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위기를 계기로 한국식 성공모델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는 가운데 비판의 목소리도 들린다. 서구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식 모델이란 결국 개인 프라이버시를 침해한 대가(代價)라는 것이다.
지난 7일 <피렌체의 식탁>은 김강기명 필자가 쓴 ‘유럽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이란 칼럼을 실었다. 많은 독자들로부터 찬반양론이 쏟아졌다. 이 글에는 “유럽이 전체적이고 모성적인 경찰국가의 돌봄과 통제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성숙한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담겼다. 이후 국내 언론들은 프랑스의 어느 변호사가 쓴 ‘코로나19와 확진자 동선 추적: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키지 말라’는 칼럼을 소개했다. 
이에 국제문제 전문가인 한승동 메디치미디어 기획주간이 반박 칼럼을 썼다. “유럽이 한국 방식을 수용하지 않은 것은 현실적으로 그것을 수용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담아서다. 요즘 국내에선 동서양, 동·서유럽 사이에 발견되는 코로나19 대응의 차이점을 분석하는 글이 늘어나고 있다. <피렌체의 식탁>은 이것이 지식인 사회에서 오래 전에 펼쳐진 ‘오리엔탈리즘 논쟁’과 맥락이 닿아있다고 판단해 한승동 기획주간의 글을 싣는다. 이를 계기로 한국식 모델을 둘러싼 문명사적 논쟁이 활발해지길 기대해 본다. [편집자]

#코로나19의 폭발적인 확산에도
  유럽이 ‘한국 방식’ 채택 못한 이유
  ‘성인 유럽’ ‘아동 한국’ 때문 아니다
#유럽의 敵은 아시아 전체주의?
  아시아에 대한 우월감 작동으로
  안이한 인식, 집단면역전략 채택
#한국의 성공모델이 특별한 이유?
  서방의 가치를 배우고 모방했지만
  과학적 능력·태세로 감염 고리 끊어

대장균과 코로나19

대장균은 번식 환경이 좋으면 20분마다 한 번꼴로 분열한다. 하루에 72번 분열하는 셈인데, 그렇게 제대로 분열하면 그 수는 단 하루만에 2의 72제곱(=10의 26.1제곱) 마리가 된다. 대장균 1마리의 무게는 약 1조분의 1(10의 마이너스 12제곱) 그램. 따라서 대장균 1마리가 분열에 필요한 충분한 영양분 등이 갖춰진 환경 속에서 하루에 72번 분열하면 그 무게는 4000톤이 된다. 만일 그런 분열이 이틀 동안 계속 진행된다면 그 무게는 5.977×10의 21제곱 톤(t)인 지구의 질량을 넘어서게 된다.
단 이틀 만에! 영국의 진화 생화학자 닉 레인의 <미토콘드리아>(김정은 옮김, 뿌리와이파리, 2009)에 나오는 얘기다.

40억 년 전 지구상에 생명체가 탄생했고 그 20억 년쯤 뒤에 핵을 가진 진핵세포가 등장하면서 오늘날 인간에까지 이르는 생명체 진화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핵이 없는 박테리아 대장균은 40억 년이 지나도록 본래의 단순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대장균이 그 단순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그래야 그 엄청난 번식속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빠른 번식속도는 대장균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요소다. 만일 환경(영양)이 제한적이라면, 가장 빨리 번식하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바꿔 말하면 번식속도가 느리면 살아남기 어렵다. 빠른 쪽이 영양분을 먼저 다 먹어 치워버릴 테니까. 분열 속도는 구조가 단순할수록 빠르다. 그래서 대장균은 빠른 번식에 방해가 되는 유전자 등을 모조리 내버리는 극단의 다이어트를 감행했다. 진화를 거부함으로써 살아남은 진화의 승자라고 해야 할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 코로나19)의 구조와 증식방법은 대장균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 숙주를 감염시켜 불려가는 양태는 상당히 닮았다. 대장균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은 넷이 되고, 넷은 여덟, 여덟은 열여섯, 열여섯은 서른둘이 되고, 그 다음엔 예순넷이 되고, 그 다음엔….
코로나19에 감염된 사람(숙주)이 다른 사람을 접촉해서 감염시킬 수 있는 ‘좋은 환경’ 속에 있다면, 감염자는 곧 최소 두 명, 많게는 수십 명으로 불어나게 된다. 기하급수적 증가 양태는 대장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시에 수십 명을 감염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조건만 갖춰진다면 코로나19의 감염은 늘 둘로만 분열하는 대장균보다 더 폭발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이론상으론 그렇다.

