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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리더의 말과 글’] 긴즈버그의 잘 계산된 ‘long game’…여성 민권의 오랜 장벽을 깼다

by | 2020년 9월 29일 | 국제, 기획 · 연재, 박상현의 '리더의 말과 글'




지난 18일,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대법관의 부음을 전하면서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많은 미국의 언론매체들이 “페미니즘의 선구자”, “페미니스트 아이콘”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여성의 민권(civil rights)을 위해 싸웠던 긴즈버그를 설명하는 데 페미니즘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들린다.

하지만 긴즈버그는 처음부터 진보 성향이 뚜렷한 판사가 아니었다. 1993년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이 대법관 후보로 지명했을 때만 해도 긴즈버그는 중도(moderate) 성향으로 분류되었던 판사였고, 당시 여성계는 탐탁지 않게 받아들였다. 첫 번째 여성 대법관인 샌드라 데이 오코너가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지명한 ‘보수 판사’였던 것을 생각하면 두 번째 판사는 여성의 민권을 지켜줄 수 있는 진보 성향의 판사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 진영에서는 뚜렷한 진보-여성 대법관을 원했지만, ‘새로운 민주당’(New Democrats)으로 분류되는 빌 클린턴은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1933년에 태어난 긴즈버그가 하버드대학 법과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코넬대학에서 만나 결혼한 남편이 같은 학교에 진학한 이듬해인 1956년이었다. 그 해 입학한 500여 명의 학생들 중 여성은 단 9명에 불과했다. 법과대학원 학장은 그 아홉 명과 가족을 초청한 저녁식사에서 “남자들의 자리를 빼앗아가면서 법대에 진학한 이유가 뭔지 한 사람씩 말해보라”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이 질문에 대한 긴즈버그의 답은 페미니스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 해 먼저 진학한) 남편이 어떤 일을 하는지 좀 더 잘 이해하고, 그를 도와주기 위해서”라는 뜻밖의 대답이었다.
1950년대의 미국이 어떤 세상이었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화이지만, 긴즈버그 본인도 인정하듯 그 때까지만 해도 페미니즘 운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다. 많은 여성들이 그랬듯 그도 세상이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그 안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찾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던 긴즈버그가 미국 여성들의 처지가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건 그가 29세가 되던 1962년에 법제 연구차 스웨덴에 갔다가 그 나라 여성들의 지위를 직접 목격한 후였다. <워싱턴 포스트 9월 25일자 보도>

“(미국에)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원래 그런 거라 생각했어요. 세상은 원래 그런 거니까 내가 견뎌야 하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I guess I knew inequality existed [in the U.S.], but it was just part of the scenery. It was the way things were. You had to cope with it.”

그런데 여성은 집에 남아 가정주부로 사는 것이 당연시되었던 당시 미국과 달리, 스웨덴에서는 아내와 남편이 모두 직업을 갖는 것이 흔한 일임을 긴즈버그는 발견했다. 물론 당시만 해도 여성은 일을 하면서도 집에 돌아와서는 주부로서 집안일을 모두 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 스웨덴 여성들은 “왜 남자는 직업이 하나고 여자는 둘이어야 하느냐”고 묻고 있었다.

◇1992년 뉴욕대학 강의

긴즈버그는 여성의 민권을 무조건 옹호하지 않고 신중하게 접근했다. 이런 접근이 그의 중도 성향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성차별이 당연하던 시기에 태어나 자란 여성의 조심스런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전략적 접근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지만, 적절한 판단을 위해 긴즈버그가 밝힌 견해를 몇 가지 소개해보려 한다.

우선 여성 민권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대법원의 낙태권 판결에 관한 긴즈버그의 비판적 견해를 보자. 흔히 Roe v. Wade (1973)라고 불리는 이 판결은 인권운동가 출신의 진보대법관 서굿 마셜(Thurgood Marshall) 등의 주도로 얻어낸 여성운동의 기념비적 성과이자, 트럼프를 앞세운 미국의 보수진영이 반드시 뒤집겠다고 벼르고 있는 표적이다.

그런데 긴즈버그는 대법관으로 임명되기 한 해 전, 뉴욕대학의 한 강의에서 대법원의 낙태권 판결은 옳지만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적용된 판결이라고 주장했다. 원래 Roe v. Wade 사건은 텍사스 주의 낙태 금지가 위헌이라는 원고의 주장을 판단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73년 당시 대법원은 평소와 달리 특정 사안의 위헌 여부를 결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50개 주에 존재하는 모든 낙태 금지가 위헌이라고 결정해버렸다. 이 강의에서 긴즈버그는 그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강의는 논문으로 남았다. <논문 보기>

“경험에 따르면 원칙의 팔과 다리가 너무나 성급하게 만들어지면 오래 버틸 만큼 든든하지 못합니다.”
“Doctrinal limbs too swiftly shaped, experience teaches, may prove unstable. (중략)”

