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 작은따옴표로 표기한 ‘진보교육’은 1980년대 전교조 결성을 필두로 여러 교사단체 및 교육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의 활동과 진보적 교육감들의 등장으로 이어진 흐름을 의미한다.

가장 낮은 교육정책 지지율

‘진보교육’은 2010년대 시도교육청 단위로 무상급식, 혁신학교, 학생인권조례 등을 추진하여 한국 교육에 새로운 방향과 가치를 제시해 왔다.

그러나 ‘진보교육’의 대표주자인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이 문재인 정부 들어 교육부 장관으로 입각하자마자 수능 개편안 연기, 방과 후 영어교육 금지 파동 등이 일어났다. 급기야 2018년 5월 한국갤럽이 실시한 문재인 정부 취임 1주년 분야별 평가 여론조사에서 교육정책이 최하위를 차지했다. 같은 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직무수행 지지율이 83%에 달했음을 고려하면 30%밖에 되지 않는 교육정책 지지율은 눈에 띄게 낮은 수준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인 20-40대에서도 30%대에 그친다.

교육과 관련된 여론은 근본적으로 진보에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다. 예를 들어 ‘진보/보수 성향 가운데 어떤 교육감을 선호하는가?’ 라는 설문 답변을 보면 지속적으로 진보가 보수를 압도해왔다. 이러한 여론조사 결과는 전국 동시 교육감 선거가 처음 치러진 2010년 지방선거 이전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나타난다. 구체적인 정책을 봐도 그렇다. 매년 교육개발원이 시행하는 교육 의식조사에서 ‘고교평준화에 찬성하는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답이 2000년대부터 지금까지 늘 60~70%에 달한다. 이렇듯 교육에서 진보에 유리하게 기울어진 여론 지형은 과열경쟁과 주입식 교육을 조장해온 보수 교육이 대단한 혁신을 하지 않는 한 쉽게 역전되지 않을 것이다.

교육감 선거에서 대체로 지지받아온 ‘진보교육’이 왜 국가 수준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것일까? ‘진보교육’은 이에 대하여 흔히 대중이 우매하거나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해석에 반대한다. 오히려 ‘진보교육’의 통념에 몇 가지 중요한 결함들이 존재하며, 이것이 연이은 정책 실패를 낳은 것이다. 이 글은 ‘진보교육’의 통념을 분석하여 그 결함과 한계를 드러내고, 이를 극복한 새로운 진보교육을 위한 글이다. 구체적으로 수업·평가의 혁신, 입시의 혁신, 대학체제의 혁신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제시하고 각 지점에서 ‘진보교육’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려 한다.

1. 경쟁과 교육열

농지개혁 성공이 교육열의 기원

한국의 교육열이 유별난 것은 한국 사람들이 처절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신화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과거 개발도상국이긴 했지만 가장 가난한 축에 속하지는 않았다. 본격적인 산업화 이전이던 1960년 한국의 1인당 GDP는 158달러였는데 이는 개발도상국 가운데서는 낮은 수준이 아니었다. 인도·중국의 2배에 가까웠고 태국과 엎치락뒤치락했으며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다고 알려졌던 필리핀의 62%에 달했다.(2018년 달러 가치 기준 세계은행 통계) 우리에게 ‘가난의 기억’이 강렬한 것은 워낙 짧은 기간에 압축성장이 이뤄지다 보니 지금도 절대빈곤을 기억하는 인구 비율이 높고, 6.25 전쟁 때 겪은 피난과 기아의 기억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보다는 훨씬 가난했지만, 한국은 20세기 중반 이미 극빈국이 아니었다.

우리 국민이 특별히 이기적 욕망을 강하게 가졌던 것도 아니다. 20세기 후반 세계에서 대입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나라가 한국, 대만, 일본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세 나라는 역사적 전통이 서로 다르고 특히 일본은 한국이나 대만과 달리 식민지 경험이나 유교적 전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현상이 나타났다. 이 세 나라 국민들이 우연히 유독 이기적 욕망이 강했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낮다. 그보다 이 세 나라에서 유독 농지개혁이 철저히 이뤄져 자산(농지)을 가진 자영농 비율이 높았음을 봐야 한다. 2차 대전 종식 직후 중국의 마오쩌둥이 소작농을 조직해 사회주의혁명에 성공하자, 미국은 인접 국가로 혁명이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세 나라에 강력한 예방 혁명(농지개혁)을 단행하도록 했다. 그로 인해 한국, 대만, 일본은 1960년 기준 세계에서 가장 토지가 골고루 분배된 나라가 되었고 그중 한국은 토지 지니계수가 0.35로서 토지 분배의 균등함에 있어 세계 1등이었다.