하지만 감염 속도도 대장균만큼 빠르지 않고, 폭발적 감염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 예컨대 마스크도 쓰지 않은 사람들이 한정된 공간에 밀집해 있는 환경이 늘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런 좋은 조건을 계속 만날 수만 있다면, 코로나19의 놀라운 전파력(감염력)으로 볼 때 지구 전체의 78억 인구를 모조리 감염시키는데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1월 거의 같은 시기에 첫 확진자가 나온 미국, 영국, 이탈리아 등에서 불과 한두 달 만에 확진자가 수만 내지는 수십만으로 불어났다. 전 세계 코로나19 감염 확진자 수는 조만간 200만을 넘길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검사를 해서 감염사실을 확인한 숫자만 그렇고, 실제 감염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

3월 중순에 나온 영국 런던 임페리얼 컬리지의 코로나19 태스크포스(TF)팀 보고서는 미국과 영국 정부가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코로나19 확산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될 경우, 미국에서만 220만 명, 영국에서는 51만 명이 사망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코로나19 환자가 모두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해도, 영국에서 25만 명, 미국에서는 110만~12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예상도 내놓았다.
4월 14일 현재 이 두 나라의 코로나19 확진자 및 사망자(미국은 각각 58만6천, 2만3천) 증가곡선은 당국의 여러 대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페리얼 칼리지 연구팀의 경고를 떠올리게 할 만큼 가파르다.

실패한 서방, 성공한 한국

대장균이 이틀 만에 지구 무게보다 더 무거운 거대한 덩어리로 불어나지 않는 것은 그 연속적인 분열을 뒷받침해줄 영양분과 공간 등 적절한 환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코로나19가 빠른 속도로 지구상 인류를 모조리 감염시키지 못하는 것은 그런 연쇄감염을 가능케 해줄 환경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코로나19의 감염을 저지하려면 연쇄감염이 일어나는 조건을 없애버리면 된다.

도미노 게임에 비유하자면, 연속적으로 세워진 도미노 줄에서 도미노를 어느 지점에서 한 개 또는 몇 개를 제거해 전도(顚倒)의 연쇄고리를 끊어버리면 된다. 그렇게 해서 이가 빠진 도미노 줄은 줄줄이 넘어지다가 ‘빠진 이빨’ 앞에서 멈추게 되고 전도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이 연쇄고리 끊기를 ‘거의 성공’시킨 나라가 한국이다. 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 초기에 이 간단하다면 간단한 원리를 그야말로 ‘교과서적으로’ 적용해서 실행할 역량과 의지를 갖추고 있던 거의 유일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 코로나19 사태 발생 이후 몇 개월이 지난 지금, 각종 통계치와 도표·그래프들의 세계 각국 비교가 그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미국이 실패했고, 영국도 실패했으며, 유럽연합(EU)의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 그 밖의 서방 국가들도 실패했다. 아베 신조 총리의 3월 말 도쿄올림픽 연기 발표 이후 일본 내 관련 상황 추이를 볼 때, 일본도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이들 서방 국가와 유사한 패턴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 감염검사 등 본격적인 대처가 너무 늦었다는 점에서 일본은 서방국가보다도 더 혹독한 상황과 맞닥뜨릴 수도 있다.
이들 나라는 왜 실패했고, 한국은 성공했을까?

