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식당에서 아내가 묻는다.
“뭐 먹을 거야?”
“난 순두부찌개”
“아들은?”
“비빔밥”
메뉴판 보던 아내가 “이집 이거 잘해. 여기 보리쌈밥 3인분이요.”

#2
옷가게에서 또 아내가 묻는다.
“이 옷 어때?”
“좋아”
“이건?”
“좋아”
“좋다고만 말고... 잘 봐봐. 이건 어떤데?”
“그건 좀”
“난 괜찮은 거 같은데...”
“그럼 사든가...”
“아니, 딴 데 더 보고...”

#3
아내에게 얘기했다.
“내가 돈을 한 번 벌어보고 싶어. 당신은 돈이 얼마나 있으면 만족하겠어?”
아내가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딱 한마디 했다.
“우리 원국이가 또 사고 쳤구나. 조용히 원상 복구해 놓든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말하지 마라. 둘 중에 하나 안 되면 이번엔 그냥 못 넘어간다.”

일상의 대화가 그립다. 코로나19로 강의도 약속도 없는데, 아내와의 대화마저 사라졌다. 외식이나 쇼핑할 일도, 주식에 투자할 여유도 없다.

대화 실력은 리더의 핵심 역량

말의 종류는 많다. 토론, 보고, 발표, 연설 등. 이 가운데 가장 많이 하는 게 대화다. 담소는 물론 논의나 회의, 회담, 대담, 좌담, 면담, 면접 모두 대화다. 대화는 일상적인 말하기다. 말을 잘하는 것과 대화를 잘하는 것은 별개이다. 말은 못해도 대화는 잘할 수 있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 오히려 대화에는 서툴 수 있다. 그런데 연설이나 토론을 잘하는 사람은 말을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대화를 잘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리더의 말하기 중 가장 중요한 건 대화이고, 대화 실력이 리더의 핵심 역량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 대화를 잘하는 사람에게 호감이 간다. 그런 사람의 말에 신뢰가 간다. 그럼에도 대화를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화에 서툰 걸 불편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는다. 대화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리더 자격이 없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전교 1등을 했어도 말이다.

#대화가 필요한 이유① 정신건강

이전에 즐겨 보던 개그 프로그램 중에 '대화가 부족해'가 있었다. 이 코너가 재미있었던 건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없는 소리라도, 의미 없는 수다라도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 내 생각에 곰팡이 피지 않도록, 서로의 생각이 멀어지지 않도록 대화하고 관계해야 한다.

나는 주로 아내에게 하소연한다. 지난 일에 대해 후회하고, 현재의 고민을 말한다. 그리고 앞일을 걱정한다.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제풀에 감정이 정리된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여보, 나 죽으면 화장하지마.”
“왜?”
“뜨거울까봐 무서워.”
“나는 산에 혼자 누워있는 게 더 무서워.”

아들은 문자로 대화한다. 심지어 한 집에 있으면서도 자기 방에서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낸다.
“밥 언제 먹어요?”
문자는 표정이 없다. 감정의 교류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말하는 사람의 표정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배경과 맥락을 생략한다. 또한 듣는 사람의 표정을 보고 오해를 해명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이모티콘으로 안간힘을 쓰지만 한계가 있다.

남 앞에서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저 깊은 곳에서는 말하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를 방치하면 답답증을 느낀다. 무기력, 고립감, 우울증에 빠진다. 말을 시원하게 하고 나서 느끼는 뿌듯함이 없다.

#대화가 필요한 이유② 창의성

창의성을 요구받는 시대에 대화는 불가결하다. 서로 다른 게 섞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시대다. 토론이건 논의건 회의건 대화가 필요하다.

1990년대 초 캐나다 맥길대 캐빈 던바 교수(심리학과)는 실험실 네 곳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나오는 곳을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획기적인 발견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실험실 현미경 앞이 아니었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정기모임이었다. 다른 분야 연구원의 얘기를 듣고, 자신의 연구 과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좋은 아이디어들이 잇따라 나왔다.

