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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칼럼] 한은도 부동산시장, 녹색금융을 고민해야 할 때다

by | 2020년 7월 16일 | 국제, 정책



천재들은 적어도 한 세대를 앞서 간다. 아티스트 백남준이 1960년대에 일찍이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세계를 연 것이 그 예다. 보통사람들은 20년 뒤에야 그를 이해하고 좇아갈 수 있었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1959년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교수가 황당한 아이디어를 내놓았을 때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물질의 기본단위인 원자 속으로 들어가 원자핵과 전자 사이의 넓은 공간을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상식에서 어긋났기 때문에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아이디어는 30년 뒤 나노공학으로 발전했다. 한계에 다다른 기존 물리·화학이론의 돌파구였다.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금과옥조로 여겨왔던 상식을 깰 때 새로운 돌파구가 열린다. 재정정책 면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국가채무비율이 빠르게 높아지고, 기본소득과 부유세 도입이 논의되는 것이 그 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최근 주요국 통화정책의 변이 내용을 살펴보고 돌파구를 찾아보려 한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공조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은행이 산업정책의 한 축을 맡아서 신재생에너지 산업 등에 자금을 공급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한 방법들을 동원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화폐와 신용은 모든 경제정책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위기마다 ECB는 원칙을 조금씩 이탈

유럽중앙은행(ECB)의 모든 활동은 각국의 지분에 비례한다.(협정문 제29조) 그것을 지분율 비례원칙(capital key)이라 한다. 회원국별 지분은 인구와 경제력에 비례하는데, 독일의 지분이 21.4%로 가장 높다. 뒤이어 프랑스 16.6%, 이탈리아 13.8%, 스페인 9.7% 순이다.
따라서 ECB는 국제통화기금(IMF)처럼 국가별로 대출조건과 규모를 조절할 수 없다. ECB이 무슨 방법으로 돈을 풀든 항상 독일에 가장 많은 몫이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2012년 남유럽 재정위기 때 ECB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이유다. 결국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키프로스 등의 국가신용등급 하락을 수수방관해야 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2015년 ECB가 고안한 게 국공채 매입프로그램(PSPP)이다. 이를 통해 ECB는 회원국 국채뿐만 아니라 EU(유럽연합) 내 6개 국제기구의 채권도 사들인다. 6개 국제기구란, EU, 유럽개발은행(EDB), 유럽투자은행(EIB) 등이다. ECB가 PSPP를 통해 6개 국제기구 채권을 매입하고 그 기구들이 특정 회원국을 지원하면, 지분율 비례원칙은 무뎌진다.
코로나19 위기를 계기로 ECB는 자산매입 규모를 크게 늘리고(월 200억 유로→300억 유로), PSPP 의존 비중을 70~90%까지 높이기로 했다. 나아가 투기등급인 그리스 국채를 매입하기 위해 특별 프로그램(PEPP)을 신설하기도 했다. 이런 결정들을 통해서 ECB의 통화정책은 설립 당시의 원칙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ECB의 정체성 혼란은 EU 균열의 시작

ECB가 PSPP와 PEPP를 통해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 재량적으로 자금을 배분하게 되면, ECB의 위상은 커지지만 그만큼 독일의 몫이 줄어든다. 그래서 독일의 우파는 일찍이 2015년 PSPP가 도입될 때부터 이의를 제기했다. EU가 추구하는 비례의 원칙이 위배됐다면서 유럽연합법원(CJEU)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 소송에서 CJEU는 PSPP의 합법성을 인정했다.(2018년)

그러자 독일 우파는 독일 헌법재판소(GCC)에 다시 위헌심사를 제청했다. 그런데 지난 5월 초 독일 헌법재판소는, PSPP가 독일 헌법에 배치된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3개월 안에 ECB와 분데스방크가 독일 헌법재판소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분데스방크는 PSPP에 참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프로그램을 통해 과거에 사들인 채권도 모두 매각해야 한다.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사실상 ECB의 기능 정지다.

ECB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CJEU는 EU 내 최고법원(EU 협약 제267조)인데, 독일 헌법재판소가 CJEU의 판결을 뒤집은 것은 EU 질서에서 분명히 하극상이다. 이것은 EU 사법체제의 균열을 의미한다. 그래서 미국의 역사학자 애덤 투즈 교수는 독일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이 여간 예사롭지 않다고 평가한다.

