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하는 지금 동아시아 정세를 한 세기 전 구한말의 그것에 흔히 비유한다. 냉전 붕괴 뒤 30년이 지나도록 유사 냉전 상태가 지속되면서 별다른 변화가 없어보이던 한반도와 주변 동아시아 지형이 최근 급변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예상을 뛰어넘은 중국의 급격한 부상과 이로 인한 미중의 격돌, 빨라지는 일본의 상대적 쇠퇴, 한일 갈등 심화로 표출된 동아시아 정세 급변은 최근의 ‘코로나19’ 사태 확산으로 가속도가 붙고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이런 변동은 우리에겐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

최근 <아사히신문>이 일본의 석학인 데구치 하루아키(出口治明) 리쓰메이칸 아시아태평양대학 총장(72·사진)의 인터뷰를 실었다.  “미일 안보조약 개정 벌써 60년”이라는 제목의 인터뷰를 새로운 동아시아 정세 인식의 재료로 삼아 우리의 대응전략을 생각해 본다.  [편집자]

마지막 ‘노마드’ 일본의 우파

중국이 한반도를 수천 번 침략했다는 ‘상식’은 사실인가?
고정불변의 사실인 듯 널리 회자돼 온, ‘중국’이 한반도를 수없이 침략 또는 침범했다는 세간의 언설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어느 날 통렬하게 깨닫게 해 준 것이 이삼성 한림대 교수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한길사, 2009년)였다.

우리 민족이 유사 이래 중국으로부터 침략·침범을 당한 게 수천 번에 이른다는 유력 보수언론의 보도는 세간의 속설에 토대를 둔 것인지 거꾸로 그런 보도가 세간의 속설을 재구성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한국인들의 세계인식, 고정관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 동아시아 정세관 및 역대 정부의 대외정책 수립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전에 반세기 가까이 우리의 뇌리에 ‘중공’으로 각인된 중국은 철저한 반공국가 대한민국에겐 불구대천의 ‘원수’국가였다. 적어도 1992년 한중 수교 이전까지의 중국은 ‘중공 오랑캐’, ‘인해전술’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공산당’ 이미지로 뒤덮여 있었다.

그 때문인지 중국이 유사 이래 우리 땅을 수천 번 침략했다는 그 보수언론의 주장은 의심의 여지없이 먹혀들어 갔고, 한중 수교 30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그 ‘사실’에 아무런 의문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아 보인다.

하지만 이삼성 교수가 한중간에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면밀히 검토한 끝에 내린 결론은 그게 아니었다. 7세기 당(唐)의 한반도 개입 뒤 통일된 중화체제로서의 ‘중국’이 한반도를 침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이 교수는 얘기했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통틀어 당 제국 완성과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 및 그 왕국들이 침범당한 것은 오히려 중원에 자리 잡은 통일제국으로서의 중화체제, 즉 중국이 약화되거나 무너졌을 때였다.

그럴 때 한반도도 전란에 휩싸였고, 그때 이 땅을 침범해 온 것은 통일된 중화체제로서의 중국이 아니라 약화되거나 무너진 중국의 힘의 공백을 메우려고 몰려든 중화체제 주변세력, 주로 북방세력들이었고 그들이 고려와 조선을 침범했다. 예컨대 10~11세기의 고려시대에 거란의 거듭된 침략전쟁과 13세기 몽골의 30년 침략전쟁, 17세기 중반의 후금 및 청(淸)의 조선에 대한 두 차례 침략전쟁(정묘호란, 병자호란)도 중원의 중화제국이 약화되거나 무너질 때 감행됐다.

침략자들은 중국이 아니라 ‘주변 노마드’

이삼성 교수는 이를 중화제국과 한반도 왕조, 그리고 주변 북방세력(이삼성 교수는 이를 ‘북방 노마드’ 세력이라 부른다)의 ‘삼각구조 함정’으로 설명한다. 중국, 즉 ‘중원의 통일제국=중화체제’가 굳건하고 강성할 때는 삼각구조가 형성되지 않는다. 삼각구조는 중화체제가 약화되거나 무너질 때 북방 노마드들에게 팽창 공간이 확장되면서 형성된다.

