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한 시기엔 비상한 선택과 결단이 필요하다. 북핵 협상이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한 상황에서 한반도 정세는 좀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최근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김정은 중병설’은 새삼 남북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한미 방위비분담금협상을 둘러싼 다툼도 치열하다. 장차 주한미군 감축문제로 점화될 수 있는 변수다. 이웃 나라를 돌아봐도 외교안보 현안이 녹록치 않다.
<피렌체의 식탁>은 지난달 29일 문정인 대통령 외교안보통일 특보를 만났다. 지난해 12월 ‘국가원로 인터뷰’를 한 지 5개월 만이다. 이 시대의 외교안보 전략가로 평가 받는 문 특보는 각종 현안을 넘나들며 그 나름의 명쾌한 방향과 해법을 제시했다. 문 특보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남북 관계와 관련해선, 제21대 국회가 개원되면 4.27 판문점선언을 비준하고 남북 교류협력을 제한하는 각종 법령을 고칠 필요가 있다. 미국과 마찰을 빚더라도, 대북제재에 포함되지 않는 인도적 지원이나 남북 철도 연결, 과학기술협력센터 같은 사업을 먼저 추진해 크고 작은 성공경험을 쌓아 나가야 한다. 지금 같은 교착상태를 크게 반전시킬 방법은 결국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뿐이다.
②주한미군 분담금협상과 관련해선, 미국 측 요구가 동맹, 자주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 몰상식의 문제라고 규정했다.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SMA)에도 없는 지출항목을 강요한다면 설혹 협상이 타결되더라도 국회 비준을 받기 어렵다. 미국 측이 일단 분담금 13% 증액안을 수용한 뒤 한미 간에 SMA 개정협상을 거쳐 내년에 다시 증액 규모를 논의해야 한다.
③한일 관계와 관련해선 11월 23일 종료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의 종료 가능성을 언급했다. 협정상 양측은 협정 종료 3개월 전에 연장 여부를 통보해야 하는데, 아베 정부가 지금 같은 제재조치를 고집할 경우 우리 정부도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
④문 특보는 또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6~7월 한국을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중국 내부 상황이 전반적으로 안정된다는 전제를 달아서다. 경제협력과 북핵 협상이 주요 의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문 특보와의 인터뷰는 지난 달 29일 두 시간가량 진행됐으며, e메일 인터뷰를 한 차례 추가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편집자]

#대북 정보력, 미국보다 더 낫다
  軍부대 이동에 특이동향 없었다
#북한, 국회 개원 맞춰 대화 나와야
 실기 땐 우리도 못해주는 상황 초래
#美측 분담금 무리한 요구 계속하면
 동맹·자주 아닌 상식·몰상식 문제 
#시진핑 6~7월 방한하면 의미 커
 日제재 안 풀면 우리도 할 게 없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건강상태를 놓고 20일 넘게 국내외 언론이 온갖 추측을 쏟아냈습니다. 심지어 김여정 중심의 후계체제까지 상상력을 발휘한 일본 매체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대북 정보력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대북 정보력에 관해서 대한민국보다 더 강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대북 정보력에 대해선 이해해야 할 부분이 있다. 기본적으로 대북 정보 수집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휴민트(human intelligence)라 해서 사람을 통해 대북한 첩보를 수집, 분석해 정보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둘째는 테킨트(Technical Intelligence)인데 첨단기술을 활용해 정보를 수집한다. 테킨트는 세 가지로 구성된다. 이민트(imagery intelligence) 영상 첩보, 시긴트(Signal intelligence) 암호 첩보, 메신트(measure and signature intelligence) 측정 첩보가 있다.
대북 정보의 핵심은 휴민트, 이민트, 시긴트다. 북한 상황에 대해 이 세 가지 정보를 폭넓게 수집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미국은 영상 정보, 암호 정보를 하지만 인간 정보는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영상 정보를 얻더라도 우리는 24시간 감시하지만 미국은 한계가 있다.
대북 정보 수집에선 한국이 최고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간 정보, 영상 정보, 암호 정보를 수집하는 시스템을 24시간 가동 중이다. 그러니 한국의 대북 정보력은 미국보다 더 낫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김정은 건강이상설을 놓고 우리 정부가 갈팡질팡 했을까요?

▲그렇지 않았다. 우리 정부의 입장은 일관되게 “북에 특이동향이 없다”는 것이었다.

“북 지휘부 동선에 특이동향 없었다

-김정은 건강이상설이 나왔던 지난달 하순 문 특보님께선 일찌감치 폭스뉴스를 상대로 이상 없다고 언급했습니다.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 그렇게 말씀하신 건가요?

