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지어 함장의 '코로나19 요청서'
  격리 힘든 항모 구조 등 근거 들며
  단순히 "도와달라" 아닌 합리적 설득
  끝엔 "한 명도 잃을 수 없다" 호소
#문건 유출 후 장병들 하선·격리 조치
  해군장관 대행, 돌연 함장 직위해제
#장병들 박수치며 “Captain Crozier!”
  美 시민 분노에 해군장관 대행 사퇴

너무나 유명해서 인용하는 게 진부하게 느껴지는 표현들 중에 "영웅은 난세에 탄생한다"는 말이 있다. 평상시에는 정해진 룰에 따라 행동하면 그만이지만, 어려운 시기에는 어려운 결단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그런데 옳지만 내리기 힘든 결정이 있고, 그르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안전한 결정이 있다. 전자에 해당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고, 영웅이라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몇 주 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큰 위기에 빠진 미국에서 그런 영웅이 또 한 명 탄생했다. 미 해군의 핵추진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즈벨트 호(USS Theodore Roosevelt)의 함장 브렛 크로지어(Brett Crozier·사진)가 그 영웅이다. 그런데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은 위대한 연설이나 감동적인 글이 아니라, 아주 사무적이고 건조하게 작성된, 3페이지가 조금 넘는 문서 한 장이었다.
이 문서 한 장이 해군 지휘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작성자인 함장을 파면당하게 했고, 미국의 국방부와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고, 결국 함장의 상급자인 해군장관 지명자를 물러나게 하는 대형 사건으로 번진 것이다.

미국 항공모함에 퍼진 코로나19

지구상에서 현재 운용되고 있는 항공모함은 20척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중 절반인 10척이 미국의 항공모함이다. 현재 건조되어 테스트 중인 한 척(USS Gerald Ford)을 제외하면 이 모든 항공모함은 모두 니미츠(Nimitz)급 항모들이고, 그 중 71 함번(CVN-71)을 가진 배가 20세기 첫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딴 시어도어 루즈벨트 호이다. 그리고 브렛 크로지어는 1992년에 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해군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2019년 11월에 루즈벨트 항모의 함장으로 취임한, 50세의 해군장교다.

미 해군사령부의 지휘를 받는 항공모함들은 미국 군사력과 패권을 상징하듯 전 세계 주요 지역을 누비고 다닌다. 한반도에서도 종종 목격하는 일이지만, 미국이 특정 지역에 항모를 파견하는 것만으로도 상대 국가나 세력을 압박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 "전 세계 공군력 가운데 최강은 미 공군, 2위는 미 해군"이라는 말처럼 미 해군이 항모 10대에 유지하고 있는 전투기만으로도 웬만한 나라의 공군력을 압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막강한 미국의 군사력이라고 해도 그것을 투사하기 위해서는 병력이 항상 전투준비태세(combat-readiness)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항공모함처럼 엄청난 화력을 지니고, 또 그만큼 큰 운용비용이 드는 부대의 전투준비태세는 그만큼 더 중요하다.

그런데 그런 미국의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즈벨트에서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한 것이 확인된 건 3월 24일이다. 태평양 지역에 파견되어 있던 탓으로 짐작하지만, 세 명의 승무원이 호흡기질환을 호소했고 검사 결과 코로나19로 확인된 것이다. 미 해군함정에서는 처음 발생한 케이스였다. 그리고 며칠 새 환자는 12명으로 증가했고, 그 이후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루즈벨트호는 27일, 태평양에 위치한 미국령 괌에 정박을 하게 되고, 31일이 되자 환자는 100명으로 증가했다. 일주일 사이에 확진자가 30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이를 본 브렛 크로지어 함장은 해군사령부에 보고서를 보낸다. 하지만 그 보고서는 단순한 상황의 보고서가 아닌, 요청서(request)였고, 상명하복의 군조직에서는 보기 힘든 문서였다.

용기 있는 함장의 요청서

2020년 3월 20일로 발송일자가 적힌 이 문서는 워낙 충격적이고 긴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밖으로 유출되었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서 이를 입수해 단독보도를 하면서 단번에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https://www.documentcloud.org/documents/6821571-TR-COVID-19-Assistance-Request.html#document/p2
https://www.sfchronicle.com/bayarea/article/Exclusive-Captain-of-aircraft-carrier-with-15167883.php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문서는 전형적인 군부대의 딱딱한 공문 형식을 가지고 있다. 첫 줄은 ’Subj(ect)’ , 즉 제목이다. REQUEST FOR ASSISTANCE IN RESPONSE TO COVID-19 PANDEMIC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한 지원 요청).
그리고 제목 밑에는 BLUF라는 문단이 들어간다. BLUF는 ‘Bottom Line Up Front’의 약자로, 핵심을 제일 먼저 기술한다는 의미. 즉, 보고서 전체를 한 문단으로 요약하는, 일종의 executive summary에 해당하는 문단이다.