그때 힘이 세진 북방 노마드 세력이 중원을 장악하기 직전에 또는 장악할 무렵 전쟁이 빈발해지며, 중원체제를 떠받치고 있던 또 하나의 ‘안정자’ 역할을 했던 한반도 왕조를 먼저 쳐서 배후 위험을 제거하고 중원으로 진군한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병자호란은 그런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보수언론이 수천 번에 걸친 중국의 이 땅 침략 역사라고 한 것은 그런 삼각구조 속에서 벌어진 북방 노마드와의 격돌이거나 고려·조선 국경지대의 수많은 부족 단위의 작은 충돌들을 모두 ‘중국의 침략’으로 산정한 경우일 것이다. 그런 전쟁을 ‘중국’의 한반도 침략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반도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안정자’

한반도를 침략했던 북방 노마드도 일단 중원을 장악하고 통합된 중화체제를 재구성한 뒤에는 한반도를 침략 대상이 아니라 중원체제를 떠받치는 안정자로 활용했다. 통일된 중화체제로서의 중국은 오히려 한반도의 왕조들이 북방 노마드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할 때 원병을 보냈다. 그것이 중화체제(중국)를 유지하는 근간의 하나였고, 오랜 세월 동아시아에 존속했던 ‘조공체제’는 하나의 독립된 세계였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를 떠받친 일종의 국제관계 룰이었다.

한반도 왕조들도 그런 국제관계의 중요한 플레이어 가운데 하나였고, 통합된 중원체제(중화체제 또는 중국)와 순망치한의 관계를 맺은 일종의 동맹세력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명 왕조가 조선에 대규모 지원병을 보낸 것이나 아편전쟁 이후 무너져 가던 청이 동학농민전쟁과 일본군의 침략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낸 것도 그런 맥락 위에서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명이 무너진 데에는 그때의 원병 파병 후유증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청의 멸망도 결국은 조선 지배를 둘러싼 신흥제국 일본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탓이 크다. 조선이 무너지면 중국도 위기에 처하게 되는 순망치한의 한중 관계. 청나라 말의 리훙장과 위안스카이 시절의 청일전쟁을 전후한 중국의 한반도 개입과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도 중국이 무너져 가던 때의 서양 제국과 일본의 개입에 대적하기 위한 반작용으로 시도된 중화체제의 자기보존 본능의 몸짓으로 읽을 수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때의 중국 인민해방군의 개입도,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그런 맥락 위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이삼성 교수에 따르면 흔히 얘기하는 중국, 우리 역사에서 통상 중국으로 지칭되는 대상은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매우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함의를 지닌 존재다.

어쨌거나 그런 ‘중국’을 ‘침략의 원흉’으로 인식하는 것은 사실의 오인이거나 기억의 착종이거나, 의도된 ‘기억의 정치학’의 산물일 수 있다. 마치 전쟁의 가해자 일본이 자신들을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는 것, 한반도 분단의 최초 기획자라 할 수 있는 미국을 ‘민족의 구원자’로 여기는 것과 유사한 기억의 정치학은 중국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앞서 얘기했듯이 반공국가 한국과 중국군의 전쟁 개입 및 남북 간의 전쟁, ‘매카시 선풍’ 등으로 상징되는 ‘빨갱이 마녀사냥’ 등 굴곡진 근현대사의 체험들이 거기에는 강렬하게 투사돼 있다.

중원을 겨냥했던 최후의 노마드, 군국 일본

이삼성 교수의 생각에 기댄다면, 일본을 동아시아 북방 노마드의 최후 주자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일본은 북방이 아니라 남방이지만, 북방이냐 남방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근대 이전의 중원 정복세력이 주로 북방 대륙에서 밀고 내려 온 세력이어서 북방이란 수식어가 붙었을 뿐, 중점은 중원 주변의 노마드 세력이라는 데에 주어져 있다.

