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COVID-19) 사태로 심각한 타격을 받은 세계 유력 정치인을 꼽으라면 아마도 가장 먼저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을 떠올릴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없었다면, 11월 대통령 선거전을 상당히 여유 있게 맞이했을 트럼프의 재선 가도는, 결국 자업자득일지도 모르겠으나 졸지에 아주 험난해졌다. 트럼프에 이어 또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지목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른바 ‘아베노믹스’를 앞세워 일본 역대 최장수 총리 기록을 갈아치운 아베의 최종 목표는 아마도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30년’을 벗어던지고 헌법 개정을 완수하는 것이리라. ‘위대했던 일본’, ‘영광의 과거’ 부활을 갈망해 온 그의 오랜 꿈이 거의 이뤄지려나 했는데, 역시 코로나19로 인해 졸지에 모든 게 위태로워졌다.
아베의 애초 계산대로라면 지금쯤 도쿄올림픽을 화려하게 치르면서 외국인 관광객 4000만명 유치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2% 성장, 2% 물가상승이라는 아베노믹스의 목표치에 다가갔을지도 모른다. 그 바탕 위에서 개헌도 밀어붙일 수 있을 거라고 아베 총리와 ‘일본회의’ 우파세력 멤버들은 계산하지 않았을까.

코로나19가 막고 있는 일본 개헌

개헌에 필요한 개헌지지 국회의원 수는 중·참의원 3분의 2 이상인데, 참의원 쪽 집권여당(자민+공명) 의원 수는 그에 못 미치지만 야당 쪽에서도 개헌 찬성 의원들이 상당수 있으므로 결코 불가능한 게 아니다.
문제는 그 다음 절차인 국민투표다. 지금 상황으로는 개헌안 통과에 필요한 과반수를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만 없었다면, 올림픽만 제대로 치렀다면, 소비가 늘고 관광객들이 사상 최대로 밀려들었다면, 그리하여 한국전쟁 특수를 발판으로 고도성장기로 들어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달려가던 전후(戰後) 일본경제의 만개를 예고한 1964년 도쿄올림픽의 재래를 다시 한 번 꿈꿀 수 있게 됐더라면,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 찬성 과반 달성이야 따 놓은 당상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물론 이 또한 더 두고 봐야겠지만, 그런 ‘아베의 꿈’은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요코하마에 정박한 대형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호(號) 구석구석에 소리 없이 스며들었을 때부터 엇나가기 시작했다. 중·참의원과 국민투표 통과 일정에 맞춰 연속적으로 터뜨릴 하나비(불꽃)이자 애드벌룬이었을 도쿄올림픽과 4000만 관광객, 아베노믹스 목표 달성은 지금은 되레 아베 정권의 발목을 잡는 방해물로 전락한 듯 보이기도 한다.

애초 계획을 훨씬 뛰어넘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올림픽은 1년 연기됐다지만 여전히 개최 자체가 불투명하다. 관광객은 거의 제로상태이며, 아베노믹스는 2009년 ‘리먼 파산 사태’(월스트리트 발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훨씬 더 어려운 국면을 맞고 있다.

지난 5월 미쓰비시 종합연구소가 내놓은 성장률 예측치들 가운데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지목된 것은 –6.5%였다. 다이와소겐(大和總硏) 그룹이 지난 12일에 발표한 2분기(4~6월) GDP 성장 예측치는 전년도 동기 대비 연율 –27.3%로, 상황이 심각했던 2009년 ‘리먼 쇼크’ 때의 1분기(1~3월) -17.8%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상 최저치다. 지금 부총리·재무상인 아소 다로 당시 총리가 집권 1년만에 그 때문에 물러났다. 공익재단 일본경제연구센터가 지난달 1일 발표한 올해 경제성장률(예측치)은 –8.5%,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코로나19 사태가 하반기에 수습되더라도 –6.8%다.

