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식탁은 최근 발간된 책 《협력의 역설》을 소개한다. 캐나다 출신의 갈등 해결 전문가 애덤 카헤인이 쓴 이 책의 원 제목은 ≪Collaborating with the Enemy≫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가 추천의 글을 썼다.

한국 사회는 어느 때보다 소통, 포용, 통합이란 단어를 빈번하게 쓰지만 정작 현실은 딴판이다. 대립, 갈등은 때로 충돌, 적대감으로 치닫고 아예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진영논리로 나뉘어 곳곳에서 대치 전선이 발견된다. 이 책의 저자가 언급한 적화 증후군(enemyfying syndrome)에 딱 들어맞는 사회적 현상이다.
이 책의 저자는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도 난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세상을 바꾸는 분열의 힘’이란 부제가 역설적이다.

최재천 교수는 “2020년 대한민국이 필요로 하는 덕목은, 마주 앉아 이야기하면서 갈등을 해소하고 협력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토론보다 숙론(熟論)이라는 신조어를 쓰자고 제안한다. 초여름 주말의 읽을거리로 최 교수가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다. [편집자]

#소통·협력 원하지만 현실은 딴판
  협력엔 자기희생 수반, 통제 어려워
#협력을 할 땐
무조건적 타협보다
  사실 입각한 주장이 더 나을 때도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부터 바꿔라 
#상대 제압하려는 한국의 토론 문화
  '너는 틀렸다'는 적화 증후군으로 흘러
 
만일 요즘 리더들의 어록을 가지고 빅데이터 분석을 해보면 어떤 키워드가 가장 빈번하게 나올까? 최고로 빈번한 키워드를 맞출 자신은 없지만 그 목록의 상위권에 ‘소통’과 ‘협력’이 들어갈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나는 소통과 협력이 원활하게 잘되는 조직을 본 적이 없다. 오랜 고민 끝에 그 이유를 찾았다. 원래 소통과 협력은 안 되는 게 지극히 정상이기 때문이다.
소통과 협력에는 어떤 형태로든 자기희생이 수반된다. 스스로 자기 생명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독립적 생명체로서 희생은 애당초 쉽지 않은 일이다.
오죽하면 평생을 해로하기로 약속한 부부 사이에도 완벽한 소통과 협력이 불가능할까? 하물며 “생각도 다르고 호감도, 신뢰도 없는” 사람과 함께 일하라니……

세상에는 두 종류의 동물이 있다. 혼자 사는 동물과 모여 사는 동물. 개미와 꿀벌, 박쥐와 얼룩말, 침팬지와 인간은 모두 모여 산다. 이런 사회성 동물 중 인간만 유일하게 이룩한 진화의 단계가 있다.
침팬지 열댓 마리가 쾌적한 카페에 둘러앉아 커피나 차를 마시고 있는데 전혀 모르는 침팬지 한 마리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카운터에서 카페라테를 주문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열댓 마리의 침팬지들이 순식간에 덤벼들어 그 낯선 침팬지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수백 명이 웅성거리는 서울역 대합실에 겁 없이 들어선다. 이 세상 모든 사회성 동물 중에서 이 단계를 넘어선 동물은 호모 사피엔스밖에 없다. 우리는 거대한 익명 사회를 구축하고 문명을 일으켰다. 우리는 늘 “생각도 다르고 호감도, 신뢰도 없는” 사람과 일해왔다. 늘 힘들어하면서.

사실 나도 협력과 관련해 힘든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때는 2002년, 한국, 중국, 일본의 생태학자들이 2년마다 세 나라의 공동 생태학회를 열기로 했다. 그리고 2003년에 중국 베이징에서 그 착수 회의를 가졌다. 나는 선배들에게서 ‘첫 학회는 한국에서 열리게 하고 첫 회장은 한국인이 맡아야 한다’라는 지령(?)을 받고 착수 회의에 참가했다.

그런데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중국 측에서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첫 학회는 중국에서 열고 첫 회장은 중국인이 맡아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무 협의도 없이 그런 식으로 통보하는 중국 측에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질문을 퍼부었다.

중국은 한국에 비해 학회를 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나는 그 틈을 파고들어 한국에서 왜 첫 학회가 열려야 하는지, 첫 회장은 한국에서 나와야 하는지를 설파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 반까지 이어진 기나긴 토론이었다. 결국 이 토론에서 중국은 수긍하고 한국 측의 의견을 따라주었다. 이때의 토론은 애덤 카헤인의 《협력의 역설》에 나온 것처럼, 협력을 할 때는 무조건적인 타협보다는 때로는 사실에 입각한 주장을 해야 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embed]https://youtu.be/3Yzh4JfDmA8[/embed]


1990년 2월 넬슨 만델라가 27년 간의 복역을 마치고 석방되자 남아공 사회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았다. 남아공은 소수의 백인이 지배하던, 지구상의 몇 안 되는 분리된 사회구조를 가진 나라였다. 흑백 갈등은 물론, 진보 단체와 극우 보수 진영, 기업과 노동자, 빈민과 중산층 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위기 상황에서 1991년 9월 케이프타운 몽플뢰르 컨퍼런스 센터에서 남아공의 현재와 미래 세력을 대표할 만한 차세대 지도자 22인이 모였다.