나는 이런 사실을 참여정부 5년 동안 직접 경험했다. 연설비서실은 매일 모여앉아 이러저런 얘기를 나눴다. 때로는 의미 없는 잡담을 했고, 또 어떤 때는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각자 글 쓰면서 느끼는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또한 ‘독회’라는 자리를 통해 공동으로 글을 고쳤다. 고치는 과정에서 치열하게 토론했다. 함께 대화할 때 몇 가지는 반드시 지켰다. 남의 의견은 일단 듣는다. 각자 한 번 이상 발언한다. 발언하기 위해 준비한다. 모두가 동의할 때까지 의견을 나눈다. 발언권은 동등하다. 이런 관계와 연결이 연설비서관의 재주 없음과 얕은 실력을 상쇄해줬다.

#대화가 필요한 이유③ 민주주의

대화는 민주주의 그 자체이다. 민주주의는 생각과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관용의 토대 위에서, 대화하고 타협한 후, 그 결과에 승복하고, 패자에게는 재도전의 기회가 주어지는 게 민주주의다.

이런 민주주의 과정에서 핵심은 대화이다. 대화하기 위해선 관용해야 하고, 대화를 통해 만들어진 결론만이 모두를 승복시킬 수 있다. 대화가 안 되면 타협도 합의도 결론도 없다. 대화가 없는 사회는 사생결단, 약육강식만 있을 뿐 약자에 대한 배려도 패자 부활의 기회도 없다.

군사독재와 압축성장 과정에서 대화의 가치는 과소평가되어 왔다. 아니 비효율과 지체를 일으키는 주범으로 지목됐다. 또한 대화가 없는 사회는 사람에 대한 이해 부족과 불신을 키웠고, 상대에 대한 불신은 명령, 훈계, 비난을 낳았다. 대화를 통해 더 큰 이익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강요하고 공격함으로써 내 이익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대화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대화 기회가 많을수록 오히려 관계를 해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자주 만나 대화하다 보면 때론 의도치 않게 선을 넘게 되고 관계가 틀어진다. 사실 접촉하지 않고 대화하지 않으면 소원해지긴 할망정 오해를 살 일도 없다. 그래서 대화는 고슴도치 딜레마 같은 것이다. 온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가까이 가야 하지만, 가까이 가면 가시에 찔리게 되니 말이다. 이런 역설 때문에 대화의 기술이 필요하다.

대화의 요체는 수사학 아닌 심리학

대화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잘 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 말을 잘 들어주면 싫어할 사람 없으니 맞는 말이다. 먼저 듣고 나중에 말하고, 많이 듣고 적게 말하는 것이 전략적으로도 유리하다. 상대 생각을 안 뒤에 말할 수 있고, 상대로부터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뭐가 어렵다고 잘 안 될까. 부질없는 우려 때문이다. 말을 안 하면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 취급할까봐. 또 뭔가 마음에 안 들어서 조용히 있는 줄 알까봐. 그리고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는 내가 먼저 말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말을 하다 보면 결국 남의 말을 듣는 데 소홀해진다.

김대중(사진) 전 대통령은 생전에 손목시계, 책장, 화장실 벽에 ‘침묵’이라고 붙여 놓았다. 그는 어린 시절 혼자 떠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남의 말을 자주 가로챘다. 독선적인 아이로 따돌림을 당했다. 정치를 하면서 이런 단점을 고쳐보려고 줄곧 노력했다. 그는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란 책에 이렇게 썼다.
“대화의 요체는 수사학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심리학에 있다.”