유목민족으로 번역되는 노마드는 한 자리에 정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기동력 좋은 집단이며, 상황에 따라 강력하게 통합된 그들이 중화체제가 허약하거나 정체할 경우 일거에 밀고 내려와 중원을 장악하는데, 그때 그들의 기동력은 대규모 기마병 편성과 장기 보관이 가능한 고칼로리의 말린 고기(육포) 등 장기간·장거리 병참체제 확보를 통해 극대화된다.

일본군은 말하자면 남방에서 밀고 올라온 새로운 유형의 해양세력 노마드였다. 인구 증가와 대양 항해가 가능해진 시대, 서양 총포를 무기로 활용할 수 있게 된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들의 제1차 시도인 임진왜란은 자체 역량의 한계와 한반도 주민들의 저항(의병), 조명(朝明)연합군의 대응에 막혀 실패했다.

그들이 성공한 것은 그 300년 뒤인 19세기 말, 역시 중국 중원을 표적으로 삼았던 서양 제국주의 열강과의 합작 내지 그들에 편승한 결과였다. 남방 노마드 일본의 초기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개량된 서양 총포의 위력과 이를 운용할 수 있게 해준 서양 군사체계였다.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고 정복한 것은, 식민주의자들이 즐겨 동원하는 ‘문명’이나 ‘문화’의 수준과는 무관한 일이다. 몽골이나 거란, 돌궐이 중원의 일부 또는 전체를 장악한 것은 그들이 중원보다 더 뛰어난, 앞선 문명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를 침략하고 정복한 것도 그들의 문명 수준이 더 높아서가 아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침략 초반에 연전연승한 것이나 근대 청일전쟁에서 이긴 것 역시 그들의 문명이나 문화 수준이 높아서가 아니라 총포 장비와 그것을 운용하는 군사체계(선취한 서양 근대과학·기술체계)가 앞섰기 때문이다.

막판에 내부 반란으로 실패했지만 오다 노부나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장 이전에 일본을 거의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총포를 가장 효율적으로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에서도 오래 강의한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의 <나의 한국사 공부>(너머북스, 2013년)를 보면, 중국에선 이미 송 왕조 때 근대체제를 확립했고, 그것을 뒷받침한 것은 발전된 농업・제조업에 토대를 둔 높은 물적 생산력과 과거제도로 대표되는 고도의 지식체계(신유학=성리학)와 인쇄・제지술, 그것을 소비하는 광범위한 독립적 소농체제의 확립, 신분체제 타파, 중앙집권체제 완성 등의 혁신이었다.

조선에서도 일찍부터 과거제가 도입됐으며, 그것을 운용할 수 있게 해 주는 물적 토대와 지식체계 및 산업과 소비층을 갖추고 있었다. 미야지마 교수가 보기에 그런 점에서는 중국과 조선이 유럽을 훨씬 앞서갔다.

중앙집권체제 부재 속에 지방분권 역사가 이어졌던 일본은 잦은 전란을 겪은 일종의 ‘전쟁국가’적 특성을 띠게 된다. 정주 농경중심 사회와 노마드 세계는 지배구조도, 작동원리도 다르다. 정복자들은 주로 노마드지만 그들이 더 문명화됐다는 건 난센스에 가깝다. 식민주의자들은 그 난센스에 허버트 스펜스 류(類)의 약육강식, 우승열패 식 사회다위니즘이라는 사이비 과학을 덧칠해 상식으로 바꾼 뒤 피지배자들을 세뇌했다.

어쨌든 근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그 총포의 성공을 과신한 나머지 중국 대륙까지 장악할 수 있다는 오판 속에 빠른 속도로 정복지를 확장해 가는 단기전 위주의 전략을 펼쳐 초기에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성공은 빠른 속도로 확보해 간 정복지라는 점들을 철도·도로라는 선으로 잇는 아날로그적 그물망 같은 것이었으며, 괴뢰국 만주국을 제외하면 점(點) 외의 광대한 면(面)들을 장기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힘도 전략(소프트웨어)도 없었다.