“대법원이 Roe 케이스에서와 같이 미국에서 당시에 새롭게 만들어진 극단적인 (낙태금지)법들만이 위헌이라고 판단하는 데서 멈추고 더 나아가지 않았다고 생각해봅시다. 대법원이 각 주의 (낙태금지)법들을 모두 대체하는 포괄적인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 목격하듯, 그리고 대법원의 판결이 갈린 Planned Parethood v. Casey 케이스에서 보듯, 20년 넘게 이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었을까요? Roe 케이스처럼 포괄적인 판결을 내리지 않고 텍사스 주의 극단적인 법에만 위헌 판결을 내렸다면 논란은 더 커지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Suppose the Court had stopped there, rightly declaring unconstitutional the most extreme brand of law in the nation, and had not gone on, as the Court did in Roe, to fashion a regime blanketing the subject, a set of rules that displaced virtually every state law then in force. Would there have been the twenty-year controversy we have witnessed, reflected most recently in the Supreme Court’s splintered decision in PlannedParenthoodv. Casey? A less encompassing Roe, one that merely struck down the extreme Texas law and went no further on that day, I believe and will summarize why, might have served to reduce rather than to fuel controversy.”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존재하지 않지만 긴즈버그는 이런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대법원의 이야기를 다룬 유명한 책 <The Nine>의 저자이자, 뉴요커 지(紙)에 법과 관련한 주제로 글을 쓰는 제프리 투빈은 한 인터뷰에서 ‘대법원이 그렇게 포괄적인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낙태법에 대한 공격이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긴즈버그의 생각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게 긴즈버그의 접근법’이라고 말했다. <제프리 투빈 인터뷰>

긴즈버그의 강의가 있은 지 30년, 판결이 있은 지 50년이 되어가는 지금, 긴즈버그의 공석을 채우도록 트럼프가 지명한 대법관 후보는 바로 그 판결을 뒤집을 것으로 기대되는 인물이다. 긴즈버그의 판단이 맞았던 것일까, 아니면 지난 50년 동안 대법원의 판결이 지켜준 여성의 권리를 대법원을 통해 계속 지켜야 하는 것일까? <에이미 코니 배럿에 관한 보도>


◇1971년 남편의 동등한 권리

긴즈버그의 견해가 그가 한때 가졌던 중도 성향에서 비롯되었다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접근이 잘 계산된 롱 게임(long game)임을 보여주는 사례들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Weingberger v. Wiesenfeld 케이스.

이 케이스는 출산 중에 아내를 잃은 한 남성이 갓 태어난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서 (당시까지만 해도) 남편을 잃은 아내가 받던 사회보장연금을 받으려고 신청했다가 거부당한 사건이다. 이 부부의 경우 세상을 떠난 아내가 소득이 더 많은 ‘bread winner’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회에서 그 역할은 남성들이 하고 있다는 편견으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남성에게는 연금이 지불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재판 당시 대학에서 법을 가르치던 긴즈버그가 판사가 아닌 원고 남성의 변호사로 싸워서 대법원까지 올라갔고, 결국 원고 측이 이겼다. 언뜻 보면 이 판결은 여성의 권리와는 무관해 보이지만, 긴즈버그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여성의 권리 주장의 핵심은 남녀가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다르다”는 전통적인 성역할 분리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이 케이스가 바로 그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긴즈버그는 “성(역할)의 구분은 여성을 떠받는 게 아니라 우리에 가둔다.”(a gender line (…) helps to keep women not on a pedestal, but in a cage.)”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소위 ‘미망인’이라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을 막고 있음을 간파하고 지적했을 뿐 아니라, 재판을 통해 깨뜨린 것이다. 여성들만 누리던 것을 남성들도 누릴 수 있게 한 다음에는, 남성들만 누리던 것을 여성들에게 금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긴즈버그의 롱 게임이다.

◇1996년 버지니아 군사학교 판결

흔히 United States v. Virginia라고 알려진 이 판결은 유명한 버지니아 군사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 VMI)가 남학생들만 사관생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재판에서 버지니아 주는 여자대학에도 리더십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버지니아 군사학교에서 남학생들만 받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VMI가 갖고 있는 평판 및 그 학교의 졸업생들이 누리게 되는 인맥은 여대에 있는 리더십 프로그램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혜택을 남성들만 누리도록 처음부터 제한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판결문에서 긴즈버그는 이렇게 말했다.

“법이나 정책이 여성이 자신의 재능과 능력으로 포부를 품고, 성취하고, 사회에 참여하고 기여하는 등 시민의 권리를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부한다면, 연방 정부와 주 정부 모두 평등보호조항을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Neither federal nor state government acts compatibly with equal protection when a law or official policy denies to women, simply because they are women, full citizenship stature—equal opportunity to aspire, achieve, participate in and contribute to society based on their individual talents and capacities.”

