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1990년대 초, ‘에이즈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작은 단체가 있었다. 이들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가 에이즈(AIDS, 후천적 면역결핍증후군)의 원인이라는 걸 정면으로 부정했다. 에이즈가 HIV 바이러스가 아닌 영양실조 같은 다른 이유로 걸리는 병이라고 주장했다.
교육 수준이 낮은 음모론자들로 구성된 단체가 아니었다. 이들 중엔 캘리포니아대학 교수도 포함돼 있었다. 주장은 주장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당시 남아공 대통령이었던 타보 음베키는 이들에게 적극 동조했다. 음베키는 HIV 치료약 등 에이즈 전염을 막기 위한 원조 제의를 거부했다.
음베키 정부의 ‘에이즈 부정론’은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그제서야 음모론에 대한 집착에서 조금 벗어났지만, 이미 30만명 넘은 남아공 국민이 목숨을 잃고, 감염을 피할 수도 있었을 3만5000여 명의 아이들이 HIV 양성 반응을 보인 뒤였다.

#장면 2
지난 29일, 독일 베를린을 비롯해 스위스 취리히,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에서 코로나19 관련 정부 조치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는데 반대하는 사람들부터, 존재하지 않는 팬데믹을 빌미로 정부가 국민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외치는 사람들까지 모두 다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000명 가까이 참가한 취리히 집회에선 이런 구호가 등장했다. ‘조심해라, 코로나를 믿는 바보들아’, ‘내 몸은 내 것이다’.

<사진1> 지난 29일 스위스 취리히의 코로나19 반대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조심해! 코로나 바보들아!'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2> 취리히의 코로나19 반대 집회 참가자. '내 몸은 나에게 속한다'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있다.

위의 두 케이스는 30년의 시차가 나지만 인간 사회의 음모론이 언제 어디서나 비슷한 양태로 등장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많은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전염병은 음모론이 퍼지기 좋은 토양이다. 코로나19 이후 비과학적 근거로 정부 조치에 반발하는 움직임은 유럽 전역에서 끊이지 않았다.

지난 3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어느 가톨릭 교구는 신자들을 위해 특별한 문서를 발급했다. 당시 스페인은 코로나19의 신규 확진자 수가 하루에만 1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어서 거리 통행이 금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장례식 등 예외적인 경우에 교구가 발급한 통행 허가증을 가진 사람들만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교구는 예외적인 이유가 없는 신자들에게도 미사를 위해 성당에 올 수 있도록 허가증을 내줬던 것이었다. 이것이 발각되자 교구 측은 “불법인 건 알았지만 위생수칙을 지켰다”고 변명했다.

코로나19로 숨진 가톨릭신부만 70여 명

스페인 인구의 약 70%는 기독교(로마 가톨릭) 신자다. 코로나19로 인해 종교행사가 금지됐지만, 앞에 말한 사례처럼 최악의 상황일 때도 이것은 잘 지켜지진 않았다. 몰래 미사를 드리다가 발각되는 일이 연이어 발생했다.
지난 3월 말에는 세비야에서 ‘종려 주일’(부활절 직전 일요일)을 맞아 선교회 모임이 열렸다가 경찰에 의해 중단됐다. 4월 초 그라나다에선 성(聖) 금요일(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을 기리기 위한 미사에 20여 명이 참석했다가 경찰에 발각돼 성당에서 끌려 나갔다.

정부 지침을 따르지 않은 대가는 처참했다. 스페인 주교회의에 따르면, 스페인에서 지난 4월 중순까지 코로나19 사망자로 추정되는 신부만 약 70명이다. 자성의 목소리가 나올 법도 한데, 현실은 그 반대였다. ‘스페인 기독교 변호사 연합’은 스페인 내무부 장관인 페르난도 마를라스카를 고소했다. ‘정부가 (종교 행사를 금지함으로써)국가 위기 상황을 기독교 박해에 이용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스페인에서 제2차 대유행 조짐이 뚜렷해진 지난 7월 말엔 가톨릭 바르셀로나 대교구가 코로나19 희생자(당시까지 2만8000여명)를 추모하기 위한 미사를 열었다. 장소는 한국인들에게도 관광 명소로 잘 알려진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사망자의 가족·친척뿐 아니라 요양원, 장례식장, 호텔, 공동묘지, 언론사 관계자들이 참석 대상이었다.
종교 행사에 10명 이상 모이는 게 금지된 상황이었지만 오멜라 대주교는 이를 밀어붙였다. 대주교는 미사 중 “우리는 힘을 모아야 한다. 함께 싸워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렇게 ‘함께 힘을 모은’ 결과, 8월 말 현재 스페인의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수는 하루 수천 명으로 다시 늘어났다.