대세 묻어가지 말고 줏대 있게 말해야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걸음 더 나가야 한다. 우선, 묻어가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투명인간처럼 눈치나 보면서 대세에 묻어가지 않아야 한다. 모두가 짜장면을 말할 때 나는 ‘짬뽕’이라고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얹혀가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내 것은 내놓지 않고 남의 것만 얻어가려는 거지근성을 버려야 한다. 대화의 주체로서 남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영양가 있는 소리를 해야 한다. 누군가의 힘이 돼야지 짐이 되어서야 쓰겠는가.

끝으로,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부초처럼 둥둥 떠다녀서는 안 된다. 줏대를 갖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와의 대화가 필요하다. 내가 이럴 것이라고 믿는 내가 아니라, 남들이 너는 이렇다고 말하는 내가 아니라, 주변에서 당신은 이래야 한다고 요구하는 내가 아니라, 진짜 나와 대면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태도, 목소리, 말의 속도에 신경써야

말은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눈으로도 받아들인다. 자신 있는 자세, 확신에 찬 표정, 자연스런 고갯짓, 적절한 손동작, 흔들리지 않는 시선 등이 순간순간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상대를 향해 약간 숙이고 상대의 눈을 보고 말하는 것은 기본이다.
팔짱을 낀다거나 한숨을 내쉰다든가 귓속말을 한다든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는 일은 대화를 망친다. 대화하는 태도에 그 사람의 인품이 배어있다.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 있는지, 공감능력과 감수성은 어떤 수준인지,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얼마나 큰지.

“말은 맞는데 싸가지가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네 가지를 하지 말아야 한다. 이기려들기, 가르치려들기, 독차지하려들기. 잘난 체하려들기. 대화할 때 이겨야 직성이 풀리고, 남을 얕잡아보며 가르치려 하고, 시종일관 잘난 체하고,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다행이다. 남을 이길 만큼 똑똑하지도, 남을 가르칠 만큼 아는 게 많지도, 말을 독점할 수 있을 만큼 할 말이 많지도 않다. 잘난 체를 좀 하기는 하지만 진짜 잘났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라는 걸 사람들이 안다. 그래서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듣진 않는다.

목소리 크기와 말의 속도도 중요하다. 누구에게 말하느냐에 따라 말의 크기와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어르신들께는 큰 소리로 천천히 말하고, 연인에게는 소곤소곤 말하고,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는 큰 소리로 빨리 말해도 될 것이다.

상대방이 만족하는 소통이 돼야 

대화의 성공 여부는 내가 아니라 상대방에 달려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아야 한다. 대화의 목적은 소통이다. 친목을 위한 대화였다면 상대 기분이 좋아지고 나에 대한 친밀감이 높아져야 한다. 설명을 위한 대화였다면 상대가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무언가를 설득하는 대화였다면 상대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그랬을 때 소통에 성공한 것이다. 내가 아무리 흡족하게 대화했어도 상대가 만족하지 못하면 그 소통은 실패한 것이다.

상대가 만족하는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맞춰야 할 것이 있다. 첫째, 눈높이를 맞춘다. 노무현 대통령이 어린이와 사진 촬영할 때 두 다리를 넓게 벌려 키를 낮추듯 대화의 수준을 맞춰야 한다. 어렵게 말해도 될 대상이 있고, 쉽게 말해야만 알아듣는 상대가 있다.

둘째,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에 주목함으로써 관심사를 맞춘다. 그러기 위해 먼저 상대의 기호나 취향을 파악하고, 그 가운데 나와 비슷한 대목을 찾아 대화를 이끌어간다. 또한 뺄셈보다는 덧셈을 해야 한다. 남의 말을 깎아내리거나 반박하기 보다는 그 말을 보완하고 보충해주는 대화를 해야 한다.
‘그러나’, ‘하지만’ 보다는 ‘그리고’, ‘아울러’, ‘그와 함께’라는 말로 보태줘야 한다. 더 나아가 발언 내용도 비관적이기 보다는 긍정적, 소극적이기 보다는 적극적인 게 바람직하다.