◇2007년 레드베터 對 굿이어타이어

굿이어타이어 회사에서 일하다 퇴직한 여성이 자신과 비슷한 일을 한 남성들에 비해서 심각한 수준으로 적은 임금을 받았음을 알고 연방법인 차별금지법 위반으로 회사 측을 제소해서 대법원까지 올라온 이 판결(Ledbetter v. Goodyear Tire & Rubber Co.)에서 긴즈버그는 소수의견에 속했다.

대법원은 이 여성의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고 판결하고 하급법원의 판결에 손을 들어줬지만 긴즈버그는 소수의견에서 “직장에서는 노동자가 다른 사람의 연봉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공소시효는 원고가 다른 사람의 연봉을 알게 된 후부터 계산해야 한다”면서 이례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직접 읽으며 대법원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특히 긴즈버그는 “공은 이제 의회로 넘어갔다(The ball is in Congress’s court)”라는 말로 의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민주주의 제도에서 궁극적인 결정은 민의를 대변하는 의회에서 입법 활동을 통해 내려야 하는데 의회가 필요한 법을 만드는 기능을 게을리 하는 바람에 법원이 이런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는 질책이었다.

2008년 대선 당시 대통령에 당선된 버락 오바마는 헌법을 가르치던 교수로서 긴즈버그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당선 후 의회와 협력해서 통과시킨 첫 번째 법안이 바로 ‘레드베터 공정 임금법(Lilly Ledbetter Fair Pay Act)’이었다. 긴즈버그의 충고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2013년 셸비 카운티 對 에릭 홀더

1960년대 미국에서 통과시킨 대표적인 민권법안인 선거권법(Voting Rights Act, 1965)은 낙태권과 함께 끊임없이 공화당과 보수 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온 법이다. 2013년에 급기야 이 법의 주요 조항 중 하나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온 것이 Shelby County v. Holder 케이스다.

각 주에서 투표와 관련한 법을 개정할 경우 법무부의 사전허가(preclearance)를 받도록 한 절차가 위헌이라고 판결하는 바람에, 흑인 표가 많은 남부 주들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흑인 유권자의 투표를 방해하는 ‘꼼수’를 쓰는 것을 막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때 대법원장인 존 로버츠가 손을 들어주는 바람에 5대4로 위헌판결이 나오자 긴즈버그는 이례적으로 소수의견을 통해 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투표방해행위를 잘 막아왔고, 지금도 잘 작동하고 있는 사전허가제도를 내던지는 것은 비바람 속에서 몸이 젖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비를 막고 있던) 우산을 던져버리는 것과 같다.”
“Throwing out preclearance when it has worked and is continuing to work to stop discriminatory changes is like throwing away your umbrella in a rainstorm because you are not getting wet.”

◇2000년 부시 對 고어

2016년의 대선 승자인 도널드 트럼프, 2000년의 대선 승자였던 조지 W. 부시의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일반유권자들의 표(popular votes)는 상대 후보보다 적게 받았지만, 격전지에서의 승리로 선거인단 수(총 538명)에서 앞서는 바람에 대통령이 된 것이다.

2000년 선거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플로리다 주에서는 투표용지의 심각한 문제로 재검표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재검표를 하려면 해를 넘겨도 승자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재검표를 둘러싸고 플로리다 주 대법원과 연방대법원의 공방이 벌어졌고, 결국 이런 전례 없는 위기를 끝낸 것은 대법원의 판결이었다. 플로리다에서 재검표를 하지 않도록 하는 바람에 결국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소수의견을 낸 긴즈버그는 이렇게 말했다.

“헌법을 충족시키는 재검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대법원의 판결은 예언이며, 대법원은 그 예언이 맞는지를 검증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검증되지 않은 예언이 미합중국의 대통령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The court’s conclusion that a constitutionally adequate recount is impractical is a prophecy the court’s own judgment will not allow to be tested. Such an untested prophecy should not decide the presidency of the United States.”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긴즈버그는 트럼프의 재선 여부를 지켜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트럼프는 긴즈버그의 유언을 무시한 채 새로운 대법관의 임명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2000년 대선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한 개표 논란이 발생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박상현 필자

뉴미디어 스타트업을 발굴, 투자하는 ‘메디아티’에서 일했다. 미국 정치를 이야기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워싱턴 업데이트’를 운영하는 한편, 조선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에 디지털 미디어와 시각 문화에 관한 고정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아날로그의 반격≫, ≪생각을 빼앗긴 세계≫ 등을 번역했다. 현재 사단법인 코드의 미디어 디렉터이자 미국 Pace University의 방문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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