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대응 ‘新 마셜 플랜’ 제안
  위기가 終戰 때만큼 힘들다는 방증
#먼저 시동 건 나라는 미국 아닌 중국
  은폐 의혹 벗고 글로벌 구원자 부각
#한국 보건의료 수준 전 세계에 과시 
#소프트파워 강국 되려면 세 가지 필요
①위기 지역에 지원 아끼지 말자

②종합병원·의료교육 ‘패키지 수출’
③‘코로나19 백서’ 냉철하게 만들자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25일 ‘중국이 위기 속에서 소프트파워를 과시한다(China displays soft power in a crisis)’라는 제목의 기사를 1개 면을 털어 게재했다. ‘중국이 유럽과 아프리카 국가에서 구원자로 등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코로나19 위기로 만신창이가 된 경제가 되살아나자 바이러스 발생과 은폐 의혹, 언론통제 등으로 손상된 국가 이미지와 명성을 복구하는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가히 유소작위(有所作爲: 국제사회의 현안에 적극 개입한다)요, 유소분발(有所憤發: 유소작위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이다. 시진핑 시대의 외교 전략이다. 
특히 이탈리아·스페인과 동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의료진과 구호물자 공급을 늘리면서 미국의 소프트파워에 도전하는 모양새까지 연출한다. 불과 한 달 전에 위기의 한복판에 섰던 것과 아주 딴판이다. 재난 외교를 통해 위기수습 능력을 과시하는 한편으로 ‘보건의료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페인, EU 차원 新 마셜 플랜 호소

‘스페인, 복구를 위해 EU 국가들에 신 마셜 플랜 호소’. 지난 23일자 파이낸셜 타임스(FT)의 1면 톱기사 제목이다. FT 보도에 따르면 스페인은 16일 열린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재무장관 화상회의에서 유럽 경제를 구할 ‘신(新) 마셜 플랜’ 을 제안했다. 스페인의 페드로 산체스 총리가 코로나19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사상 최대의 경제자원과 물자 동원”을 지시한 뒤 내놓은 긴급 제안이었다.

이에 호응해 샤를 미셸 유럽이사회 의장은 유럽연합(EU) 지도자들이 마샬 플랜 같은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고 폴리티코 유럽이 25일 보도했다. 유럽이사회는 EU 회원국의 정상·각료로 구성된 EU 정상회의체이며 역내 주요 문제를 다룬다. 이렇게 유럽의 마셜 플랜 구상은 하나씩 가닥을 잡아나가고 있다. 전염병과 경제난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상황에서 냉전체제의 대표적 산물인 마셜 플랜을 72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재소환하기에 이른 것이다.

마셜 플랜이란 1948년 유럽 동맹국들의 전후 재건·원조를 위해 미국이 마련한 경제 부흥 프로그램이다. 1945년 종전 뒤 옛 소련이 동유럽으로 영향권을 확대한 뒤 서유럽까지 압박하자 미국은 효과적인 세계전략을 무척 고심했다. 그 결과로 조지 마셜 당시 국무장관은 1948년 3월 서유럽에 4년간 132억 달러(2020년 현재 가격으로 1280억 달러에 해당)를 지원해 경제 부흥을 돕는 ‘마셜 플랜’을 입안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국토와 경제를 재건해야 하는 유럽을 자기네 영향권에 두려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미국은 민주주의·시장경제를 두 축으로 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을 주로 지원했다.

경제 지원은 군사 동맹으로 이어졌다. 딱 한 해 뒤인 1949년 4월 트루먼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창설했다. 나토는 이후 러시아의 서진(西進)을 막는 서방의 핵심 안보 축으로 작동해왔다. 안보와 경제는 동전의 양면임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다. 미국은 마셜 플랜을 통해 전후 경제난으로부터 유럽을 구하는 동시에 나토라는 집단안보체제를 형성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됐다. 통일독일은 나토 회원국이 됐다. 뒤이어 동유럽과 옛 소련의 일부였던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발트 3국)까지 나토에 가입했다. 마셜 플랜은 서방세계의 결속을 다진 부흥전략으로 평가된다. 미국은 경제·안보 동맹을 바탕으로 서방세계의 맹주가 됐다. 유럽이 마셜 체제를 21세기에 재소환한 것은 그만큼 코로나19 위기 충격이 컸음을 말해 준다.

중국은 ‘21세기 마셜 플랜’을 가동하나

그런데 코로나19 위기로 지구촌이 고통 받는 요즘, ‘21세기 마셜 플랜’을 가장 먼저 가동한 나라는 아이로니컬하게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라 할 수 있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중화권 매체 아주주간(亞洲週刊)은 최신호에서 ‘세계 공동으로 역병에 대항하는 것을 돕기 위해 중국의 역량(力量)이 달려간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잡지는 코로나19 팬데믹이 선언된 가운데 중국이 세계 각국에 의료진·물자를 파견하고 있다는 소식을 다뤘다. 전염병과의 싸움 경험을 공유하고 국제연대를 도모하며 책임 있는 대국으로서 역할을 하겠다는 중국 측 다짐도 소개했다.

