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육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어독문학과)가 독일 대학을 준거 삼아 한국 교육을 비판한 데 이어 최성수 연세대 교수(사회학과), 김종영 경희대 교수(사회학과)의 찬반 의견이 한겨레신문에 칼럼 형식으로 실렸다.
김누리 교수는 “[세상읽기] 대한민국 새 100년, 새로운 교육”(6월 8일)이란 글에서 대학 입시 폐지, 대학 서열 폐지, 대학 등록금 폐지, 특권학교 폐지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 최성수 교수는 “(독일에서) 무경쟁 교육과 입시는 다수의 학생을 대학 입시에서 배제하면서 귀결되는 독일 시스템의 특징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교육평론가인 이범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피렌체의 식탁>에 글을 보내왔다. 이범 필자는 메가스터디 창업 멤버이며 서울시교육청 정책보좌관,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역임했다. 조만간 <에듀폴리틱스: 코로나 이후, 문재인 이후의 교육>을 출간할 예정이다.
<피렌체의 식탁>은 최근 스위스에서 자녀 둘을 키우는 김진경 필자의 “유럽 교육, 한국의 롤 모델 아니다…환상 앞서 실상부터 알아야”(7월 27일)라는 칼럼을 실은 바 있다. [편집자주]

#입시제도 핵심은 외부시험, 정원 제한
  롤 모델로 꼽힌 독일도 외부시험 존재
#프랑스 대학, 입학정원 제한 없지만
  중도탈락률 평균 30%, 의대는 80%

#국공립대 통합해 서울대 폐지할 경우
  연고대가 '아이비리그'처럼 서울대 대체

 #한국 국공립대 숫자 적고 분포 불균등
  학생 교육비, 현 수준의 세 배로 올리고
  인서울 사립대 끌어들일 방법 찾아야

한국 대학교육을 둘러싼 논쟁은 여러 가지 중요한 쟁점과 시사점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그 잠재적 가치에 비해 별다른 파장이나 영향은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주요 쟁점 중 하나인 인문계/실업계 분리교육 문제는 중요한 주제이긴 하지만, 김누리 교수가 주장하는 본령과는 다소 포인트가 다르다. 나는 이 논쟁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래의 두 가지 논점이 뚜렷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대학 입시 폐지’라는 김누리 교수의 목표가 의외로 모호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입시’는 ‘외부시험’과 ‘정원 제한’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김누리 교수가 말하는 입시 폐지가 ‘외부시험’이라면 독일에도 주(州) 정부가 주관하는 아비투어(Abitur) 시험의 형태로 입시가 존재한다. ‘정원 제한’이라면 독일 대학의 상당수 인기 학과에서도 정원을 제한하고 이들 학과에서는 주로 성적순으로 학생을 선발하므로 입시가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즉 독일이 진정으로 ‘입시 폐지’의 본보기인지 의심스럽다.

둘째, 사립대가 과다한 한국 현실에서 평준화된 독일 대학이라는 이상을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는 것이다. 논쟁의 당사자인 김누리, 최성수, 김종영 교수 모두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문제는 한국엔 국공립대가 매우 적어 국립대 통합의 효과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한국의 국공립대 재학생 비율은 OECD 최하위권일 뿐만 아니라 인구의 절반이 몰려있는 서울·수도권에 유난히 국공립대가 적다.

특히 논쟁의 당사자인 김누리, 김종영, 최성수 교수 모두 ‘인(in)서울’ 사립대 교수인데, 이들은 모두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그것이 실현될 때 본인이 소속된 ‘인서울’ 사립대가 어떤 식으로 변화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이것이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의 결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징후라고 생각한다. 정부가 국립대를 통합하고 여기에 적극적인 투자를 할 경우, 인서울 사립대들은 공공성과 정반대 방향으로 맹렬한 진화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입시 폐지’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입시=외부시험(external exam)

‘입시’를 담당 교사 이외의 사람이나 기관에서 출제하는 ‘외부시험’이라고 규정할 경우, OECD 35개국 가운데 캐나다, 노르웨이 두 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는 입시를 갖고 있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영국의 A레벨, 핀란드의 대입시험(ylioppilastutkinto), 미국의 SAT·ACT, 한국의 수능 등이 모두 외부시험이다. 외부시험을 활용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다른데 독일의 경우 인문계 고등학교 졸업인증을 위한 아비투어 점수를 내신성적 3분의 2와 외부시험(주 정부 주관) 3분의 1을 합산하여 매긴다. 즉 독일에도 ‘외부시험’이라는 의미의 입시가 존재한다.