아베 내각 지지도 추락 현상

전 세계와 일본의 최근 추세를 보면 코로나19 사태는 악화일로다. 일본 언론에선 하루 확진자가 1000명대, 많게는 1600명을 넘긴 코로나19 재확산을 연일 보도하고 있는데도 아베 정권은 ‘비상사태’ 선언을 꺼리고 있다. 그로 인해 경제활동이 더욱 침체되면 코로나19로 인한 직접 피해보다 더 큰 재앙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코로나19 확산 위험을 크게 증대시키고, 다시 경제활동 위축을 가속화하는 악순환을 부를 수 있다.

지난 8일부터 사흘간 실시된 NHK 여론조사 결과, 아베 내각을 ‘지지한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34%로 전월보다 2%포인트 줄었다. 반면 ‘지지하지 않는다’는 47%로 전월보다 2%포인트 더 올라갔다. 지지하지 않는 이유로는 ‘정책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가 37%, ‘사람을 믿을 수 없어서’가 28%였다. 또한 ‘불안을 느끼거나 어느 정도 느낀다’는 비율이 87%, ‘별로 또는 전혀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 응답자는 11%였다.

극우성향의 산케이신문과 함께 아베 정권의 편에 선, 일본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요미우리신문이 10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는 아베 정권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코로나19 사태 대응에 아베 총리가 제대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 응답자가 전체의 78%였다. 정부 대응에 대해서도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66%인데 비해, ‘평가한다’는 27%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 6월 분게이슌주(文藝春秋) 조사에서는 아베를 ‘지지한다’가 21.6%, ‘지지하지 않는다’가 78.4%였다. 비슷한 시기의 아사히신문 조사에서는 지지율이 29%, ‘아베의 입’이라고나 할 산케이신문 조사에서조차 지지율은 36.4%였다.

누가 아베 뒤를 잇게 될까?

지금 3기째 연임인 아베 총리의 임기는 내년 9월에 끝난다. 그때 집권 자민당 총재선거를 하는데, 승자가 총리직도 맡게 된다. 임기 3년인 자민당 총재직을, 아베는 2012년 말부터 지금까지 8년 연속으로 맡고 있다. 제1차 집권기간(2006년 9월~2007년 8월)까지 합하면 10년에 가깝다. 내년 9월까지 임기를 다 채우면 딱 10년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악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아베의 집권기간은 10년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루고 경제까지 호전되면, 자민당 총재선거 규정까지 고쳐서 아베의 제4기 연임으로 가야 한다는 게 당내 여론의 대세로 비쳤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상황을 바꿔 버렸다. 이제는 과연 내년 9월까지의 임기를 다 채울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어려워 보인다. 저토록 추락한 지지율에, 코로나19 사태마저 언제 수습될 수 있을지 전망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포스트 아베’를 둘러싼 얘기들이 심심찮게 나오고, 어느 정도 후계구도 윤곽까지 그려지고 있다.

예컨대 지난 6월 초에 분게이슌주(문예춘추)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차기 총리 후보들이 1위부터 10위까지 순위가 매겨져 있다. <표 참조>

1위를 차지한 이시바 시게루는 총 투표자 1018명 중에서 346표를 얻었다. 2위 요시무라 히루후미는 191표. 1위, 2위를 합하면 과반을 넘는 537표나 된다. 이에 비해 3~10위를 모두 합쳐도 348표에 불과하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왜 안 되는가

10위권에 든 인물 중에 요시무라 히로후미(2위), 고이케 유리코(5위), 스즈키 나오미치(공동 8위)는 말하자면 지방자치단체장(지방 수령)이다. 중앙 정치인이 아닌 세 명이 10위권에 든 것은 그야말로 괄목할만한 일인데, 유명 정치평론가들 중에는 이들의 등장에 큰 의미를 두면서 ‘장차 일본 정치를 바꿔 갈 열쇠는 지방에 있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당분간 내각제인 일본에서 중의원 배지 없이 바로 총리가 되긴 어렵다. 고이케 지사는 험난한 일본 정치 무대를 헤쳐 나온, 뚝심 있는 여성정치인이지만 야당뿐만 아니라 집권당 내에서도 인기가 없어 보인다.
참의원을 지낸 야마모토는 대중적 인지도가 높고, 독도를 한국에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주변국들과의 우호를 강조하면서 당내 보수우파세력을 직설적으로 비판하기도 하는 독특한 이력의 정치가다. 그러나 총리 후보가 되기엔 46세 나이여서 너무 젊고, 당내에서 다수표를 얻기도 어렵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일본 총리는 먼저 집권 자민당 총재가 돼야 하고, 총재가 되려면 총재선거에서 이겨야 하는데, 현역 의원들과 지역 당원들의 투표로 결정하는 총재선거에서 당내 지지기반이 없으면, 예외적인 경우도 없진 않지만, 총재가 되는 게 아주 힘들다.