결국 일본 제국군은 중국의 끝없는 저항과 훨씬 더 강력한 근대 군사체계와 그것을 뒷받침한 경제력을 지닌 미국의 반격으로 몰락했다. 일제의 그 침략전쟁으로 2000만 명의 아시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남방 노마드’ 일본의 성공과 실패

‘제국 일본’의 성공과 실패는 한반도도 하나의 꼭지점을 이룬 동아시아 전쟁과 평화의 ‘삼각구조’의 19~20세기형, 즉 근대형 버전의 형성과 해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근대 최후의 동아시아 노마드 일본제국. 기세등등했던 그 남방 노마드의 등장은 어떻게 가능했으며, 왜 실패로 끝났을까? 그것을 일본 내부자의 시선으로 훑어보는 것은 흥미롭지 않겠는가.

2020년 2월 4일 <아사히신문>에 실린 데구치 하루아키(出口治明) 리쓰메이칸 아시아태평양대학 학장(총장)의 인터뷰(“미일 안보조약 개정 벌써 60년”)는 그 문제를 생각하는데 하나의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다.

데구치 하루아키 학장은 1948년생으로 일본생명보험에 입사해 영국 현지법인의 사장 등을 거친 뒤 2008년에 라이프넷 생명보험이란 회사를 차렸고, 그 10년 뒤인 2018년에 국제 공모를 통해 리쓰메이칸 아시아태평양대학 학장이 된, 경제와 역사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메이지유신의 계기가 된 흑선(黑船, 페리 제독의 증기선)의 내항(1853년) 때 페리는 왜 일본에 왔을까. 당시 미국은 중국 시장을 둘러싸고 영국과 경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이 경제 패권을 쥔 인도양 주변에서는 미국이 이길 수 없었다. 교역을 하는데 물품 값에다 뉴욕~런던간의 운임까지 더 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태평양 항로를 개척하고 중국 시장과 직접 거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열도의 존재가 미중 무역을 생각할 때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됐다.”

말하자면 미국에게 일본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고, 중국으로 가는 길목의 현관이었던 것이다. 미국은 그런 일본과 손을 잡았고, 나중에 일본이 중국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을 주장할 때까지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지지했다.

“메이지유신(1868년) 약 15년 전 일인데, 그때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라는 사람이 노중수좌(老中首座, 총리급)를 맡고 있었던 것은 일본에겐 행운이었다. 그는 아편전쟁 등을 연구해서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의 피아(서양과 일본)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 결과 개국을 하고 교역을 해서 국민국가를 만들고 부국강병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랜드 디자인을 그렸다.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 등 규슈 일대), 조슈(야마구치현 일대) 등은 존황양이로 대항했지만 사쓰에이(薩英, 사쓰마-영국) 전쟁이나 시모노세키 전쟁(下関戦争. 죠슈번과 영국·프랑스·미국·네덜란드 연합군 간의 전쟁)에서 지고 나서 양이(攘夷, 서양 배척)는 안 된다는 걸 사쓰마와 죠슈는 체험을 통해 깨달았다. 따라서 에도 막부 붕괴 뒤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개국·부국·강병이라는 아베의 그랜드 디자인을 채용해 일본의 근대화를 크게 진척시켰다.”

일본 국가생존전략의 제1논점: 개국

그리하여 일본은 주변의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서 너무 잘 나가다 보니 오만해져서 개국을 버리게 된다. 런던 군축조약과 국제연맹 탈퇴 등으로 상징되듯 부국강병으로 뭐든 할 수 있겠다고 과신하게 됐고 그 길로 달려간 결과가 2차대전 대패배였다.”