유럽, 한국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지난주 <피렌체의 식탁>에 실린 김강기명씨의 ‘유럽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이란 제목의 칼럼도 한국의 ‘성공’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제목처럼, 그는 한국의 성공방식을 유럽은 애초에 수용할 수 없었을 것으로 봤다. 그러면서 이 성공적인 한국 방식이 유럽 등 서방의 방식에 일단 ‘승리’했지만, 특히 ‘민주주의’적 측면에서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대안인지, 또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자세를 보였다. 아니 회의적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이 흥미로운 글에서 김강기명씨는 예컨대, 한국의 성공 이유를 서방국가에는 없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도타운 ‘사회적 신뢰’에서 찾은 <뉴욕타임스> 류의 분석은 그 논거가 불충분한 “헛소리”라며 “아시아의 공동체문화 같은 것은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적인 요소”라고 쏘아붙였다. 그의 그런 비판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그런데 오리엔탈리즘에 기댄 그런 분석을 날카롭게 비판한 김강기명씨 자신은 오리엔탈리즘에서 자유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것은, 지금 유럽 등 서방이 코로나 19사태를 해결하려면 한국 방식을 수용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치료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것은 한국 방식이 한국만의 무슨 신비로운 마술적 위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 방식이 과학적 근거에 입각한 보편적 해법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김강기명씨는 이런 사실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유럽이 한국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한국과 유럽 사회의 특성 내지 근본적 차이를 ‘아동’과 ‘성인’의 그것에 대비했다. 그는 자신이 유학 중인 독일에서 6년 만에 와서 본 한국에서 친절하고 효율적이지만 요란한 온갖 안내와 알림, 설명, 선전구호의 범람과 그것을 기꺼이 수용하는 고분고분한 한국인들에게서 ‘아동’을 발견했고, 그와는 전혀 다른 독일인들 속에서는 ‘성인’을 찾아냈다. 그는 고분고분한 ‘아동적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한국사회를 ‘탈근대의 모성적 경찰국가’로 규정한다.

“시민들은 기꺼이 그들의 어머니 국가의 감시, 통제 그리고 돌봄을 수용한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시민권’의 중요 요소다. 이것이 바로 한국적 대책이 가지고 있는 민주적 외양의 진짜 얼굴이다.”
“한국의 행정이나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표준 시민’은 ‘아동’이고, 반면에 유럽의 불친절하고 느린 행정에서는 (그것이) ‘성인’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과연 자기 스스로를 (사실 여부를 떠나) 성인이고,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자유주의적이고 비판적이라고 생각하는 유럽의 ‘표준 시민’들이 이런 완전한 감시와 통제 정책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결국 말 잘 듣는 ‘아동’인 한국을, 성숙하되 말을 잘 안 듣는 ‘성인’이 받아들이고 따를 리 없다는 얘기다.

성숙한 ‘성인’ 유럽, 말 잘 듣는 ‘아동’ 한국

그는 이번 대규모 팬데믹에서 유럽이 그들 시스템의 열등함을 보여주었지만, 그럼에도 유럽인들은 성숙한 사람들이라서 “이 비상사태와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의 발코니 콘서트 등을 통해 ‘삶-의-형태’(bios)를 지속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또 유럽이 “이런 전체적이고 모성적인 경찰국가의 돌봄과 통제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성숙한 것일 수도 있다“고도 했다.

성숙 또는 성인-아동을 반드시 가치비교, 우열관계로 대비시킨 것은 아니겠지만, 그의 글에서는 한국 또는 아시아 방식에 유럽이 뒤진 것에 대한 유감과 아쉬움이 묻어난다. 그가 보기에 민주적 방식으로 성공한 유일한 사례라는 한국 방식의 내면(진짜 얼굴)이란 실은 모성적 감시와 통제, 돌봄에 대한 ‘아동’의 자발적 수용이라는 비민주성·비주체성의 발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지적들은 스마트폰을 통한 확진자의 이동경로 등의 개인정보 추적과 공개를 중국의 그것과 다름없는 전체주의의 반(反)인권적 프라이버시 침해라 비판하는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일부 논객들의 비판적 발언이나 논조와는 결이 다르긴 하지만, 상통하는 면이 있다.