김누리 교수는 아비투어가 일종의 졸업인증 내지 학위(diploma)이기 때문에 입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독일에서도 정원 제한을 두는 학과에 지원하면 아비투어 성적이 합격 여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아비투어 외부시험도 엄연히 ‘입시’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도 A레벨이라는 시험은 기본적으로 고등학교 과목별 낙제/이수 인증 기능을 위한 시험이지만, 그 성적이 대학에 제출되어 대학 합격 여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므로 상식적으로 ‘입시’라고 부를 수 있다.

#입시=정원 제한(Numerus clausus)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 나라의 대학에는 입학정원이 있고, 지원자 수가 정원을 초과하면 선발(selection)을 한다. 입학사정관제가 보편화된 미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나라들은 주로 성적순으로 선발한다. 심지어 핀란드, 스웨덴도 성적순이다.
한국에는 ‘학생을 줄 세우면 대학이 줄 선다’는 그릇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학생 서열화(성적순 선발)는 대학 서열화를 선명히 드러내는 효과가 있을 뿐이지 결코 대학 서열화의 ‘원인’이 아니다.
대학 서열의 원인은 ‘학생 1인당 교육비’로 대표되는 재정 투입의 격차에 있다. 핀란드, 스웨덴에서 학생 서열화(성적순 선발)를 한다고 해서 대학이 서열화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흔히 ‘유럽 대륙 주요국의 대학들은 평준화되어 있다’고 할 때, 그 핵심은 대학 간 재정격차가 적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원 제한이 없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프랑스 대학의 모든 학과에 정원 제한이 없고, 독일 대학에서도 다수 학과에 정원 제한이 없다. 프랑스의 경우 바칼로레아 시험에서 과목별 20점 만점에서 10점 이상을 받으면 어느 대학을 지원해도 무조건 입학시켜 준다. 다만 특정 캠퍼스에 지나치게 몰리는 경우가 있어 2009년부터는 캠퍼스별 수용한계를 초과하면 추첨을 한다.
프랑스에는 대학 이외에 ‘그랑제콜’이라는 별도의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이 있지만 인기 직업인 의사, 변호사가 되려면 그랑제콜이 아닌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 따라서 성적이 매우 높아도 그랑제콜이 아닌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독일에는 그랑제콜 같은 별도의 엘리트 교육기관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프랑스보다 진정으로 평준화된 대학 시스템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등학생이 받은 아비투어 점수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졸업인증(학위)을 받게 되고 이것이 있으면 정원 제한이 없는 학과에는 무조건 입학 가능하다. 이렇듯 정원 제한과 선발이 없다는 의미에서 ‘입시가 없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독일 대학의 높은 중도탈락률

그런데 정원 제한이 없는 경우에는 ‘중도탈락’이라는 어두운 이면이 도사리고 있다. 정원 제한이 없는 프랑스 대학들의 경우 대학 중도탈락률이 30%에 달하고 의학계열의 경우 무려 80% 이상이다. 공식 통계에는 이보다 낮게 잡히는데 그것은 전문대 등으로 옮긴 경우를 제외했기 때문이고 엄격하게 4년제 대학의 중도탈락률로 한정하면 깜짝 놀랄만한 수준이다.

독일의 경우 정원 제한을 두고 선발하는 의학계열의 경우 중도탈락률이 5% 내외인 반면, 정원 제한이 없는 전공은 중도탈락률이 높다. 인문사회계열에는 학과별 중도탈락률이 20% 미만이므로 이공계의 상황을 잘 모를 수도 있는데, 공학과 자연과학의 학과별 중도탈락률이 대부분 40~50%대에 달한다. 참고로 의학, 치의학, 수의학, 약학은 모든 대학에 정원 제한이 있고 법학, 심리학, 생물학, 경제학 등은 대학에 따라 정원 제한 여부가 다르다.

정원 제한을 두는 경우 합격 기준은 주로 성적순이다. ‘주로’라고 표현한 이유는 학과별 모집정원의 20%는 순수하게 아비투어 성적으로 합격 여부를 정하고, 60%는 대학 자율로 정하되 아비투어 성적을 중심에 두고 면접이나 추가시험(의대의 경우 하루 동안 치르는 별도의 적성검사가 있다) 성적 등을 참고하기 때문이다.