▲원래 국가정보라는 건 우리가 안다는 걸 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우리가 무엇을 아는 지 노출하는 게 되고 상대방은 우리의 수집 노력을 쉽게 블로킹을 하기 때문에, 정보기관들은 정보의 구체적 내용을 이야기할 수 없고, 비밀 분류를 하여 공개하지 않는다.
이번에 우리 정부는 휴민트, 이민트, 시킨트를 전부 활용해 ‘북에 특이 동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이 동향’의 예를 들자면, 만약에 북측에 유고사태가 생겼다면 평양 방어를 위해 군 병력을 이동시킬 가능성이 높다. 또 북측 지휘부에 있는 사람들의 동선(動線)이 달라질 수 있다.
북한에 유고가 생겨 급변사태로 갈 것인지 그 판단 기준은 군부대의 동향이다. 그런 동향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정부는 특이 동향이 없다, 모든 게 평소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봤던 것같다.

-만의 하나 김정은 체제에 변화가 발생할 경우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는 게 좋을까요?

▲우리가 신경 쓸 게 뭐 있는가. 북한 급변사태가 우리를 포함, 서방의 주요 분석 대상이 된 것은 내 기억으론 1990년대 초반이다. 당시 미국 CIA는 김일성이 죽고 나면 북한에 엄청난 정치적 혼란과 급변사태가 벌어져 체제붕괴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1994년엔 김일성 사망하고 김정일이 등장하자 3년을 못 간다고 봤다. 그런데 김정일이 2011년까지 살아서 북한을 통치했다. 한국, 미국으로선 1990년대 초에 첫 번째 중요한 대북정보 실패 사례를 겪었고, 1994년에 또 다시 중요한 정보 실패를 했던 셈이다. 재밌는 게 요즘 ‘북한 붕괴론’을 주장하는 친구들은 당시에도 같은 주장을 했다. 그래야 자기들 주장이 정당화되기 때문일 것이다.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 승계 체제로 간 다음에도 그들은 ‘오래 못 갈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그러나 2011년부터 2020년까지, 벌써 9년 동안 북한 체제를 잘 움직여가고 있다. 따라서 북에서 지도자에게 유고가 발생할 경우 급변사태, 내부 혼란, 위기, 붕괴가 있을 거라고 가정하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접근이다.
과거 진보 정부에서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해 고당계획 같은 게 있었다지만 그 때 계획은 북에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북에 그런 사태가 벌어져서 대규모 난민들이 밀려왔을 때 그것을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를 준비하는 것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부 들어선 북한에 정말 급변 사태가 일어났을 때 한미 연합전력이 북에 들어가서 혼란 상황을 안정화시키는 작전에 관해 많이 준비한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작계5027이나 작계5029는 지금 폐기된 겁니까?

▲두 개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작계5027은 북한이 대규모 남침을 했을 때, 한미 연합전력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작계5029라는 건 이명박 정부에서 북한 급변사태 발생 시 한미연합전력의 안정화작전을 세운 거라고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서는 그런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안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고가 생긴다 해도 기존 정책에 큰 변화가 없을 거라고 본다. 당과 군 사이에 집단지도체제가 생기거나 군부 주도 체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통치를 하는 데 정통성을 가지려면 백두혈통에서 누군가 지도자로 나와야 한다. 김여정이든 김정철이든 누군가 백두혈통에서 나올 것이고, 최소한 단기간에는 김정은 체제가 유지된다고 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체제 변화에 대해 우리가 왈가왈부하는 하는 건 부적절해 보인다.

-민감한 부분이군요. 작계5029 이 자체도 논란이지만, 우리가 간섭한다 해도, 방관한다 해도 논란거리가 될 것 같습니다.

▲과거에 김영삼(YS) 정부 때 충무계획을 세웠다가 북에서 문제를 삼았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는 고당계획이 있었지만 거론되지 않았다. 고당계획의 기본은 북에 문제가 생겨 대규모 난민이 밀려왔을 때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그런 계획이 있다 해도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게 원칙일 것이다.

“판문점선언 비준, 남북관계법령 개정 필요”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4.15 총선이 치러졌습니다. 알다시피 집권여당이 과반 의석인 180석을 차지했고요. 정국 주도권을 잡은 문재인 정부가 앞으로 추진해나갈 외교안보통일 분야의 우선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선 당장은 2018년 남북 정상이 발표한 4.27 판문점선언 비준안 문제가 있다. 국회 비준을 제대로 받아야 남북공동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 남북관계 관련 법률을 보면, 지방자치단체들이 통일부,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남북 교류협력을 할 수 있는데, 이를 고칠 필요가 있다. 지방정부가 자발적으로 신고만 하고, 통일부 승인을 받는 게 아니어야 한다. 향후 법안 중 하나로 처리해볼 법하다.
남북 간 국회회담도 우리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지만 우리 내부의 갈등과 북측의 무응답으로 흐지부지 됐는데, 여대야소가 됐으니 국회회담을 실현시켜 북측과 대화 채널을 확립하는 게 중요하다.