이 기준을 놓고 보면 1위 이시바, 3위 아베, 4위 고노, 6위 기시다, 8위 스가, 10위 고이즈미가 일단 유력 후보군에 들 수 있다. 하지만, 고이즈미는 아버지의 후광 덕에 한때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 물망에 올랐으나, 환경대신을 맡은 이후 그의 행보를 통해 경험 미숙에다 별다른 사상적·지적 알맹이도 없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당분간은 가망이 없어 보인다.

스가 관방장관은 직책상 대중에게 가장 많이 얼굴이 노출되는 유리한 점이 있어선지 그도 한때 유력시됐으나 본인 의사가 불분명하고 아베 측근이라는 게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고노는 집안 배경도 있고 전투적이고 의욕적인 자세가 득점 포인트인데 외상, 방위상 등 요직을 거친 이력 면에서도 유리하다. 하지만 독불장군 격이고 때론 오만하게 보여서 당내 지지기반이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계 싸움, 이시바 vs. 기시다

이렇게 보면 후보는 아베 총리를 예외로 치면 이시바와 기시다 두 사람으로 압축된다. 문예춘추 여론조사에서 보듯 이시바가 총리 후보로는 압도적인 지지기반을 갖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1위 후보 이시바 역시 자민당 총재가 될 가능성은 여전히 높지 않다.
그것은 현역 의원들과 지방 당원들 투표로 결정되는 총재선거 방식과 자민당 체질 때문인데, 먼저 자민당 체질이 정책이나 당 방침에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총재, 즉 아베 총리의 리더십에 의존하는 편이어서, 말하자면 먼저 아베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그리고 총리가 되려면 당내 파벌정치에서 줄을 잘 서야 한다. 아베 총리가 소속돼 있는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細田派)의 경우 자민당 중의원 현역의원 중 약 4분의 1을 차지한다. 이 호소다파의 실세인 아베(총리인 지금은 파벌에서 빠져 있다)와 그의 정치적 동맹인 부총리 겸 재무대신 아소 다로의 마음에 들거나 그들과 손잡을 수 있는 인물이 가장 유리하다.

이시바는 이 두 가지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는 지방 당원들에겐 인기가 높지만 집권당 현역 의원들로부터는 배척을 당한다. 반면 이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바로 기시다 정조회장이다.

좀 더 살펴보면, 아베의 경쟁자인 이시바는 이들 당내 주류로부터 거의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데다, 아베노믹스의 방만한 금융 완화정책에 따른 과도한 재정적자(국가 부채) 해소를 주장하며 이를 위한 긴축재정론을 펼쳐왔다.
자민당뿐만 아니라 자민당 정권을 떠받치는 기둥 가운데 하나인 재계·경제계도 그런 이시바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한다. 게다가 한국과 잘 지내야 한다는 이시바의 주장을 호소다파 등 당내 세력뿐만 아니라 그들과 밀접히 연결돼 있는 ‘일본회의’ 등 우파 반관반민 조직들이 달가워할 리 없다.

이에 비해 기시다는 아베와 당 주류의 환영을 받을 만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를 두고 아베 총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외상(외무대신)으로 상당한 경험을 쌓았다. 매우 성실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편으로, 기시다 씨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
기시다는 성실한 우등생 스타일인 데다, 또 하나의 유력 파벌인 고치카이(宏池会) 회장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요직을 두루 거친 주류의 총아이고, 특히 아베 총리가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 하는 ‘선양(禪讓)’ 대상이라고 한다. 지금으로선 ‘포스트 아베’의 가장 유력한 후보일 것 같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문예춘추 투표 조사에서도 드러났듯이 기시다는 뚜렷한 존재감이 없고 당내에서조차 인기가 별로 없어 보이며, 스가 관방장관처럼 아베 측근이라는 점이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약점일 수 있다.

