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가 영국 유학할 때 이야기다. 식민지 청년이란 이유로 그를 업신여기는 영국인 교수가 있었다. 어느 날 학교 식당에서 옆자리에 앉은 그 교수가 말했다.
“돼지와 새는 한자리에서 밥을 먹을 수 없다네.”
간디가 답했다.
“그럼 제가 다른 자리로 날아가겠습니다.”

앙심을 품은 교수가 수업시간에 간디에게 질문했다.
“지혜와 돈 보따리 중 하나를 고르라면 무엇을 선택하겠나?”
“저는 돈 보따리를 택하겠습니다.”
“어찌 배우는 학생이 그럴 수 있나. 역시 식민지 청년은 다르구먼. 나라면 지혜 보따리를 챙길 텐데…”
간디가 답했다.
“네, 누구나 자신에게 부족한 걸 취하는 법이지요.”

시험기간, 교수에게 복수할 기회가 왔다.
거의 만점에 가까운 간디 답안지에 ‘idiot(멍청이)!’라고 썼다.
이를 받아든 간디가 교수에게 물었다.
“제 답안지엔 점수가 없고, 교수님 서명만 돼 있는데, 무슨 일이죠?”

나도 웃긴다는 소리 좀 듣는데, 절망감을 느낀다. 즉흥적으로 이게 가능한 일인가. 사실인지 의심이 갈 정도다. 그런데 간디의 이 말이 그런 의심을 풀어준다. “나의 오랜 투쟁을 견딜 수 있게 해준 힘은 유머에서 나왔다.”

웃기는 사람이 인기 있는 이유

나는 웃기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것이 대세인 듯하다. 우리 사회도 웃음을 찾기 시작했다. 과거 ‘웃으면 복이 와요’ 같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나 구하던 웃음을 일상에서 찾고자 한다. ‘개그콘서트’에서나 보던 개그맨들이 주변에 많아졌다.
이유가 있다. 이제 창의성이 필요해졌다. 웃음은 긴장을 풀어주고 사고를 유연하게 한다. 소통도 중요해졌다. 유머는 친근한 관계와 공감 분위기를 만든다. 알약에 입힌 당분처럼,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고 쓰디쓴 얘기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많은 사람이 재미와 여유를 상위의 가치로 놓기 시작한 데 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괴로움을 참는 게 아니라 그것에 다소 못 미치더라도 즐겁게 살기를 원하고, 기왕이면 유쾌하게 살고자 한다.
이런 결과로 웃기는 사람들의 세상이 도래했다. 유머감각이 그 사람의 인상과 평판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매력의 척도가 됐다. 왠지 끌리고 인기 있는 사람 배경에는 유머가 있다.

유머는 리더의 책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의문이 하나 있었다. 리더가 구성원의 기분에 맞춰줘야 하나, 아니면 구성원이 리더의 기분에 맞춰주는 게 맞나.
나는 주로 후자 쪽이었다. 상사의 기분을 살피고 그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것이 직장생활의 거의 전부였다. 과연 이게 맞았는가. 나만 그랬는가. 지금은 어떤가. 조직을 떠난 지 오래 돼서 현재 직장 분위기를 잘 모른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전자가 맞았다. 리더가 구성원의 눈치를 보는 게 맞다. 그렇게 해도 구성원은 리더의 심기 상태를 살필 테니까.

리더의 역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조직 분위기 관리다. 구성원의 기분을 일하기 좋은 상태로 만들어주는 것이 리더의 기본 책무다. 왜냐하면 조직은 일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니까. 일하는 사람들의 기분이 언짢고 불편하면 일을 잘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
따라서 리더는 필요하면 기꺼이 광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리더 본연의 업무다. 구성원을 관리 감독하고 평가하는 일은 부수적 업무다. 이게 리더의 주 업무가 될 때 구성원은 리더의 눈치를 본다. 그리고 눈치를 잘 보는 사람, 다시 말해 리더의 기분을 잘 맞춰주는 사람이 득세한다.