중국은 유럽 국가 중 위기 상황이 가장 심각한 이탈리아를 맨 먼저 지원했다. 지난 11일 구호물품과 의료진을 실은 중국 여객기가 로마에 착륙했다. 의료·방역 전문가 9명과 방호물자 42상자를 보낸 것이다. 로마에 도착한 구호물품 상자에는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했다는 명언이 적혀있었다. “우리는 같은 바다의 한 조각 파도이고, 같은 나무의 잎이며, 같은 정원의 꽃이다.” 이 말을 이탈리아어, 영어로 써놓았고 그 아래엔 ‘샤오미 기부’라고 명기한 표식을 붙였다. 중국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나온 이탈리아 정부는 EU를 향해 의료진 마스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모두 외면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구호물품을 들고 나타난 나라는 중국이었다.

국수주의 구호 아래 一省一國 실천

중국은 코로나19 확산 초기와 달리 요즘 국수주의적 자신감을 과시한다. 중국역량(力量), 중국감은(感恩), 중국속도, 중국정신, 중국원조 같은 용어를 쏟아내며 중국인들의 불만어린 시선을 나라 밖으로 돌리고 있다. 특히 중국 의료진은 일성일국(一省一國) 원칙 아래 구호 여력이 있는 31개 지방정부(성·시·자치구)에서 해외 국가를 하나씩 맡아 지원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예컨대 이란에는 상하이(上海), 이라크에는 광저우(廣州)가 의료진을 파견하는 방식이다. 이란에 보낸 상자에는 ‘우한의 승리는 후베이의 승리, 후베이의 승리는 중국의 승리, 중국의 승리는 세계의 승리(武漢勝則湖北勝, 湖北勝則中國勝, 中國勝則世界勝)’라는 구호가 적혀있었다.

독일 국제방송 도이체벨레(DW)는 “코로나19가 확산되는 유럽에 대해 중국이 방역 및 의료 지원을 통해 국제적 연대감을 강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3월 25일자)
실제로 이탈리아의 루이지 디 마이오 외교장관은 중국 지원을 받고 나선 “아직도 이탈리아를 도우려는 나라가 있다”며 감격해했다고 한다. 이탈리아는 코로나19 위기 초기에 EU 각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어느 나라에게도 직접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최근에야 독일 바이에른 주(州)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가 병상이 모자라는 이탈리아를 돕기 위해 확진 환자 일부를 받기로 했다.
중국은 스페인에도 의료장비 지원, 방역 전문가 파견 등의 도움을 주었다. 곧 프랑스에도 그럴 예정이다. 그래서인지 EU 집행위원장은 유럽을 대표해 중국 리커창(李克强) 총리와의 전화 통화에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시진핑 주석은 요즘 각국 지도자와 차례차례 통화하며 위로와 함께 지원 의사를 전달해왔다.

중국, 동유럽의 해결사로 급부상

중국의 공공외교는 냉전 시절 공산권이던 동유럽에서 유감없이 펼쳐지고 있다. 발칸반도에 있는 인구 700만의 세르비아는 뾰족이 도움을 청할 대상이 없는 처지다. EU 및 나토 가입을 희망하지만 아직 후보국일 뿐이다.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분리된 세르비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 개입에 이어 알바니아계 학살, 코소보 전쟁을 치르면서 서방 선진국에겐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혀 있다. 유일한 맹방 러시아는 국제유가 하락에다 코로나19 차단을 위한 방역 때문에 제 코가 석 자다. 이런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지난 21일 방역 전문가 6명과 방호복, 마스크, 호흡기 등을 긴급 수송했다. 방역·의료 인력은 광둥(廣東)성 소속이었다.

아주주간에 따르면 세르비아 정부는 중국 지원에 열렬하게 반응했다. 대통령이 각료급 인사들을 수행하고 직접 베오그라드 국제공항에 나왔다. 현장에서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에 입을 맞추면서 감사를 표시했다. FT에 따르면 이 장면은 중국 TV에서도 방영돼 무려 3억 명이 시청했다. 이에 앞서 세르비아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과의 전화 통화에서 양국 관계를 ‘강철처럼 견고한 100년 친구 사이’라고 표현한 뒤 “코로나와 싸우는 데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중국은 앞으로 300명의 의료요원을 세르비아에 더 보낼 예정이다.