예컨대 3월 6일 프랑스 경제지 <레제코>에 실린 ‘코로나19와 확진자 동선 추적: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키지 말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비르지니 프라델 변호사의 주장은 김강기명씨의 그것과는 물론 다르지만, 둘 사이의 논리적 거리는 별로 멀지 않아 보인다.
프라델 변호사는 한국과 대만이 코로나 방역에는 성공적이었고 “불행히도 프랑스는 그렇지 못했다”는 점을 유감스러워 하면서, 한국은 “디지털 감시와 시민억압기술을 개발한 중국과 다름없는 전체주의 국가”라면서, 우월의식과 편견에 찬 억지주장을 늘어놓는다.
“수천 명의 한국인들은 학교에서 고발 기술을 배우고 (담배꽁초 무단 투기부터 부정부패, 간통에 이르기까지) 동료 시민들의 잘못을 고발해 돈을 받고 있다”
“이들 국가는 다행스럽게도 프랑스 문화에는 없는 초감시·고발 문화를 갖고 있다”
“오래 전에 개인의 자유라는 것을 버린 나라들이다.”

유럽의 적은 코로나19가 아니라 아시아 전체주의?

프라델 변호사는 끝으로 “우리 프랑스인들의 아름다운 전통인 개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외면하는 프랑스 정부를 원망하면서 “시민사회가 깨어나 전체주의의 조짐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가 맞서 싸워야 할 적은 코로나19가 아니라 그 틈을 비집고 진군해 오는 아시아의 전체주의라는 얘기다.

다소 극단적인 주장이겠지만, 코로나19 방역문제를 자유로운 시민사회냐, 억압적인 전체주의사회냐의 체제문제로 바꿔 놓고는, 그는 ‘억압적 감시체제하의 동양사회’에 대비되는 ‘자유로운 유럽 시민사회 프랑스’ 만세를 부르는 정신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그만큼 이번 팬데믹에서 유럽의 속수무책 ‘패배’에 대한 유럽인의 충격과 위기의식은 크다.

이쯤 되면, 우리는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한때 유럽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던 ‘과학’과 합리의 세계에서 어느덧 유럽 자신이 소외되고 있는 현실을 확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강기명씨는 스마트폰의 GPS 정보를 수집해서 감염자를 추적하는 것을 두고 “마치 10대 아들의 스마트폰이나 딸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지나치게 그들의 삶을 염려하는 걱정 많은 엄마”의 위태로운 간섭으로 봤지만, GPS 위치추적은 그야말로 감염자나 감염의심자의 위치를 파해서 전염병 확산통로를 차단하려는 것일 뿐, 스마트폰이나 일기장 내용까지 들여다보진 않는다.

프라델 변호사와 같은 유럽 쪽의 시선이 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우월감의 발로이거나, 코로나19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엄청난 피해를 입은 자신들의 무능, 태만을 합리화하려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은 유럽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유럽의 걷잡을 수 없는 피해 확산은 실은 코로나 19에 대해 무지했거나, 그것을 아시아의 토착 유행병 정도로 여긴 오만, 금방 지나갈 일종의 독감 정도라 생각한 근거 없는 낙관주의, 그리고 어쩌면 역병의 정체를 알면서도 아무런 대비도 할 수 없었던 무능 탓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유럽이 한국 방식을 수용하지 않은 것은 감시와 통제를 따르는 예속적인 ‘아동’에 대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성인’의 거부감 때문이 아니라, 역병 자체에 대해 잘 몰랐을 뿐만 아니라 한국 방식을 받아들이고 따라갈 역량도 없었고 준비도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아주 단순명쾌한 이유 쪽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그들은 한국 방식을 수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럽인들이 “이 비상사태와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의 발코니 콘서트 등을 통해 ‘삶-의-형태’(bios)를 지속하고 있는” 것도 김강기명씨가 얘기하듯 경찰국가의 돌봄과 통제를 거부하는 ‘성숙’한 ‘성인’의 행동이라기보다는, 발코니에서 소리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의 무능과 무지, 오만 탓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성숙한 성인이 아니라 어느덧 시대에 뒤처져버린 늙은 ‘노인’이 돼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은 어떻게 성공하고, 유럽은 왜 실패했나?