독일에선 마스크 안 쓰려 '허위진단서'

스페인 가톨릭 교구가 ‘통행금지 예외 허가증’을 불법으로 발급하고 있을 무렵, 독일에선 ‘마스크 착용 예외 허가증’을 불법으로 발급했다. 현재 스위스에선 코로나19 때문에 대중교통을 비롯한 공공장소에선 마스크를 의무적으로 써야 하지만, 호흡기 질환 등 특별한 사유가 있다는 의사 진단서를 받으면 안 써도 된다. 이를 악용해 독일의 한 의사가 자신이 진단도 하지 않은 스위스 사람들에게 진단서를 보내준 것이다. 발급 비용은 단 5유로(약 7000원).

텔레그램(대화가 암호화되는 메신저) 그룹인 ‘코로나 레벨렌’(Corona-Rebellen, ‘코로나 저항자들’)에서 이런 정보가 돌았고, 한 스위스 언론사가 신청해봤더니 실제로 진단서가 배달돼왔다. ‘모니카 J’로 알려진 이 독일 의사는 진단서를 보내면서 자신의 개인적 의견을 첨부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스크 의무 착용에 대항해) 우리의 자유와 기본권을 지켜야 한다. 코로나19와 관련된 모든 조치를 즉시 무효화해야 한다. 당신은 자식들과 손주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의사가 환자와 대면해 진단을 하지 않고 진단서를 발급하는 것은 현재 스위스에서 최대 징역 5년형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다.


영국에선 코로나19가 한창 확산 중이던 지난 4월에 ‘5G(5세대 이동통신) 전파가 바이러스를 실어 나르고 인간의 면역체계를 파괴한다’는 가짜 뉴스가 퍼지면서 버밍엄, 리버풀 등에서 5G 기지국이 불타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유튜브에선 구체적인 방화 방법을 알려주는 동영상까지 등장했다. 전 세계 제약회사가 개발 중인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음모론은 나라를 가리지 않고 돌아다닌다. 코로나19 백신에 원숭이 뇌를 넣었다거나, 백신을 맞으면 얼굴 근육이 일그러진다거나, 빌 게이츠가 백신에 마이크로칩을 넣어 전 세계인을 조정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거나, 그 내용도 다양하다.

유튜브에선 5G 기지국 방화 선동

인터넷에서만 도는 얘기가 아니다. 내가 지난 7월 길에서 만났던 동네 사람은 날 보자마자 ‘코로나19가 애초에 백신을 만들어 팔기 위한 제약회사가 조직적으로 퍼뜨린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냐’고 물었다. 평범한 은행원인 그는 그 내용을 유튜브 다큐멘터리에서 봤다고 했다.
함께 모여 기도함으로써 바이러스를 이겨내자, 바이러스를 막는 데 도움이 안 되는 마스크는 벗어버리자, 바이러스의 전파 경로인 5G 기지국을 불태워 없애자, 백신은 음모다, 이런 주장들의 공통점은 뭘까.

한마디로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다. 이런 주장들에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 하지만 무비판적 추종자들이 넘쳐난다. 전문가들이 나서서 틀렸다고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이들은 전문가가 나서는 걸 ‘견고한 음모론’의 증거로 보고 자신들의 주장을 더욱 강화한다.

음모론은 언제 어느 사회에서건 있어왔다. 유명 정치인의 암살에서부터 백신이 자폐증의 원인이라는 주장까지. 하지만 이 현상이 전 세계적 팬데믹과 만나면서 소수의 기이한 행태로 웃어넘길 수만은 없게 됐다.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거나 기지국이 불타 인터넷을 못 쓰게 되면 사회 전체에 직접적인 피해가 생기기 때문이다.