그럼 나머지 20%는 어떻게 선발할까? ‘대기 입학자’에게 할당해 기회를 준다. 독일에서는 아비투어 점수를 다시 받을 수 없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재수(再修)란 게 없다. 그런데 예를 들어 내가 의대에 합격하지 못했지만 의대에 진학하고 싶으면 대기자로 등록해놓으면 매년 일정 비율씩 가산점을 더해준다.
그래서 어느 특정 연도에 본인 아비투어 점수와 가산점의 합(合)이 기준점을 넘으면 의대에 입학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의대 진학을 위해 대기자로 등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정한 규칙에 따라 ‘가산점’을 줌으로써 성적이 낮아도 도전할 기회를 준다는 취지다.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대학에는 정원 제한이 있다. 왜 사회적 평등을 그토록 강조하는 스웨덴이나 핀란드에서도 정원 제한을 두고 지원자를 선발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정원 제한을 두지 않으면 ‘입학자 과잉’으로 인한 교육여건의 악화, 입학 후 탈락하지 않기 위한 학생 간 경쟁 과열, 대량으로 발생하는 중도탈락자 문제, 근본적으로 국민 세금을 낭비한다는 비판 등에 직면할 수 있다. 김누리 교수나 김종영 교수는 이에 대한 대답을 마련하고 있는가?

◇‘국립대 통합’의 결과는 무엇일까?

#국립대 통합안의 역사와 문제점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는 정진상 경상대 사회학과 교수가 저서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2004년)를 통해 정리한 대학 체계 개혁안에서 나온다. 국립대들 간의 연계와 교류를 활성화하고 공동입학·공동학위 제도를 실시해 대학서열과 학벌주의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2000년대 민주노동당의 정책이 되었고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민주당 후보의 공약집에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로 채택되었다.

5년 뒤인 2017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의 공약집에는 ‘대학 네트워크 구축’이라는 다소 모호한 표현으로 담겼는데, 그 의미는 뜻밖에 정의당 심상정 대선 후보의 공약집에 잘 설명돼 있다.
이에 따르면, 국공립대와 일부 사립대가 참여하는 통합 네트워크를 ‘학점교류→공동학위→공동입학’ 3단계로 실현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1단계는 공동 교육과정, 학점 교류, 전학, 전과 등 울타리 넘어 교육과정 클러스터 ▲2단계는 요건에 부합하면 공동학위 ▲3단계는 공감대와 합의가 있고 여건 구비 시 통합전형 순으로 추진한다는 것이다.(2017년 심상정 대선 후보 공약집)

문제는 한국에선 국립대 숫자가 매우 적고, 그 분포가 불균등하다는 점이다. OECD 2017년 기준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국공립대 재학생 비율은 OECD에서 일본 다음으로 낮다. (일본 20.3%, 한국 23.6%) 특히 인구 밀집지역인 서울·수도권에 국립대가 극히 적다. 2020학년도 기준으로 서울·인천·경기 지역의 국·공립대 입학정원은 해당 지역 수험생에 대비할 경우  4.1%밖에 안 된다.
2020학년도 기준으로 수능 지원자(원서접수 기준, 재수생·검정고시 포함)는 54만8734명이고, 그중 서울·인천·경기 지역 수험생은 절반이 넘는 29만7385명이다. 그런데 이 지역 4년제 국·공립대 정원은 1만2181명밖에 안 된다. 서울대, 서울시립대, 서울과학기술대, 인천대, 한경대(경기도 안성 소재 국립대) 등 5개 종합대학과 서울교대, 경인교대 등 2개 교육대학을 더해서 그렇다. 이러니 전국적인 공동입학·공동학위 시스템을 만들기 어렵다.