‘논 팔아 대학에 보냈다’는 말은, ‘팔 논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필리핀이나 아르헨티나의 농민은 자식이 아무리 똑똑해도 대학에 보낼 수 없었다. 소작농이거나 농업노동자여서 ‘팔 논’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대만, 일본의 유난한 대입 경쟁은 평등의 결과이다. 못 가진 사람들의 평등이 아니라 소자산가(쁘띠부르주아)들의 평등, 유사시 논 팔고 소 팔아서 대학에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의 평등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심리는 격차가 작은 사회에서만 가능한 멘탈리티다. 넘사벽이면 부러워할지언정 배가 아프지는 않다.

‘대치동 엄마’는 비난 대상이 아니다

한국, 대만, 일본 3국의 대입 경쟁이 유난히 격심했지만, 그중에서도 한국과 대만의 대입 경쟁이 일본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대학서열의 양상과 관련이 있다. 일본에도 대학서열이 있고 그 정점에 토쿄대가 있지만, 과거 ‘제국대학’이라고 불렸던 7개 국립대학이 최상위 위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서열 격차는 한국·대만보다 적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고시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대학은 토쿄대이지만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대학은 교토대이다. 반면 한국과 대만은 옛 제국대학의 후신인 국립서울대와 국립대만대가 대부분 분야에서 원톱이다. 즉 일본보다 대학서열이 심하게 일극화되어 있어서 말하자면 금/은/동메달에 주어지는 대가의 차이가 일본보다 큰 것이다. 그래서 일본보다 대입 경쟁이 더 격렬하다.

요컨대 한국, 대만, 일본이 공통으로 대입 경쟁이 심한 것은 교육경쟁에 참여할만한 소자산가들이 유난히 많았고, 여기에 더하여 대학 서열화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세 나라 중에서도 서열 격차가 보다 뚜렷한 한국과 대만의 대입 경쟁이 일본보다 심하다. 교육 경쟁에 대한 ‘진보교육’의 클리셰, 즉 학부모들의 그릇된 욕망이 공교육을 망치고 있다는 식의 비판은 비과학적 인식에 기반해 있을 뿐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치동 엄마들에 대한 비난에는 심지어 심각한 젠더 편향의 혐의마저 있다. 교육열은 구성원들의 ‘인성’이 아니라 그 배경이 되는 ‘사회’를 분석함으로써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한국의 대입 경쟁은 1990년대 후반 이후 노동시장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소득 격차가 큰 폭으로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그 원인이 복합화된다. 지니계수, 상위 1% 소득률, 기업 규모별 소득격차 등 모든 지표가 급속히 양극화에 가깝게 악화되고 노동시장이 25%의 좋은 일자리와 75%의 나쁜 일자리로 이중화된 것이다. 이로 인해 몇십 년간 이어진 ‘출세’를 위한 경쟁에 더하여, 하층 노동시장으로 빠지지 않으려는 ‘공포’로 인한 경쟁이 겹쳐졌다. 경쟁을 완화하려면 소득 격차를 줄여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소득 격차가 줄어들고 취업난이 해소된다고 해서 대입 경쟁이 완화될 것이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돌이켜보면 1980-90년대 취업이 쉬웠을 때도 명문대에 진학하기 위한 경쟁은 매우 격렬했지 않은가?

이렇듯 ‘출세욕’과 ‘공포심’으로 복합화된 대입 경쟁을 완화하려면 자산격차·소득격차를 줄이려는 노력 못지않게 대학 서열격차를 줄이려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2012년 문재인 후보 대선 공약집에 들어있던 ‘국립대 네트워크’ ‘공동입학·학위제’는 2017년 대선 공약집에서는 빠졌다. 시뮬레이션 해보면 매우 시행하기 곤란한 정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폐기의 대상이 아니라 업그레이드의 대상이며, 대학 구조조정 및 전체 대학 시스템의 개혁과 맞물려 추진해야 하는 핵심적인 과제이다.(이에 대해서는 이 글의 후반부에서 언급한다).