한국이 가장 성공적으로 코로나 19사태에 대처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김강기명씨의 칼럼은 비교적 정확하게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나 해외 언론들이 분석하고 있는 것처럼 소위 한국식 해법은 다섯 개 정도의 중요한 요소로 이뤄져 있다. 1.중앙집권화 된 국민건강보험, 2.정부의 선제적인 개입, 3.빈번하고 광범위하고 확실한 검사, 4.보편적인 이동제한이 아닌 감염자들의 동선 추적과 선별적 격리, 5.중단 없는 정보공개와 투명한 감시가 그것이다.
이 5가지 요소들은 한국에서만 36명의 생명을 앗아간 2015년의 메르스 위기 이후 한국 정부가 발전시켜온 기술적 대책과 협력적 구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런 해법들을 통해 한국인들은 여전히 폭넓은 이동의 자유를 누리고 있고, 감염률 역시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유럽에서의 출입금지령이나 접촉금지령, 중국에서 있었던 혹독한 지역봉쇄나 이동금지령 없이 말이다. 이것은 특히 서구의 많은 의료전문가나 정치인들로부터 (중국의 전체주의 모델과 비교되는) ‘민주적 모델’이라고 찬사를 받았다.”

그는 한국의 이 ‘민주적 모델’에 대해 외양일 뿐 그 내면은 다르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한국 성공의 핵심 기제(機制)랄까 원리를 제대로 지적했다. 그것은 대장균의 경우처럼 증식환경을 제거하거나 도미노 게임의 ‘빠진 이빨’처럼 연결고리를 제거해서 연쇄반응, 즉 감염확산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 정부는 질병관리본부와 바이오산업체 등 정부·민간 관련조직들을 조기에 효율적으로 조직·동원해 성능 좋은 진단키트를 대량생산해서 감염자를 찾아내기 위한 검사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그리하여 확진자를 가려내고 경중을 가려서 따로 수용, 치료함으로써 단기간의 대규모 환자 발생에 따른 ‘의료 붕괴’를 막았다. 감염자를 재빨리 찾아내고 격리, 치료한 것은 감염자가 다른 사람들을 감염시켜, 폭발적인 연쇄감염이 일어나는 통로, 회로, 구조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준비돼 있던 한국은 이를 조기에 주도면밀하게 실행에 옮겼다.

한국 정부와 질병관리본부, 의료·바이오 산업체는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당대에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준비된, 가장 유능한 집단이었다. 감염회로 차단이 빠르면 빠를수록 확산 저지가 쉬워진다. 이를 대장균의 증식 메커니즘에 빗대어 얘기하면, 최초의 감염자 차단에 실패하면 감염자는 둘이 되고, 둘의 단계에서 차단하지 못하면 감염자는 넷이 된다.
만일 여섯 단계에서 차단하지 못하면 감염자는 예순 넷이 되며 10단계에서 차단하지 못하면 감염자는 1천이 넘는다. 몇 단계 차단에 실패할 경우 ‘슈퍼 전파자’가 등장한다. 대처가 늦을수록 확산 저지에 투입되는 에너지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되지만 성공 가능성은 더 낮아진다.
유럽이 훨씬 더 큰 에너지를 투입하고도 엄청난 희생을 막지 못한 채 허둥대고 있는 것은 바로 확산 조기차단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일본도 그래서 위험하다.

유럽의 일부 논자들이 반인권적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라며 비판하는 위치추적 등 개인정보 탐색과 공개를 한국 정부가 수용한 것도 감염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최첨단 정보통신기술로 무장한 한국은 이 분야에서도 가장 앞서 있었다. 감염 폭발이 일어난 신천지 사태의 경우 수십만 신도 명단을 파악해 그들 모두의 감염 여부를 확인 조사한 것도, 감염자를 가려내 그들의 타인 접촉으로 인한 추가 연쇄감염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신천지 신도 전원 조사 및 치료야말로 유럽이나 미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경악해마지 않았던 한국의 ‘성공’을 상징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유럽은 그럴 생각도, 그렇게 할 능력도 없었다.