메이지유신의 주류세력은 몇 차례 성공 뒤 아베 마사히로가 설계한 개국, 부국, 강병 디자인에서 개국을 버리고 다시 자존망대의 독존적 쇄국체제로 간 것이 패착이었다는 얘기다. 데구치는 그것을 다시 돌려놓은 사람이 패전 직후 총리 자리를 오래 맡았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였다고 본다.

“전후(戰後)에 요시다는 다시 한 번 ‘개국’ ‘부국’ ‘강병’이라는 3종 카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깊이 생각했다. ‘강병’ 부분은 안보조약을 통해 미국으로 대체하고, ‘개국·부국’으로 재건을 꾀하기로 결단했다. 요시다가 그런 큰 그림을 그리고 실행한 것이 오늘날의 번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제1 논점이다.”

일본 패전 뒤 전승(戰勝)의 연합국들이 동서 두 진영으로 분열해 냉전이 시작된 것도 일본에겐 행운이었다. 그는 말한다. “일본 주변의 지도를 위아래 거꾸로 놓고 보라. 옛 소련이나 중국이 태평양으로 나가려면 일본열도는 엄청난 방해물이 된다.”

그것은 곧 미국엔 엄청난 방파제였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지난해 11월 말 타계)가 일본 ‘불침항모론’을 앞세우며 당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정부와 이른바 ‘론-야스’ 관계를 맺으며 밀월관계를 구가했는데, 그때가 1990년대 초에 일본 거품경기가 꺼지기 전 최고조에 이르렀던, 일본의 전성기였다.
지금은 중국이 일본의 최대 무역상대국이지만 오랫동안 일본 최대의 무역상대국은 미국이었다.

“냉전 때는 (…) 미국의 가상적 소련을 봉쇄하기 위해 일본열도가 지정학상 절묘한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냉전기간에 미국은 일본을 정말로 중시했다.”

국가생존전략의 제2논점: 지정학적 가치 추락

“전후의 일본은 미국이라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는 자식과 같은 존재로 철강, 자동차, 반도체 등 미국의 주요 산업을 전부 찌부러뜨리면서 성장해 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보통의 나라였다면 움푹움푹 파 먹혀 쓰러졌겠지만, 미국은 그 정도로 무너질 나라는 아니었다. 하지만 냉전 종결로 미국이 중국, 러시아와 직접 교섭을 하게 되면서 일본의 지정학적 지위는 저하했다. 이것이 제2 논점이다.”

제3의 논점, 그러면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다.
“안전보장을 생각할 때 스스로 방위력을 강화하든지 아니면 어느 쪽과 군사동맹을 맺는 것, 이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예컨대 미 해군 최신예 항공모함 1척이 약 1조4000억 엔(약 14조원)이다. 이건 해상자위대 전체 예산과 맞먹는다. 지금 일본의 재정상황을 볼 때 일본 단독으로 감당할 수 있는 군비는 도저히 충당할 수 없다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국가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2배 이상(약 250%)으로 패전 때보다 더 많아진 상황에서 그건 무리다.”

그러면 동맹을 맺어야 하는데, 데구치 생각으로는 동맹을 맺으려면 상대가 적어도 일본보다는 세야 하고, 그렇다면 미국, 중국, 유럽연합(EU)밖에 없다. EU는 너무 멀어서, 미국·중국 중에서 골라잡아야 하는데, 둘 다 가능하단다. 이제부터 얘기가 더욱 흥미로워진다.

기자가 지금의 중국이 과거 당·청과 같은 대제국, 말하자면 통일된 중원의 중화체제에 필적하는, 몇 세기만에 한 번 있는 혁명적인 획기(劃期)라며 적대하기보다는 동맹을 맺는 것이 중장기 전략으로 좋지 않겠느냐고 하자 그의 대답은 이랬다.