2. 대입, 공정, 서열화

상대평가의 역설, 아랍어 선택이라는 웃픈 현실

서구 선진국의 대학은 대부분 학생을 성적순으로 선발한다. 영국, 프랑스는 내신 없이 입시성적만을 반영한다. 독일, 호주, 스페인은 내신성적과 입시성적을 합산하여 반영한다. 스웨덴은 입시성적과 내신성적 가운데 무엇을 반영할지 지원자가 택일한다. 핀란드에는 입시가 두 가지(국가고시와 대학별 고사) 있는데 이 두 입시성적과 내신성적을 어떤 비율로 반영할지 대학 자율에 맡긴다. 캐나다는 입시 없이 내신성적만을 반영한다. 이처럼 나라마다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내신’과 ‘입시’라는 두 가지 성적으로 지지고 볶아 학생을 선발한다. 왜 그럴까? 내신과 입시는 기회가 비교적 평등하기 때문이다. 내신은 수업에서 배우는 것과 관련하여 평가하니 기회가 평등하고, 입시는 그 시험 범위와 유형과 기출문제가 공개되어 있으니 또 그 나름 기회가 평등하다. 기회의 평등은 교육의 공공성에 있어 핵심적인 가치이다.

미국의 입학사정관제나 한국의 학종(학생부 종합전형)처럼 내신과 입시를 제외한 요소(이른바 ‘비교과’)를 활용하는 순간, 제아무리 좋아 보여도 기회가 결정적으로 불평등해진다. 예를 들어 ‘독서이력’을 반영하면 얼핏 교육적으로는 좋아 보일지 몰라도 부모가 대학원 졸이냐 고졸이냐에 따라 기회가 상당히 불평등해질 것이다. 봉사나 동아리 활동도 그렇다. 가장 심각한 것은 경시대회 입상 실적이다. ‘나’는 애써서 경시대회를 하나 준비하고 있는데, 내 짝꿍은 부모와 사교육을 활용하여 경시대회를 세 개 준비하는 게 보인다. ‘내’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교육의 공공성은 반쯤 버린 것이다.

물론 서구 선진국에서 모든 입시와 내신은 예외 없이 절대평가이다. 상대평가를 하지 않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에서 특히 학업능력이 뛰어난 집단이 선호하는 과목을 선택할 경우 자동으로 불리해진다는 역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OECD 국가 중에서 한국은 일본과 더불어 유일하게 상대평가가 존재하는 나라다.(일본은 내신만 상대평가, 한국은 입시와 내신이 모두 상대평가) 그래서 학생들이 물리와 경제를 기피하고 아랍어로 쏠리는 웃픈 현상이 나타난다. 요컨대 상대평가는 ‘다양한 교육’과 양립할 수 없다. 그래서 서구 선진국에서 ‘평가’란 곧 ‘절대평가’이다. 입시와 내신 모두 절대평가로 등급 또는 점수를 부여한다.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절대평가라면 곧 등급제라고 착각하는데, 점수제(원점수 부여)도 절대평가다. 서구 선진국들의 내신과 입시에 나타나는 절대평가는 등급제인 경우도 있고 점수제인 경우도 있다.

‘진보교육’은 경쟁과 서열화를 증오한 나머지 대학 서열화와 학생 서열화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비판한다. 하지만 대학에서 지원자 중 누구를 합격시킬지를 고를 때 학생 서열화는 가장 널리 사용되는 방법이다. 그리고 기회의 평등을 위해 ‘내신’과 ‘입시’ 위주로 선발하다 보면, 대체로 지원자를 성적순(입시 및 내신)으로 줄 세워 선발하게 된다. ‘진보교육’이 본보기로 삼는 핀란드도, 스웨덴도, 독일도 다 그렇게 한다. 이 나라들에서는 예를 들어 어느 학과의 정원이 100명인데 지원자가 300명이면 지원자들의 절대평가 성적(입시 및 내신)을 이용하여 줄을 세운 뒤 100등까지를 합격시킨다. 대학 서열이 별로 없는 나라들이지만 인기 전공에 합격하려면 높은 성적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독일의 의대, 법대 등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은 상당히 치열하다. 따라서 이들에게도 ‘공정함’이 중요한 문제이고, 성적순 선발이 지배적이다.

