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올라온 지 40년이 다 돼간다. 그 사이 ‘인상 좋다’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 내 얼굴이 호감 형이어서 그러려니 생각했다. 얼굴에 비해 말투는 콤플렉스에 가까웠다. 서울생활을 그리 오래 했는데도 바뀌지 않는 고향 사투리 억양이 싫었다.
내 목소리가 듣기 싫어 출연한 방송도 보지 않았다. 어쩌다 TV나 라디오에서 내 목소리가 나오면 소스라치게 놀라 채널을 돌렸다. 묵음으로 해놓고 얼굴만 보면 참 보기 좋은데 말이다.

그런 내가 지난 2월부터 <말 같은 말>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매주 3개의 원고를 쓰고 녹음까지 한다. 라디오니까 나의 강점인 얼굴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적어도 세 명 이상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방송 잘 듣고 있어요. 말이 어눌하긴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매력적이에요. 따뜻하고 진실해 보여요.” 심지어 내레이션 작업을 해도 좋을 목소리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다.

“나이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150여 년 전에 에이브러햄 링컨이 했던 말이다. 나는 ‘얼굴’ 자리에 ‘말투’를 넣고 싶다. 나이 예순이 가까워오는 지금에야 비로소 알았다. 내가 말투까지 좋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만 보면 ‘인상~ 인상~’ 하는구나.

말투는 인상을 바꾼다

누군가를 만나고 나면 그에 대해 인물평을 한다.  ‘그 친구 수더분하고 왠지 느낌이 좋아’, ‘그 사람 되게 까다롭고 신경질적일 것 같아.’
이런 평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인상’이다. 그런 인상을 결정하는 요인은 많다. 얼굴 생김새, 표정, 몸짓, 옷매무새 등 다양하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이성이나 중요한 인물을 만날 때는 얼굴을 매만지고 옷차림이나 표정, 자세에 신경을 쓴다.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그런데 미처 챙기지 못하는 게 있다. 바로 말투다.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말 습관 같은 것 말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말투에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말투야말로 그 사람의 됨됨이에 가장 가깝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면 얼굴이나 옷차림을 볼 게 아니라 말을 들여다보는 게 맞다. 왜냐하면 말투에는 그 사람의 성격이 묻어있고, 살아온 이력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말투는 들리는 억양이나 어감 이상을 포괄한다. 말투는 인격 그 자체이다.

말투는 정직하다. 얼굴은 화장할 수 있고 옷차림은 단장할 수 있지만 말투는 속일 수 없다. 예를 들어 말투가 퉁명한 사람과 상냥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첫 인상은 말투가 상냥한 사람이 좋다. 그런데 그 상냥함이 꾸며낸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금세 눈치 챈다. 그리고 그런 ‘거짓 상냥함’에 최악의 점수를 준다. 반대로 겉으로는 퉁명해보여도 그것이 ‘속 깊은 무뚝뚝함’이라면 오히려 더 호감을 갖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의 말은 세련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말주변이 좋지 않다. 그런데 희한하게 설득력이 있다. 사람들이 좋아한다. 이유가 뭘까? 2018년 하버드 경영대학의 에이미 커디 교수와 동료 심리학자는 15년 넘게 연구한 결과, 인상을 좌우하는 요소는 따뜻함과 유능함인데, 이 중 더 중요한 것은 따뜻함이라고 발표했다. 
따뜻함으로 먼저 신뢰를 얻어야 비로소 능력에 대한 평가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신뢰가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능력을 앞세우면 도리어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고도 했다. 신뢰가 없는 능력은 상대에게 위협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재주가 있다', '언변이 좋다'는 평은 좋은 의미로만 쓰이지 않는다. 진실하지 못하고 임기응변에 능하다, 꼼수와 잔재주를 부린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커디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따뜻함은 없고 유능함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 말에는 따뜻함이 있다. 일에 대한 열정과 상대를 향한 애정이라는 두 종류의 따뜻함이 있다. 말투가 겸손하고 따뜻하다.