제3논점: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이라는 선택지는 가능하고, GDP 2, 3위의 연합(중일연합)이니까 아마도 미국이 제일 싫어할 것이다. 국민감정이나 지금까지의 경위를 생각할 때 미국이 싫어하는 동맹을 백년지계로 실현할 수 있을지 큰 의문부호가 찍힌다. 소거법으로 미일동맹을 중시해 갈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조건들을 하나하나 검토해서 불리하거나 안 되는 것 등 마이너스 요소들을 지워나가다 보면, 결국 미일동맹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미국이 중국에 질 것 같진 않다. 서양 역사를 보면 패권국의 교체는 인구감소가 계기가 됐다. 근세 이래 패권국은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미국 순인데, 앞 세 나라는 모두 인구가 줄면서 쇠퇴했다. 하지만 미국은 인구가 계속 늘고 있는 예외적인 패권국이다. 기업가치 평가액이 10억 달러가 넘는 비상장 벤처기업을 유니콘이라고 하는데, 미국에는 200개 정도 있다. 중국은 아직 100개 정도. 미국의 유니콘은 유학생과도 얽혀 있어서, 미국이 전 세계에서 인재를 불러 모으는 희망의 나라로 남아 있는 한 쉽게 쇠퇴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을 만만하게 봐서도 안 된다고 그는 말한다.

“교육에 계속 집중 투자하면서 PISA(국제학습성취도 조사)의 시험 결과가 월등하다. 하이테크나 AI분야는 미국과 호각지세를 이룬다. 화웨이가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지만 15억 인구가 있어서 데이터는 얼마든지 모을 수 있다. 하이테크 분야 패권경쟁의 행방은 예측불허다.”

‘미일동맹 지속 쪽을 선택할 경우 중국과는 잠재적인 적대관계가 돼 위험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에, 데구치 학장은 독일을 통일한 비스마르크 재상의 능란한 수완을 떠올린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국익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러시아와 적대하는 오스트리아, 영국과 삼국동맹을 맺는 한편 비밀리에 러시아와 재보장조약을 맺어 관계를 심화시켰다. 당시 독일의 기본전략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협공을 받는 동시다발작전을 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비스마르크가 퇴진한 지 4반세기(25년) 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를 적으로 돌렸다. 적을 최소화한 비스마르크의 능수능란한 외교를 포기한 결과다. 일본에 필요한 것은 비스마르크적 발상이다.”

미국과 중국, 두 마리 토끼를 잡아라

부연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이것이 데구치가 하고 싶었던 말의 핵심이다.
“냉전이 끝났기 때문에 미국은 미일동맹을 자신들에게 사활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따라서 일본은 인간관계, 경제관계, 외교적 지원 등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 동맹 유지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그 한편으로는 가능한 한 중국과 사이좋게 지내도록 한다. 경제 파이프가 끊어지지 않도록 두껍게 만들어가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해 놓으면 동맹이 아니더라도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이가 된다. 내가 교토대에서 배운 고(故) 고사카 마사타카(高坂正尭, 법학부 교수) 선생이었다면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중국과 무역을 많이 하고 최혜국대우를 해서 번 돈으로 일본은 군함을 만들면 되지’.”

데구치 학장은 ‘지금 미일동맹에서 문제는 트럼프라는 예측불허의 인물이 미국 대통령이 돼 있는 현실로 인한 불확실성인데, 그 때문에 미국이 반대한 TPP(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를 미국 눈치 크게 보지 않고 일본이 해낼 수 있었던 뜻밖의 이점도 있다’며 이렇게 결론짓는다.

“미국 대통령은 언젠가 바뀔 것이다. 그가 누구든 어떻게 딜(거래)할 것이냐는 것보다는 미국의 가장 똑똑한 사람들(best and brightest. 엘리트들)에게 일본이 얼마나 중요한 나라인지 늘 의식하게 만드는 쪽으로 국가전략을 세워가는 게 급선무다. 하지만 미국으로 가는 일본 유학생들이 줄어드는 등 장래 인간관계 구축이 제대로 돼 있지 않다. 그게 미일동맹의 미래에 최대 과제다. 외교는 친구의 숫자이니까.”