#국립대 통합 땐 연고대가 서울대 자리 차지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서울대를 포함해 전국 10개 거점 국립대를 통합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이렇게 되면 ‘1등 대학’이라는 서울대의 상징적 지위는 즉시 연고대로 넘어갈 것이다. 물론 대학원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연구 지표는 서울대가 연고대보다 높을 것이고, 세계적인 대학 평가들은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이뤄지므로 서울대의 세계 대학 랭킹은 여전히 연고대보다 높을 것이다. 하지만 10개 거점 국립대 학부과정을 통합해 공동 선발할 경우 이 대학의 합격선은 연고대와 동등하거나 이를 능가하기 힘들다. 서울대라는 이름을 가지는 학부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흔히 이야기되는 ‘서울대 폐지론’의 맹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학부생 3000여명을 선발하던 서울대의 특권적 지위를 내려놓고, 10개 거점 국립대가 연합해 3만4000여명의 학생을 공동 선발하는 가칭 ‘통합대’를 만든다고 가정해 보자. 정원이 각각 4000명인 연세대 또는 고려대와, 정원이 3만4000여명인 통합대에 동시 합격한 학생들은 어디를 선택할까? 대체로 연세대, 고려대를 선택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통합대에 합격한 경우를 시뮬레이션 해보자. 이 학생이 서울캠퍼스에 배정될 확률은 10% 미만이다. 2020학년도 기준으로 거점 국립대 10곳의 전체 입학 정원이 3만4675명인데 비해 서울대 입학정원이 3312명이기 때문이다. 만일 서울시립대(1812명), 서울과학기술대(2302명)까지 통합대에 포함된다 해도 20% 미만이다. 나머지는 서울 밖의 캠퍼스로 배정된다.

이 학생 입장에선 서울이나 서울 인근에 거주한다면 상당히 기피할만한 상황인데, 단순히 낯선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게 될 뿐 아니라 주거비 등의 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통합대는 학벌이 없다. 학부 선배가 없으므로 ‘학연’을 기대할 수 없고, 적어도 학부에는 서울대라는 명칭이 없어지므로 후광 효과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그런데 연고대에 등록하면 서울캠퍼스에서 다니고, 학연(네트워크 효과)과 이름값(후광 효과)을 그대로 누린다.

통합대에 투자를 집중해 통합대의 교육 여건을 연고대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어떻게 될까? 학생 1인당 교육비를 기준으로 보면 서울대를 제외한 9개 거점 국립대가 대부분 연간 1600만~1700만원대에 그친다. 연세대가 3100만원 남짓이므로 9개 거점 국립대의 학생 1인당 교육비를 지금의 두 배 가까이 증액해야 교육 여건이 동등해진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도 통합대는 네트워크 효과, 후광 효과, 인서울 효과에 있어 연고대에 뒤질 뿐만 아니라 입학 정원이 연고대에 비해 훨씬 많기 때문에 합격선을 연고대 수준으로 유지하기 어렵다. 통합대의 합격선은 연고대보다 낮을 것이고, 심지어 서·성·한(서강대, 성균관대, 한양대)보다 낮아질 가능성도 있다. (※학생 1인당 교육비는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합친 통계이므로 학부생만으로 엄밀히 계산하면 수치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대학별로 학부교육의 여건에 큰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거의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통합대가 연고대와의 서열 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면 통합대의 학생 1인당 교육비를 현재의 두 배 수준(연고대 수준)으로 높이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아마도 현재의 3배 수준(4300만원대인 서울대 수준) 정도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해도 또 하나의 결정적인 문제가 남는다. 통합대의 정원이 3만4000여명 밖에 안 되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은 여전히 서열화된 대학들 사이에서 경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통합대 정원을 늘리면 연고대와의 서열 경쟁에서는 다시 불리해진다.

#인서울 사립대는 어떻게 진화할까?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나 서울대 폐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상위 사립대의 반작용이다. 통합대를 만들기로 결정하는 순간, 상위 사립대들은 통합대에 대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맹렬하게 움직일 것이다. 특히 현재 정부가 행정력을 활용해 막고 있는 등록금 인상을 허용해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상위 사립대 동문들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2020년 총선에서 당선된 300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고려대 출신이 27명, 연세대 22명, 성균관대 20명, 이화여대 11명, 경희대 8명, 한양대·중앙대·동국대 각 7명이다.(참고로 서울대 출신은 63명) 주요 인서울 사립대 출신 국회의원들이 힘을 합치면 100명 이상의 강력한 로비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다.

정부로서는 통합대에 투자를 집중하는 형편일 테니, 사립대에서 ‘등록금을 올려 교육의 질을 높이겠다’고 나서면 이를 막을 명분이 없다. 국립대(통합대)에 돈을 몰아주면서 사립대에겐 손만 빨고 있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결국 상위 사립대들은 통합대와의 경쟁 과정에서 공공성과는 반대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다. 등록금을 높이면서 고급화를 표방하고 우수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결국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의 귀결은 미국식 대학 구조, 즉 아이비리그로 대표되는 일부 사립대들이 최상위 서열을 차지하고 그 아래에 주립대학들이 위치하는 식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과거 서울대 학부가 차지했던 지위와 기능을 연고대가 차지하고, 서울지역 최상위 사립대들이 아이비리그와 유사한 그룹을 이루는 결말을 그려볼 수 있다.