-법 제도 말고 예산 측면은 어떤가요? 예를 들면 남북교류협력기금 문제도 있고, 남북철도 복원사업, 코로나19 방역 지원사업을 집행하려면 예산 문제가 따르는데 앞으로는 원활하게 진행될 거라 보십니까?

▲남북교류협력기금은 현재 1조2000억 정도 있다. 당연히 원활하게 될 거라고 본다. 그걸 하려면 국회 통일외교상임위를 통과해야 된다. 그 다음엔 국회 예결위에서 처리할 사안인데, 기본적으로 여당이 과반 의석을 가지고 있으니까 입법부 차원에서 동의, 지원이 활성화되어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북한이 실기(失期)를 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북한이 6월 개원할 제21대 국회에 맞춰 남북대화 테이블에 나와야 탄력이 붙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북한이 계속 거부하면 국회 과반 의석을 갖고 있어도 우리 정부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적절한 타이밍을 잃게 되면 국민들이 식상해하며 정부·여당을 비판할 것이다. 그러면 북한이 원해도 국민 정서상 우리가 못해 주는 상황에 부닥친다.
지금 당장도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마스크, 진단키트, 의료장비를 주려 해도 실행에 옮기는 게 어렵지 않나.

“분담금 증액하려면 지출항목에 맞아야”

-트럼프가 지난달 20주한미군 분담금 협상을 퇴짜 놓았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앞서 로이터통신은 한국이 방위비 분담금을 전년 합의 대비 최소 13% 인상하는 안을 제시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거부했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한국 측 분담금은 현재 1조원을 약간 넘는 수준입니다. 트럼프는 11월 대선을 겨냥해 더 많은 돈을 내라고 계속 압박할 거 같습니다.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계속 타결되지 못할 경우 우리 정부는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까요?

문정인 특보와의 인터뷰 이후 동아일보는 7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한미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연간 13억 달러 선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한미 협상 실무팀이 잠정 합의했던 13%보다 네 배 가까운 인상률이다. 2019년의 분담금(1389억 원)에 비해서도 절반 가까운 금액을 추가 부담하라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 때문에 한미 양측은 추가 협상 일정도 잡지 못하고 있다.

▲보수 진영에서는 한미동맹을 살려야 하니까 미국에 분담금을 더 주라고 얘기하지만, 이건 몰상식한 주장이다. 동맹, 자주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 몰상식의 문제다.
한미동맹을 굳건히 위해 양국은 주한미군 주둔에 관한 한미행정협정(SOFA)를 맺었다. 그 협정의 하위개념으로 나온 게 1991년부터 추진한 SMA(special measures agreement,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다.
SMA에 따라 우리가 주한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한국인 근로자의 봉급을 주고, 군사시설 건설 및 병참 지원을 하는 것이다. 이건 국가 간 협정이다. 우리가 예산을 짜서 주려면 지출 항목이 그 세 가지에 맞아야 한다.
그러나 미국이 말하는 건 ‘그 외의 항목’이다. 미국은 ‘호르무즈해협에서 나가는 원유와 원유수송선을 보호해주고, 남중국해에 정찰기를 띄우거나 전략폭격기 출동 비용을 부담하고, 주한미군 병력을 6개월~1년마다 교체하고 있다’며 그런 비용을 우리가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이 협정에 포함되지 않는 항목들이다. 미국 입장에선 일단 분담금 13% 증액을 수용하고 그 다음에 SMA 개정을 통해 추가로 분담금 증액 요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우리 국회가 비준을 해줄 수 있겠는가? 그래야 절차가 맞는 거다.
지금 미국이 요구하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만약 우리 정부가 미국과 합의를 한다 해도 우리 국회에서 비준을 해주지 않을 거다. SMA 지출 항목에 없는 걸 국회가 어떻게 비준해 주겠는가. 몰상식도 이런 몰상식이 없다.

-결국 SMA 협상부터 다시 시작해야 된다는 거군요.