셋째, 말의 비중을 맞춘다. 상대 말에 내 말을 보태거나, 상대 말을 ‘이런 뜻이죠?’하며 해석하고 부연하거나, 질문하는 방식으로 상대를 중심에 놓고 대화한다. 말을 많이 한다고 설득되지 않는다. 주도권을 쥐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럴수록 상대는 더 멀리 도망간다. 알맞은 타이밍에 할 말만 하고 빠져야 한다.

넷째, 단점을 지적하기 보다는 장점을 칭찬해서 비위를 맞춘다. 사람은 누구나 단 것을 좋아하고 쓴 것은 싫어한다. 아무리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고 하지만 쓴 것을 좋아라하는 사람은 없다. 상대의 기를 꺾기보다는 체면을 세워줘야 한다.

나는 늘 아내에게 맞춰주며 산다.
“당신, 예전에 만났다는 그 여자랑 결혼했으면 행복했을 것 같아?”
“아니.”
“왜?”
“지금이 좋으니까.”
“정말?”
“응”

이렇게 맞춰주는 일은 낯을 가리고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 더 잘할 수 있다. 그리고 하면 이런 칭찬을 듣는다. “그 사람 만나면 왠지 즐겁고 기분이 좋아.”

대화란 서로 차이를 극복하는 과정

대화는 어찌 보면 차이를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다른 사람이다. 대화는 내 말을 일방적으로 지껄이는 발화가 아니다. 듣는 사람과 협력하는 담화다.

‘티키타카’란 말이 있다. 스페인어로 탁구공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표현한 단어이다. 대화는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임이다. 운동 경기는 내가 점수를 많이 내야 승리하지만, 대화는 상대가 점수를 내도록 도와줘야 이기는 경기다. 상대가 내 말을 받지 못하도록 강(强) 스파이크를 날리는 게 아니고, 상대방이 잘 받아서 랠리를 이어감으로써 내가 다시 말할 기회를 얻어야 이기는 승부다.

미국 작가 존 그레이가 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남녀의 대화 방식 차이를 밝힌 이 책을 읽으며 아내와 내가 얼마나 다른지 새삼 확인했다.

#4
“나 뭐 달라진 것 없어?”
아내에게 이런 질문 받을 때가 제일 무섭다. 맞춘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왜 그렇게 무심해? 당신은 그래서 안 돼.”
뭐가 바뀌었는지 끝내 얘기를 안 해준다.

#5
급히 가야 하는데 아내가 거울 앞에 앉아 있다.
“늦었어. 빨리 갑시다.”
“어때 괜찮아?”
“이뻐 이뻐”
“나도 눈이 있는데 모르겠어? 아 큰일이야. 이 식지 않는 미모.”

#6
결혼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아내는 묻는다.
“처음 만날 때 내 인상이 어땠어?”
“응, 좋았어.”
“어떻게 좋았는데? 자세히 말해봐”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묻고 또 묻는다.

남성은 리포트(report)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여성은 라포(rapport), 즉 마음이 서로 통하는 신뢰관계를 구축하려고 한다. 리포트에 해당하는 것이 정보, 사실, 주장이다. 라포에 해당하는 것은 느낌, 해석, 정서다.
리포트는 설득이 목표이다. 라포는 공감이 목적이다. ‘소통’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두 가지 의미가 나온다. ‘뜻이 통하여 오해가 없음’과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이다. 다시 말해 소통이 되려면 리포트와 라포가 모두 통해야 한다. 이를 통해 서로 이해하고 갈등을 해소하고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대화인 것이다.


강원국 필자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증권회사 홍보실, 대우그룹 회장비서실 등을 거쳐 대통령의 스피치라이터로 8년간 일했다. 노무현 청와대에서는 연설비서관을 맡았다. 말과 글보다 미소 짓는 표정이 더 인상적이다. 저서로 『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가 있다. 각종 강연을 통해 ‘좋은 글쓰기’를 전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