거듭 얘기하지만 유럽이 한국 방식을 수용하지 않은 것(또는 못한 것)은 주체적 ‘성인’의 예속적 ‘아동’에 대한 불신이나 거부감이라기보다는, 현실적으로 그것을 수용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성숙한 성인의 말 잘 듣는 아동’에 대한 거부감 따위의 주장이야말로 오리엔탈리즘의 낡은 계보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닐까.

대대적인 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고성능 진단키트의 대량 생산과 이를 활용해 감염 여부를 판결할 수 있는 훈련된 의료인과 의료장비가 있어야 하며, 감염자들의 경중 상태를 판별한 뒤 그들을 수용해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시설, 인력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에 대한 시민(국민)들의 이해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한국은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서방 동맹이 무너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이 날씨가 따뜻해지는 4월쯤엔 수그러들 것’이라며 조기 해결을 호언장담하면서 시간을 허비한 것은 이 바이러스 감염증에 대한 서방의 기본인식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확산 초기엔 코로나19를 해마다 찾아오는 유행성 독감 정도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영국이나 스웨덴 등이 전체 구성원의 60~80%가 감염되면 그에 따른 광범위한 항체 형성 때문에 자연 소멸할 것이라며 적극적인 감염회로 차단에 나서지 않은 것도 현실적으로 제대로 대처할 의학적·기술적·산업적·정치적 대비가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코로나19를 유행성 독감 정도로 본 안이한 인식 탓이 컸을 것이다.

이탈리아는 확산 초기 진원지인 중국으로부터의 입국 차단으로 사태를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듯, 그 이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봉쇄만으론 안 된다는 것이 북부 롬바르디아 지역 참상으로 금방 드러났다. 그때까지도 이웃 프랑스는 허둥대는 이탈리아 상황을 조롱하며 자신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겼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감염자 조기 차단이 아니라 집단면역을 통한 바이러스 소멸전략을 쓰겠다고 공언한 것 역시 코로나19에 대한 정확한 인식 부재 탓도 있고, 현실적으로 적극적인 회로차단에 나설 무기가 수중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존슨의 영국은 결국 방향을 바꿨다. 집단면역론은 이론상으론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코로나19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고령자들에 대한 일종의 기민(棄民)정책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윤리·도덕적으로도 문제가 많다. 이런 윤리·도덕적 문제를 무릅쓰고 그것을 감행하려면 어쩔 수 없이 비용 대 효과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럽의 리더들이 이번 사태 확산 초기에 생각했듯이, 코로나19가 유행성 독감 정도의 피해만 각오하면 될 정도의 위력이라면 집단면역 전략을 계속 밀어붙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일 수만 명씩 확진자가 급증하고 수천 명씩 사망했다. 불과 2~3개월 만에 주요국들 사망자가 각각 1만 명을 넘어서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냉동차도 모자라 무인도에 집단매장을 해야 할 정도로 사망자가 급증하면서 50개 주 전체를 재난지역으로 선포하기에 이른 미국이 집단면역 전략을 쓰는 건 무모하다.

아베 정권이 도쿄 올림픽을 성사시키기 위해 취한 전략도 유럽식의 집단면역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확산 초기에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은 코로나19에 공동전선을 편 서방 동맹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동맹은 이제 무너졌다. 서방이 코로나19에 제대로 대처하려면 싫더라도 한국 방식의 ‘핵심적 요소’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한국식이어서가 아니라 보편적 해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확산의 조기 차단을 위한 모든 정책과 이를 실행하기 위한 정치·사회·산업·기술적 조치들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서방이 코로나19 사태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적어도 코로나 19 백신이나 강력한 치료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한국의 성공이 특별한 이유