▲금년은 이미 늦었다. 5년마다 하기로 했던 것을 매년 하기로 바꿨다. 우리의 기본 입장은 금년엔 우리가 13%까지 증액하겠다고 했으니 그걸 먼저 받고, 그러고 나서 SMA 협상을 다시 해서 추가 분담금 문제를 협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회와 국민을 설득할 수 없다.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데, 우리는 뭐 민주주의 국가 아닌가? 우리도 법과 절차에 따라 움직이는 나라다. 아무리 미국이 힘센 나라이고 우리에게 무슨 압박을 가한다 해도 결코 수용할 수 없다. 이건 단순히 액수의 문제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아무리 트럼프 대통령에게 잘 해주고 싶어도 제도상, 절차상 불가능한 얘기다.

“주한미군 감축, 北비핵화 연동카드 가능”

-트럼프가 올 가을 대선에서 재선될 경우 분담금 협상을 계기로 불거진 주한미군 감축 구상을 가시화할 거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그럴 수 있다. 지난 1월에 워싱턴에서 내가 국가이익센터 강연을 했는데, 전직 고위인사들과 미국 싱크탱크의 현실주의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얘기가 나왔다. ‘북한이 전술핵과 단거리 탄도미사일 타격능력을 거의 갖춘 상황인데 지금 평택에다 주한미군 2만8500명을 계속 유지하는 건 자살행위와 같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북이 유사시에 전술핵으로 거길 친다면 주한미군 2만8500명의 대량 희생은 상상 가능한 시나리오다. 요즘 미국 내에서도 주한미군의 점진적 감축론이 계속 나오는 분위기다.
트럼프 대통령이 압박하는 방위비 분담금 증액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략환경이 바뀌었고 북한 위협의 성격이 변화했기 때문에 한 곳에 미군 2만8500명을 모아서 둘 수 있느냐를 놓고 내부 논쟁이 많이 오가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 보수 진영에선 누구도 그 얘기를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이 오는데 대비해야 한다.
주한 미 지상군 감축은 한미동맹에 근본적인 손실을 가져오지 않는다. 미국과 해·공군, 그리고 정보정찰감시 자산 부분에서 협력을 잘 해나가고 확장억지력을 계속 유지해주면 우리 안보엔 큰 지장이 없다고 본다.
주한미군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옛날 냉전시대의 인계철선 논리에 계속 빠져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이 있어야 미국이 한반도 유사시에 지상군을 포함한 대규모 병력 지원이 가능하다고 보는 건데, 나는 현실적으로 그렇게 보지 않는다.
만약 미국 쪽에서 지상군을 점진적으로 감축한다면 우리가 수용하되, 그렇게 버리는 카드로만 쓰지 말자는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와 주한미국의 점진적 감축을 연계시켜 북한 비핵화를 추동하는 카드로도 쓸 수 있어야 한다.

"대북제재 범위 밖에서 할 일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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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도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남북한 보건의료 협력방안이 거론됩니다.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은 최근 남북협력기금을 활용해 김정은 위원장의 역점사업인 평양종합병원 건설·운영을 통 크게 도와줘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반면 교수님께선 개성연락사무소와 대화채널 재개가 우선이라는 입장을 보인 걸로 압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월 7일 신년사에서 세 가지를 이야기했다. 첫째는 개별 방문 관광이다. 둘째는 비무장지대에 국제평화지대를 조성하고 과거 전쟁의 흔적을 역사문화유산으로 만들어 유네스코에 등재하겠다는 안을 냈다. 셋째는 철도사업을 어쨌든 시작하겠다, 정 안되면 오랫동안 끊어진 동해북부선 110㎞라도 연결시키겠다고 했다. 여기에 더해 박원순 서울시장은 2032년 하계올림픽을 공동 유치해 남북한이 함께 할 것을 제안했다. 모두 네 가지 아이템이 있는 것이다.
또한 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공동보건, 코로나19 방역에 더해 남북한 보건협력방안을 이야기했다. 4월 27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도 공중보건협력부터 시작해 남북협력 물꼬를 트자는 구상이 논의됐다고 한다.
이에 앞서 지난달 20일 이종석 전 장관은 한반도 관련 포럼에 참석해 “북한이 평양종합병원을 건설하려고 하는데 건물만 지으면 뭐 하냐, 장비가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화끈하게 지원해주자. 그러면 북이 남북대화 국면으로 나올 것이다”고 말했다.이 자리에서 내가 반론을 제기한 부분은 “그럴 수도 있지만, 첨단 의료기기와 컴퓨터가 들어가야 하는데 전략물자 통제에 걸릴 여지가 엄청 많다. 그걸 어떻게 단시간에 해결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우리가 북측과 협상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은 ‘약속을 해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아예 약속을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이다.
북측이 우리에게 상당히 불만과 실망감을 느끼는 이유는 판문점선언, 평양선언 다 해놓고 하나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리가 못한 것이다. 2018년 11월 한미 워킹그룹을 만들어 남북관계의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전부 다 미국과 협의해 추진하다 보니 하나도 진척된 게 없었다.
평양종합병원 지원도 좋겠지만 우선 남북대화 통로가 마련되어야 한다. 코로나19 문제 때문에 북측이 개성연락사무소에서 우리더러 나가라고 요구했는데, 우리 입장에선 이를 다시 복원시키기 위해 구체적으로 협의해 나가야 한다.
북핵 문제가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데 이 상황을 크게 반전시키는 방법은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김 위원장이 답방해 문재인 대통령과 서로 대화하면서 큰 그림을 그리고, 문 대통령이 다시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고, 이렇게 크게 풀고 나가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 문 대통령이 말했듯 유엔의 대북제재 범위 밖에서 할 수 있는 사안들이 상당히 많다.