아베를 대체할 인물은 결국 아베 자신?

결국 10명의 후보군 중에서 현직 총리인 아베를 빼고는 딱히 그를 대체할 인물이 자민당 내에는 없다. 아베를 아베가 대체(?)하는 수밖에 없는 이상한 형국이다.
그렇다고 당 바깥, 즉 야당 쪽에서 총리가 나오기는 더욱더 어렵다.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는. 중의원(총 465석) 가운데 여당 의석은 314석이고, 참의원 245석 중에서도 여당 의석은 141석이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과 지금 해체 뒤 일부가 입헌민주당에 합류할 것으로 보이는 국민민주당 두 당에 사회민주당 의석까지 합쳐봤자 야당에서 중의원은 기껏 120석, 참의원도 고작 61석이다. 일본 정가에서 아베 4기 연임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까닭이다.

집권 자민당은 아베 총재를 중심으로 파벌과 이권 안배만 잘 하면, 그리고 ‘미국 눈치만 잘 보면’ 앞으로도 상당 기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 담합구조를 깨뜨릴 힘이 여당에도 야당에도 없어 보인다.
이런 자민당 독주현상은 미국중앙정보국(CIA) 주도로 일본 보수정당 합동이 이뤄진 ‘1955년 체제’ 이래 늘 그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초 동서냉전이 무너지고 미국 주도하의 기존 반공체제가 흔들리면서 이런 보수합동 담합구조는 위협을 받게 되고, 거기에 기생해 번영을 구가했던 일본 경제의 조건 자체를 바꾸었다.

일본이 이런 변화하는 세계에 주체적으로 대처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면 자신들의 기존 체제도 바꿔야 한다. 아베 체제의 문제는 어쩌면 그런 변화를 거부하면서 무너져 가는 ‘일본 최고’, ‘영광스런 과거’ 신화를 재건하려는 퇴행적 방향설정에서 비롯됐을 혐의가 짙어 보인다.

한일 갈등과 징용공 배상 판결

한일 간에 일제 강제동원 노동자(징용공) 피해자 배상 판결을 둘러싸고 빚어진 갈등도 그런 아베 정권의 과거지향적이고, 심지어 인종차별적이기까지 한 가치관 및 역사관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한일 간 갈등은 일본 보수우파의 그런 가치관과 역사관이 바뀌지 않는 한 해소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일본의 국력이 약해지고 한국·중국이 힘이 커져 나갈 향후 세계에서 오히려 점점 더 큰 파열음을 내게 될 공산이 크다.

일본 우파는 근거 없는 자국민 우월주의에 젖은 퇴행적 역사관과 가치관을 버려야 한다.
한국의 경제발전이 일본의 식민지배 때 생겨난 일본기업들을 일본 패전 뒤 불하받아 키운 덕이라는 식의 일본 우파 이데올로그의 최근 발언도 그런 역사관과 가치관의 소산이다. 그런 일본 기업들의 돈벌이와 성장에 동원됐을 피식민자들의 고통과 한(恨), 수탈이 일상화돼 있던 식민지배구조 자체의 죄악에 대해서 그는 상상할 능력조차 없어 보인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 인도의 경제발전은 영국 동인도회사 덕이며, 지금 콩고의 발전이 식민자 벨기에의 학살만행 덕이라고 얘기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2차 대전 이후 아시아태평양 질서를 규정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체제와 그것을 토대로 해서 체결된 1965년 한일협정체제를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샌프란시스코조약체제와 한일협정체제의 근본문제는 모두 일본의 전쟁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은 채 주요 전쟁범죄자들을 사면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 수천만이 희생당한 아시아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사죄도, 반성도, 배상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이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배를 국제법상으로는 합법이라고 지금도 주장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으며, 오늘날 징용공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한국 대법원 판결과 이를 법에 따라 집행하려는 한국 정부를 향해 아베 정권이 오히려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도, 한국·중국에 참석 자격도 주지 않은 샌프란시스코조약체제와 거기에 기반을 둔 한일협정이다.