反지성주의 뿌리는 네 가지

톰 니콜스의 <전문가와 강적들>(The Death of Expertise)은 이러한 반지성주의 흐름을 분석하고 비판한 책이다. 팬데믹 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시사점이 크다. 국제관계학 전문가이자 미 해군대학 교수인 니콜스는 반지성주의의 배경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인간의 심리학적 본성, 즉 확증편향과 평등편향 때문이다.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은 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증거만 받아들이는 성향이다. 이미 마스크가 소용없다고 결론을 내려놓고, 그에 관련된 증거만 찾아다니는 것이다.
평등편향(equality bias)은 ‘나도 맞고 너도 맞다’는 식의 공생 화법이다. 친한 사람들이 반대 주장을 할 경우 굳이 면전에서 그것이 틀렸다고 하진 않는다는 거다. 인간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다. 확증편향과는 반대되는 개념인 것 같지만, 비판이 실종됐단 점은 공통적이다.

이런 치우친 본성을 극복하고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교육인데, 비판적 사고를 기르는 교육을 해야 할 대학이 더 이상 제 역할을 못 한다는 게 반지성주의가 널리 퍼지고 있는 두 번째 이유다.
예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문제는 대학이 더 이상 ‘지성의 전당’이 아니라는 점이다. ‘환영합니다, 고객님!’을 외치며 학생을 수익 대상으로 보는 기업처럼 변질돼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식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과잉보호하는 헬리콥터 부모도 거기 장단을 맞춘다. 그 결과 “미국 문화는 ‘아이들이 스스로가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감싸주는’ 문화로 전락했다”고 톰 니콜스는 지적한다.

세 번째 문제는, 예상 가능하듯, 인터넷이다. 니콜스는 ‘스터전의 법칙’을 인용한다. 1950년대 초반에 고답적인 비평가들이 대중문학을 폄하하곤 했는데, 이에 화가 난 SF 작가 시어도어 스터전이 “어떤 장르건 대부분의 작품은 수준이 낮다. ‘모든 글’의 90%는 쓰레기다”라고 한 데서 비롯된 용어로, 인터넷에 존재하는 정보의 대부분은 전혀 가치가 없다는 의미다.
더욱이 전문 지식이 없는 유명 인사가 인터넷에서 쓰레기 정보를 퍼뜨리는데 합세하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유명 영화배우 기네스 펠트로가 자신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 여성 건강을 위해 질에 증기를 쐬라고 했다거나, 짐 캐리가 트위터에서 백신에 반대한다고 주장한 것이 그런 예다.

마지막으로 니콜스는 ‘가장 불편한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민주주의 개념이 뒤틀려버렸다는 거다. “서구 민주주의 체제의 국민, 특히 미국인들은 더 이상 민주주의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전문가와 일반인의 관계는 ‘민주적’이지 않다. 모든 사람의 재능이나 식견 수준이 똑같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는 늘 원한에 가득 찬 평등주의를 고집하려는 유혹을 받으며, 아무 제약을 가하지 않을 경우 그 고집은 억압적인 무지가 된다.”
한 마디로 말해 “민주주의가 ‘나의 무지함이 당신의 지식만큼이나 훌륭하다’는 뜻으로 잘못 해석되고 있다”(‘로봇 3원칙’으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말)는 것이다.

극도로 분업화된 현대 산업사회가 별 문제 없이 굴러가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독감에 걸리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세탁기가 고장 나면 수리 기사에게 연락해 고치는 건 각자가 맡은 영역에 대한 존중과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미국 反지성주의 뿌리는 종교계? 

그런데 이 전문 영역에 무조건적인 평등주의를 적용해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 것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앤서니 파우치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의 대립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5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파우치 소장은 아주 좋은 사람이지만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파우치 소장이 당시 상황에서 ‘개학 여부를 조심스럽게 결정해야 한다’고 발언한 걸 겨냥한 말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 세계적으로 반지성주의의 상징이 됐는데, 실제로 미국은 반지성주의의 역사가 깊다. ‘반지성주의’라는 용어가 처음 쓰인 건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책 <미국의 반지성주의>다. 무려 1963년에 나온 책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호프스태터는 사회가 발전하면서 예전과 달리 훨씬 복잡해졌다는 게 보통 사람들에게 무력감과 분노를 자아낸다고 말한다. “옛날에는 지식층의 도움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기에 지식인들이 그저 가벼운 놀림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그들의 도움이 너무 많이 필요하기에 강한 적대 의식의 대상이 돼버린 것이다.”