요컨대 서구 선진국에서 ‘이수자’ 서열화(상대평가)는 없지만, ‘지원자’ 서열화(성적순 선발)는 널리 활용된다. ‘성적순 선발’은 제한된 자원과 기회(입학정원)를 배분할 때 흔히 사용되는 비교적 공정하고 효율적인 수단이다.

입학사정관제는 유대인 견제 용도였다

그런데 성적순 선발에서 멀리 벗어난 아주 예외적인 나라가 하나 있다. 1990년대 이래 ‘점수 위주’ 선발을 비판하는 담론들의 기원이 된 나라, 그리고 한국의 교육계와 교육학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준 나라.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입학사정관제가 보편적이다. 미국의 입학사정관제는 대학 재량으로 내신·입시 성적뿐만 아니라 다양한 비교과 활동과 자기소개서(에세이)와 추천서 등을 광범위하게 활용하여 선발하는 방식이다. 그만큼 기회의 불평등이 허용되는 셈이다.

미국은 왜 하필 이런 제도를 가지게 되었을까? 그 기원은 유대인 이민자들에 대한 주류 백인 계층(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대응에 있다. 미국에서 20세기 초반 유대계 신입생 비율이 하버드대의 30%, 컬럼비아대의 50%에 이르자 위협을 느낀 주류가 1930년대부터 성적 이외의 다양한 요소들을 대입에 반영하여 유대인 비율을 끌어내린 것이 입학사정관제의 시작이다. 이것이 지금은 아시아계 차별의 방법으로 활용된다. 아시아계는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입학정원 중 20% 이내로 제한된다. 물론 입학사정관제는 1960년대부터 적극적 역차별(affirmative action)을 통해 저소득층이나 소수인종을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활용되기도 하지만, 머리는 좀 떨어져도 기부금을 많이 낸 명문가 자녀를 받는 방법(legacy admission)으로 활용되기도 한다(동문 자녀 특례입학의 예로 부시가문이 있다). 입학사정관제는 미국에서도 숱한 논란이 있었던 제도이고 많은 소송이 있었지만, 연방대법원에서 모두 대학 측이 승소하여 살아남았다. 그야말로 미국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가 반영된, 예외적인 제도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이 있다. ‘진보교육’이 학종을 옹호하는 주된 이유는 ‘비교과’가 아니라 ‘세특’에 있다는 것이다. 세특이란 ‘교과 세부 특기사항’의 줄임말인데, 학생 개개인의 특성과 성취를 교사가 문장으로 적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학종을 통해 대입에 반영되면서 고등학교의 수업과 평가가 혁신되는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데 있다. 관성적인 기존의 수업과 평가를 지속해서는 ‘교과 세부 특기사항’에 변변한 내용을 적어줄 수 없다. 혁신학교가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는 성공 사례들을 만들어냈지만, 고등학교에서는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던 차에, 학종이 활로를 열어준 것이다. 이것이 학종이 가져온 가장 긍정적인 효과이고, 일반 여론에 비해 교사 여론이 학종에 우호적인 이유다. 여태까지 대입의 변화가 주로 공교육에 부담을 주거나 공교육을 형해화(形骸化)하는 방향인 경우가 많았던 데 비해 학종은 공교육에 긍정적 변화를 일으킨 점이 확인되는 것이다. 하지만 유의할 점은 학종이 ‘교과 세부 특기사항’과 ‘비교과’를 패키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비교과’는 부담의 증가와 불공정(기회의 불평등)의 주범으로서 폐기 내지 대폭 축소되어야 마땅하다.

정리해 보면, 대학의 입학자 선발은 ‘내신’과 ‘입시’ 위주로 선발하는 것이 기회의 평등이라는 원리에 맞다. 성적순으로 선발하거나 적어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 공정하다. ‘교과 세부 특기사항’을 반영하여 성적순 선발에서 다소 벗어나는 경우가 생긴다든가 기회균형전형을 통해 사회적 취약계층을 배려하는 것 정도는 한국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비교적 평등한 지원자들 사이에서 경쟁이 공정하게 관리되는 것을 중시하는 한국에서, 미국식 선발제도를 도입하고 특히 지금처럼 비교과를 중시하는 것은 교육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위험한 일이다.