이는 미국이 일본 패전 뒤 일본에게 사실상 면죄부를 주는 대신 종속국가로 편입시키면서 전범들의 세계관, 가치관, 역사관을 온존시킨 결과다. 수천만 명의 생명을 희생시킨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서곡이라 할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근대의 일본 침략전쟁을 아시아민족 해방전쟁이라고 현직 총리가 공식 담화에서 버젓이 주장해도 아무 탈이 없는 세계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일본이 사는 길

아베 총리는 A급 전범이었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로부터 하명 받은 이른바 ‘평화헌법’ 제9조를 바꾸는 개헌 드라이브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군대 보유와 국제분쟁 해결수단으로서의 전쟁을 명시적으로 부정하는 제9조를 바꿔 ‘옛 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일념에 불타는 듯한 아베가 오로지 추구하는 것은 코로나19 사태가 한시바삐 진정돼서 올림픽도 열고, 외국 관광객들도 불러들이고, 소비도 되살려 국민투표에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아닐까.

<일본은 왜 몰락하는가>를 쓴 모리시마 미치오 교수는 ‘일본이 살 길은 하루빨리 과거사를 청산하고 자국 제일주의의 폐쇄구조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에 유럽연합(EU) 같은 대등한 나라들의 자발적 연합체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그것만이 무섭게 힘을 키워 나가는 중국이라는 거대국의 폭주를 막고 역내 협력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일이 가까워져야 하며, 또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적어도 전후 독일 정도의 과거청산을 통해서라도 주변 나라들과 진심으로 화해해야 한다.

그런데 아베와 일본 우파는 모리시마 교수가 제시한 길과는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 그것은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이다. 한국 대법원의 판결과 이를 법률적으로 구현하려는 한국 정부의 행보는 일국 차원을 넘어선 보편적 가치 추구에 부합한다. 어쩌면 지금, 일본 우파의 독선을 막고 있는 가장 강력한 비토세력은 코로나 바이러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한일관계의 역설

아베 정권과 일본 우파는 한국 정부가 오히려 국제법을 위반하고 반일 정치공세로 자국 내 지지세력을 분기(奮起)시켜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 한다고 비판해왔다. 일본 온라인 매체들에 등장하는 무수한 우파 논객들도 한결같이 그렇게 주장한다.

한국에서 발간된 <반일종족주의>나 한국 보수매체들의 한국 또는 한국 정부 비판 논조를 그대로 복제해 증폭시키고 있기도 한 그들의 수많은 언설은 거의 천편일률적이다. 하지만 그 비판은 오히려 아베 정권과 일본 우파에게 고스란히 돌려줘야 한다. 일본 우파세력이야말로 패전 뒤 반성과 청산 없이 과거 잘못을 되밟아 가며 이웃과의 불화를 조성해 오랫동안 국내 정치에 이용해오지 않았는가.

한국 우파 일부와 보수매체들의 무분별한 한국 정부 비판과 그것을 복제 증폭시키는 일본 우파의 행보는, 오늘날 대내외 정세에 대한 아베 정권의 판단 미스와 잘못된 진로 설정에 한국 우파와 유력 보수매체들이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기막힌 역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매체들의 보도를 맹신하는 일본인들의 눈에, 한국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빠져 있다고 비쳐질 것이다.
실제로 극우 매체들을 비롯한 일본 우파세력은 지난해 일본 정부의 대한국 첨단소재 수출규제 뒤 한국 경제를 놓고 8월 위기설, 9월 위기설, 10월 위기설, 연말 위기설, 새해 연초 위기설 등을 잇달아 제기해왔다. 그들은 빗나간 애초의 예언(?)이나 기대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위기설을 유포하고 있다.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공식 매체를 통해 문재인 정권을 그대로 두고는 절대 한일관계가 정상화될 수 없다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런 오만방자와 무례라니. 한심하고 어리석다.

한승동/ 메디치미디어 기획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