호프스태터의 이론을 바탕으로 반지성주의를 좀 더 현대적으로, 그러나 긍정적으로 분석한 책이 모리모토 안리의 <반지성주의-미국이 낳은 열병의 정체>다. 안리는 반지성주의를 지성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성찰이 결여된 지성, 또는 지성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특권계층에 대한 반감으로 본다.

호프스태터와 안리는 미국 반지성주의의 역사를 미국 종교의 역사에서 찾는다. 식민지시대 미국은 청교도의 극단적인 지성주의가 지배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신앙부흥운동(리바이벌리즘 또는 대각성운동이라고도 함)이 일어났다.
각자가 자기 내면을 응시하고 자신의 신앙 상태를 철저히 검토한 뒤 확신이 생기면, 어떤 권위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도전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안리는 이렇게 설명한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종교에는 ‘인공적으로 쌓아 올린 오만한 지성’보다 ‘소박하고 겸손한 무지’ 쪽이 소중하다는 기본적인 감성이 존재한다. 신의 진리를 인텔리만 알아서는 곤란하다. 신의 진리는 접하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진리여야 한다. (…) 반지성주의는 ‘학자’와 ‘바리새인’, 즉 성서 시대 당시 학문과 종교 권위자를 정면으로 비판했던 예수의 말을 궁극적인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부흥운동을 배경으로 미국 독립혁명이 일어나고, ‘개인의 자각’ 및 ‘평등주의’는 미국 건국이념에 중요한 토대가 된다.

반지성주의가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이며, 반지성주의 덕분에 오히려 지성이 비판 받아 사회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은 타당한 면이 있어 보인다. 꾸준히 제기되는 마스크 유용성에 대한 논란 때문에 바이러스를 막는 데 더 효율적인 마스크가 개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건전한 비판’일 경우에만 그렇다.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식의 반지성주의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라영은 <타락한 저항: 지배하는 ‘피해자’들, 우리 안의 반지성주의>에서 반지성주의를 ‘알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로 정의한다. “반지성주의란 단지 무지나 무식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반지성적 면모를 보이는 사람 중에는 지식이 부족하기는커녕 오히려 지식이 풍성한 사람도 있다. (…) 적어도 무늬는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과학적으로 갖추고 나름 ‘합리적인 혐오’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반지성주의 해법은 결국 소통과 참여

이 책에서 이라영이 반지성주의라는 키워드로 다루는 것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나꼼수’ 현상, ‘메갈리아’ 현상 등 주로 한국의 정치·문화에 관련된 것이지만, 이를 코로나19 팬데믹에 적용해도 들어맞는다. “기존 질서의 변화를 두려워하기에 자신을 바꾸는 성찰과 반성을 거부한다.” 서울 대형 교회의 목사와 신도들이 바이러스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 알기를 거부하는 것,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 2020년 대한민국의 반지성주의다.

팬데믹 시대에 더욱더 힘을 발휘하는 반지성주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지금까지 언급했던 책의 저자들은 약속한 듯 공통적으로 한 가지를 이야기한다. ‘참여’가 그것이다. 지식인(전문가)과 일반인 사이의 괴리는 있을 수밖에 없지만, 서로의 영역에 관심을 갖고 문제해결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소통은 진부한 용어지만 실현이 어렵다는 점에서 진부하지 않다.

“정책 선택에 관한 토론에서 발생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토론의 성격을 연구의 영역에서 정치와 민주적 선택의 영역으로 옮기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의미 있는 가치가 되려면, 전문가와 일반인 모두가 함께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나가야 한다.”(톰 니컬스)
“지성은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향해 치밀한 관심을 동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립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되, 현실에 참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이라영)
“지식인은 앙가주망, 즉 맹세하고, 책임지고, 참여한다.”(리처드 호프스태터).


김진경 필자

한국에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미국에서 만난 스페인 출신의 남편과 2011년부터 스위스 취리히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한국 및 스위스 매체에 문화 다양성(cultural diversity)에 대한 글을 쓴다. 여전히 정체성을 고민 중이고, 심리적 이방인의 새로운 시각을 글에 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