3. 입시의 필요성

절대평가의 한계를 극복하는 입학시험

‘진보교육’은 고등학교에서 입시를 준비하는 것은 ‘정상적 공교육’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입시로부터 자유로워져야 정상적인 공교육이라는 관념 또한 전형적인 미국의 특징이다. 다수의 유럽 국가들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입시 준비를 하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특히 영국과 프랑스처럼 대학에서 선발할 때 내신성적을 반영하지 않는 나라의 경우 인문계 교육과정(academic curriculum)의 마지막 2년은 주로 입시(영국의 A레벨,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를 준비하는 데 할애하는 방식으로 고교교육과 입시를 긴밀하게 연계시키고 있다. ‘진보교육’의 입장에서 본다면 영국과 프랑스는 고등학교에서 입시를 준비해주는, 매우 기형적인 교육체제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인문계/실업계를 나누는 우리의 고교체제가 기본적으로 유럽적 전통을 따른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미국에는 실업계 고교가 거의 없다) ‘진보교육’의 이러한 인식은 모순이다.

내신성적만으로 선발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왜 대부분의 OECD 국가에 입시가 존재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고등학교 교육이 다양하고 창의적으로 이뤄질수록, 이들 간을 ‘비교’할 합리적 수단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즉 ‘난중일기를 읽히고 토론시켜 논술형으로 평가한 A학교의 a교사가 매긴 90점과, 조선왕조실록의 임진왜란 관련 기록을 탐구·발표하도록 하여 수행평가한 B학교의 b교사가 매긴 90점이 동등한가?’ 라는 질문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해법이 바로 ‘입시’이다. 영국·프랑스처럼 아예 내신성적을 반영하지 않고 입시성적만으로 선발하거나, 독일·스웨덴·핀란드·미국처럼 입시성적과 내신성적을 함께 활용하여 선발하는 것이다. 참고로 유럽 국가들의 입시는 전과목 논술형인데, ‘진보교육’에서는 이를 ‘자격고사’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시험에서 낙제(F)하면 해당 과목 이수 인증을 받을 수 없으므로 자격고사로 볼 여지도 있지만, 낙제점 위에 여러 등급 또는 점수를 부여함으로써 변별 기능도 동시에 수행하기 때문에 이를 ‘자격고사’라고 부르는 것은 엄밀히 말해 틀린 표현이다.

주요 선진국 가운데 입시 없이 내신성적만으로 선발하는 유일한 나라가 캐나다이다. 그러면 캐나다는 어떻게 서로 다른 내신성적을 ‘비교’하는가? 내신성적이 후한 지역의 지원자 성적은 깎고, 짠 지역의 지원자 성적은 더하는 방식으로 보정한다. 이러한 보정은 대학 자율로 이뤄지는데 구체적인 보정 방법은 극비로 삼는다. 대입 경쟁이 한국보다 훨씬 덜한 캐나다에서조차 내신성적 보정에 시비가 붙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하물며 한국에서 내신성적만으로 변별하도록 하는 제도가 성립 가능할까?

입시와 고교교육을 분리해야 하는가

물론 현행 입시(수능)는 선다형이기 때문에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는 질문만을 할 수 있어 다양한 역량을 키우는 데 적합하지 않고, 특히 창의적 교육에 역행한다. 이에 대한 해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 해법은 미국의 SAT·ACT처럼 입시를 고교 교육과 분리하는 것이다. 미국의 SAT·ACT는 1년에 6~7회씩 시행되며 학생이 2~3년에 걸쳐 여러 번 치를 수 있는, 마치 토익 같은 시험이다. 따라서 학교에서 일률적으로 문제풀이 연습을 한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 미국의 고등학교 내 평가는 대부분 논술형 및 수행평가이다. 즉 선다형 입시가 존재하지만 그것이 공교육에 직접 영향을 주지 않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단점은 학생들이 내신과 입시를 별도로 준비해야 하므로 부담이 크다는 점이다. 미국은 여기에 더하여 각종 비교과 활동까지 반영한다. 내신 따로, 입시 따로, 비교과 따로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최근 미국에서 사교육이 가파르게 늘고 있다.