구성원이 리더의 기분을 살피는 조직에서는 웃기는 일이 윗사람 몫이 아니다. 상사는 웃어주는 역할만 잘하면 된다. 굳이 유머를 구사할 필요가 없다. 웃기면 경박한 것이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위엄을 풍기는 것이 더 지도자답다.
이런 조직에서는 리더가 웃음을 유도하는 부하 직원을 나무라기까지 한다. 자기 몫을 대신해주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왜 그렇게 실없냐’,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냐’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냐’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리더가 승진도 빠르다.

유머, 설 땅이 없다

10년 넘게 대통령과 회장의 연설문을 쓰면서 유머를 넣어보려는 시도를 했지만 늘 미수로 그쳤다. 왜 그랬을까.

유교적 계층문화와 군사독재가 심어놓은 권위주의적 사고가 뿌리 깊다. 말에도 위계질서가 있다. 우리말은 특히 높임말이 발달했다. 높임말을 쓰다 보면 말을 가려서 하게 된다. ‘말은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말에 높낮이가 있으면 관계도 위아래가 만들어진다. 공손하고 예의발라야 한다는 우리의 관념 속에는 상하와 주종 관계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오랜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말의 불평등 구조가 심화되었다. 우리 사회는 말하는 사람 따로, 듣는 사람 따로 있다. 어른은 말하고 자녀는 듣는다. 선생님은 말하는 사람, 학생은 듣는 사람이다. 직장에서도 상사는 말하고, 부하직원은 듣는다. 윗사람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아랫사람은 말해야 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런 권위적 문화에서 유머는 설 자리가 없다. 우리 민족 특유의 해학과 기지는 오랫동안 저항의 도구로만 쓰였다.

독재 시대 이후에도 편이 갈려 반목하고 적대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유머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용기를 내 유머를 구사해도 돌아오는 것은 냉소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6월 제17대 국회개원 축하 연설을 조크로 시작하고자 했다. 연설비서실에서 여러 안을 제시했다. 이것도 그중 하나다.
“브라질에서는 국회를 ‘고장 난 에어컨’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우리 17대 국회는 ‘성능 좋은 에어컨’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결국 어느 안도 채택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다행이었다. 연설을 위해 국회를 방문한 대통령을 야당은 환영하지 않았다. 그렇게 냉담한 분위기에서 조크를 하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유머야말로 상대가 받아주고, 웃어줘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잡담부터 시작하자

잡담은 부질없다는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 잡담은 쓸데없이 지껄이는 말이 아니다. 상대 마음을 열린 상태로 만드는 수단이다. 잡담 없이 불쑥 꺼내는 본론은 성공하기 어렵다. 누군가와 용건이 있어 만났을 때 용무를 말하는 데는 3분이면 족하다. 그 3분을 위해 30분 정도는 잡담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잡담하는 30분은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다. 상대가 들을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거나 대기업 회장이 협상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경계심을 허물고 신뢰감을 형성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회사 부장도 부서원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려면 잡담을 잘해야 한다. 잡담을 잘해야 같이 있어도 부담 없는 사람, 함께 얘기하고 싶은 사람이 된다.

잡담 소재는 다양하다. 최근 일어난 사건사고와 시사, 최신 유행과 트렌드, 취미 등에 관해 얘깃거리를 모아두면 된다. 자신과 주변 사람의 근황도 훌륭한 잡담거리다. 잡담은 수준이 높거나 의미가 있을 필요가 없다.
수준 높은 잡담을 하려다 보면 아는 체, 잘난 체가 되고 상대에게 가르치려든다는 느낌을 주게 된다. 또한 잡담에서 의미를 찾으면 결론을 놓고 벌이는 토론과 논쟁이 되고 상대를 이기려들게 된다. 이런 잡담은 아니함만 못하다.

잡담의 정수는 ‘유머’

유머를 잘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웃기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어야 한다. 웃기고자 해야 웃길 수 있다. 스스로 망가지고 유치하다는 소리를 들을 각오가 필요하다.
둘째, 유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 재밌는 말을 하면 기억해두고, 책에서 읽은 유머를 메모해두는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 용감해야 한다. 뻔뻔함이 필요하다. 뻔뻔하면 펀펀(fun fun)하다 하지 않는가. 유치하고 썰렁하면 어떤가. 웃기지 않는다고 욕할 사람은 없다. 유머는 유머일 뿐이다. 그냥 던져보는 거다. 웃어줄 때까지 시도하는 거다.