“美와 마찰 각오하고 남북협력 추진해야”

-대북제재와 관계없는 남북 협력사업의 예를 든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북핵 협상과 함께 남북철도 연결, 개성공단 재개, 연락사무소 활성화 및 지위 격상을 추진해야 하는 데 어디서부터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요?

▲인도적 지원은 얼마든지 허용된다.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해 인도적 지원은 미 국무부에서도 허용하는 사안이다. 민간 차원의 교류협력부터 시작해서 단순 관광을 재개할 수도 있다. 할 수 있는 건 많다. 그것부터 밀고 나가는 게 중요하다. 우리는 그것까지도 미국 눈치를 보며 못한 부분이 있다.
나는 미국과 마찰이 생기더라도 남북관계를 먼저 밀고 나가자는 쪽이다. 이건 결국 결기의 문제다. 북이 화답해줘야 가능하다. 우리 정부가 밀고 나가려는 데 북이 답하지 않으면 미국이 비웃는다. 북측에 묻고 싶다. ‘(미국이) 우리를 통해서 일이 되지 북쪽과 바로 해선 성사가 안 돼’ 이런 식으로 미국이 나오는 것을 원하는가? 이제 북이 전향적으로 나와야 한다.

-지난해 2월 하노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북미 핵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습니다. 올해 들어선 코로나19 위기, 4.15 총선, 김정은 중병설 등으로 남북정상회담도 여의치 않았고 모든 분야의 교류협력이 끊긴 상태입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는 남북대화의 재개 구상은 무엇입니까?

▲일단 국제 사회의 대북제재 범위에서 벗어난 남북 보건협력부터 시작한다면 장기적으로 대화의 문을 열 수 있다. 현재로선 국제기구나 중국을 통해 이것을 우회적으로 추진하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판문점을 통할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개성연락사무소를 빨리 복원시켜 관계자들이 만나 대화할 통로를 열어야 한다.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남북관계의 가장 큰 문제는 아직 교류협력의 성공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작은 것이라도 먼저 성공시키는 경험이 중요하다.

-산림녹화나 영유아 지원사업과 같은 방안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다른 사업을 또 꼽는다면 뭐가 있겠습니까?

▲많다고 생각한다. 산림녹화에 관해선 산림청이 이미 다 준비했다. 과학기술 쪽도 대북제재와 관계없는 분야가 적지 않다. 개성공단에 남북 과학기술협력센터를 만들 수도 있고, 전략물자에 해당되지 않는 분야나 사업들을 찾아 추진하면 되지 않겠나.

“北 실기 말고 대화 메시지 받아들여라”

-얼마 전, 남북철도 연결사업 차원에서 우리가 먼저 착공을 했다. 과연 북한이 응할 거라고 보십니까?

▲물론 어려움이 있겠지만 우리가 먼저 하면 북측도 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의선, 동해선 철도를 연결시키는 게 우리의 큰 사업이다. 동해선은 북한에서도 비판적으로 본다. 강릉, 고성까지 110㎞ 거리에 철도가 없는데 무슨 동해선 연결을 하느냐고 지적한 바 있다.
그래서 4.27 판문점 선언 2주년을 계기로 동해북부선 강릉∼고성 제진 구간의 복원 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남북협력기금을 쓸 경우 예비타당성조사를 거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일단 남쪽 구간이라도 공사를 해놓고 차후에 북측과 얘기가 잘 된다면 남북 철도를 연결할 수 있다.
결국 이 모든 게 북한에 보내는 메시지다. ‘당신들이 나오지 않아서 남북철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로선 우리 숙제를 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빨리 대화 테이블로 나오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혹시 북쪽과의 물밑 라인이 있거나 간접적으로 의사 타진을 할 채널이 별도로 있는지요?

▲직접적으로 따로 하지는 않는다.