말투는 대인관계도 바꾼다

만나고 나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모든 일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은 리더에겐 치명적이다. 여기에서도 말투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선뜻 반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왜 그럴까.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경우는 만나고 나면 기운이 빠지거나 지치는 사람이다. 만나기 전보다 기분 상태가 좋지 않다. 이에 반해 만나면 왠지 흥이 나고, 헤어지기 아쉽고, 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바로 이 기분을 좌우하는 것이 말투다. 말에도 모양이 있다. 말을 담는 그릇의 모양이다. 말을 들어보면 내용과는 무관한, 그런 모양새가 보인다. 그것을 ‘말본새’라고 한다. 이런 말본새는 상대에게 감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 친구 말본새하고는…’ 이렇게 말할 때는 말투에 감정이 상한 것이다. “그 사람 말을 참 예쁘게 한다”고 할 때는 말투에 호감이 가는 것이다.
어찌 보면 말은 옳고그름보다 듣는 사람의 기분이 더 중요한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옳은 말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경우가 관계에는 가장 안 좋다. 옳고 바른 소리는 듣는 사람에게 부담을 준다. 싫어도 따라야 할 것 같고, 바르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게 만든다. 차라리 그른 소리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거나 항변이라도 할 텐데, 말이 그럴 듯해 반박하기가 마땅치 않으면 곤혹스런 상황이 된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말투까지 고까울 때 우리는 ‘싸가지 없다’고 한다. 이것은 관계의 사망선고에 가깝다.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

누군가는 말투 때문에 손해를 보고, 또 누군가는 말씨 덕분에 일이 술술 풀리기도 한다. 인간관계에서 말투로 손해 보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
첫째, 누군가를 항상 비난한다. 이 사람은 이래서 싫고, 그 사람은 뭐가 잘못 됐고, 모두가 못마땅하다. 비아냥대고 빈정거리는 말투로 험담을 입에 달고 산다.
누군가를 칭찬하면 “글쎄, 그게 그렇게 칭찬할 만한 일일까?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게 많을걸” 하며 시큰둥하게 반응한다.
그에 반해 자신에 대해서는 “내가 왕년에 이랬다”, “누구와 친분이 있다”고 말한다. 지금의 나는 없고 과거의 자신과 자신이 아는 사람만 있다.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남 흉보는 것으로 메우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자신도 언젠가 이 사람 말의 도마에 올라 칼질 당할 것이란 생각이 들고, 그래서 만나기 싫다.

둘째, 입만 열면 구시렁구시렁, 틈만 나면 투덜투덜 거린다. “나는 되는 일이 없다”며 징징대고, “짜증나”, “재수 없어”,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툭툭 내뱉는다. 늘 화가 나있고 말에 불평불만이 배어 있다. 결국은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난 역시 안 된다”며 자기비하로 끝을 얼버무린다.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기가 빨리는 느낌이다. 당연히 피하게 된다.

셋째, 고압적이다. 누군가 말을 하면 “알아, 알아!”, “그게 아니고”, “뭐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됐고”, “거기까지만” 그러면서 상대 말을 끊는다.
그리고 자기 말을 한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이 말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대화에서 자기 말의 점유율이 낮아지는 걸 견디지 못한다. 늘 이기려 하고,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누군가 어디에 다녀왔다고 얘기하면 그 말을 듣지 않고 ‘나도 거기에 다녀왔다’면서 자기 얘기를 한다. 말을 실컷 하면 자신은 후련하겠지만 듣는 사람은 짜증이 난다. 앞으로 남는 것 같지만 뒤로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남을 깎아내리고, 힘들다고 투덜대면 당장은 반응이 나쁘지 않다. 누군가를 험담하면 듣는 사람도 속이 시원한 대리만족을 느끼고, 또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면 ‘남들도 힘들게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하지만 듣기 좋은 육자배기도 한두 번이다. 이런 말이 거듭 되면 점점 싫증을 느끼고, 급기야 그런 말을 하는 사람과 만나기 싫어진다.