유머 구사에도 단계가 있는 듯하다.
첫 단계는 책이나 온라인에서 보거나, 남에게 들은 유머를 전하는 수준이다. 그것을 전하기 위해 기억해뒀다는 노력은 가상하나 유머러스하다는 소리를 듣진 못한다.
두 번째는 의도적으로 유머를 준비하는 단계다. 밥 먹으로 갈 때나 회의하기 전에 그 자리에서 던질 유머를 미리 마련한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만나 얘기하는 경우에 음식이나 술에 관한 유머를 준비하는 식이다.

의사인 고교 동기가 있는데 만날 때마다 웃기는 말을 준비해온다. 아재개그 비슷한 걸로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든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제 할 바를 한다. 그 정성이 갸륵해서 참고 듣는다. 그런데 갈수록 유머가 일취월장한다. 요즘엔 이 친구가 얘기하면 일단 웃어준다. 웃기는 놈 떡 하나 더 주는 격이다.

마지막 단계는 그 사람만 봐도 웃음이 나는 수준이다. 그 사람만의 유머 색깔, 스타일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경우 입만 열면 빵빵 터진다. 두 번째 단계처럼 유머를 던지는 사람이 준비하는 게 아니라 듣는 사람이 먼저 웃을 준비를 하고 기다린다. 내 경우가 이런 경지이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에게 배우는 유머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웃기는 캐릭터를 구축한 분들이다. 두 분의 유머에는 남을 즐겁게 해주려는 마음과 메시지를 좀 더 효과적으로 전하고 싶은 노력이 담겨 있다. 이분들에게 유머를 배워보자.

우선, 능청 유머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1980년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희호 여사가 면회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죽이든 살리든 하나님 뜻대로 하시라고요.”
이에 대해 김 대통령으로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무조건 살려달라고 해야지 하나님 손에 맡기면 어떻게 하느냐.”

자아도취 유머도 있다. 이른바 허풍개그라고도 한다. 2005년 주한외교단 행사에서 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서양 음악에는 발을 잘 못 맞추지만, 사물놀이에는 잘 맞춥니다. 마치고 나면 한 대목 시범을 보이려고 했는데 사물놀이팀이 가버렸습니다. 다행히 가버렸습니다.”
이건 나의 주특기이기도 하다. 나는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대놓고 말한다. 나는 정색하고 말하는데 사람들은 웃는다. 웃자고 하는 얘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비웃는 것일 수도 있고.

반전 유머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터키를 방문했을 때, 동포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 좋은 데 사시네요. 여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대통령이에요. 돌아가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임기응변 유머가 있다. 기지, 위트라고도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받았을 때 누군가 이렇게 악담했다.
“김대중이 노벨상을 받은 건 개도 웃을 일이다.”
이에 대해 한승헌 변호사가 이렇게 되받았다.
“웬만하면 사람만 웃었을 텐데 얼마나 기쁜 일이기에 개까지 웃었겠습니까.”
그야말로 촌철살인이다. 한승헌 변호사의 유머 실력은 일찍이 김대중 대통령도 알아봤다고 한다.
“누가 한 변호사 따라다니며 유머를 받아 적어 책을 내면 베스트셀러가 되겠다”고 했다니 말이다.

두 대통령은 풍자와 해학도 즐겨 썼다. 풍자는 비꼬아서 비판하는 것이고, 해학은 동정해서 감싸 안는 유머라고 할 수 있다.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건 돕는다는 게 두 분의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이런 풍자와 해학이 수시로 등장한다.

리더에게 유머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리더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유머는 일상이 되어야 한다. 웃기면서, 웃으면서 살자. 이왕 사는 거, 비극보단 희극이 낫지 않겠는가.


강원국 필자

작가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증권회사 홍보실, 대우그룹 회장비서실 등을 거쳐 대통령의 스피치라이터로 8년간 일했다. 저서로 『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가 있다. 각종 강연을 통해 ‘좋은 글쓰기’를 전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