요약하면 이렇다.

일본이 근대에 부국강병 한 것은 적극적으로 쇄국을 버리고 개국을 택함으로써, 중국이라는 거대시장을 향하던 미국이라는, 영국과 패권을 다투고 있던 나라와 손을 잡은 결과다. 미국이 일본과 손잡고 일본을 지원한 것은 말하자면 중국 등 동아시아 시장에 접근하기 위한 교두보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아베 마사타카 같은 선각자들 덕에 그런 정세와 지정학적 이점을 제대로 간파해서 잘 활용했다.

그래서 상당히 성공하자 스스로를 과신한 나머지 동아시아를 독점할 수 있겠다고 오판했고 결국 패전했지만, 요시다 시게루가 동서 냉전의 호기를 틈타 아베의 개국 디자인을 되살리면서 다시 부국이 돼(‘강병=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그 위기를 잘 넘겼다. 이것이 제1 논점인데, 키워드는 ‘개국’이다. 그런데 냉전이 끝나면서 일본의 지정학적 이점이 약화된 데다 거대 중국이 등장해 새로운 위기가 도래했다. 이것이 제2 논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일본이 앞으로도 계속 성공하는 국가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제3 논점.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그래도 미국과의 동맹관계는 유지하되, 중국과도 동맹관계는 아니지만 경제적 파이프를 중심으로 더욱 돈독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이념)가 아니라 실리 외교 전략을 구사한 비스마르크한테서 배우라면서, 외교는 결국 사람관계이니 상대국 엘리트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인재를 많이 키워내 가능한 한 그들과의 접촉면을 넓히라고 그는 주문한다.

일본은 영일동맹 때도 그랬지만 근대 이후 줄곧 글로벌 최강자와 동맹관계를 맺고 자국의 지정학적 이점을 적극 활용해 왔다. 그것이 정답이거나 유일한 해법일 순 없겠지만, 그런 일본 주류의 전략의 주요 희생자가 늘 한반도였다는 점에서, 저들의 생각들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대응전략을 세우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어쨌거나 데구치 학장의 생각은 일본 보수우파 주류세력의 국가전략, 외교전략의 기본 줄기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최근 미중 무역전쟁 이후 중일의 접근 움직임 속에서 데구치류의 ‘두 마리 토끼(미국·중국) 한꺼번에 잡기’ 전략은 일본 식자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한국 보수우파가 '종북 좌파 반미'로 모는 세력
그들은 보수우파보다 더 나을까?

어찌 보면 아주 상식적인 것 같지만, 그들과 이념적으로 매우 가까운 듯 보이는 한국의 보수 주류 또는 우파세력의 사고 및 세계관과 비교하면 그런 정도의 사고나 통찰에 도달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도 양국 보수우파의 세계관이나 전략, 통찰의 폭과 깊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땅의 보수우파들은 데구치가 피하라는 이데올로기적 편향에 깊숙이 함몰돼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을 적대시하면서 오로지 미국과만 손을 잡아야 한다는 맹신에 사로잡혀 있다. 70년이 넘도록 한 치의 변함도 없는 북의 동족에 대한 적대시 정책은 차치하고라도, 이번 코로나19 사태 발생 뒤 그들이 대책 없이 중국과 중국인의 격리·차단부터 외치는 전략부재의 모습은 절망감마저 안겨준다.

거대중국의 등장은 예전 동서냉전 시기에 소련이 일본에게 제공(?)했던 지정학적 이점을 능가하는 지정학적 기회를 한반도 내지 한국에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땅의 보수우파는 그런 주어진 기회를 살리기보다 죽이는 쪽으로만 줄기차게 나아가면서 일본에게 그 기회를 몽땅 넘겨주려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이 ‘종북 좌파 반미’로 몰아가고 있는 그들의 ‘대응세력’은 그들보다 나을까.


한승동 / 메디치미디어 기획주간