-특보님께선 한반도 주변 4강과의 관계나 한국의 국제정치 위상을 높이려면 무엇보다 남북관계 개선이 선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남북관계 틀을 근본적으로 바뀌기 위해 국가보안법 폐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해서는 김대중(DJ) 대통령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했던 6월14일에 김정일 위원장과 상당한 논쟁을 벌였다. 당시 연세대 학생들이 인공기와 태극기를 게양해 경찰이 막고 내렸던 사건이 있었다. 보수 언론의 1면 기사로 크게 실렸다.
김정일 위원장이 DJ가 자리에 앉자마자 꺼낸 얘기가 그거였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일 하는데, 인공기와 태극기를 같이 건 게 뭐가 그렇게 문제 된다고 그걸 내리게 하고, 젊은 학생들을 잡아 가두냐, 그렇게 핀잔을 줬다. 그러곤 국가보안법 좀 없애라고 말했다.
그러자 DJ가 두 가지를 즉각 지적했다. 조선노동당 규약 서문에 통일전선전략이 그대로 남아있지 않느냐, 그게 있는 한 내가 우리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당신들 형법엔 우리 국가보안법보다 더 강력한 조항들이 규정돼 있다, 그래서 국가보안법 폐지는 어렵다, DJ는 그렇게 답했다.
DJ가 정말 스마트(smart)한 분이란 걸 다음 제안에서 또 알 수 있었다. 조선노동당 규약 서문에 나온 통일전선전략을 당의 기본노선으로 한다는 것을 없애면 우리 국민들에게 국가보안법 폐지를 설득해보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김정일이 말하기를, 머지않아 제7차 당 대회가 열리니 그때 개정해보겠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안 했다.
결국 ‘DJ 노선’이 정답이다. 국가보안법은 나라 안보와 관련된 일이며 북의 위협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북에서 통일전선전략이 당 기본노선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혀주고, 조선노동당 규약 서문을 바꾼다면 우리도 국가보안법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북한도 우리도 각자의 형법만 갖고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한국의 보수 세력은 이걸 모르는 것 같다.

“시진핑 6~7월 방한하면 의미 클 것”

-올 봄에 예정되었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방한이 코로나19 사태로 연기되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방문 일정을 취소한 건 중국의 수치였으나 이걸 다시 실행하는 건 중국의 과시가 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옵니다. 시진핑의 방한은 언제쯤 실현될까요?

▲예측할 수 없다. 코로나19 상황과 국제사회 이목이란 변수가 있다. 만약 시진핑 주석이 6~7월에 한국을 제일 먼저 방문한다면 의미가 클 것이다. 일본을 갈지 안 갈지는 모르겠다. 중국도 자기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시진핑 주석이 한국을 방문하려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경제일 것이다. 아마 이대로 간다면 전 세계에서 중국이 코로나19 경제 위기로부터 가장 회복이 빠를 수 있다. 우리도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미국, 유럽보다 중국과의 협력이 더 필요하다. 한중 경제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질 것이다. 북핵 문제에서 협력할 부분도 많다.
시진핑 주석이 그때 온다면 참 좋겠지만 먼저 중국 상황이 전반적으로 안정되는 게 필요할 것 같다.

-미국은 오는 11월 대선을 치르게 됩니다. 미국 대선 이후 외교정책이나 아시아 정책, 한반도 정세엔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트럼프가 다시 당선돼도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강경세력들이 포진해 선(先) 비핵화, 후(後) 보상 기조를 유지하는 정책에 별 변화가 없을 것이다. 만약 민주당의 바이든 후보가 이긴다면 김정은을 만나는 데 더 신중한 태도를 보일 테니 북미 핵협상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다면 오바마 행정부 사람들이 대거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북미 대화에 소극적인 ‘전략적 인내’ 기조를 되살려 나간다면 (한반도 상황은) 굉장히 어려워질 것이다.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나 '차이나 배싱'이 대중국 정책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데다 몇 년 새 미중 관계가 계속 좋지 않았다. 만약 트럼프가 이긴다면 '인도·태평양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갈 것이고 바이든이 된다면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전략을 채택할 것이다. 쉽게 말해 인도를 빼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 일본, 동남아, 호주가 가세하는 대중국 견제 정책을 추진해 나갈 것이다. 우리가 남북 관계를 더 잘해야 하는 이유다.

-결국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다면 대북 정책에도, 미중 관계에도 마이너스로 작용할 것으로 보시는군요.

▲그렇다. 민주당이 집권할 경우 어떻게 보면 진보 정권인데 한국 보수진영과 어젠더가 비슷해질 가능성이 높다. 바이든이 선거 캠페인에서 내세우는 대외정책 목표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민주당의 목표는 한 마디로 ‘민주주의 확산’이다.