핵심요약: 미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즈벨트호는 필요할 경우 배정된 모든 선원을 태우고 출항할 것이며,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에 감히 도전하는 어떤 적대세력과도 싸워 제압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영향을 줄 것은 분명하지만, 저희는 전투에 임해서는 평화시에는 용납할 수 없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전쟁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 명의 선원도 이번 팬데믹의 결과로 불필요하게 잃을 수 없습니다. 질병관리본부(CDC) 규정과 해군행정규정(NAVADMIN) 083/20을 준수하여 비극적인 결과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결단력 있는 조치가 필요합니다.

이 핵심요약에 이어 쓰여진 것은 보고서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7개 항목의 상황보고와 제안이다.

1번은 Problem Statement로, 현재의 문제 상황에 대한 설명. 여기에서는 TR(Theodore Roosevelt)호가 질병관리본부의 프로토콜과 해군행정규정을 준수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이 규정들에 따르면 확진자는 별도의 공간에서 14일간 격리되어야 하는데, 항공모함의 구조상 그 규정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설명을 한다.

이는 단순히 “환자가 많으니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명령, 즉 전투준비태세 유지와 전염병 가이드라인이 충돌한다고 설명한다. 즉, 자신과 선원의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행하려는 명령이 충돌하는 상황이라는 차분한 설명이다.

그 뒤엔 다음 내용이 뒤따른다.
2. Inappropriate Focus on Testing (검사에 초점을 두는 것의 부적절성),
3. Inappropriate Quarantine and Isolation (격리의 부적절성),
4. Ineffectiveness of Current Strategy (효과적이지 못한 현재 전략)

두 번째 항목에서 함장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코로나19 검사가 정확하지 않아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선원을 가려내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즉 거짓음성(false negative) 케이스가 많기 때문에 바이러스가 없는 선원을 따로 분리해내지 못하는 검사는 의미가 없다며 실제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세 번째 항목에서는 CDC과 해군행정규정에 따른 격리가 항공모함의 구조상 불가능함을 항공모함의 구조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한다. 한 마디로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서 자고 먹고 일하는 항공모함의 구조에서는 CDC와 해군의 가이드라인을 따를 수 없다는 것.

네 번째 항목에서는 현재 루즈벨트 항모는 최선을 다해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2번, 3번 항목에서 설명한 이유로 바이러스를 막아내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즉, 검사의 문제점과 격리의 문제점 때문에 바이러스는 계속 퍼질 것이라는 합리적인 결론 도출을 한다.

흥미로운 것은 5. Lesson Learned from the Diamond Princess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서 얻은 교훈)이다.
함장은 2, 3, 4에서 자신이 기술한 진단과 예상이 비전문가의 주장이라고 치부될 가능성을 염려한 듯, 코로나19로 많은 희생자가 나온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크루즈선에 관한 연구논문을 인용한다. 일본에 정박했지만 지역사회에 바이러스를 퍼뜨릴 것을 우려해서 모든 승객을 배 안에서 격리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따라서 이 논문은 초기에 승객들을 하선시켜서 격리했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논문의 결론에 이어서 함장은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는 돈을 낸 승객들이고, 따라서 각각 폐쇄된 선실에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지 못했는데, 항모 루즈벨트호는 폐쇄된 선실이 아닌 집단 거주하는 환경이기 때문에 바이러스 확산을 저지하기에 훨씬 더 열악한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일은 옳은 일입니다"

이어지는 6. Proposed New Strategy (새로운 전략 제안)에서는 이 문서의 맨 앞에서 설명했던 두 가지 명령의 충돌 상황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즉,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에 따르면) 루즈벨트 항모는 전투준비태세를 유지하는 것과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막는 것,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전쟁이 당장 닥쳤으면 (선원을 희생해서라도) 전투준비태세를 유지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평화시의 목표, 즉 코로나19를 해결하는 것을 제안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평화시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죽음을 방지하고 코로나바이러스를 배에서 완전히 제거하고, 최대한 빨리 전투준비태세를 회복하는 것이고 이 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배를 소독하고, 4000명이 넘는 선원들을 (제대로) 격리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하선시켜 수용할 육지의 시설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7. Conclusion (결론)에서 함장은 위의 여섯 가지 항목을 종합하여 정박한 항모를 지키고, 소독, 유지할 수 있도록 선원의 10%만 남기고 모두 하선, 격리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결론에 이 문단을 넣었다:

“우리 선원들을 개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는 일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인 해결책이 요구되겠지만, 이 일은 옳은 일입니다. (it is the right thing to do)  우리는 지금 전쟁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선원들이 목숨을 잃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해군이 가장 신뢰하는 자산인 우리 선원들을 제대로 보살피는 일에 실패할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세 문장은 이 유출문건을 보도한 모든 매체에서 따로 인용되었을 만큼 전체 보고서의 핵심에 해당한다.