코로나19 감염 확산의 연쇄고리 끊기에 거의 성공한 건 한국만이 아니다. 코로나19 발원지인 중국도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일단 확산을 저지한 듯하고, 대만과 싱가포르는 처음부터 연쇄 감염을 막아 대규모 확산을 저지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공식 발표된 통계수치로 보면 일본도 초기엔 이란이나 이탈리아 등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확산 저지에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왜 세계가 유독 한국을 지목하고 관심을 집중할까. 먼저 일본은 도쿄올림픽 연기와 ‘긴급사태선언’ 과정에서도 드러났듯이, 검사 횟수가 빈약할 뿐만 아니라 발표된 거의 모든 통계수치 자체가 믿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다. BBC나 뉴욕타임스, 블룸버그, 알자지라 등이 주요국들의 코로나19 확산 추세를 보여주는 도표 및 그래프를 제시할 때 대부분 항목에서 일본을 아예 제외해버린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의심스러운 통계수치와 대처방법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엄청 위험할 테니까.

대만이나 싱가포르는 개방적이고 발표된 수치도 믿을 만하지 않은가. 해당 도시·지역 주민들은 그 이유를 덩치가 상대적으로 작고 국제적 지위가 낮기 때문이라는 등의 이유를 나름으로 제시하면서 서운해 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한국이 특별히 주목받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한국의 코로나19 확산 추세가, 초기에 중국 다음으로 규모가 크고 빠른 확산 과정을 거친 직후 급속히 수그러든 뒤 신규 확진이 낮은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그 극적인 변화 때문이다.
대규모 확산을 경험한 뒤 곧바로 확산 추세가 멈추고 다시 안정적으로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는 이유다. 한국 방식이 표준모델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신천지 사태’ 발생과 효과적인 수습이야말로 한국 방식의 우수성과 유효성을 극적으로 드러내 보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예 감염자가 발견되지 않았던 타지키스탄이나 대규모 감염확산 경험이 없는 대만, 싱가포르는, 대규모 확산과 엄청난 사망자 발생을 막지 못한 채 공황상태에 빠져 있는 나라들이나 그런 끔찍한 선례가 곧 자신들의 현실이 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나라들에겐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러면 또 중국이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한국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주요국들에게 인구 수천만의 대도시와 주변지역 전체를 통째로 봉쇄하고 전파(감염) 가능성이 있는 모든 회로들을 강제로 차단해버린 ‘강압적인’ 중국 방식은 매력이 없다. 자신들은 중국과 같은 강압적인 대규모 봉쇄를 애초에 실행하기 어렵고, 장기간의 대규모 봉쇄에 따른 경제 붕괴도 감당하기 어렵다.

이 문제는 아시아에 대한 서방의 우월의식과도 얽혀 있다. 유럽은 자신들과 경쟁관계인 이질적인 중국의 ‘전체주의’보다는 서구의 ‘우등생’인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 나아야 그들 자신의 우월감도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그것이 자신들이 신봉하는 ‘진짜 민주주의’가 아닌 ‘유사 민주주의’일지라도 말이다. 여기서 ‘진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따져봐야겠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자.

한국은 서구적 근대가 제공하는 정답을 열심히 공부한 우등생이지만 주체성·자율성이 부족하고 민주적인 일상생활, 성숙한 토론문화 측면에선 문제가 많다는 김강기명씨의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하지만 한국이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에서 자유롭지 못한 서방의 ‘낡은’ 가치들을 그저 열심히 배우고 모방만 해온 것은 아니다. 모방은 창조로 가는 길목이다. “성인이고,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자유주의적이고 비판적이라고 생각하는 유럽의 ‘표준 시민’들의 가치”는 서방이 과학과 물질적 부로 세계를 지배했던 시절의 관대와 여유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끝나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는 그런 점에서 새로운 시대로 가는 분기점일 수 있다.

한승동/메디치미디어 기획주간



김강기명 필자가 피렌체의 식탁에 4월 7일 "유럽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에 대해 글을 썼고, 한승동 기획주간이 15일 위 글에 대한 반론 "코로나19 팬데믹, 서방 패권 소멸의 분기점"을 썼습니다. 이에 대해 김강기명 필자가 16일 재반론을 보내왔습니다. 피렌체의 식탁은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블로그 주소를 연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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