중국 정부 차원의 구호활동과는 별도로 ‘잭마 재단’이 주도하는 민간지원활동도 눈길을 끈다. 이 재단은 알리바바 창업자이자 공산당 당원인 마윈(馬雲)이 설립한 것으로 그의 영어 이름을 딴 것이다.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이 관리하는 뉴스 사이트인 중국망은 지난 23일 잭마 재단이 아프리카 54개 국가에 지원할 540만 장의 마스크, 108만 개의 검사 키트, 4만 개의 방호복 세트, 6만 개의 방호 마스크가 에티오피아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했다고 전했다. 코로나19 확진자는 현재 아프리카 41개 국가에서 발생했다. 잭마 재단은 일본, 한국, 미국과 10여 개 유럽 국가에도 의료 물자를 지원해왔다. 잭마 재단은 2014년 설립돼 교육, 기업가 정신, 여성 리더십, 환경 분야에 초점을 맞춰 활동해왔다. 미국의 ‘빌게이츠 재단’을 연상케 한다.

재난외교에 손 놓은 美 트럼프 정부

중국의 적극적인 공공외교에 대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미중의 역할이 뒤바뀐 듯한 느낌까지 준다. 트럼프 시대의 고립주의, 미국 우선주의 때문이다.
미중은 과거 세계적인 감염병이 발생했을 때 서로 협력했다. FT에 따르면 2014년 서아프리카에서 1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에볼라 바이러스가 확산됐을 당시 미중은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피해 국가들을 도왔다. 시에라리온의 임상병리실에서 양국 의료요원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일했다. 공항에선 구호품을 함께 하역했다.
2004년 동남아시아를 강타한 쓰나미 사태 당시에도 그랬다. 자연재해가 아닌 금융위기에도 손을 잡았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중국 정부는 2009~2010년 4조 위안(당시 환율로 약 5860억 달러)을 투입해 대대적인 경기 부양에 나섰다. 미중 정책 공조 덕에 세계경제는 짧은 기간에 위기 국면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 집권 뒤 미중 무역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협력 대신 대립의 시대가 열렸다. 이런 냉기류 때문에 코로나19 위기를 둘러싸고도 중국은 미국과의 협력을 배제하고 있다.
미국에서 발행하는 아시아·태평양 전문 국제뉴스 잡지인 더디플로맷은 지난 14일 ‘중국의 코로나바이러스 급선회’라는 기사에서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퍼지자 중국은 자국을 성공사례로 내세우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이 위기를 기회로 활용해, 트럼부 정부 이전에 미국의 전매특허 같았던 재해 외교, 공공 외교를 활발히 펼치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 일각에선 중국의 재해 외교에 경계감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외교협회(CFR)가 발행하는 격월간 국제관계 전문지인 포린 어페어스는 지난 18일 인터넷 판에서 “중국이 보건의료 실크로드를 추구한다’는 오피니언 기사를 실었다. 커트 캠벨 전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 러시 도시 브루킹스연구소 중국전략구상국 국장의 기고였다. 중국이 국가 이미지 실추를 만회하고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하기 위해 코로나19 위기를 활용한다는 지적이 담겨있다.

미국의 따가운 눈길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지원을 받는 당사국에선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미국이 손 놓고 있는 상황과 대조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위기 초기에 독일의 백신 개발회사를 미국이 사들여 ‘미국인만을 위한 백신’을 공급하겠다는 구상을 내놨다가 독일의 거부로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오는 11월 대선에서 재선을 꾀하는 트럼프가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재앙 앞에서 ‘미국 제일주의’를 외치다 거꾸로 미국 이미지에 먹칠을 한 것이다.

중국이 요즘 전개해 나가는 코로나19 지원 활동은 일종의 ‘소프트파워 외교’다. 재해라는 극한 상황에서 국제 사회의 신뢰지수를 높이려 한다. 소프트파워란 개념은 미국 하버드대의 조셉 나이 교수가 창안한 것인데, 국제 사회에서 돈이나 힘이 아니라 매력을 활용해 상대방을 포섭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국력을 일컫는다. 소프트파워 외교의 수단은 문화, 정치적 가치, 그리고 외교정책을 바탕으로 한다. 상대방의 지지, 이해, 공감이 필수적이다. 나이 교수는 2012년 “최고의 프로파간다는 프로파간다가 아니다”라며 “정보의 시대에는 신뢰가 최고 자산”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실 소프트파워는 오랫동안 중국의 아킬레스건이었다. 미국이나 서방 선진국과 달리 중국의 소프트파워 평가 순위는 늘 뒤로 밀려왔다. 영국의 글로벌 뉴스 잡지인 모노클은 2010년부터 50가지 요인을 조사해 매년 국가별 소프트파워 순위를 발표해왔다. 여기서 중국은 항상 뒷자리였다. 2014/15년의 경우 미국이 1위였으며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가 뒤를 이었다. 중국은 한국(14위)보다 뒤진 19위를 차지했을 뿐이다. 2018/19년의 경우에도 프랑스가 1위였고 독일, 일본, 캐나다, 스위스 순이었다. 미국 9위, 한국 15위였고 중국은 여전히 19위에 머물렀다. 중국이 공자학원을 전 세계에 수출하고, 개도국에 대한 대규모 유무상 원조, 개도국 출신의 유학생에 대한 국비 지원 등을 해온 것도 이를 의식한 것이다.

