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좀 돌려줘.” 나는 청소기를 돌린다. 아내 말이 헛나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모히토 가서 몰디브 한 잔 하자’와 같은 소리다. 동사무소 가서 일 보고 나오면서 “많이 파세요”라고 하거나, 통닭 주문하면서 “살 없는 치킨이요” 했다는 사람도 있다지 않나.
이런 말실수는 문제될 게 없다. 그 말로 인해서 피해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허당’이란 소리는 들을망정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장점도 있다.
우리 속담에는 말에 관한 것이 많다.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말이 씨가 된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이 모든 속담이 공통적으로 시사하는 내용이 있다. 바로 말조심이다. 말은 천 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하루아침에 공든 탑을 무너트리기도 한다.
말실수가 문제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오히려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이 ‘쪼잔하다’는 소릴 들었다. 독설을 내지르고, 음담패설을 늘어놓고,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주위로부터 인기까지 끌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이런 말 하나하나가 문제 된다. 이전엔 문제되지 않던 발언이 지금은 문제가 된다. 인권감수성이 과거와 같지 않다.
“우리끼리 하는 소린데”란 말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사회가 투명해지면서 모든 말은 백일하에 공개된다. 감추고 싶은 말일수록 급속도로 전파된다. 말이 기록도 된다. 심지어 통화내역까지 남는다. 남들이 잊어줬으면 하는 말일수록 더 또렷이 기억된다.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이불킥’ 해봐야 이미 늦었다.
잔소리 조심
점심식사를 하고서 늦게 들어오는 부하 직원에게 “점심이 늦었네?”라고 말하는 건 좀 다르다. 자칫 뒷담화에 오를 수 있다.
“그자가 글쎄 나보고 늦게 들어왔다고 시비를 걸더라? 자기는 지각도 밥 먹듯이 하면서.”
이런 말일수록 좌중의 호응이 높다.
“그 사람 말도 마. 낮에 잠깐만 자리를 비우려 해도 어디 가냐고 묻는 사람이야.” “맞아. 우리가 초등학생도 아니고, 외출하는 것까지 일일이 보고해야 돼?”
상사는 억울하다. 그 정도 말도 못하느냐고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네, 하지 마세요.’ 이것이 내 답이다. ‘바늘로 허벅지를 찌르며 참으세요. 왜냐하면 그건 잔소리이니까요.’
쓸데없이 참견하는 말, 잔소리. 리더는 이것부터 조심해야 한다. 나는 잔소리 듣고 엇나가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바뀌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아랫사람에게 혹시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하라면 하는 거지, 웬 잔소리가 그리 많아?” 아랫사람도 똑같다. “제발 잔소리 좀 그만해.”
잔소리는 두 유형의 사람을 제조할 뿐이다. 잔소리가 듣기 싫어 마지못해 일하는 사람과,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 그럼에도 왜 잔소리를 하는 걸까. 그렇게라도 상사 역할, 부모 노릇을 하고 싶어서다. 뭔가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스스로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실언 조심
일찍이 공자는 세 가지 말을 조심하라고 했다. 실언(失言), 교언(巧言), 췌언(贅言)이다. 군더더기 말, 즉 췌언이 잔소리라면 상황에 맞지 않는 말, 실언도 주의해야 할 대상이다.
아버지가 한여름에 암 수술하고 병원에 계실 때, 병문안을 온 친구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주 시원한 데서 피서 잘하고 있구먼.” 그 뒤로 두 분 사이는 멀어져 버렸다. 친구 분은 좋게 생각하라는 뜻으로 농담한 것인데, 사실 죽을 고비를 방금 넘긴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실언은 요실금처럼 뜻하지 않게 새어나온다. 발원지는 주로 농담이다. 분위기에 휩쓸려, 혹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말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실언을 하게 된다. 의도를 갖고 한 말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실언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주어 담을 기회가 없다는 점에서 더 위험할 수 있다.
야박한 것이 말이다. 말하는 의도나 취지는 중요하지 않다. 듣는 사람의 해석과 느낌이 있을 뿐이다. “농담으로 한 얘기야.” 이런 말은 통하지 않는다. “웃자고 한 얘길 갖고 그래. 친구끼리 농담도 못하냐?”는 말은 화만 더 돋울 뿐이다.
때론 덕담도 실언이 된다. 살찐 것을 콤플렉스로 여기는 사람에게 ‘건강해 보인다’고 하거나, 얼굴에 있는 점을 빼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복점이 부럽다’고 하면 조롱으로 들릴 수 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조심해야 한다. 다툼은 가벼운 말장난에서 시작한다.