말투는 인생도 바꾼다

말투는 습관이고 버릇이다. 입에 배면 고치기 힘들고 마음가짐과 사고방식, 삶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말버릇이 나쁘면 그런 버릇대로 살게 된다.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의 일상이 즐거울 수 없고, 즐겁지 않은 삶 속에서 밝은 미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1953년 미국 예일대는 졸업생들에게 ‘장차 이루고 싶은 꿈’을 말하라고 했다. 그런데 단 3%만이 인생의 구체적인 목표와 계획을 써서 제출했다고 한다. 97%는 그저 생각만 했거나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20년이 지나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조사해 봤다. 놀랍게도 구체적인 목표를 말한 3%의 졸업생이 나머지 97%의 합보다 더 큰 부(富)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조사 결과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뚜렷한 목표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큰 성공을 이뤄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있고, 그렇게 마음먹었다고 해서 목표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마음속에 목표와 꿈이 있어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조차 그걸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말을 해야 ‘자기실현적 예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사람은 공개적으로 발언하면 거기에 맞춰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바꾸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말을 길게 발음하면 ‘마알’이 되는데, ‘마알’은 마음의 알갱이란 뜻이라고 한다. 말이 바뀌면 마음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 다시 말해 몸은 마음이 가는 대로, 마음은 말이 시키는 대로 한다. 말은 잠재능력을 끌어내고, 스스로 미래를 개척한다.

말하는 대로 된다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었다. 화장실에 가서 쭈그려 앉으면 나도 모르게 “나는 무슨 대학 무슨 학과 학생입니다.”란 말을 되뇌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일종의 조건반사 같은 것이었다. 결국 학과는 달라졌지만 학교는 혼자 되뇐 대로 됐다. 말이 다짐이 되고 언약이 돼 꿈을 현실로 만든 것이다.

말이 씨가 되는 현상은 자신뿐 아니라 남에게 건네는 말에서도 나타난다. 긍정적인 말을 건네면 긍정적인 결과를 낳고, 부정적인 말을 건네면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자신과 타인의 운명까지 바꿀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리더의 말투에는 자신감이 배어 있어야 한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이기 보다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이어야 한다. 패배주의에 빠져선 안 된다.
또한 리더는 관계와 의리보다는 원칙과 양심을,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동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한마디로 기회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리더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패배주의와 기회주의를 꼽았다. 우리가 그의 말에서 희망을 보았다면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말투를 바꿀 수 있을까

말투를 고치려면 우선 자신의 말투에 관심을 갖고 의식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말투에 신경 쓰면서 말해야 한다. 나쁜 말투는 줄이고 좋은 말투는 늘리면 된다. 나 스스로 만족하는 나의 말투가 있다. 일을 시도할 때 “아니면 말고”, 일이 잘 됐을 때 “역시!”, 잘 안 됐을 때 “어쩔 수 없지.”, 남들이 뭐라 하면 “어따 대고”나 “어쩌라고” 등. 이런 말투는 자주 쓰려고 노력한다.

또한 남의 말투를 유심히 듣고, 듣기 싫은 말투를 타산지석으로 삼는다. 하루 종일 듣는 것이 말이기 때문에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나쁜 말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번 해 보기 바란다. 내 말의 대들보는 잘 안 들려도 남의 말의 티끌은 잘 들리는 법이다.

본받고 싶은 사람을 골라 그 사람의 말을 반복해 듣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말투를 닮게 된다. 이것이 자신의 말투를 바꾸는 가장 빠른 길이 될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쓰고 있는 말투도 부모나 친구, 학교 선생님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때는 부지불식간에 그 사람들의 말투를 흉내 냈지만, 이제부턴 의식적으로 닮고 싶은 말투를 따라해 보자. 말투가 내일의 운명이 된다. 운명은 바꿀 수 있다.


강원국 필자

작가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증권회사 홍보실, 대우그룹 회장비서실 등을 거쳐 대통령의 스피치라이터로 8년간 일했다. 저서로 『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가 있다. 각종 강연을 통해 ‘좋은 글쓰기’를 전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