유출된 문서, 파장을 불러오다

이 문서가 미국 전역에 큰 파문을 일으키면서 미 해군당국은 빨리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했다. 크로지어 함장이 이 문서를 고의로 유출하려던 것도, 유출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온 국민이 선원의 목숨에 관심을 갖게 된 이상 함장의 탄원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문서가 유출된 바로 다음날인 4월 1일, 해군사령부는 함장의 제안대로 극소수 인원만 남기고 승무원 전원을 하선, 격리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해군사령부, 정확하게는 해군장관 대행이자 후보자인 토머스 모들리(Thomas Modley)는 승무원들의 하선 조치에 그치지 않고 하루 뒤인 4월 2일, 브렛 크로지어 함장을 직위해제 해버린다. 미국의 항모를 책임지는 함장으로서 부적절한 처신을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다음 날인 4월 3일, 직위해제된 함장이 루즈벨트 항모에서 하선하는 장면을 찍은 영상이 인터넷에 퍼졌다. 수 많은 선원들이 항모의 하층 데크에 모여 크로지어 함장을 향해 박수를 치며 “Captain Crozier! Captain Crozider!”를 연호하는 장면이었다. 위험에 처한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함장 자신이 수십 년 동안의 커리어를 거는 문서를 상부에 올렸고, 그 결과 선원을 구하고 자신은 직위해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gUpHNCV4Iow

이 뉴스와 동영상이 퍼지면서 미국 전역에서 미 해군의 결정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끓어올랐다. 특히 베트남전쟁부터 최근까지 해군에 근무했던 참전용사들의 목소리가 가장 큰 울림을 주었다. “크로지어야말로 진정한 리더다” “부하를 아끼는 함장 밑에서 군인은 비로소 용감하게 돌진한다” “내게 지금 다시 참전하라면 나는 크로지어 함장 밑에서 기꺼이 복무하겠다”와 같은 댓글이 각 언론사의 기사와 소셜미디어에 퍼져나갔다.

그런데 여기에서 (크로지어 함장을 직위해제한) 토머스 모들리 해군장관 대행이 참모총장답지 않은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한다. 전용기를 타고 괌까지 날아가서 루즈벨트호의 선원들에게 “크로지어는 항공모함의 함장을 하기에는 너무나 순진하거나 멍청한 (too naive, or too stupid) 인간”이라며 악담을 늘어놓은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선원들은 크로지어가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그 말에 분노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모들리의 폭언에 야유를 보내며 모바일 폰으로 녹음을 했고, 이 녹음은 당연히 외부로 유출되었다. 해군을 총지휘하는 인물이 이런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인들은 크게 분노했다. 하지만 모들리는 자신이 한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다고 버텼다.
https://www.youtube.com/watch?v=gUpHNCV4Iow

모들리의 발언에 분노한 것은 시민뿐만 아니었다. 미 국방부와 미 의회의 양당 의원들이 모두 분노했다. 모들리 참모총장 대행은 미 해군에서 헬리콥터 조종사로 7년을 복무한 것이 전부인 인물이고, 트럼프가 임명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격을 의심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발언으로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수치스런 일이 발생하자 군과 정계가 압력을 행사했고 그 역시 사임으로 사건이 종료되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호의 아이러니

사족이지만, 이 사건의 중심이 된 시어도어 루즈벨트호에는 흥미로운 아이러니가 있다.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은 쿠바 문제를 둘러싸고 4개월 동안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몇 년 후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될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육군대령으로 이 전쟁에 참전 중이었다.

그런데 당시 미군 병사들은 전장에서 적군만이 아니라 풍토병인 말라리아, 황열병과 싸워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전투가 아닌 질병으로 부하들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한 루즈벨트는 당시 전쟁부 장관(Secretary of War)에게 편지를 써서 장관이 내린 결정을 번복해서 병을 앓고 있는 병사들을 본국으로 송환해서 격리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탄원을 했던 것.

그의 탄원은 받아들여졌고, 병사들은 본국으로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루즈벨트는 전쟁 후에 훈장 추서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탄원서를 받았던 전쟁부 장관이 반대하는 바람에 루즈벨트는 훈장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이 그의 이름을 딴 항공모함에서 일어난 것이다. 역사는 아이러니 없이 반복되지 않는 듯하다.


박상현 필자

뉴미디어 스타트업을 발굴, 투자하는 ‘메디아티’에서 일했다. 미국 정치를 이야기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워싱턴 업데이트’를 운영하는 한편, 조선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에 디지털 미디어와 시각 문화에 관한 고정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아날로그의 반격≫,≪생각을 빼앗긴 세계≫ 등을 번역했다. 현재 사단법인 코드의 미디어 디렉터이자 미국 Pace University의 방문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