포린 어페어스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 어느 순간에 미국의 위상이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강대국 지위나 글로벌 질서는 처음에 완만하게 변화를 하지만 돌발 상황에서 변곡점을 맞으면 확 바뀔 수 있다. 중국은 팬데믹을 씨줄로, 의료·위생 용품 생산력을 날줄로 삼아 재해 외교와 소프트파워의 업그레이드를 꾀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도 재해 외교, 공공 외교를 고민해야

이제 한국으로 눈을 돌려본다. 우리 사회는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새삼 ‘보건의료(체력)가 국력’임을 절감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위기 초기에 혼란을 겪었지만 그동안 축적된 보건의료 역량을 바탕으로 짧은 시간에 위기를 통제해 나가고 있다.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메르스) 사태 이후 마련한 감염병 관리 종합대책에 따라 검사·진단의 최신 기준을 만들고 감염 의심자의 추적·격리, 역학(疫學) 인력을 동원한 감염경로 추적의 매뉴얼을 발전시켜 놓은 덕택이다. 공중보건의들의 노고와 방역·의료 전문가, 병의원 근무자, 보건의료 정책 담당자들의 헌신적인 자세도 큰 몫을 했다.

한국은 이번 위기를 통해 K검사, K방역, K보건의료, K건강보험 등 보건의료 분야의 저력을 확인했다. 무엇보다 빠르고 정확한 코로나19 검사는 실시간으로 감염경로를 추적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세계적인 화제가 된 드라이브스루 검사와 진단키트 등은 ‘글로벌 명품’으로 자리매김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4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진단키트와 의료·방역 물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다. 국제사회로부터 한국은 위기상황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중견국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이런 기대에 벗어나지 않으려면 우리 정부는 국가전략 차원에서 세 가지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첫째, 코로나19의 위협을 받는 아프리카와 중동, 남아시아, 중남미에선 한국의 방역시스템과 전염병 관리 노하우를 공유하길 희망하고 있다. K팝, K드라마, K영화에 이어 이번 기회에 K보건의료의 노하우를 개도국들과 나누고, 위기 국가에 대해선 최대한 긴급 지원을 해줘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은 국가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중국이 요즘 선진국과 개도국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로 재난 외교를 펼치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K보건의료 허준 프로젝트’(가칭)라는 이름으로 정부개발원조(ODA)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싶다.

둘째, 한국의 종합병원과 의대, 간호대, 약대 등 교육기관을 한데 묶어 패키지로 수출하거나 지원하는 방안도 있다. 국제 사회의 책임 있는 멤버로 인정받고 헬스케어 육성, 일자리 확대라는 일석삼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특히 보건의료 인프라 및 교육 시스템이 필요한 중동 산유국을 우선 협력 대상으로 선정할 수 있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직접 원조 대신 의료인력 양성을 지원받았던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떠올리면 된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을 지내다 과로로 순직한 이종욱 박사를 기려 ‘이종욱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추진할 수도 있다. 단순하게 코로나19 대응을 지원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재난 공공외교, 보건의료 공공외교를 새로운 브랜드(K외교)로 키울 수 있다.

셋째, 한국의 코로나19 위기 대응과정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인간이 아직 모르는 미지의 바이러스 공격에 완벽하게 대응하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번 기회에 우리의 역량을 냉철하고 철저하게 분석하는 ‘코로나19 백서’를 써야 한다. 정치적 입장에서 자화자찬하거나 무작정 깎아내려선 안 된다.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보건의료시스템 전반을 다시 한 번 업그레이드하는 게 필요하다. 그것이 제2의 바이러스 위기를 겪지 않는 길이다. 이런 철저함과 겸손함을 겸비할 때 한국은 중견강국, 소프트파워의 모범국가로 인정 받을 수 있다.


채인택 필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1988년 중앙일보에 기자로 입사해 국제·문화·과학기술 분야에서 주로 일했다. 국제부장, 논설위원을 지냈고 현재 국제전문기자로 활약한다. 국제 분쟁과 갈등, 인도주의 활동, 과학기술 혁신이 만드는 삶과 문화의 변화에 대한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