막말 조심
“이쯤 되면 막하자는 거지요?” “대통령직 못해먹겠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막말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막말의 사전적 의미는 나오는 대로 속되게 하는 말이다. 정제되지 않은 말, 품격 없는 말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과연 노 전 대통령의 말은 어땠는가. 그의 말은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에둘러 말하지도 않았다. 직설화법을 구사했다. 말을 꾸미는 것도 싫어했다. 보통사람이 일상에서 쓰는 표현 그대로, 구어체로 말했다. 그것이 품위 없는 말, 막말이라고 야유해도 감수했다. 굳이 피해가려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대통령이 되고나서 고쳐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리 되지 않더라. 나는 그런 말을 하는 환경에서 살지 못했다. 수십 년 몸에 밴 말을 대통령이 됐다고 어느 날 갑자기 바뀌지 않더라. 하지만 그것이 5년 내내 물고 늘어질 만큼 대통령 결격 사유인지는 모르겠다. 어쩌겠는가. 내가 감당해야지.” 그가 임기 후반기에 한 말이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누구에게도 반말하지 않는다. 전직 대통령이나 그룹 회장 등 힘 센 사람에게는 호통 치고 이른바 ‘깽판’도 쳤지만, 아랫사람에게는, 특히 힘없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말공대가 깍듯했다.
경계해야 할 막말은 따로 있다.
첫 번째 막말은 폭언이다. 아랫사람을 업신여겨 함부로 내뱉는 경멸과 멸시의 말, 갑질 발언, 욕설 말이다. 그룹 회장이나 그 가족만이 아니라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자신의 감정을 주체 못하고 내키는 대로 하는 말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걸 일이라고 했어? 당신 어느 학교 나왔어?” “너를 낳고도 미역국은 드셨겠지.” “그 머리로 어떻게 여기 들어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이렇게 인격을 짓밟고 모욕감을 주는 말. 치가 떨리고 몸서리처지는 그런 막말 말이다.
두 번째 막말은 상대 진영을 향해 퍼붓는 저주와 야유의 말이다. 첫 번째 막말의 주요 무대가 기업이라면 이 막말의 주요 서식지는 정치권이다. 이런 막말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문화에 얹혀 살고, 대립-적대의 정치구조에 기생한다. 정책-대안을 놓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자극하고 공격하는 것으로 정치적 이득을 보는 상황에서 누가 이런 막말을 마다하겠는가.
더욱이 그런 발언에 대한 응징이 이뤄지지 않고, 잠깐 들끓다가 어느새 잊히거나 잊어주는 풍토이다. 오히려 막말 캐릭터와 노이즈마케팅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적어도 손해 보진 않는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여기에 더해 자기편으로부터는 “용기 있다”, “후련하게 잘했다”라는 칭찬을 받기조차 한다. 그러다 보니 막말의 ‘선명성 경쟁’이 이뤄지고, 말은 더 양극단으로 치닫고, 어지간한 막말은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 됐다.
세 번째 막말은 더 심각하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에 대한 비하와 조롱, 혐오 발언이 그것이다. 여성이나 노인, 장애인은 물론 성소수자나 이주노동자, 특정 지역·집단을 폄훼하고 차별하는 말은 단지 비난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범죄행위이다.
성희롱이나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런 막말은 발화(發話) 현장에서는 문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막말에 동조하고 환호작약하는 사람끼리 모인 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막말일수록 바이러스처럼 전염성이 강하다. SNS를 통해 일파만파로 번진다. 증오를 넘어 배제와 폭력으로까지 나아간다. ‘해서는 안 될 말’이라는 게 있다. 바로 이런 막말이다.
망언 조심
망언은 막말과 같으면서 다르다. 몰상식하고 비이성적이란 측면에서는 똑같다. 여기에 망언은 역사인식의 부재가 추가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일본의 주장처럼 억지이고 궤변이다. 5.18, 세월호와 관련된 망언들은 입에 담기조차 어려울 만큼 반인륜적이다. 망언은 표현의 자유라는 방패, 역사 인식의 차이라는 창으로 무장하고 시시때때로 준동한다. 하지만 사실을 왜곡하고 부정한다는 점에서 망언은 표현의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 또한 망언은 역사 해석의 문제도 아니다. 역사의 심판 대상일 뿐이다.
말실수도 습관이다. 입에 배면 고치기 힘들다. 방심하는 그 순간 찾아온다. 입을 열기 전에 생각해보자. 내가 꼭 이 말을 해야 하나, 해야 한다면 때와 장소는 적당한가, 내 말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은 없을까.
백 마디 잘해 얻는 이득보다 한 마디 잘 못해 잃는 손해가 더 크다. 패가망신할 수 있다.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말은 안하는 게 맞다. 말은 하고 나면 여지가 없어진다.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침묵은 바탕색과도 같다. 뭐든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이다. 침묵하고 있는 한, 아직 기회가 있다.
강원국 필자
작가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증권회사 홍보실, 대우그룹 회장비서실 등을 거쳐 대통령의 스피치라이터로 8년간 일했다. 저서로 『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가 있다. 최근에는 강연 등을 통해 ‘좋은 글쓰기’를 전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