웨스턴케이프 대학 피터 르 루(Pieter le Roux) 교수를 중심으로 당시 남아공 사회의 인종과 세력 집단을 망라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 컨퍼런스에 참여했다. 비록 공식적인 모임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현재 권력을 잡고 있는 세력과 앞으로 권력을 잡게 될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컨퍼런스 참가자들이 채택한 방식은 1970년대 ‘오일 쇼크’에 대처하기 위해 고안한 ‘시나리오 사고’(scenario thinking) 방법론이었다. 몇 개의 시나리오를 만든 뒤 국내의 모든 사람이 이를 공유하고 알고 있는 상황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방법이었다.

이를 위해 진행중재자(facilitator)로 초대된 사람이 바로 애덤 카헤인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다국적 에너지기업 쉘(Shell)에서 복합적이며 다면적인 갈등을 조정하는 업무를 담당해온 소통과 협력 전문가이다. 나는 몽플뢰르 컨퍼런스 성공의 절반은 카헤인 영입에 달려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후에도 세계 여러 갈등 지역에 초대되어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다. 그의 책 《협력의 역설》은 그가 치열한 갈등 현장에서 얻은 주옥 같은 혜안들을 담고 있다.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의 최우선 국정 목표는 지역구도 타파였다. 그러기 위해 그는 줄기차게 ‘대화와 타협’을 부르짖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카헤인은 이 책에서 대화가 전부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협력에는 배려와 참여 못지않게 원칙에 입각한 주장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협력이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는 협력의 본질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가 협력을 하기 위해 가졌던 모임은 대체로 전략 회의와 흡사했다. 이는 협력을 너무 성급하게 공동 작업의 단계로 옮겨 놓기 때문에 일어난다. 카헤인은 “협력은 통제될 수도 없고 통제되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어차피 우리는 거의 언제나 “생각도 다르고 호감도, 신뢰도 없는” 사람과 일해야 하기에 협력은 필연적으로 ‘스트레치 협력’(stretch collaboration)일 수밖에 없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 상황을 진전하는 방식, 상황에 참여하는 방식 모두를 바꿔야 협력할 수 있다.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우리 사회는 겉으로 보면 전례 없이 분열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선 말기의 망국적 양상과 흡사하다고 우려하는 지식인들도 제법 많다. 인터넷 속도는 세계에서 제일 빠른 정보통신국가에서 소통과 협력이 거의 불가능하다니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래서 지금 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토론 문화의 부활이라고 생각한다.

서양 사회에서 토론(discussion)은 남의 얘기를 들으며 내 생각을 다듬는 행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토론에 임하는 자세를 보면 심히 결연하다. 기어코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결기로 충만해 남의 혜안이 비집고 들어올 여지가 없다.

이러한 태도가 지나치면 카헤인이 《협력의 역설》 서두에서 언급한 ‘적화 증후군’(enemyfying syndrome)에 사로잡힌다.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고 생각하며 상대를 파멸해야 할 적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 지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문제의 원인은 내가 아니라 당신에게 있다. 그러니 협력을 위해서는 당신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쉽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스트레치 협력에 이르는 세 단계 실천 방법을 소개하며 마지막에 다시 한 번 이 적화 증후군을 언급한다. 타인이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혹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먼저 따지기보다 자기 자신 역시 해결해야 할 문제의 일부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2020년 대한민국이 필요로 하는 덕목은, 마주 앉아 이야기하면서 갈등을 해소하고 협력하는 것이다. 이 훈련만 하면 한국은 더욱 멋진 나라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국회에 계신 분들에게 《협력의 역설》을 추천하고 싶다. 물론 국회의원들을 지켜보는 모든 국민에게도 추천한다. 우리는 지역공동체에서 늘상 협력하면서 산다. 예전보다는 조금 더 현명하게 협력의 기술을 익혀야 할 때다.

또, “문제의 일부가 아닌 사람은 해결책도 될 수 없다”는 이 책의 메시지를 곱씹어보자. 그리고 우리의 토론 문화를 되돌아보자. 토론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는 행위다. 그리고 무엇이 옳은가를 찾기 위해서는 때로 상대가 아니라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토론에 참여하는 우리는 모두 이러한 ‘상황에 대한 책임’을 공유한다.

그런데 사실 토론의 ‘칠 토(討)’ 자는 ‘공격하다’와 ‘두들겨 패다’에서 ‘비난하다’와 ‘정벌하다’라는 의미까지 품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참에 다분히 오염된 ‘토론’이라는 용어를 버리고 여럿이 함께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한다는 의미의 숙론(熟論)이라는 신조어를 제안한다. 이 책이 이 땅에 성숙한 숙론 문화를 정립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기를 기대해본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생명다양성재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