둘째 해법은 유럽처럼 입시를 전면 논술형으로 개편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시험이란 곧 논술형이다. 선다형 시험의 원천인 IQ 테스트와 여론조사는 모두 미국에서 발달했고, 한국에도 선다형 시험은 미국의 영향으로 미군정 시기에 도입된 것이다. 논술형은 학생 개개인의 견해와 논리를 발전시키도록 진작한다는 점에서 민주시민교육에 걸맞으며, 선다형에 비해 다양한 역량을 길러낼 수 있고 창의적 교육에 역행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의 경우 입시를 논술형으로 변경하는 것은 국가적 과제이며, 아마도 대학 측을 포함하는 새로운 국가적 합의와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참고로 현행 대학 논술고사는 유럽의 논술형 입시와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고교 교육과정과의 연계성이 떨어진다. 과목이 불분명하고(‘논술’은 엄밀히 과목이 아니라 평가방식이다) 각 대학에서 자율적으로 출제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논술형 입시는 교육과정과 잘 연계되어 있으며 고등학교에서 준비해주는 시험이다.

4. 창의적 교육

교육이 창의력을 길러주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무성한 당위론만 있었을 뿐 늘 논의가 겉돌아왔다. 흔히 입시제도 때문에 창의적 교육이 안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대입에 직접 노출되지 않는 중학교나 초등학교 교육도 답보 상태에 있는 것을 보면 이 문제가 입시제도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중학교에서 상대평가가 폐지되고 절대평가(성취평가)가 도입된 지 5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수업·평가방식이 창의력을 기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도 ‘교사’의 문제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사가 창의적이어야 창의적 교육이 가능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그런데 창의력은 외부로부터 주입되거나 명령을 통해 실행 가능한 것이 아니라, 창의적일 수 있는 환경과 제도에서 발생하거나(generate) 나타나는(emerge) 것이다. 따라서 교사가 창의적이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과 제도를 제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국과 일본은 교사가 창의적으로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예외적인 제도들을 공유하는 사례로서 독보적이다. OECD에서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만 나타나는 특징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교사에게 교육의 주도권이 주어져야 한다

①1반에서 끝반까지 시험문항이 동일해야 한다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현직 교사 이기정 선생은 이를 동일교재-동일진도-동일시험 원리라고 부르는데, 이 때문에 창의적 수업과 평가를 시도하기 어렵다. 어떤 교사가 역사 시간에 난중일기를 읽히고 토론시키고 이 과정에서 인상 깊었던 점을 논술하도록 하여 평가하고자 한다면, 서구 선진국의 교사들은 이를 바로 실행하면 되지만 한국과 일본에서는 다른 교사들을 설득하고 합의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시험 문항이 똑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서구 선진국들은 동일 학교의 동일 과목이라 할지라도 담당 교사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수업하고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를 ‘교사별 평가’라고 한다.

②교육과정 및 교과서 검정기준이 자세하고 엄격하여, 교육과정이 간소한(simplified) 서구 선진국과 달리 교사가 자율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한국의 최신 국가 교육과정인 ‘2015 교육과정’은 교사가 수행해야 하는 무수한 성취기준들을 일일이 나열하여 지정하고 있지만, 핀란드 국가 교육과정은 예를 들어 초등 3~6학년 4개년간의 수학 교육과정이 단 6-7쪽에 불과할 정도로 간소하다.

③교사의 활동이 교과서에 종속되어 있다. 서구 선진국들이 대체로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이 제도에 따르면 교사는 교과서를 직접 집필하거나 별도의 교과서 없이 몇 권의 책을 지정하여 교재로 삼아 수업하거나 프린트물 등으로 대체하여 수업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제도이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에는 교과서 자유발행제가 논의되었으나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④신학년이 시작하기 직전에야 교사에게 담당할 학년과 과목을 통보한다. 국가 교육이 거대한 테일러주의(‘구상’과 ‘실행’의 분리)의 원리에 의해 조직되어 있어 교사는 ‘구상’하지 말고 ‘실행’만 담당할 것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에, 신학년 직전에야 통보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서구 선진국 교사들이 적어도 2~3개월 전에 신학년에 담당할 학년과 과목을 통보받아 교육과정 구성이나 교과서 집필을 포함한 ‘구상’ 기능을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⑤테일러주의에 의해 철저하게 위로부터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고 통제되기 때문에 행정업무 부담이 과중하다. 교총 통계에 의하면 학교당 연간 1만 건 이상의 공문이 내려와 그중 상당수가 교사의 업무가 되는데, 이러한 사정은 일본도 유사하다. 서구 선진국의 경우 공문 자체가 훨씬 적고 그저 교장과 행정직원이 전담할 수 있는 수준이다.