“日 제재 해제 안하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

-일본의 아베 신조 정권이 코로나19 때문에 곤경을 겪고 있습니다. 포스트 아베 시대에 한일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양측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연장이 어정쩡한 상태인데 일본의 수출규제조치(3개 품목)가 풀리지 않을 경우 우리 정부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우리 정부는 지난해 823언제든지 지소미아 효력을 종료시킬 수 있다는 전제하에 종료 통보 효력을 정지한 바 있습니다.

▲아베 정부가 무역제재를 가했던 이유가 투명성의 결여, 제도의 결여, 협의 아닌 통보 방식 등이었다. 우리 정부는 이후 전략물자 통제에 관한 입법도 했고 무역안보정책관이라는 국장급 자리를 만들었다. 직원 30명이 전략물자관리를 하도록 제도적 정비를 마쳤다. 투명하게 공개하고, 사전 협의를 하겠다는 의사를 일본측에 전달했다.
그럼에도 일본이 계속 제재를 풀지 않는다면 오는 8월 23일 지소미아 종료 선언을 할 수 있지 않을까. 11월 23일이 지소미아 종료일인데 그 3개월 전에 (연장 여부를) 통보해야 한다. 일본 정부가 ‘B’로 내린 대한민국의 등급을 다시 ‘A’로 올리지 않고, 앞으로도 제재 해제를 하지 않는다면 그간 최선을 다해온 우리 정부 입장에선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 지소미아 종료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문재인 정부 들어 국정원, 통일부, 외교부의 존재감이 희미해졌다는 비판 여론이 있습니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외교안보 분야에서 앞장서다 보니 그런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외교안보라인을 재정비할 필요는 없을까요?

▲기본적으로 국정원, 통일부, 외교부는 각자 역할이 있고 청와대에선 전체적으로 조율을 한다. 대통령의 뜻에 따라 안보실에서 특정 사안에 관해 주도적 역할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현안에 관해선 거의 다 해당부처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북핵 사안 같은 경우에만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하느라 안보실장이 나서는 것일 뿐 지금 시스템에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청와대 주도 비판하려면 타국 먼저 봐라”

-그렇지만 지소미아, 방위비 분담금, 북핵 등 대부분 현안에서 청와대가 전면에 나서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다. 방위비 분담금 협상의 경우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항이다. 협상은 외교부 관할 업무이지만 지침은 청와대가 내린다. 그래서 청와대가 전면에 나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외교부 장관에겐 대통령의 뜻을 외교부에 전달하는 역할도 있다.
그런데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잘 따져봐야 한다. 미국은 그렇지 않은가? 독일은? 일본이 대표적이다. 일본은 관방장관이, 아베가 있는 총리실이 외무성을 다 제치고 앞에 나선다. 일본 외무성은 한국 외교부보다 훨씬 제 목소리를 못 낸다.
우리 정부를 비판하는 건 좋은데, 다른 나라와 상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이 한국에 수출제재조치를 취했을 때 일본 외무성은 알지도 못했다. 우리가 그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동북아 공동체 통해 새 질서 창출해야"