미국도 위기 때마다 원칙을 변경

위기를 이유로 통화정책의 원칙이 파기되는 것은 미국도 비슷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 연준(Fed)은 대공황을 계기로 공개시장조작을 도입했다. 그때부터 연준은 상업은행 이외에 영리기업인 증권회사에도 자금을 공급해 왔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그 선을 훨씬 넘었다. 특정 보험사와 증권회사를 살리기 위한 선별적 구제금융을 제공했고, 가계·영세기업 지원 프로그램(TALF)까지 도입했다. 재정정책에 해당하는 일을 연준이 발권력을 이용해서 대신 한 것이다. 이를 준(準)재정활동(quasi-fiscal actitivity)이라고 한다.

이번 코로나19 위기 국면에선 준재정활동이 더욱 노골적이다. TALF를 즉각 부활시키는 한편, 주(州)정부나 제조업체를 지원하는 대출프로그램까지 신설했다. 최근에는 AT&T, 애플, 토요타, 폭스바겐, 나이키 등 다양한 산업에 걸쳐 영리기업들의 회사채를 직접 매입하고 있다. 오죽하면 현금을 많이 가진 애플사가 어리둥절해 할 정도다.


원칙을 변경하려면 법적 근거 필요

그렇다면, 중앙은행의 준재정활동에 대해서 왜 유럽은 시끄럽고 미국은 조용한가? 그 답은 정공법과 편법의 차이에 있다.
미국은 정공법을 따른다. 미 연준이 업무 영역을 확대할 때는 반드시 법률을 개정하거나 의회 승인을 얻는다. 공개시장조작을 수행하기 위해 1935년 미 연준법을 고친 것이 그 예다. 글로벌 금융위기나 이번 코로나19 위기 때도 특별법을 제정하고 Fed의 준재정활동을 의회가 승인하는 절차를 밟았다. 아울러 Fed의 선별적 구제금융이 종료될 때까지 의회에 정기적으로 보고토록 했다.

반면, 연방국가의 개념이 느슨한 유럽은 편법 또는 꼼수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ECB의 준재정활동(PSPP을 통한 특정 회원국 선별 지원)을 법률이 아닌 정치로 풀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독일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이 나온 직후 메르켈 총리와 마크롱 대통령은 7500억 유로 규모의 회복기금(EU Recovery Fund) 조성 계획을 발표하고, 각국의 참여를 촉구했다. 그 기금의 일부는 EU가 발행하는 채권으로 조달되는데, 각국이 이에 동의하면 ECB의 EU 채권 매입(PSPP)도 정당화된다는 논리다. (그럴 경우 독일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된다).

하지만, 편법은 문제를 키운다. 남유럽 국가를 돕는데 소극적인 ‘구두쇠 4인방(frugal 4)’, 즉 오스트리아, 덴마크, 네덜란드, 스웨덴과 함께 최근에는 폴란드, 헝가리까지 기금 조성에 강하게 반대한다. 그런 일은 자국의 헌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다. 뒤늦게 EU 정상들은 부랴부랴 긴급회담을 진행하고 있다. ECB 협정문을 고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EU 협정문까지 고쳐야 할지 모른다. 혹 떼려다 혹을 붙이게 생겼다.

결국 정공법이 정답이다. 중앙은행이 준재정활동을 하더라도 원칙을 지키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기획재정부와 국회가 취한 방법은 모범적이라 할 만하다.
코로나19 위기를 맞아 한국은행이 저(低)등급 회사채와 CP를 매입(최대 8조원)하는 길을 마련하되, 국회가 이를 승인하는 절차를 갖췄기 때문이다.(※그런 절차와 방법은 필자가 4월 14일자 피렌체의 식탁 칼럼을 통해 처음 제안했다)

아무리 경제위기라고 하더라도 중앙은행이 법적 근거 없이 준재정활동을 하면 위험하다. 중앙은행이 자의적으로 금융자원을 배분하는 역할을 떠맡으면 정치적 압력과 비판에 노출된다. 아베노믹스를 집행하느라 바쁜 일본은행이 딱 그렇다. 중앙은행 제도 면에서는 일본이 한국보다 훨씬 후진국이다.

일본은행을 앞서려면 대출 제도를 정비해야

제도와 정책은 다르다. 중앙은행 제도 측면에서는 한국이 일본을 앞서지만, 통화정책 면에서도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국은행이 정책 면에서도 일본은행을 압도하기 위해서는 유동성 공급의 유효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2013년 아베노믹스가 실시될 때 일본은행의 자산은 명목 GDP의 29%를 차지했다. 그런데 2019년 말에는 100%를 넘겼고, 올해 말에는 125%에 이를 전망이다. 일본은행이 이렇게 과감하게 유동성을 공급할 땐 주로 국채 매입 방식을 활용했다. 지난 3월말 현재 일본은행이 보유하는 국채는 국내자산의 84%를 차지한다. 반면 대출은 9.4%에 불과하다.