⑥공립학교 교사들을 정기적으로 다른 학교로 전보 발령하여 공립학교에서 교육적 전통이 안정적으로 유지, 발전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 제도 역시 한국과 일본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인데, 한국의 혁신학교에서 새로운 교육적 전통을 만들어가다가도 전보로 인해 휘청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결국 한국과 일본의 교육은 마치 ‘창의적 요리’를 하라고 하면서 요리의 종류, 재료, 공급처, 조리도구, 구상시간 등을 심각하게 통제하는 것과 같은 모순적 행태를 보이는 셈이다. 창의적 교육을 위해서는 교사가 교육과정 및 교과서, 평가 등의 전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체계적 변화가 이뤄져야 하고 교사의 자율적 권한들이 ‘교권’ 개념의 핵심으로 자리잡혀야 한다.

혁신학교가 교육 혁신은 아니다

‘진보교육’은 현존하는 혁신학교를 확대하면 된다는 안이한 인식을 노출한다. 혁신학교는 혁신에 불리한 제도적 환경을 ‘문화’를 통해 극복하려는 시도였고 상당한 성과를 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문화운동이기 때문에 확산의 속도가 느리고, 갈수록 ‘무늬만 혁신학교’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혁신학교에 근무한 교사들이 다음 전보 시 혁신학교를 다시 지원하는 비율이 낮은 점에서 볼 수 있듯 최근 혁신학교의 지속가능성과 확장 가능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점에서 그저 혁신학교를 확산시키면 된다는 태도는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혁신학교 운동은 교사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진작하는 전면적인 ‘제도개혁’으로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혁신적인 교육이 ‘전파’되는 데 그치지 않고 ‘발생’하는 것이 가능하다.

5. 대입 경쟁의 해결: 사회적 대타협 모델

지방 국립대와 수도권 국·공·사립대의 공동입학제

결국 대입 선발은 비교과를 배제하거나 최소화하고 내신과 입시 중심으로 구성하는 것이 마땅하되, 내신과 입시를 모두 혁신해야 한다. 내신 혁신의 핵심은 교사의 자율성을 대폭 확대하고 교육과정·교과서 구상 권한을 부여하여 다양하고 창의적인 교육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고, 입시 혁신의 핵심은 선다형을 없애고 논술형으로 변경하면서 고교 교육과 긴밀하게 연계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서열이 극심한 환경에서 내신 혁신과 입시 혁신이 가능할 것인가? 아주 작은 점수 차이로 인해 진학할 대학이 결정되고 이것이 장차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상황에서, 내신 혁신과 입시 혁신은 모두 어려울 것이다. 대입 경쟁을 현저히 완화할 수 있는 해법으로 ‘진보교육’이 내세워온 정책이 ‘국립대 네트워크’안이다.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공약집에는 국립대 네트워크와 공동입학/공동학위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2017년 대선에는 이게 공약집에서 빠졌다. 그 이유는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이 보수화되거나 우클릭해서가 아니라, 이 정책을 자세히 시뮬레이션해볼수록 실현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지방에는 국립대 정원 비율이 상당한 수준이다. 그런데 서울·수도권은 국립대 정원이 워낙 적어 공립대인 서울시립대를 포함해도 1만 명 이하, 대략 이 지역 고졸자 수의 3%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서울·수도권을 포함한 전국적인 공동입학 체계를 설계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논리적인 해법은 서울·수도권 지역 사립대들을 네트워크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즉 서울대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서울지역 사립대를 모두 포괄하는 대학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 국립대 네트워크를 처음 제기한 경상대 정진상 교수는, 공동입학 시스템에 들어오는 사립대에 한해 의학/법학전문대학원을 인가하는 방식의 거래를 제안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거래가 불가능한 지금, 거래 수단이 될 만한 유일한 요소는 돈이다. 즉 학생선발권을 공익을 위해 양보하는 대학에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공동입학 시스템에 포함되는 대학에 교수 1인당 1억 원 정도의 비율로 정부 재정 지원을 늘리는 것을 가정해 보자. 물론 교수 개인에게 직접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 지원하여 일정 수준의 교육여건을 확보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대학원 연구비로 쓰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고졸자 중 1/3을 수용하는 전국적 4년제 대학 공동입학/학위 시스템을 만드는 데 매년 4~5조 원이 소요된다. 현행 대학교육 예산을 70% 정도 증액해야 하는 큰 변화이긴 하지만, 소요 예산이 정부 예산의 1% 정도이므로 실현 가능한 수준이다.