-문재인 정부가 중국의 눈치를 너무 본다며 한국이 핀란드(Finlandization) 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외교하는 국민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동북아 균형자론을 펼쳤습니다. 한국 외교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우리 사회는 어떤 인식과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애초에 한국 사회에는 핀란드화의 의미가 잘못 소개됐다. 핀란드화라는 용어는 핀란드 사람이 만든 게 아니다. 1970년대 초 독일 기독교사회당 당수였던 요셉 스트라우스라는 독일인이 만들었다. 미소 냉전체제 하에서 핀란드가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외교정책을 중립적으로 펼치자, 서방 이념에 위배된다는 시각에서 핀란드를 ‘이웃 강대국에 아부하는 국가’라고 폄하하려고 쓴 말이다. 명백히 미국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용어다.
내가 핀란드에 가서 강연할 때 이런 문제 제기를 하니, 핀란드 학자들이 “핀란드화가 뭐가 잘못된 거냐”며 거꾸로 반문하더라. 핀란드는 소련과 두 차례 싸워서 많은 희생자를 냈고, 엄청난 안보 위기를 겪었다. 그 이후 소련과 외교적으로 협력하되, 특정 정책에 대해선 중립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핀란드화’라는 게 국가 생존을 위한 자주적인 외교정책인데 왜 서방에서 폄하하고 왜곡하는지 모르겠다고 핀란드 사람들은 설명하더라.
한국에서 핀란드화를 거론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미국과 유럽에서 이 용어와 시각을 배워왔다. 그래선지 핀란드 사람들의 시각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한국에서도 일부 식자층이 한중 관계를 비판하기 위해 핀란드화 단어를 꺼내는데, 국제정치의 기본상식은 바로 옆에 있는 강대국과 가까이 잘 지내는 것이다.
현대국가에서 원교근공(遠交近攻)은 잘못된 정책이다.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던 춘추전국시대에나 써먹을 전략이다. 지금은 우리에 대한 중국의 위협을 먼 곳에 있는 미국이 막아줄 수 없다. 당장 중국 대륙에 배치된 수많은 군부대와 전략무기들이 움직인다면 한국은 금세 초토화된다. 한미동맹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잠재적 위협을 최소화해야 한다.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한미동맹을 잘 유지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런데 양쪽에서 자꾸 선택을 하라고 하니 어려워지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 진영에서 자꾸 진보 쪽이 중국에 편승한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말할 근거가 뭐가 있나? 미국 요구로 사드도 들여놓고, 북핵 문제도 미국과 주로 상의해 왔다. 중국과는 제대로 한 게 없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 다 같다.
미중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다섯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밸런싱(balancing) 전략, 우리가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시키며 중국 부상을 억제하는 전략이다. 요약하면 현상 유지, 한미동맹 강화론이다.
둘째는 중국 편승론이다. 미국은 ‘지는 패권국’, 중국은 ‘신흥 패권도전국’이므로 중국과 함께 가는 게 좋다는 주장이다. 그래야 병자호란, 삼전도의 비애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수 언론과 야당에선 ‘문정인의 주장’이라 말하는데 나는 이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셋째는 그동안 강대국에 너무 당해왔으니 이젠 우리의 길을 가자는 ‘홀로서기론’이다. 그 방법으로는 영세중립국을 선언하거나 핵무장을 감행하는 게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둘 다 불가능하다.
넷째는 DJ의 ‘논두렁론’이다. 소가 논두렁을 지날 때 오른쪽 풀도 뜯어먹고 왼쪽 풀도 뜯어먹지 않느냐, 왜 한쪽만 먹고 사느냐는 것이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과 협력하자는 건데 당시 미중 관계가 좋기 때문에 가능했던 주장이다.
다섯째는 강대국 등쌀에 휘말리지 말고 우리가 앞장서서 동북아의 새 질서를 주도해보자는 주장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창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이어나가는 기조다. 동맹 중심 질서로부터 벗어나 다자안보협력체제로 전환하고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면서 창의적 외교를 펼칠 수 없겠냐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노무현의 꿈이었고, 내가 맡아서 했던 일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다섯 가지 전략 중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방식이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DJ의 논두렁론이 그 다음이다. 나머지 방식들엔 다 문제가 있다. 미국을 택하면 중국이, 중국을 택하면 미국이 난리를 칠 거다. 핵무장을 했다간 북한 꼴이 나기 십상이다. 인구가 5000만을 넘고 남북통일 땐 8000만~1억이 되는데 영세중립국이 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새로운 질서 창출을 통한 동북아 공동체를 만드는 게 우리 나름의 해결책이다.

“선진 외교, 깨어있는 세계시민 양성해야”

-요즘 젊은 세대 중에는 외국어, 외국문화를 습득한 인재가 우리 역사상 가장 많습니다. 국수주의를 벗어나 명실상부한 선진 외교를 펼치려면 우리 정부나 대학, 기업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결국엔 '깨어있는 세계시민'을 양성해야 한다. 일본에선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이라 해서 깨어있는 정치 리더들을 양성했다. 한국에선 아산서원(峨山書院)을 했다가 문을 닫았다. 그런 노력이 시민사회에서 활발히 전개되면 좋을 것이다. 국가나 정부가 나서서 할 수는 없다. 시민사회에서 뜻 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깨어있는 세계시민이란 결국 미래를 보는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다.
열린 마음을 갖고 역지사지로 다른 국가들을 보고, 동정(sympathy)을 넘어서 공감(empathy)을 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하버드대학의 조지프 나이프 교수가 말한 대로 세상을 표피적으로 보지 않고 맥락을 포착해 내는 ‘contextual intelligence’도 필요하다. 또한 ‘prudence’, 비전과 꿈을 크게 갖되 실행은 신중하게 해나가는 신중함도 필요하다.
그리고 ‘sharing’, 공유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constant learning’, 끊임없는 학습은 필수다. 여기에 건강한 토론이 더해져야 가짜뉴스에 빠지지 않고 세계시민으로서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 시민사회가 주도해 학습센터를 만들고 외연을 확장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대담=이양수 편집주간
정리=한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