결국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는 한국 사회의 대입 경쟁을 완화하는 데 큰 효과를 내지는 못할 것이다. 유일하게 효과가 있을만한 지점은, 9개 거점 국립대에 대한 투자가 늘면서 비(非)수도권 우수 학생들이 상경하지 않고 자기 지역의 거점 국립대로 진학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서울·수도권 학생들의 경쟁도 줄어들 수 있다.
내가 국립대 통합의 ‘높은 단계의 버전’엔 반대하지만 ‘낮은 단계의 버전’에 찬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낮은 버전은 공동입학제 없이 9개 거점 국립대를 집중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균형발전이라는 대의뿐만 아니라 전체 대입 경쟁도 다소 완화시키는 효과를 낼 것이다. 다만 그 경쟁의 감소가 학생·학부모에게 체감될만한 수준일지는 미지수다.

#중앙대, 경희대가 공영형 사립대 될 수 있나?

국립대 통합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사립대를 이 네트워크에 끌어들이기 위해 ‘공영형 사립대’ 모델을 고안했다. 이것은 이사진의 절반을 공영이사로 교체해 기존 재단의 핵심 기득권(특히 인사권과 재정권)을 사실상 사회화하는 방안이다.
그런데 이런 방안을 인서울 유수의 사립대들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 이 정책에 관심을 가진 대학들은 곧 학생 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이는 비수도권 사립대들이고, 평균적인 국민들은 ‘왜 곧 망할 대학에 지원해주느냐’며 차가운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를 알고 있는 기획재정부는 이 방안에 노골적으로 반대해왔고 그로 인해 공영형 사립대는 예산을 제대로 배정받지 못했다. 가장 심각한 점은 차기 대선주자 누구도 이를 자기 공약집에 집어넣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에 상당수 사립대를 포괄하여 ‘대학 네트워크’로 발전시키려면 인서울 사립대를 끌어들일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마도 문턱은 낮추고(요구조건 완화), 인센티브는 높여야(국고 지원 확대) 할 것이다. 마침 국립대 통합을 적극 지지하는 김누리 교수와 김종영 교수가 각각 중앙대, 경희대의 교수인 만큼, 자신의 소속 대학이 공영형 사립대에 지원하려면 기존 정책에 어느 정도의 변경이 필요할지를 가늠해보고 공개적으로 제안해보기 바란다. 이렇게 되면 대학 체계 개편에 대한 새로운 논의의 장이 열리고, 정치적으로도 보다 바람직하고 실현가능한 대안이 나올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발전 단계는 의지나 선의만으로 주요한 정책적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었다. 보다 정교한 시뮬레이션과 액션플랜에 근거한 설득이 필요하다. 내 제안은 유별나거나 까탈스러운 게 아니라 정책 시뮬레이션을 잘 해보자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실패한 핵심 원인이 ‘시뮬레이션 부족’ 아닌가?

※칼럼 내용과 관련된 주요 인터넷 사이트 [편집자 제공]

▲김누리/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세상읽기] 대한민국 새 100년, 새로운 교육으로/ 한겨레신문, 6월 8일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48251.html

▲최성수/ 연세대 사회학과 조교수
[왜냐면] 김누리 교수 칼럼에 부쳐: 독일 교육에 대한 오해/ 한겨레신문, 6월 23일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950488.html

▲김종영/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
[왜냐면] 김누리 교수를 반대하는 이들에게/ 한겨레신문, 7월 14일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953498.html

▲최성수/ 연세대 사회학과 조교수
[왜냐면] ‘교육개혁’ 논쟁 2라운드: 개혁은 구호가 아니다 / 한겨레신문, 7월 23일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954795.html

▲김종영/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
[왜냐면] ‘교육개혁’ 논쟁 2라운드: 연구를 위한 연구, 그만하자 / 한겨레신문, 8월 6일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956607.html


이범 필자

교육평론가. 경기과학고 및 서울대 분자생물학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과학사·과학철학 전공으로 박사과정 수료. 메가스터디 창업 멤버로서 과학탐구영역 스타강사로 활동하다 2003년 은퇴했다. 서울시교육청 정책보좌관,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역임한 뒤 2017년 문재인 대선캠프에서 활동했다. 조만간 저서 <에듀폴리틱스: 코로나 이후, 문재인 이후의 교육>을 출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