그나마 일본은행의 대출은 담보물의 가치와 조건(적격성)만 점검한 뒤 실행된다. 대출업무에서 민간의 실물경제활동과 연계성을 고려하지 않아서 일본은행의 대출은 공개시장조작과 별로 다르지 않다. 아무리 유동성을 공급하더라도 그것이 실물로 흘러가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한국은행도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1990년 이전에는 한은 대출과 실물경제의 연계성이 대단히 높았다. 예를 들어 1997년 외환위기 전에는 우리나라에 대형 찜질방이 없었고, 다방도 전부 영세했다. 한은이 대출할 때 소위 ‘사치·유흥업종’으로 자금이 흘러가는 것을 철저히 차단한 결과다. 지금 그런 노력이 다시 요구된다.

얼마 전 한은은 상업은행장들을 불러 모아 “기업에 대한 전방위적 지원을 지양하고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미시적 정책이 더욱 효과적”임을 설득했다. 대출관행을 바꾸라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해야 하는 것은 한은 자신이다. 상업은행들의 대출실적에 따라 한은의 대출금을 공평하게 배분하는 데 만족하지 말고, 일일이 실물경제와의 연계성을 확인해야 한다. 그런 미시적 방법을 동원하면, 통화정책의 효율성은 당연히 높아진다. 또한 돈만 푸는 데 만족하는 일본은행을 앞서게 된다.

예컨대 신재생 에너지 등 저탄소·친환경 분야에서 진행되는 고용·투자·구매·생산 활동을 한은이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그런 예다. 정부의 짐을 덜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과제로 대두된 ‘그린 파이낸스(green finance, 녹색 금융)’에도 부응한다. 통화정책에 미시적 요소(산업정책)가 가미되었다는 측면에서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주창했던 거시건전성 정책(macro-prudential policy)과 다르지 않다. 거시건전성 정책이 합당하다면, 산업정책과 결부된 통화정책도 합당하다.

통화정책 완화의 부작용에도 신경 써야

한은은 통화정책의 부작용에 관해서도 신경 써야 한다. 요즘 부동산값 급등 때문에 전국의 민심이 들끓고 있다. 그러나 그 책임을 어느 한 기관에만 지울 수 없다. 한은도 예외가 아니다. 저금리와 유동성 공급 확대 등 완화적 통화정책이 근본 원인인데, 미국에서는 그 부작용이 주식시장 거품으로 나타나고, 한국에서는 집값 상승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한은은 출구전략까지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부동산 문제만 생각한다면 당장 금리를 올리거나 시중의 유동성을 회수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럴 수 없다면, 통화정책 집행 면에서 보완책을 찾아야 한다. 현재 상업은행들은 부동산 담보대출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는 부동산시장 수요를 자극하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신용공급이 부동산 경기와 동조화되어 금융안정을 저해하기도 한다. 한은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 방법의 하나는, 한은과 상업은행의 대출에서 부동산 담보의 역할을 낮추는 것이다. 당장 무담보 신용대출을 늘릴 필요는 없다. 적어도 기업대출에서는 상업어음 재할인처럼 순수하게 운전자금만 공급할 수 있는 경로를 확대하면 된다.

오늘날 상업어음 재할인은 많은 나라에서 자취를 감췄다. 1970년대에 풍미했던 통화주의의 영향이다.(통화주의는 통화량만 중요하게 다루면서 자금공급 경로를 따지지 않는다) 그러나 완화적 통화정책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면,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 거기서 돌파구가 열린다.

요컨대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한 녹색 금융과 부동산시장 거품 억제를 위한 상업어음 재할인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현재 다른 중앙은행들이 하지 않는 이런 일이 어색할 수도 있다. 출발 단계에서는 조악할 수도 있다.
그런데 백남준은 소니사의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로 비디오 아트를 시작했다. 아주 조악하고 조잡한 출발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미술계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통화정책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발상의 전환과 실천이다.
리차드 파인만 교수는 나노공학의 문을 열 때 “저 밑으로 내려가면, 가능성은 무궁하다(There’s Plenty of Room at the Bottom)”고 강조했다.
케인즈도 거시경제학을 개척할 때 비슷한 말을 했다.
“어려움은 새로운 생각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구석 곳곳에 파고든 낡은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일반이론』 서문)


차현진 필자

금융전문가. 서울대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유펜) 와튼스쿨에서 공부했다. 대통령비서실, 미주개발은행(IDB)과 한국은행 워싱턴사무소장, 기획협력국장, 금융결제국장, 부산본부장을 거쳤다. 저서로는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 없는 경제학>, <금융오디세이>, <중앙은행 별곡>, <법으로 본 한국은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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