여기서 ‘진보교육’의 통념 두 가지를 깨지 않으면 안 된다. ‘진보교육’은 사립학교를 일종의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사립대에 대규모 국고를 지원하는 방식의 사회적 대타협을 상상하지도 않는다. 그저 일부 사립대를 ‘공영형 사립대’로 만들자는 소극적 대안에 그친다. 그런데 정작 서울·수도권 지역 대학은 학생 모집에 별 문제가 없기 때문에, 재단 자율성을 상당 부분 반납해야 하는 ‘공영형 사립대’ 모델에 관심을 보일 리가 없다. 국민 여론도 이러한 정책에 예산을 투입하는 데 부정적일 것이다. 사립대 몇 개를 공영형으로 개편한다고 해서 대입 경쟁이 완화될 리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 지적할 ‘진보교육’의 희한한 통념은 학부와 대학원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대입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학부’의 변화에 집중하고, 대학원은 연구 중심 기관으로서 서열화와 격차를 인정해야 한다. 학부와 대학원을 통째로 동등한 수준으로 육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지방 거점 국립대 대학원의 연구성과를 서울대나 연고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훨씬 엄청난 예산과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하물며 모든 대학 네트워크의 연구 수준을 동일한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학생 줄어드는 지금이 대입 혁신의 최적기

사회적 대타협에 의해 성립된 ‘대학 네트워크’는 프랑스식 대학 모델보다는 독일 대학 모델에 가깝다. 프랑스에서는 입시(바칼로레아)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점수를 받으면 대학에서 무조건 입학시키고, 그 대신 대학 2학년에 진입할 때 40% 내외, 3학년에 진입할 때 추가로 20~30%를 탈락시킨다. 입학은 매우 쉽지만 다수가 대학 재학 중에 탈락하며, 특히 인기 전공일수록 탈락률이 높다. 반면 독일은 대학서열은 별로 없지만 대학별/전공별로 정원을 설정하고 정원보다 지원자가 많으면 이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워 선발한다. 따라서 인기 전공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은 불가피하다. 한국의 대학 네트워크 공동입학 체계에서도 인기 전공을 향한 경쟁은 일정 수준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대타협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첫 번째 설득 논리는 세계 최악의 저출산·고령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용 및 주거와 더불어 교육의 획기적 변화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설문조사를 해보면 ‘결혼을 안 하는 이유’로 주로 고용과 주거를 꼽고,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로 주로 교육과 보육을 꼽는다. 대입 경쟁을 현저히 낮출 수 있는 새로운 사회시스템을 실현하지 않으면 한국은 심각한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장기적으로 경제·사회적으로 침몰할 운명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사회시스템에서 교육은 핵심적인 자리에 있다.

두 번째 설득 논리는 창의적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입 경쟁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미세한 차이에 의해 입학하는 대학이 달라지고 이를 통해 미래의 삶이 크게 차이나는 환경에서는, 변별력을 최우선시하는 선다형 평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특히 앞에서 이야기한 미국형 입시와 유럽형 입시, ‘내신 혁신’과 ‘입시 혁신’ 모두 사교육 우려와 변별력 요구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다. 요컨대 대입 경쟁을 현저히 줄여야 국민의 행복도를 높이고 사교육을 줄이며 창의적 교육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범 / 교육평론가, MBC <시선집중>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