 횡포를 더 무서워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구조! 지금으로는 안된다

단일한 적이 안 보이는 공공 테러의 시대, 언제 어디서나 드론 공격이 가능한 시대다. 분노의 주체는 광장으로 나오기 때문에 보이지만 분노의 대상은 꼭꼭 숨어들어 잘 보이지 않는다. 가장 힘이 센 사람과 가장 자주 보는 사람과 가장 분노해야 할 사람이 다 다르므로 누가 주적인지 불투명하다. 보수·진보 할 것 없이 모든 엘리트들이 다 포섭되었기 때문에 어용도 없고 사쿠라도 없다. 첫 번째 민주주의 시기와 달라진 점이다.

불행한 사실은 관료, 재벌, 법조 누구도 자기들이 이 나라를 끌고 간다는 자각이 없다는 것이다. 관료들은 자기 부처의 이해를 중심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국가를 책임진다는 전략적 사고를 하기가 어렵다. 기업과 법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1980년대의 군인과 1990년대의 정치인은 전략에 사고에 능하고 대한민국의 운명을 자기들이 결정한다는 시대적 소명의식도 있었다. 무엇보다 추진하고 결정할 힘이 있었다.

2018년 대한민국은 꿈도 잃고, 길도 잃고, 힘도 잃었다. 비전도 없고, 전략도 없고, 리더십도 없다. 교차로에서 뒤엉켜 모두 경적만 울리는 상황이다. 군인과 정치인의 시대에는 청문회도 없고, 미투도 없고, 스마트 폰이 없었다. 상대적으로 쉬웠다. 지금은 정치인이 ‘예능’을 하는 가벼움의 시대다. 전쟁 같은 진영 싸움으로 정치뿐만 아니라 군, 검찰, 법원, 경찰, 관료, 언론, 방송, 공기업까지 모두 전쟁터가 되어 쑥대밭이 되었다. 권력은 사라졌고 권위는 떨어졌다.

‘1987 체제’로부터 시작한 첫 번째 민주주의기를 대체할 두 번째 민주주의기의 출범이 시급하다. 방향과 목표는 분명하다. 누구도 결정하지 못하는 과두 상태의 ‘비토크라시(Vetocracy)’를 깨는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첫 번째 민주주의기를 열면서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1988년 소선거구제를 통해 ‘적과 동지’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한 ‘체제 내화(內化)’를 얻어낸 것처럼 두 번째 민주주의기에는 ‘다당제’를 통해 생각이 다른 목소리에 정당한 지분을 인정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에는 문재인 대통령도 여러 차례 동의와 의지를 밝힌 바 있다. 대통령과 여당은 이를 결단하고 이 문제에 대해 짐짓 뒷짐지고 있는 야당을 장내로 끌어들여야 한다. 1987년에는 군 출신의 지도자들도 30년 독재의 기반을 무너뜨릴 결단을 했는데 촛불 민심으로 들어선 민주당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결단을 못하면 창피사건이다.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고 체제 리뉴얼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4인 가구 동거를 설정해 지은 1990년대의 아파트가 1인 가구, 2인 가구가 사는 오피스텔, 아파트로 급속히 대체되고 있다. 오비와 하이트가 양분해온 맥주시장은 수입 맥주, 소규모 양조장 맥주의 폭발을 맞고 있다. 소비자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정치 소비자 또한 변화를 갈망한다.

 

 

두 번째 민주주의 시기, 누가 어떻게 열 것인가

전략적 목표는 세 가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의 비전을 향해 전략과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은 누구도 결정하지 못한다. 두 번째는 자기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갖고 있지 못한 국민을 대변할 정치세력이 자기 지분만큼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선거제도(연동형 비례대표제나 중·대선거구제)의 개편을 통해 다당제를 안착시키는 것이다. 선거가 포용할 수 있는 국민의 폭을 넓히는 일이다. 세 번째는 선출권력이 비선출 권력을 통제하는 ‘문민 통제’의 원칙과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선출된 권력이 비선출 권력의 발목잡기로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세 가지는 모두 개헌과 선거제도의 개편으로 가능하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유권자인 국민은 정치인을 (선거를 통해) 통제하고, 정부는 (법과 제도를 통해) 국민을 통제하고, 정치는 관료와 사법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은 선출 권력이 비선출권력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잃고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다.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보다 더 중요한 과제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해찬 대표, 범여권 지도부는 이 문제를 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박성민/ 정치 평론가

피렌체의 식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